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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나는 조선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빨치산 시인’ 이기형

  • 이소리│ 시인, 문학in 대표 lsr21@naver.com

“나는 조선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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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시를 통해 반일 독립정신 일깨워주고 싶어”
  • ● 시 소재 구하려 남으로 왔다가 길 막혀 빨치산 활동
  • ● “몽양 선생 존경하지만 그의 비서는 아니었다”
  • ● 여운형은 전투적 지도자, 한용운은 고요한 지도자
  • ● 통일국가 가로막는 말은 ‘빨갱이’ ‘친일보수’
  • ● ‘민족’ 잠시 접고 다문화, 다민족 포용해야
“나는 조선의 벨린스키가 되고 싶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리저리 요동치며 흘러온 굵직굵직한 우리 ‘역사의 무늬’를 새기고 있는 시인이 있다. 올해 94세인 시인 이기형 선생이 그다. 그가 시를 쓰게 된 이유는 러시아 리얼리즘 문예이론을 세운 문예평론가이자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벨린스키(Vissarion Grigol‘evich Belinsky·1811~1848)처럼 “시나 소설을 통해 반일독립운동 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줘 일제를 하루빨리 무너뜨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국 문단에서 ‘21세기 마지막 빨치산’ ‘20세기 역사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가 일제강점기 때 무엇을 했으며,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우리 역사 흐름을 어떻게 보았는지, 광복 이후부터 6·25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

‘민주조선’ ‘동신일보’ 등 남북을 가리지 않고 신문사에서 정치부, 사회부 기자생활을 한 그는 여운형, 박헌영, 김구, 한용운, 임화, 박팔양, 오장환 등 광복 전후 우리나라를 이끈 정치지도자와 뛰어난 문인도 많이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는 “몽양 여운형은 철저한 전투적 지도자요, 만해 한용운은 고요한 지도자”라고 단언했다. 박헌영에 대해서는 “박헌영이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세우려 했다. 판결문을 찬찬히 살펴보니 미국의 앞잡이였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판결문은 1955년 12월15일 북한에서 열린 박헌영의 재판 판결문이다. 이 판결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이는 인터뷰 중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시인은 또 “통일국가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것은 ‘좌우익’ ‘진보 보수’ ‘빨갱이’ ‘공산당’ ‘친일수구’란 말들이며, 이런 말들을 버려야 통일이 앞당겨질 수 있다”면서 “8·15 때 광복이 올 줄 그 하루 앞날까지 몰랐듯이 남북통일도 내일 당장 될 수도 있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 12세 때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알게 됐고, 1933년부터 작가 한설야, 사학자 문석준, 독립운동가 여운형, 시인 임화 등을 만나 조선독립을 위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왜 문학을 공부했습니까?

“나는 반일 독립운동 정신을 사람들에게 고취시켜 다 함께 일제를 물리치고 싶었어요. 그때 러시아 리얼리즘 문예이론을 세운 문예평론가이자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벨린스키가 쓴 일본어 평론을 많이 읽었어요. 나도 벨린스키처럼 문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하면 일제를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강제징용을 피한 학생들과 함께 ‘협동단’을 만든 것도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 협동단 지도자는 고향이 나와 같은 염윤구였는데, 산에서는 그를 청산(靑山)이라 불렀죠(노시인은 당시의 회한이 밀려온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문인으로는 임화가 쓴 평론을 애독했고 가끔 만나기도 했어요. 지금은 시나 소설을 통해 통일문제를 자꾸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싶어요. 내 시가 남북통일에 도움 되는 자양분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요.”

참으로 신기했던 선거를 소재로 첫 시 발표

▼ 1947년에는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나요?

“나는 북에 있을 때 프리랜서로 활동하기도 했고, ‘민주조선’ ‘노동신문’의 정치부, 사회부기자를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그만두었어요. 1947년 ‘민주조선’에 발표한 시의 제목은 ‘선거’였는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선거란 걸 해본 적이 없었죠. 선거를 하니까 참 신기하기도 해서 그 내용을 시로 써서 발표했어요. 박팔양 선생이 그때 ‘노동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선생이 내 시를 ‘민중문화시의 표본’이라며 크게 칭찬했어요. 1950년에는 ‘후방’(당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전방,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은 후방이라 불렀다고 한다)에서 시나 소설 소재를 구하려고 (남으로) 내려왔어요. 정치적 입장은 없었고요. 그때는 전쟁 중이라도 민간인들이 남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9·28 서울 수복을 하면서 남북이 가로막혔어요. 당시 친구 2명과 함께 목포까지 갔다가 정읍을 거쳐 전주로 가는데 경찰인지, 군인인지 언뜻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우리는 깜짝 놀라 산으로 올라갔는데, 누군가 산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가는데 가까이서 보니 미군이었어요.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해 친구 2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요. 나는 다행히 산자락에 엎드려 고개를 포옥 파묻고 있어서 총을 맞지 않았죠. 다음 날 삽을 들고 친구 2명을 산에 묻었어요. 북으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그냥 산으로 올라갔죠. 산사람(빨치산)들을 만나 함께 지냈죠.”

▼ 여운형, 한용운 선생과 자주 만났고, 또 아주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는데요. 몽양과 만해는 언제 처음 만났나요?

“나는 그때 조선 청년 학생들을 지도해줄 만한 유능한 지도자를 찾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 문석준(사학자)을 소개했고, 문석준 선생이 1937년에 여운형 선생을 소개해줬어요. 문석준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나온 수재였는데, 우리말로 우리 역사를 처음 썼던 분이셨죠. 그 원고는 내가 직접 봤어요. 북한에서는 8·15 직후에 그 책을 교과서로 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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