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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중국 수입’ 주장한 원세개, 전 세계에 한글 알린 선교사 헐버트

한글 세계화 열전

  • 곽경 | 건축사·한국어정보학회 회원 http://blog.naver.com/ken301

‘한글의 중국 수입’ 주장한 원세개, 전 세계에 한글 알린 선교사 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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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중국 수입’ 주장한 원세개, 전 세계에 한글 알린 선교사 헐버트
한글에 대한 관심은 한반도를 넘어선다. 국내외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글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왔다. 한글은 애초 중국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많은 중국 학자가 우리 한글을 연구하고 있다. 한글이 만들어질 당시의 중국 발음을 연구하는 데 한글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크지만, 현재 중국 정부는 한글을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하고 있다.

창제 직후 한글은 지도층으로부터 외면을 받아 평민이나 하층민이 쓰는 글자로 전락했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한국에 온 외국인들에 의해 한글은 새삼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한글에서 중국문자의 대체 또는 보조 문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해 연구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국의 정치지도자였던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꼽힌다.

문자의 문제로 고통을 받던 근대 중국의 지도자들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450년 전에 고민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들은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한자로 인해 발생하는 높은 문맹률이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했다.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위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문자의 혁명을 이뤘다면, 중국에서는 서양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나라의 존립이 어려워진 원인 중 하나가 어려운 한자 때문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 문자 개혁운동이 일어나는 이유가 됐다.

근대 중국의 문자 개혁은 지리적인 여건상 싫든 좋든 한글을 의식해 진행되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한글의 세계화와 관련된 연구의 대상에는 중국이 당연히 포함된다. 특히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중국인(원세개)의 행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중국의 정치지도자 원세개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였을까. 또 근대 한글 교육의 선구자로 불리는 미국인 헐버트는 왜 한글에 집착했을까.

원세개



구한말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의 원세개는 군인 및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이때 조선에서 다진 정치적 발판을 이용해 후일 초대 중화민국의 총통과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원세개는 한국의 정치에 간여하며 문화나 풍속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또 원세개는 조선의 여인 세 명을 첩으로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풍속과 문화를 자연스레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시절 원세개는 중국인의 높은 문맹률이 문제로오르자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신하들이 “망한 나라의 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亡國之音, 何謂國字)”고 주장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쉬안룽윈(玄龍云) 교수가 필자에게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원세개는 본처 외에 아홉 명의 첩 중 조선여인 이씨·김씨·오씨를 2·3·4번째 첩으로 삼았고 셋째 첩 김씨가 원세개의 둘째아들 극문을 낳았다. 그리고 극문의 아들(원가류)은 미국 최초의 고속가속기실험자가 됐다. 원가류의 부인인 오건웅 교수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핵물리학자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물리학회 회장을 지냈다. 원세개의 아들 17명 중 7명, 딸 15명 중 8명이 조선여인에게서 태어났다. 원세개의 가정은 조선과는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원세개와는 달리 세종은 문자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해 자신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오히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한글 창제가 백성을 구하는 길이라는 뚜렷한 신념으로 뜻을 관철했다. 그러나 원세개가 이끌던 중국은 “중국 문자의 개혁에 한글이 적합한가 아닌가”라는 핵심은 버려둔 채 ‘망한 나라의 글자’라는 이유로 이를 포기한 것이다. 후에 원세개는 사욕과 권력욕을 앞세워 신해혁명으로 이룩된 공화정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야욕을 드러냈는데, 이것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

헐버트 박사

원세개와는 대조적으로,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책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1886년 조선에 온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1863~1949)는 일찍이 한글의 가능성을 파악해 이를 조선 근대화의 희망으로 보았다. 그는 조선에서 근대교육 보급의 초석을 놓으면서 언제나 한글을 그 중심에 두었으며, 이러한 한글자강운동은 그가 남긴 여러 업적 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의 실질적인 주역이었고, 한글자강운동을 폈던 주시경 선생을 육성한 교육자였다. 그가 벌인 한글 관련 활동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없어진 뒤에는 독립운동의 형태로 발전했다.

원세개와 동시대를 살았던 헐버트는 조선에 발을 디디자마자 뛰어난 자질과 안목으로 한국문화의 진수를 파악했고 한글과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연구업적을 남겼다. 한국어정보학회장을 지낸 경희대 진용옥 명예교수는 헐버트를 두고 “근대 한국문화의 정립에 초석이 된 선구자의 한 분이며 한글자강운동의 창시자”라고 말했다. 헐버트는 우리나라가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뺏긴 이후에는 “조선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며 교육을 통해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한 밀사 4명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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