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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⑦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철혈 재상을 추억하는 술, ‘칵테일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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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비스마르크의 전공(戰功)은 프러시아 내에서 그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1866년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가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해 의회를 장악한다.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1862년 이후부터 예산 승인 없이 사용한 경비에 대해 사후승인을 받는 안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킨다.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의 승리는 인근 강대국인 프랑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1808~1873·재위 1852~1870)는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독일의 부상을 유럽 전체의 힘의 균형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로 판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와의 일전을 벼르고 있었던 비스마르크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남부 독일을 포함한 전 독일의 통일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프러시아가 주도하는 독일 통일을 이룬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비스마르크는 치밀한 사전 공작을 통해 프랑스와 대립 긴장 관계를 점점 높이면서 마침내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를 계기로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자극한다.

프랑스군 대파한 몰트케 장군

참다 못한 프랑스가 1870년 7월19일 전쟁을 선포했으나, 몰트케 장군 지휘하의 프러시아군과 독일 연합이 일방적으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서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사실상 승부를 결정했다. 9월 초,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항복하고 프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파리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계속 프러시아군에 저항했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이듬해에는 파리까지 함락되는 수모를 당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주변국들의 개입 가능성을 염려해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종결하기로 하고 1871년 5월10일 알자스-로렌 지방의 양도 및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을 받고 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1871년 초 보불전쟁의 끝이 임박한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 마침내 통일 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에 따라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1월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신성로마제국에 이은 독일 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제2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제국령(알자스-로렌 지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비스마르크 역시 프러시아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한 채 독일제국 총리가 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이런 지위는 1890년까지 이어진다.



전쟁도 불사하는 강경한 정책과 노련한 외교 수완으로 수백 년 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 숙원을 이룬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는 오히려 적극적인 평화 애호론자로 바뀌었다. 우선 외교적으로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의 강력한 힘과 위상을 배경으로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유럽 전체의 평화 유지를 위해 균형 외교를 펼치는 데 전력투구했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소외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대해 여전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등을 우군으로 해 기타 모든 유럽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화 정책을 펼친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해외 식민지 개척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는 해외 식민지 개척 비용 및 각종 부담을 고려할 때 지나친 식민지 확장 정책은 국익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그도 1880년대 초반 들어 국민 여론이 식민지 개척 찬성 쪽으로 기울자 마지못해 정책을 전환했다. 그 결과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토고랜드(지금의 가나와 토고), 카메룬, 독일령 동아프리카(지금의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등을 차지했다.

경제 정책 측면에서 그는 1870년대의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독일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관세 정책을 펼쳤고, 정치적으로는 귀족계급인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사회적으로는 1871년부터 가톨릭 세력이 정치세력화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는 이름의 가톨릭 억압 정책을 펼치기도 하고,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78년 반사회주의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노력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계속 강해져 그의 목적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1880년대 당시 세계 최초가 되는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해 의료(1883), 사고(1884), 양로 및 장애(1889) 보험을 도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집권 말기는 순탄하지 못했다. 1888년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1831~1888)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후두암으로 취임 99일 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왕의 장남인 당시 29세의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1859~1941)가 새로운 왕으로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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