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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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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은 불쌍하다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미수호통상사절단. 통역관 로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서광범(앞줄 왼쪽부터).

한국민은 불쌍하다. 내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보고 위 아래로 4000년의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알렌의 수술을 받고 생환하기 6개월 전에 민영익은 미국을 둘러보고 귀국해서 주한 미국공사 루셔스 푸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나서 광명계에 갔다가 또다시 암흑계로 돌아왔다. 아직 나의 갈 길이 똑똑히 보이지 아니하나 미구에 보여지기를 바란다.

미국과의 수교로 초대 공사가 부임하자 그에 대한 답례 방문 형식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단장으로 민영익은 미국에 40일을 체류했다. 조선 건국 이래 서양에 파견된 첫 외교사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럽을 둘러보았다. 그와 사절단은 체스터 아서 대통령을 예방했다. 정부 민간 조직을 시찰하고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리고 있던 만국박람회도 관람했다. 그 엑스포(exposition)가 110년 뒤 조선 땅에서도 열리게 될지는 몰랐다.



을사조약이 있은 후 민영익의 사촌동생인 민영환은 자결하고 민영익은 상해로 망명했다. 을사년으로 접어들기 전 11월에 민영익의 누이동생인 황태자비가 32세로 사망했다. 그녀와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이다.

을사년은 연초부터 기상이 이상했다. 봄날 같은 따뜻한 겨울이 계속되었다.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음력 1월7일 지진이 있었다. 2월20일 지리산이 일주일째 울었다. 23일 또 지진이 있었다. 5월 개성부(開城府)에 큰비가 내렸다. 나비 수백만 마리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도성 안에 가득히 날아들었다. 7월22일 춘천에 큰 우박이 있었다. 8월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임명되었다. 서울과 전국에 큰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3, 4일 동안 계속되는 곳도 있었다. 나무들이 뽑히고 집이 무너지기도 했다. 강둑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넘쳤다.



을씨년스러운 을사년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저물어갔다.

말을 마친 노인은 담뱃대를 딱딱 털었다. 컴컴하던 방안에 십 촉광 전등이 희미하게 켜졌다. 어제 신문에는 당인리(唐人里)에 발전소가 생긴다는 소식이 있었다.

경성전기회사는 얼마 전 고양군 용강면 당인리에 1만 키로왓도의 발전소를 설치하려고 계획을 세워가지고 당국에 허가를 신청 중이던바 27일 허가되었다. 당인리는 홍수가 날 때에도 매우 안전한 곳이므로 금강산전기회사에서 받고 있는 7천3백 키로왓도를 합하여 쓰게 되면 현재와 같이 가끔 정전이 되는 소동은 없을 듯하고 일반에게 소요되는 전기료금도 매우 싸질 듯하다.

1898년 황실의 주도로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1904년 한미합작회사가 되었다가 1909년 일본 회사에 매각되어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뀌었다. 동대문발전소가 궁궐과 종로 일대에 380등의 불을 밝힌 것이 1900년이었다. 전력 수요는 급증하여 1903년 마포에 제2발전소가 세워졌고 남대문에 변전소가 설치되었다. 전기와 철도 사업을 겸하는 금강산전기철도회사는 1920년에 설립되었다.

유언이 되고만 마지막 인터뷰

노인은 새해 11월에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인터뷰를 한 뒤 1년을 못 넘기고 1930년 11월8일 밤 숨졌다. 이 인터뷰는 그래서 그의 공개 유언처럼 되고 말았다. 빈혈증과 신장염으로 자택에서 치료받던 중이었다. 한림과 몇 시간을 함께한 1920년대 마지막 해의 연말은 생애 마지막 연말이 되고 말았다. 한림은 해를 넘겨 다시 한 번 고인이 된 그의 장교동 집을 찾아 조문했다. 빈소를 지키던 유진태가 유난히 긴 다리를 세우며 일어나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평소에도 좌우로 실룩거리곤 하는 버릇이 있는 그 큰 눈과 입이 한층 일그러졌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그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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