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신문사 편집국의 오후 한 시 반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1-11-22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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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한 대감의 집을 나선 한림은 황금정을 걷는다. 연말 저녁 거리는 전차와 자동차, 행인으로 분주하다. 명치정과 본정은 밤의 열기로 후끈해지고 조선은행 앞 광장은 오가는 인파로 가득하다. 귀족회관은 급조된 조선의 귀족들과 더불어 퇴락해가고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은 활기찬 새해를 준비하고 있다. 증권거래소는 각종 악재가 속출해 근년에 보기 드문 대폭락을 이어온 한 해를 마감했다. 올해의 마지막 신문을 찍어내는 저물 녘의 신문사에는 압수 통보가 하달되었다. 송년호 신문은 기사 검열로 버려지고 다시 제작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
    (제4장)

    한통의 전화에 평화는 깨어졌다.

    “이런 제기, 또 압수야.”

    “여보, 큰일 났소. 압수요 압수.”

    웅성거림 속에 먼발치서 편집국장의 표정을 살피던 사회부장이 다가간다. 검열에 걸리는 빈도는 사회부가 가장 높다. 기자 수도 편집국 내 최대다. 무려 6명이나 된다. 정치부와 경제부는 각 1명이다. 부장 하나 기자 하나.



    “야, 기계 멈춰라 기계.”

    하루의 소란을 접고 마감 후의 고요로 접어들어야 할 편집국에 제2차 소란이 일어난다. 편집국장은 경무국 도서과 검열관과 통화 중이다.

    “…윤전기 세웠습니다.”

    -오늘 신문 펼쳐주십시오.

    “오늘 기사는 어디가 나쁘다는 겁니까.”

    - 제ㅇ면 ××제목의 기사 전부요. ㅇ단 ㅇ행부터 ㅇ행까지 삭제하세요.

    짧은 통화를 마친 국장은 털썩 전화통을 내려 걸었다. 오후 내내 주고받은 수십 차례 전화 통화 모두를 합친 것만큼 피곤하다.

    윤전기는 얼마간의 신문을 토해놓고 멈추었다. 곧 경찰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 시각 검열당국의 다급한 움직임은 총독부 경무국의 내부 기록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오후 4시부터 5시 사이 석간이 나올 무렵의 경무국 도서과. 그때쯤이면 검열계의 책상 위에는 백촉 전구가 휘황하게 켜져 있다. 사환이 한글 신문사로부터 신문을 갖고 달려와서 검열자에게 건네준다. 한 자 한 단어라도 등한히 할세라 검열자의 눈은 번득이고 있다. 붉은 줄이 그어진 신문이 관계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다. 날 듯이 전화에 달려가 경기도 경찰부에다 “ㅇㅇ일보 제 ××××호 제 ㅇ면 ××제목의 기사는 치안방해로 차압되었으므로 수배해주십시오” 한다. 신문사에서는 관할 경찰서원의 출동으로 신문이 전부 압수된다.



    갓 나온 신문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그 일부가 이미 눈치껏 이곳저곳으로 배포되고 난 뒤일 수도 있다. 윤전기의 속도는 일취월장해 지난해 일본에서 도입한 최신형 기계는 시속 8만부를 찍어내고 있다. 시속 3만부 인쇄를 자랑하던 윤전기는 2년 만에 교체되었다. 5만부가 넘지 않는 전체 부수를 1시간 안에 찍어내고 남는 속도다. 윤전기 세우라는 통보를 받기까지 이미 상당 부수가 인쇄되었기 때문에 압수 전에 일부를 빼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검열당국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삭제된 신문의 납본이 다시 도착해야만 이 일이 끝난다. 그러나 이 삭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국이 신문발행자를 신뢰하는 것을 근본 전제로 한다. 가령 그 신문사가 “기계 세워요”의 명령이 있었는데도 태연히 그대로 윤전기를 돌리면서 말로만 “세웠습니다”하고 모두 찍어낸 뒤 마지막 한 장을 요구대로 기사삭제해 납본한다면 완전히 전 부수를 발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문은 어렵사리 나왔다. 문제가 된 기사는 사회부 소관은 아니었다. 사설이었다. 정치부에 배속된 논설반원 2명이 오늘은 뒷마무리 행사를 치렀다.

    평소 같으면 마감 후 신문 나올 때까지 숙직실에서 바둑 두고 있을 사회부장 현진건은 그 희고 맑은 얼굴이 황혼처럼 불콰해져 곧장 술집으로 나가기라도 할 태세다. 유명인사 현진건은 지난해 이맘때 잡지 ‘별건곤(別乾坤)’과의 인터뷰에서 하루 일과에 대해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집무. 그때부터 바둑 두다 황혼녘에 귀가”라고 답했다. 그 이후는 “식사 후 독서. 불면증으로 어떤 때는 새벽 3시까지 독서”라고 덧붙였다. 기상은 오전 5시. 독서하고 식전 산보한다고 했다. 술 마시는 얘기는 없다.

    내일 아침 간부회의에서 영업국장은 구체적인 수치로 경영손실을 제시하며 감독 부실에 핀잔을 놓을 것이다. “지지리 말을 해도 또 그러느냐. 빈정대는 표현을 하지말래도.” 사장은 누구에게라 할 것이 없는 호통을 칠 것이다. 하루 생활 중 제일 반가운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신문을 다 만들어서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 들을 그때”라고 대답하는 사장이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27년 신문사 편집국.



    2년여 만에 편집국장 자리에 다시 돌아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이광수도 귀중한 시간을 날려버렸다. 그는 출근 전 집에서 아침 6시부터 2시간가량 소설을 쓴다고 한다. 가능한 한 저녁 6시면 귀가해 일찍 잠자리에 들 정도로 시간과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6개월 전에 오른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후로 모임을 최소화하고 있다. 젊어 객지에서 얻은 결핵이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고질로 계속되는 가운데 신장결핵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여성개업의였던 부인이 결혼 전부터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까지 그를 간호하고 있다. 이광수는 편집국장으로서 자신의 하루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신문사에 가서는 동료들의 출석상황을 보고 숙직부를 보고 서신 온 것을 보고 주요한 신문을 보고 소설 한 회 쓰고 부득이하면 사설도 쓰고 공장에 몇 번 들락날락하고 사장실에 몇 번 불리어가고 각 면의 주요기사를 읽어 혹시 시비 들을 것이나 없나 혹시 면박당할 것이나 없나를 보고, (…) 간혹 동료의 불평을 듣고 간혹 경무국에 불리고, 그리고 윤전기가 돌아 신문이 제시간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면 내 하루의 작업이 끝이 난다. 그러고는 곧 타기 싫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고(…)



    내일 신년호부터 나갈 그의 새 연재소설이 미리 인쇄되어있다. ‘군상(群像)’이라 제목한 그 첫 회의 도입부는 이렇다.

    혁명가- 그의 이름은 공산(孔産)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가명이다. 그의 본명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나는 절대로 대답할 수가 없다. 이것이 이야기꾼이 지키는 유일한 비밀이요 또 신의이다. (…) 공산이 병으로 누운 지는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의 병은 폐결핵이다. (…) 여러 해 동안 불규칙하고도 심신 과로한 생활을 한 결과로 처음에 감기 같은 병이 마침내 폐병으로 판명되고 말았다.

    부인은 지긋지긋하다며 발길에 채는 약병을 걷어찬다. 벽에 부딪히고 방바닥에 뒹구는 약병은 약물을 방바닥에 쏟아놓는다. 몇 방울이 돌아누운 공산의 얼굴에 튄다. 신년호치고는 다소 우울한 시작이다.

    조선인보다 조선말 잘하는 검열관

    검열에 걸린 사설은 제목이 ‘세모(歲暮)’다. 세모를 맞아 세모의 감정을 전하는 송년사설의 한 구절도 검열관은 이 세모에 그냥 넘기지 않는다. 조선말을 조선인보다 더 잘한다는 일본인 검열관은 아직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송년사설은 1929년 한 해의 주요 사건을 몇 가지 언급하고 있다.

    원산 노동대쟁의(元山 勞動大爭議)는 실로 조선 미증유의 대쟁의 사건으로 참가인원 2000여 명, 쟁의일수 약 3개월에 이르렀다. 불행히도 노동자 측의 준비부족과 당국의 몰이해한 태도에 의하여 결국은 노동자 측의 패배로 끝났지만 노동자 자신의 조직이 강고하여야 할 것과 한 노동자단체의 쟁의만으로는 노동자의 승리를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에 있어서는 더 큰 교훈을 받았다고 할까.

    2년 연속 논바닥을 달구고 뱃가죽을 등에 붙게 한 충청 전라 경상도의 대가뭄도 언급되었다.

    봄부터 여름에 걸친 삼남 일대의 대흉재는 작년부터 가뭄 기근으로 신음하던 가련한 동포들의 이중의 재액이었으며 우리 생활기록사상 빼지 못할 대불상사였다. 요행히 국내외 열렬한 동포의 의연이 있어 냇물에 물 한 방울의 감이 없지 않았으나 동포애의 발로로 보아 만금의 가치가 남았다고 할 만한 의의가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원대의 대금을 소비하며 조선통치 20년의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음은 조선인을 위하여 무슨 소득을 갖게 하였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불행히 금년은 긴축경기로서 해를 보낸다.

    가을 박람회 때는 상경객들을 겨냥해 한몫을 노리고 여관시설로 허가받으려는 신청이 쇄도했다. “보따리 주머니 맛을 보려고 코만 반반히 붙은 여자면 으레 기생으로 나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일시 경기가 후끈했다. 박람회 개최 석 달 전 기사가 전하는 풍경이다.

    박람회를 앞둔 경성시가는 차차 세월이 좋아간다. 돈 1원 쓰려면 부들부들 떠는 시골농부들도 관청의 권고에 보따리를 짊어져야 할 모양이니 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던지 간에 세월은 풍성풍성할 것이다. 열댓간 넘는 집이면 으레 여관집이 되는 판에 집세가 올라가고 따라서 전화값이 올라가고 자동차가 늘어가고. 그뿐만이 아니다. 현대 기생의 전형인 서도기생은 벌써 제2차 결사대를 조직하고 30명이 이미 경성에 침입하였다던가.

    경제와 정치라고 할 것이 없는 조선이긴 하지만 후반기에 심각해진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은 해를 넘겨 지속될 조짐이다. 사설은 이어진다.

    11월 광주고보학생과 광주중학생 충돌사건을 발단으로 전국적 학생 및 사회의 대운동을 본 것은 금년의 대사건이다. 학생의 충돌이 전조선의 문제로 변한 것은 당국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일부 공산주의자의 책동이 아니라 축적된 평소의 민족적 불평불만이 이 기회에 폭발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니 조선인이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 일단을 볼 수 있겠다.

    압수는 12월 들어 6번째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이어진 학생들의 동맹휴교와 사회단체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신문과 검열의 부딪침이 늘어났다. 압수조치가 절정에 달했던 1924년의 56건, 1925년의 57건보다 월평균 횟수로 보자면 이번 달이 더 많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압수 건수는 매년 줄어왔다.

    1929년 한 해의 압수는 이로써 28회가 되었다. 계산해보면 압수율 8%. 평균 13일에 한 번꼴로 압수된 셈이다. 압수된 신문부수는 33만부가 넘는다. 매번 윤전기가 세워질 때마다 이미 인쇄돼 있던 1만부 이상씩이 몰수된 것이다.

    본보 압수(押收)

    12월31일자 발행 본보 제 3367호는 기사 중 당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된 바가 있어 발매금지의 처분을 당하였기에 저촉된 기사는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 반포하였음을 알려 드림.



    내일 제작하는 신문에는 전날의 신문이 압수되어 재발행되었음을 알리는 사고(社告)가 1면 아래에 박히게 된다. 매번 같은 문안으로 날짜와 호수만 바뀌는 이 고정란이 10년동안 한결같이 지속되어왔다. 이광수에 앞서 전임 편집국장이었던 주요한(朱耀翰)은 훗날 이 시절을 풍자적으로 회고하고 있다.

    신문에는 세 가지 시대가 있었다. 첫 시대는 압수당하는 것을 장하게 여기는 때요, 둘째 시대는 압수당해도 부득이하다고 생각한 때요, 셋째 시대는 압수 아니 당하기를 힘쓰는 때다.(…) 조선 신문계의 편집국장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설 검열관에 불과하다. 매일 신문 초벌을 세세히 읽고 불온 문자가 들어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직무다. 그러므로 그의 최대의 특권은 때때로 도서과 사무관에게 톡톡히 꾸지람을 듣는 것이다. 이 검열사무는 쉬운 듯하면서도 실로 어려운 일이다. 국어(國語)라고 써야 할 것을 일어(日語)라고 한 글자 잘못 써 압수를 당한 적도 있고.

    경성으로 퍼져간 광주학생사건의 열기

    그저께 29일자 신문도 마찬가지로 압수를 당했다. ‘이 땅의 주인은 조선인이다’는 사설이 문제가 되었다. 다시 찍어낸 신문에서는 제목이 ‘광주사건의 의의’로 바뀌었다.

    광주사건은 마침내 해금(解禁)되었다. 애초부터 게재를 금지하지 않았던들 이처럼 큰 파란을 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번 일단의 사건이야말로 당국의 언론탄압에 대한 뼈아픈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광주사태가 발생 55일 만에 비로소 보도 금지에서 풀려난 날이었다. 11월3일 일어난 광주학생 충돌과 이후 각지로 파급된 동조 시위는 보도 금지됐다. 한참 뒤에 이례적으로 조치를 철회한 당국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학생소요사건은 자유로운 보도를 금지케 한 결과 조선 내 각지에 번져서 여러 가지 과대한 부언유설(浮言流說)을 일으키고 당국이 신문지상에 발표하는 소요사건의 진상이라는 것은 일반 조선인들에게는 관변 측의 기만적인 선전인 듯한 오해를 일으키게 했다. 그러므로 조선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서는 이 사건의 신문게재를 금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를 해제하되, 잘못된 기사로서 인심을 동요시키는 사항에 대해서만 단속함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1929년 12월28일 이의 보도금지를 전부 해제하게 되었다.

    광주학생사건은 12월 경성으로 파급되어 남녀학교 생도들이 총동맹 휴학을 벌임으로써 전 조선의 각 학교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격문이 뿌려지고 시위가 일어나 다수 학생이 연행되었다. 기미년 3·1운동 이후 10년 만에 보는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3년 반 전 6·10 만세 때의 열기를 초월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몰아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려던 모의가 사전 발각되어 신간회 44명, 근우회 47명이 검거되었다. 주모자급인 권동진(權東鎭) 허헌(許憲) 홍명희(洪命憙) 한용운(韓龍雲) 등 열 사람은 보안법 위반죄로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주요한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돼 지금 고등법원 사상검사의 취조를 받고 있다. 조병옥(趙炳玉)이 들고 온 연판장에 서명했다가 둘 다 그리됐다. 지난해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김준연(金俊淵) 편집국장이 투옥된 이후 1년 반의 공백 끝에 주요한은 지난달 편집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다시 한 달 만에 이광수로 교체되었다. 권동진과 한용운은 10년 전 서대문형무소 신세를 진 바 있다. 변호사 자격으로 형무소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허헌은 이번에는 갇히는 입장이 됐다. 허헌은 신문사의 이사직도 겸하고 있다. 홍명희는 5년 전 편집국장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는 지금 2000명 가까운 사람이 수용돼 있다. 그중 이른바 사상범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500명 된다. 정원은 일정한데 들어가는 사람은 해마다 증가해서 세계에 보기 드물게 협소한 곳―그곳이 조선의 감옥이다. 28일자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16개의 형무소, 10개소의 지소, 합이 26개소. 수용력은 최대 1만2000명. 여기에 1만6000명 가까이 들어찼으므로 그 곤란이 막심하다. 개성과 김천, 두 소년형무소는 400명 정원에 1100명이 들어가 있다. 방은 이처럼 좁은데 집어넣기만 꾸준히 하므로 대개 한 평에 8명이 들어가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일본에서는 한 평에 2명꼴이다. 죄수 숫자는 조선과 정반대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 형무소 여간수는 남간수보다 대우도 좋지 못하고 피복도 이상한 것을 입혀 눈에 거슬리던바 이번에 감옥령이 개정되어 직명도 간수로 고치고 피복도 선명한 양장으로 고치기로 하였는데, 양장으로 하면 짧은 치마를 입혀야 되는데 거기 종사하는 여자들이 대개 다리가 굵고 허리가 절구통 같으므로 외모 문제도 고려 중에 있다 한다.

    1910년 병합 당시 7000명 남짓하던 전국의 수감자가 20년 동안 두 배 이상이 되었다. 수감 인원은 1919년 3·1운동 이후 급증했다가 1923년부터 이전 상태로 돌아갔는데 지난해 1928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올해는 기미년 당시 숫자를 넘어섰다.

    사회부 기자들의 철필구락부

    오늘은 긴 밤이 될 것이다. 한림도 그렇고 한림의 동료들도 그렇고 경찰도 그렇고 경찰의 감시와 추적을 받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내일은 신년호가 제작된다. 오늘 밤까지 미리 만들어놓는 특집기사들이 있지만 내일도 여느 때와 같이 바쁘게 되어 있다. 기사 마감의 아우성. 규칙적인 늦은 점심. 공장에서는 하루를 쉬고 난 활자가 뽑히어 오늘의 자리에 저마다 새롭게 배열되고 새 두루마리 종이뭉치를 건 윤전기는 다시 또 규칙적인 굉음을 내며 돌아갈 것이다. 휴일은 없다. 지난 10년 동안 신문이 쉰 날은 강제 휴간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나왔고 명절에도 나왔다. 기자들은 2주에 한 번꼴로 휴무를 갖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그렇다.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종이 위를 갈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치른 산기슭에 한 이랑의 화전을 일구려면

    돌부리와 나무등걸에 호미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

    스위치를 젖혔느냐, 윤전기가 돌아가느냐

    맹수의 포효와 같은 굉음과 함께

    한 시간에도 몇 만장이나 박혀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이다!

    오오 붓을 잡는 자여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

    1924년에서 1925년 사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심대섭(沈大燮)이 나중 심훈(沈熏)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다.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인 철필구락부의 기관지 ‘철필(鐵筆)’에 ‘필경(筆耕)’이란 제목으로 낸 것이다. 철필은 펜을 뜻하는 신조어다. 이 기상천외한 필기구의 등장으로 영원하리라 믿어져온 붓의 시대는 급속히 저물고 있다. 천년만년 영구하리라는 암시를 주며 만년필로 명명된 또 하나의 현대적 필기구는 ‘모던(modern)’ 지식인의 상징물처럼 되어가고 있다. 먹물에 흠뻑 젖은 붓은 어느새 사라져가고 잉크의 바다에서 철필이 헤엄치는 세상이 되었다. 심훈은 시와 소설, 평론과 시나리오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더니 마침내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스스로 대본을 쓰고 감독한 1927년의 영화 제목은 ‘먼동이 틀 때’였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소설가 심훈이 장편소설 ‘상록수’ 당선금으로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세웠던 상록학원.

    철필구락부는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언론탄압에 맞서는 한편에 사회부 기자들의 급료 개선운동도 벌였는데 최저임금 80원을 내세운 교섭에서 회사가 거부하자 심대섭은 동료 기자들과 더불어 퇴사했다. 1925년 5월 하순이었다. 함께 나간 8명 중에는 임원근(林元根) 박헌영(朴憲永) 허정숙(許貞淑) 김동환(金東煥) 안석주(安碩柱)가 있었다. 이들은 다들 나이도 비슷했고 입사 시기도 1년 안팎으로 공통점이 많았다. 저마다 사회주의운동에 매진하거나 다른 신문사로 옮겨가 계속 일했다.

    미술 문학 연극 영화 예술 전반에 능통했던 안석주는 예명 안석영(安夕影)으로 일찍이 신문 삽화의 신기원을 열면서 심훈과 영화제작도 함께 했다. 김동환은 그해 최초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올해는 주요한 이광수와 더불어 ‘3인시가집’을 펴내고, 종합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해서 운영하고 있다. 심훈은 신문사를 떠난 지 10년 뒤 신문사의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응모해 당선됐다. 제목은 ‘상록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으로 소설이 출판된 다음 달에 장티푸스로 요절했다.

    독립은 어디서 오는가

    밤이 깊어간다. 한림은 편집국의 3층 창문 너머로 태평통 거리를 내다본다. 가스등 아래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린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자선냄비는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23일부터 거리에 나왔다. ‘귀하의 희사금(喜捨金)을 자선남비에’라고 휘장을 단 구세군을 행인들이 둘러싸고 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는 구세군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사이에 조선에 뿌리를 내렸다.

    서대문정(西大門町)에 있는 조선구세군본영(救世軍本營)에서는 예년과 같이 겨울 빈민구제를 한다. 시내 각처에 자선남비(慈善鍋)를 걸어놓고 오고가는 사람에게 동정을 얻는다 한다. 또 1원짜리 책을 만들고 그 속에 자선권(慈善券) 20장을 넣어 책을 산 사람이 그 자선권을 빈민에게 나누어주면 빈민은 자선권을 가지고 서대문정 빈민음식소(貧民飮食所)에 가서 더운 국밥을 먹게 하고 또 극빈민(極貧民)에게는 쌀 약간씩을 나누어준다는데, 자선남비는 작년에도 시험한 결과 성적이 매우 양호하였으므로 금년에도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구세군 자선냄비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등장했다. 사진은 1960년대 서울 거리의 구세군 자선냄비.

    잠을 쫓으려 편집국을 한 바퀴 돈다. 정치부의 유일한 기자는 일본문 통신을 번역하고 있다. 입법기관과 정당이 없기 때문에 정치부는 외국 신문의 경우와는 달리 할 일이 별로 없다. 사실상 정치가 없는 조선에서 대개의 문제는 사회문제다. 총독부조차 사회부의 소관이다. 정치부의 주된 일은 일본 통신사에서 전보(電報)로 오는 통신 기사를 번역해서 게재하는 일이다. 외보 번역부라고 우스개로 부른다. 일본과 나라 밖 소식이 1면을 차지한다.

    인도의 국민회의가 간디의 독립안을 가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다. 국민회의는 1885년 발족한 정당인데 제1차 세계대전 후 마하트마 간디가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대중적 운동조직으로 전환해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들었다. 간디의 후원을 받는 자와할랄 네루가 이번에 완전 독립을 국민회의의 목표로 선언한 것이다. 새해 첫날을 맞아 모든 계급의 철폐와 대동단결, 금주, 영국 직물 불매, 자국 면화 장려와 같은 구체적 실천 강령을 발표하리라 한다.

    국민회의는 완전자치를 통한 독립을 표방하는 스와라지 운동과 국산품 애용을 촉구하는 스와데시 운동 그리고 국민 교육 운동을 3대 요강으로 실천해왔다. 을사조약 다음해부터 시작되었으니 25년째다. 인도는 어디로 가는가. 독립을 선언한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도는 독립으로 가기 위한 통일된 노선과 운동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환갑을 맞은 간디가 지도하는 민족적 무저항적 독립투쟁에 사회주의 강령을 도입하려는 40세 네루의 급진 노선은 의견 차를 보이면서도 하나의 조직으로 융합해가고 있다. 간디는 계속 물레를 돌리고 대중은 그와 네루를 따라 물레와 실처럼 돌아가고 있다.

    조선도 금주운동과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해보았으나 별 실효는 없었다. 지난 5월에 서울 YMCA가 소규모의 조선물산 장려 바자를 열었을 때도 구경 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출품된 물건도 초라했다. 인도에 비해 조선은 통일된 독립노선과 체계가 없다. 인구 대비로 볼 때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단체는 더 많을지 모르나 통합된 일관성이란 점에서 보면 부족하다. 민족 유일 당, 민족 협동전선을 표방하며 좌우통합 단체로 출범한 신간회는 3년이 못 된 지금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좌와 우, 파벌과 파벌 간의 내부 균열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번 달 광주학생운동에 연계한 민중대회 모의 건으로 신간회 간부가 대거 체포되자 해산하자는 목소리가 좌파 쪽에서 나오고 있다. 애매한 강령에 각종 파벌이 두루 섞인 신간회는 주도권을 둘러싼 내부 신경전이 누적되어왔다. 인도에도 무슬림과 힌두라는 종파의 갈등이 잠복해 있지만 조선의 상습적인 내분과는 양상이 좀 다르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보면 간디를 비롯하여 모두 국내에서 하고 있었고, 국내에서 하므로 대부분은 합법적으로 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동지의 결속을 많이 하면 기회를 얻어서 각지에서 일제히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자들은 대개 해외로 나왔다. 이것은 마치 민족을 일본의 손에 내어 맡겨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간디는 당시 식민 조선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광수가 먼 훗날 회고한 대로 조선의 처지는 인도와 달랐다. 8년 전, 3·1운동 2년 뒤에 이광수가 상해에서 귀국했을 때 그는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임시정부에서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지내던 사람이 조국에 돌아온 것은 독립운동을 배반하고 일제에 귀순한 것이라는 게 당시의 평균적 민심이었다. 다시 2년 뒤 그가 신문사에 입사할 때에도 기자 다수가 거부운동을 벌일 정도였다. 상해 갔던 자가 어떻게 일제시대에 입국하는가, 하는 편집국의 여론이었다. 그러면 일제시대에 사는 너희들은 무어냐, 라고 한림은 반문했다. 일제 통치하 신문사에 근무하는 기자들과 가족 친지들, 일제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동포들은 다 뭐가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민족주의자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한림이 보기에 결코 민족적이지 않았다. 또 사회주의 공산주의 한다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노래를 부르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지만 전혀 인터내셔널하지가 않았다. 간도로 이주한 백성들은 불쌍하다고 의연금을 보내자 하고 만주와 상해로 망명한 운동가들은 훌륭하다고 지원금을 보내자고 한다. 나라를 떠난 사람들은 동정이나 존경을 받고, 나라를 지키고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기 싫어하는 것인가. 이광수는 다시 말한다.

    민족의 독립은 독립을 운동함으로 될 것이 아니요, 민족이 독립의 실력을 갖춤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길은 민족 각 개인의 실력을 기르고, 이러한 개인들이 단결함으로 독립의 힘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힘이 없고는 독립이 오게 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남의 힘으로 또는 요행으로 독립이 오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래 지닐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깨닫고 보니 나는 동포들이 많이 사는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 주권이 있는 나라의 혁명 운동은 국외에서 하는 것이 편하고, 제 주권이 없이 남의 식민지가 된 나라의 독립 운동은 국내에서 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3년 전 6·10만세 사건을 기화로 검거선풍이 지나간 뒤 궤멸적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제3차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金?洙)는 조직사업 도중 탄압이 닥쳐오면 그냥 망명하려고 하는 후배들을 가리켜 “못난 사람들”이라 했다. 지하에 남아서 일상적으로 닥치는 고통을 견뎌가며 당 조직 수습에 나서기보다 어서 나라 바깥으로 빠져 나가려고만 한다는 아쉬움과 못마땅함이었다.

    한림은 생각한다. 도주와 망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육신은 도망하되 정신은 도망 안 갔다고 주장하는 것이 망명인가. 몸과 마음이 다 떠나는 것이 도피인가. 망명자라는 명칭은 그럴싸하고 도망자라는 이름은 창피한 것인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가 나라 안으로 되돌아오면 도망가는 것인가. 동일한 현실은 명분을 달리 주면 다른 현실이 되는 것인가. 조선을 망국의 그날까지 지배한 명분론이 상투 자르고 양복 입은 지금 애국자들의 세포에 면면히 흐르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망명한 사람들은 상해를 찾아들어갔고 쫓겨난 사람들은 국경 가까운 간도에 거주했다. 만주 살던 사람이 귀국하면 고향에 돌아왔다고 반길 테지만 상해 있던 사람이 돌아오면 왜 왔나 돌려보낼 듯 적대적인 눈빛으로 쳐다본다. 일단 국경을 넘어 나가면 돌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돌아 들어오는 경우는 감시를 받거나 폭탄을 던지거나 감옥에 가거나 주로 셋 중 하나였다. 이광수는 이 셋 다가 아니었다. 조선민족의 인식수준을 앞서가는 예민함으로 대중적 표상이 되었던 이광수는 대중의 평균적 인식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이질감으로 배척당하고 뭇매를 맞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

    김철수의 눈에는 상해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태도도 거슬렸다. 해외로 나가게 된 사정이 어떠했건, 그곳에서의 고초가 어떠하건 국경 밖에서는 입으로 많은 일을 처리하지만 국내에서는 모든 것을 몸으로 감당해야 한다. 분열된 채 상쟁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그룹들은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조직 내에도 예외 없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정신적 물질적 후견인인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은 보다 못해 1927년, “해외 망명자들이 조선공산당을 직접 지도하려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또 하나의 기사에 눈길이 간다. 중국 소식이다. 제왕(帝王)의 호화(豪華)도 지금엔 춘몽(春夢)-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의 근황을 담고 있다. 중국은 조선이 병합되던 다음 해 신해혁명, 그 다음 해 중화민국 건국으로 청나라 왕조를 끝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조선의 순종과 마찬가지로 한 왕조의 끝이자 왕조제도 자체의 종결이 된 운명의 선통제는 지금 23세다. 세 살에 즉위해 일곱 살에 폐위되었다. 재위 중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순종과 같다. 다섯 번 결혼했으나 후사가 없는 점도 두 번 혼인한 순종과 비슷하다. 그의 이름은 아이신줴러 푸이(愛新覺羅 溥儀). 만주 동북부 여진족의 족장으로서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운 청 태조 아이신줴러 누르하치(愛新覺羅 奴爾哈赤)의 후손이다. 순종의 선조인 태조 이성계는 동북 지역 여진족의 근거지를 발판으로 고려를 뒤엎고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영화와 부귀를 혼자 누리던 일국의 제왕으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윤락(淪落)의 길로 빠지어 온갖 고초를 다 맛보고 온갖 풍상을 다 겪는 이는 과거 역사에도 많이 볼 수 있거니와 현재에도 그 수가 적지 않지만 기구한 목숨으로 극도의 빈궁에 빠진 이는 아마도 전 청(淸) 선통제(宣統帝) 외에는 다시 없을 것이다. 일찍이 중원에 군림하여 사억 인민을 다스리고 호령하던 그로서 오늘날에 한 몸도 편안히 의탁할 곳이 없고 의식의 위협까지 받게 될 줄이야 누가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아래에 기록한 애화(哀話)는 최근 천진(天津)으로부터 상해에 돌아온 옛 신하가 전하는 이야기다.

    선통제가 거주하는 곳은 본래 전 신하의 주택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그 주택이 어떤 상인에게 팔리게 되어 매우 곤란 중에 있으며 나머지 가산은 대개 수십만원에 불과하여 그 가산이 없게 되는 날에는 생활 곤란에 빠질 형편에 있어서 무슨 사업이나 하여 수입을 얻으려고 애쓰던 중 하루는 천진에 있는 뉴욕 어떤 신문사의 기자라고 자칭하는 독일인 로트라는 자가 찾아와서 감언이설로 선통제를 꾀어 합자로 신문사를 경영하자 하였다. 선통제는 그 독일인을 믿게 되어 현금 20만원을 주어 모든 설비를 하게 하였던바 그 독일인은 홀연 간 곳이 없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에 비로소 선통제는 사기를 당한 줄 알게 되었으나 그 돈은 필경 잃어버리게 되어가지고 살던 가산을 하루아침에 버리게 되었다. 선통제의 가정에는 본처와 첩 두 사람 외에 하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요사이 그 하인이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뒤로 선통제는 하인도 두지 못하고 음식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자시게까지 되었다. 전날에는 유신(遺臣)과 정객(政客)들이 오락가락하며 제정(帝政)부활을 도모하여 옛날의 영화를 꿈이나마 꾸게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 문 앞에 차마(車馬)를 볼 수가 없다. 충신인 체하는 유신들도 요사이는 선통제를 방문하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비록 선통제가 찾아와도 생활비나 보태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하여 면회까지 거절한 일이 있다.

    일본의 동북 지역 점거와 군벌(軍閥)들의 난립으로 지금 중국은 다시 삼국지의 시대로 돌아간 듯한 양상이다. 왕조가 소원대로 멸망한다고 해서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주족(滿洲族) 500만명의 중국지배를 끝내자는 열망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구호를 압도했다. 반제국주의 운동은 서구식 개혁의 희망 속에서 희석되어간 반면, 260년 동안의 억압과 치욕을 쓸어내자는 민족적 구호는 단번에 혁명적 열기로 녹아들어갔다. 구질서는 해체되었고 사회는 혼란으로 접어들었다. 2년 뒤인 1932년 3월1일 푸이는 만주국(滿洲國)의 수반으로 다시 즉위하게 된다. 만주 지역의 조선인은 날로 증가해 135만명에 이르고 있다.

    속이는 일이 없기를

    교정을 보는 정리부(整理部) 책상 위에는 한 명이 벌써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고 있다. 숙직자가 아닌 사람들도 밤이 늦으면 그냥 자고 아침을 맞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리부장 자리에는 내일 신년호 신문에 담길 특집 기사들의 교정지들이 쌓여 있다. 어두운 불빛 아래 한림은 그중 몇 장을 잠시 훑어본다. 1930년 전망―우리는 어떻게 할까. 각 단체 주요 간부의 포부가 담겨 있다. 먼저 근우회(槿友會) 위원장 정칠성(丁七星)이 여성 교양에 대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일제강점기 큰 인기를 끌었던 박가분.

    부인교양 운동은 어느 때든지 문젯거리로 되어있으나 새해부터는 특히 농민 노동자 층의 부인을 중심 삼아 교양을 시키고 싶소. 조선의 부인운동이 근우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보아 농민 노동자들 부인이 좀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대구에서 상경한 한남권번(漢南券番) 소속의 기생 정칠성은 1923년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뒤로 대구여자청년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 등과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해 유학생 이현경(李賢卿) 황신덕(黃信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결성하고 1927년 귀국해 좌우통합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경성 포목상 조합장 박승직(朴承稷)의 말이 이어진다.

    언제든지 하는 말이지만 새해부터는 색 있는 옷을 입기를 장려하고 싶으니, 흰 의복처럼 비경제적이요 비위생적인 것도 없소이다. 그리고 우리 상업계에 있어서는 수량과 품질을 속이는 일이 절대 없기를 바라며 긴축과 절약을 하고 술이나 담배 중 한 가지는 끊어야 되겠으니 나는 이십 여명의 식구에 대하여 벌써 금연을 단행하여 실시하는 중이외다.

    종로4정목 배오개시장 맞은편 박승직상점은 1898년 개업 이래 다년간 개인기업 최고 납세자에 올랐다. 빈한한 집안에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송파장에서 장사를 배워 행상으로 기반을 닦은 박승직은 포목 도산매로 시작해 곡물 수출 등으로 만주까지 사업범위를 넓혀 주식회사로 확장했다. 부인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관허(官許) 제1호 화장품 박가분(朴家粉)은 1920년대를 석권했다. 요즘은 왜분(倭粉) 양분(洋粉)으로 불리는 수입 화장품의 경쟁이 가열되어 박가분의 인기가 주춤하다. 일본 신식 화장품을 많이 찾고 프랑스 향수와 미제 미용비누 냄새를 풍기는 것이 유행이다.

    10년의 회고

    12월31일 새벽이다. 거의 가거나 잠들고, 켜진 전등불은 몇 안 남았다. 쥐 한 마리가 편집국을 횡단한다. 1년이 지났다. 10년도 지나갔다. 그동안 한림의 주변 여기저기서 오고간 숱한 말이 겨울밤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처럼 혹은 환청처럼 스쳐간다.

    - 나이는 늙고 시집살이는 고되고, 어찌하면 좋을는지…앞으로 기자생활 10년은 더해나갈 수 있을까.

    - 신문기자 생활이 언제나 전투생활이니까 쉬 늙지요. 일본 기자는 40세가 본격인데 조선 기자들은 퍽 어린 셈이야.

    - 신출 때는 언제나 흥분해 떠들고 오래 지나면 침착해지고 말지요. 10년 전에는 기분으로 떠들었고 지금 기자들은 노련해졌다고 볼 수 있지요. 요새는 신출 기자도 10년 전 우리가 처음 기자 되었을 때처럼 그렇게 심한 감격성은 없는 것 같아 보입디다.

    - 신문기자뿐 아니라 조선민족 전체가 10년 전보다는 퍽 침착해진 것이 사실이지.

    - 어느 나라든 정부 기관지보다는 정부 반대지가 잘 팔리는 것이지. 그러나 조선 신문의 민족주의라는 것도 점점 거세되는 것이 사실일세. 신문을 아니 한다면 모를까 신문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당국의 검열기준에 의해서 차차 거세될 밖에 별수가 있겠나. 지금 10년 전의 신문을 펴놓고 보면 아찔아찔한 글이 많이 실려 있고 지면이 요란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는 그것도 무사통과했단 말이야. 그러나 한두 차례씩 정간(停刊)의 맛을 본 오늘에 와서는 그 수준에 천양지차가 있네. 10년 전에는 한 달에 10회 이상 압수 있기를 예사로 알고, 사실 압수 많이 당하기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요새 와서는 아주 딴판이지.

    - 당국은 절대 행정권을 가졌고 자칫 사법처분에 걸려들기 일쑤네. 징역이야 살고 나오면 되지만 정간을 당하면 당장 손해가 수만원이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겠나.

    - 그렇게까지 하면서 신문을 발행할 필요가 있을까.

    - 글쎄 그것이 문제란 말일세. 그것은 신문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모든 문화사업에 대한 문제일세. 우리가 학교를 해나갈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농촌사업을 해나갈 필요가 있느냐, 우리가 합법적 모든 단체를 해나갈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겠지. 결국 그것은 정도 문제 아닐까.

    - 그래도 신문은 합법적으로 조선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대표하는, 순전히 조선 사람의 손으로 경영하는 유일한 사업기관이요, 유일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도기관이지. 서너 개밖에 안 되는 민간신문이 조선의 지식계급의 총집중소가 된 것은 그런 사정 때문이야.

    - 하지만 정치 경제가 없는 기형적인 사회에서 기사 재료는 빈약하고 문맹률은 높은데 일어(日語)신문은 식자층을 겨냥해 점점 파고들고 있으니. 광고수입은 구미의 신문이 판매수입의 배나 되고 일본만 해도 판매수입과 대등한 수준인데 조선의 경우 판매수입의 절반이 될까 말까. 판매부수는 모든 신문을 다 합쳐야 10만부가 될까 말까 하니 2000만 인구에다 비기면 200명 중에 한 부밖에 안 되는 셈이야. 다른 나라 신문이 100만부 200만부 하는 것에 비기면 어림도 없단 말이야.



    조선사회가 좁은 까닭인지 혹은 조선 사람의 도량이 좁아서인지 억지로 허물을 들춰내고 마는 풍조가 많아, 한 줄의 기사라도 이 ‘민간검열’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으면 큰 봉변을 하게 된다. 인사동정 기사를 실으면 ‘왜 이런 놈을 다 실어주느냐’고 항의가 들어오고, 또 안 실으면 ‘왜 저런 것은 실리고 나는 안 실어주느냐’고 야단을 친다. 조선인 단체의 일은 아무리 호의를 가지고 써주어도 자칫하면 시비가 일어난다. 그들의 대부분은 다 허장성세기 때문에 진실에 가깝게 쓰면 대개는 내용폭로가 되는 탓이다. 쓸 요량이면 최대한의 형용사를 서너 개 집어넣어 주어야 뒤에 말막음이라도 될 것이다.

    이 시절을 회고해 주요한은 이렇게 또 하나의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동경의 최고 명문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해에 유학 중 독립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주요한도 이제 30대로 접어들었다. 3·1운동을 앞둔 1919년의 벽두, 열아홉에 최초의 종합 문예동인지 ‘창조’ 창간호의 첫 페이지에 현대적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주요한이다. 나이 서른은 완연한 중년이다.

    떠나는 사람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09년 부산 동래온천 일대.

    날은 곧 새어 한 해의 마지막 해가 올랐다. 북서쪽 창문으로 인왕산의 백석이 겨우내 매달린 홍시 하나처럼 물들어 오른다. 옆 의자에 발을 올리고 비스듬히 책상에 팔을 고인 채 잠들었던 한림은 황혼 무렵인 줄 착각하며 소스라치듯 깨어났다. 출근한 직원들이 하나 둘 코트와 상의를 벗어두고 와이셔츠에 조끼차림으로 옥상으로 올라간다. 아침마다 모여서 체조하는 게 유행이다. 한림은 굳어가는 호떡에 굴러다니는 시트론 소다수 한 병을 찾아내 요기를 했다. 마감을 하는 동안 오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교정지가 나오기까지 빈 회의실 구석으로 기어들어 의자와 의자를 이어붙이고 눈을 붙였다. 꿈을 꾸었다.

    ‘…동래 온천장(東萊 溫泉場)이다. 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북에서 남으로 부산부(釜山府)를 길게 종단한다. 오른 쪽은 금정산(金井山), 왼쪽으로 산과 구릉 너머 물길을 따라 20리 밖에 수영만(水營灣)과 해운대. 거기서 바다가 열린다. 부산역까지 12㎞. 여기서 경성행 열차표를 끊는다. 1910년 병합되던 해 가을 문을 연 르네상스식 새 역사는 2층에 호텔도 있다. 1912년에 개업한 철도국 직영의 부산철도호텔이다. 서울의 조선철도호텔보다 2년 먼저 생겼다. 남은 기차 시간 동안 항구를 따라 남으로 넓게 뻗은 대로를 걸어 50m 높이의 용두산에 오른다. 동산 아래 10만평이 넘는 일본인 거류지는 그야말로 바둑판처럼 구획 정리가 되어있다. 일본의 개항지 하나를 떼어다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부산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던 해 유일하게 최초로 개항되었고 다음해 조계(租界)가 설치되어 일본 청나라 영국의 영사관이 개설되었다. 눈 아래 항구의 여객부두에는 관부연락선이 정박해 있다. 을사조약 두 달 전에 첫 운행을 개시한 이래 운항속도와 수송능력이 급신장해왔다. 배에서 내린 사람 상당수는 한림과 같은 기차를 탈 승객들이다. 경성 가는 사람, 대구나 평양에서 내릴 사람, 신의주 지나 압록강 넘어 봉천으로 갈 사람, 가끔은 유럽까지 직행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쿄나 오사카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 서울 신의주로 해서 안동 시베리아 러시아 유럽을 차표 한 장으로 환승해 여행할 수 있다. 관부연락선을 관리하는 일본 정부 철도국은 세계로 가는 기차라는 신개념의 중핵에 이 부산을 놓았다. 올해 울산비행장과 여의도 경성비행장의 개항식이 열렸다. 한림은 스물한 살에 고향을 떠나 상경한다. 많은 사람이 점점 더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다….’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던고?

    1926년 부산항의 관부연락선.

    수런대는 소란을 까마득히 쫓아 한림이 다시 잠이 깨었을 때 벽에 걸린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편집국의 오후

    한 시 반

    모-든 손가락이

    푸른 원고지에

    육박한다

    돌격한다

    (…)

    찰칵

    철컥

    공장에서는

    활자의 비명-

    사회부장의 귀는

    일흔두 개다

    젊은 견습기자의 손끝은

    종이 위로 만주의 전쟁을 달린다

    (…)

    분만의 수분 전

    달음박질하는 윤전기

    벙글거리는 치륜(齒輪)

    다리 꼬고 의자에 자빠져

    나는 눈을 감고 망막 위에 그려본다

    기차는 역마다

    우리의 아들-신문지를 뿌려주겠지

    전 조선의 수그러진 머리 위에서

    외치는

    딩구는

    그 자식의 모양을

    4개월 뒤, 다가오는 새 봄에 신문계에 입문하게 되는 22세의 김기림(金起林)은 견습기자 시절의 인상을 담아 훗날 이 같은 시를 발표하게 된다.



    동아일보 / 동광 / 별건곤 / 신동아 / 정진석, ‘한국언론사’, 나남출판, 2001 / 정진석,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1’, LG상남언론재단, 1998 / 현길언, ‘문학과 사랑과 이데올로기-현진건 연구’, 태학사, 2000 /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9 / 조영복,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 살림, 2007 / 노형석,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생각의 나무, 2004 /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 2005 / 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 2000 / ‘캠브리지 중국사 11’, 새물결, 2007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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