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2-01-19 12: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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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장)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조선시대 대군과 공주의 집으로 쓰인 안동별궁 건물 일부.

    1920년 3월 31일. 봄비를 맞으면서 한림은 야트막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남으로 안국동(安國洞) 사거리를 향해 뻗어 내린 길은 곧고 길다. 이틀 연속 내린 비에 기온은 떨어졌다. 화동(花洞)의 기와집 낮은 담장 밖으로 벗어나온 목련 가지 하나가 찬비에 흔들린다. 꽃을 부르는 비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궂은 날씨다. 날로 다사로워가는 봄볕을 따라 곧이라도 터질 듯 방긋대던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한 꽃봉오리는 놀라 움츠러든 표정이다. 가늘지만 꾸준히 내리는 비는 목덜미에 닿는 느낌이 선뜩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 사이비(似而非). 겉으로는 그런 듯하나 실제로는 아니다. 한림은 문득 그런 구절을 떠올리며 안동별궁(安洞別宮) 담장 곁을 지난다. 두꺼운 돌담이 두 길도 더 되는 높이로 한참을 펼쳐진다. 여기가 어딘가. 지금 창덕궁에 계신 이왕(李王) 전하가 두 차례 가례(嘉禮)를 올린 곳이다. 여덟 살 때 세자빈을 맞는 경사스러운 가례를 위해 고종과 민비는 이 별궁을 마련했다. 전국 처녀들의 혼인이 일시 금지된 상태에서 엄선한 규수들로 여기서 세 번의 간택 행사가 치러졌고 최종 낙점된 민씨 집안의 규수가 여기서 숙식하며 석 달간 신부수업을 받고 궁중예법을 익혔다. 그리고 여기서 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어 입궁하였다.

    이 별궁 터는 일찍이 세종이 여덟째 아들을 위해 처음 터를 잡고 저택을 지은 이래로 대대로 대군과 공주들의 집이었다. 세종은 이 집을 짓고 나서 몸져누웠는데, 이 집에서 지내기를 원해 이리로 거처를 옮기고 열흘 만에 승하했다고 한다.

    세종의 자식 사랑 못지않은 열정을 고종과 민비는 아들에게 쏟았다. 혼인 다섯 해 만에 어렵게 얻은 첫 원자(元子)를 닷새 만에 잃고 3년 후에 다시 얻은 귀한 원자는 돌을 맞기 무섭게 세자에 책봉되었다. 책봉의 원만성사를 위해 청나라 조정에 청원도 넣고 청국 주재 일본공사를 통해 지원도 부탁했다. 병자수호조약으로 일본에 개항하기 한 해 전인 1875년이었다. 이해의 설날, 세자 책봉을 앞둔 고종 내외의 벅찬 기쁨을 담은 고종의 말이 실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올해는 우리 태조(太祖) 대왕이 탄신하신 지 아홉 번째 회갑이 돌아오는 해이다. 원자가 어느덧 자라 세자 책봉 예식을 이해에 거행하게 되니 나라의 근본을 확고히 하고 선대의 위업을 빛나게 하는 의의가 있다. 자전(慈殿)께서도 매우 기뻐하면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조선왕조의 역대 혼례 중 가장 화려하고 성대했다는 이 가례식을 거쳐 고종 내외는 1882년 초, 세자빈을 맞이했다. 다섯 달 뒤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인 병사들이 폭도가 되어 궁궐에 난입해 왕비를 잡아 죽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난리를 피해 민비는 궁녀로 변장하고 궁을 빠져나가 도성 밖을 나서 지방으로 피신했다. 궁궐에 난입해 왕비를 찾아낸다며 혈안이 되어 날뛰는 일본인들과 조선인 협력자들을 피하지 못하고 민비가 시해되기 13년 전의 일이다.

    을미사변이라 부르는 그 현장의 참담함을 23세의 나이에 온몸으로 겪은 왕세자빈은 그때 받은 육신과 정신의 충격에 짓눌린 채 온전치 못한 생을 아홉 해 더 연장하다 1904년 말에 이승을 하직했다. 을사조약 한 해 전이었다.

    을사조약 다음 해에 황태자는 계비(繼妃)를 들이는 두 번째 가례를 이곳 별궁에서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 고종황제가 왕좌에서 밀려나자 순종이 되었다. 그리고 3년 만에 폐위되어 10년째 이왕(李王)이란 칭호로 창덕궁에 거주하고 있다. 덕수궁에서 이태왕(李太王)이란 칭호로 거주하던 고종이 작년 1월 승하한 이후 아직 삼년상중이다.

    안동별궁은 일없이 비어 있고 본채 전각 주위로 늘어선 부속 건물들엔 상궁(尙宮)들이 거처하고 있다. 여관(女官)이라 불리던 이들의 등등한 기세는 이제 찾아볼 길 없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마지막 호롱불처럼 남은 창덕궁 하나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미 많은 상궁 나인이 오래전 궁궐을 떠나갔다. 명월관을 위시한 요릿집에 궁중음식을 선보이거나 낙원동에 들어서는 떡집에 궁중 떡 제조비법을 전수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다. 창덕궁 정문 돈화문이 굽어보는 앞길 주변에서 궁중 복식을 선보이는 나인들도 있다. 이곳에 즐비하게 들어선 국악원에서 궁중 아악을 전수하며 생활하는 악공(樂工)들이나, 견지동과 인사동 주위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도 유사한 처지다.

    언감생심 꿈속에라도 넘보지 못할 구중궁궐의 의식주가 어느덧 만백성에게 공개되고 있다. 나라를 잃었다고 울부짖었지만 실은 임금을 잃은 것이었고 그를 옹위하며 백성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는 관리들이 교체된 것이었다. 국권을 잃었다고 가슴을 쳤지만 실은 왕권을 잃은 것이었고 일상생활의 규율을 정하는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던 것이다. 문제는 조선인만의 권력교체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한성(漢城)의 백성은 이제 경기도 경성부(京城府)의 부민이 되었다. 궁궐 밖의 백성들은 이제 부민으로서 빈 궁궐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한다. 안동별궁은 매년 한 차례 북촌 주민들이 예방접종 받으러 가는 공설 접종소가 되었다. 백신 맞을 때 한 번 가고, 며칠 뒤 접종이 잘되었는지 검사하러 또 한 번 들른다.

    민간에 위생관념이 철저하지 못하여 예방할 생각이 아주 적음에 말미암아, 몹쓸 천연두로 훌륭한 얼굴과 육체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손실함이 많으니 크게 주의하여 예방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천연두는 우두(牛痘)만 넣으면 걸리지 않는 법인데 우두도 넣기를 싫어하는 일은 실로 잘못된 관념이다. 금번 종로경찰서에서 시행할 봄철 종두일자는 양력으로 4월 12일부터 나흘간을 시행하는데 일자와 시간과 처소와 구역은 별표와 같으니 종로경찰서 관할구역 안의 인민은 빠짐이 없이 우두를 넣게 함이 좋겠다 한다. △12일 단성사 △13일 안동별궁 [검사는 18일 안동별궁에서]

    4월 중 기관별 행사 중에서 생활 정보가 될 만한 것을 골라서 기사 양식에 맞춰 정리해두는 일이 한림이 맡은 일 중 하나다. 그러면 경력 있는 기자가 그걸 한번 쓱 보고 토를 달거나 고쳐서 부장에게 올린다. 한림은 편집국에 서무로 입사했다. 편집국의 살림살이를 돕고 타 부서와 업무연락을 하고 사내외의 각종 잡무를 처리하고 어린 사환들 데리고 청소도 함께 하는 직책이다. 입사하자마자 창간 준비로 바빴던 3월 한 달은 기자들 일손이 부족해 취재 보조도 하고 교정도 보며 이렇게 간단한 안내 기사까지 작성하게 되었다. 한림은 신문에 관한한 무경력자이고 서울에 올라온 지도 얼마 안 되어 아직 물정에 어둡다. 기자들 중에는 관영신문 매일신보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도 있고 일본 신문에서 활동하다 건너온 이들도 있다. 굳이 신문일이 아니라도 외국에서 유학과 예술활동 같은 것으로 견문을 넓히고 온 사람들도 있다. 기자들은 거의가 서른 살이 넘지 않은 20대였다. 가장 젊은 기자 이서구(李瑞求)는 한림과 동갑이라 했고 유광렬(柳光烈)은 한 살 위, 염상섭(廉想涉)은 두 살 위라 했다.

    한림은 차오르는 복받침 같은 것을 가슴께에 느끼며 안동별궁의 높고 긴 돌담을 벗어났다. 오늘 일은 일단 끝이 났다. 첫 신문이 나오는 날이다. 오랜 준비를 거친 창간호 대면을 앞두고 다들 홀가분하면서도 긴장된 기분이 되어있다. 신문이 인쇄 되어 나올 동안 잠시 회사를 빠져나와 가까운 주변이라도 한 번 둘러보며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다. 수요일의 오후였다.

    사람은 우측통행

    경성은 그에게 낯선 곳이다. 화동의 신문사에서 남쪽으로 내리뻗은 이 길을 내려와 안국동 사거리에 설 때마다 한림은 서울이 왜 서울인지를 알 것 같았다. 북악의 줄기를 병풍 삼아 왼쪽 동편으로 창덕궁이, 오른쪽 서편으로 경복궁이 지척에 바라보인다. 그 옆으로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인왕산과 낙산이 종묘와 사직까지 품고 있다.

    사통팔달의 안국동 사거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안듯이 정면으로 남산을 바라보며 서서히 낮아지는 길을 따라 남으로 내려간다. 안개비 너머 남산은 마치 경주와 가야와 백제의 고분처럼 부드러운 상체를 소담스레 드러내고 있다. 견지동 대로를 따라 종로 사거리에 이르는 500m가량의 이 직선 구간이 한림이 경성의 신문사에 출근해 처음 접한 길이고 가장 익숙한 길이다.

    길의 오른편을 따라 걷는다. 우측통행이 조만간 시행되리라 한다. 우마차(牛馬車)가 뒤섞여 복잡해져가는 도시의 대로상에서 인간이 가야 할 길과 그 방향에 대한 규칙이 마련되었다. 보행자는 보차도가 구분된 곳이건 아니건 길 오른편으로 걷도록 유도된다.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계도기간을 거쳐 남촌 본정경찰서 관내에서 먼저 시행한 뒤 북쪽 종로경찰서 관내로 확산된다고 한다. 5월 중 게재될 안내 기사문이다.

    최근 교통기관이 현저히 발달되었는데 시민들이 법규를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뜻밖의 화를 입는 일이 자주 생기므로 본정경찰서에서는 보행하는 사람의 우측통행을 실시한다. 경찰파출소에 한층 엄중히 단속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각 정동(町洞) 대표에게 시민의 주의사항을 다음과 같이 간곡히 의뢰하였다. 길에는 때때로 물을 뿌릴 것, 아이들은 길에서 작난하지 못하게 할 것, 다섯 살 미만 어린아이를 보호자 없이 길에 다니지 못하게 할 것, 길에다 수레나 기타 모든 물건을 늘어놓지 못하게 할 것, 길에서 허가 없이 무슨 일을 할 때 교통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말 것.



    한 건물 앞에 한림은 멈춰 섰다.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입주할 예정인 곳이라 한다. 출판은 물론 인쇄와 판매 일체를 총괄하는 기업형 출판회사가 한 달 뒤 출범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자본금 30만 원. 한림이 입사한 신문사의 자본금이 100만 원이다. 그나마 주식 모집이 순조롭지 않아 주식회사 설립이 지연되는 형편이다. 어쨌건 이번 봄 새로 생겨난 조선인 경영의 3개 신문사 역시 10년 전의 신문사들과는 질과 양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10년 세월이란 그처럼 긴 기간이었다. 한바탕 긴 악몽을 꾸고 난 것처럼 사회 전체가 부스스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형상이다.

    ‘우리의 진보와 문화의 증장(增長).’ 그런 기치를 내걸고 한성도서는 이미 각계 인사들로 임직원을 구성하고 광화문통에 마련한 임시 사옥에서 운영에 들어갔다. 단행본 발간과 아울러 잡지 발간에 주력하고 있다는데 첫 작품으로 월간잡지 ‘서울’이 막 간행되었다. 뒤이어 학생잡지 ‘학생계’가 5월에 발행을 앞두고 있다. 부녀잡지 ‘가정’도 7월 발행 예정으로 편집작업 중이다. ‘언론잡지’를 표방한 ‘서울’은 인쇄분이 조기에 매진되리라는 전망이다.

    잡지는 이미 한성도서 외에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개척(開拓)’ 창간호가 나왔고 ‘여자시론(女子時論)’ 2호가 나왔다. 제호도 찬란한 ‘서광(曙光)’과 ‘현대(現代)’가 각각 제3호를 앞 다투어 내었고, ‘여자계(女子界)’ 4호도 나왔다. ‘현대’는 동경의 기독청년회에서 나오던 기관지를 새 이름으로 바꿔내는 것이고 여자계는 동경여자유학생 친목회가 연중 3회 발행하는 기관지이긴 하지만 잡지의 종류는 풍성해지고 있다. 병합 이래 작년까지 10년간 외국인과 내국인이 펴내는 잡지의 절반은 종교잡지였다. 그러다 지난 겨울부터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그동안 동인지 성격의 문예지 몇몇이 하나 둘 눈치 보듯 나오다 들어가곤 했을 뿐, 시사문제를 곁들이는 잡지까지 쏟아져 나오는 일은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판매1위는 족보책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뒤이어 7월 개업을 앞둔 조선도서주식회사도 자본금 25만 원으로 창립 준비작업이 한창이라 한다. 한성도서와 쌍벽을 이루리라는 세간의 예상이다.

    갑자기 다가온 이러한 변화는 3·1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기미년 만세운동의 소요와 희생의 결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식이 병합 10년 만에 처음으로 변화를 맞았고 사회 경제 문화의 각 방면에서 중요한 제도 변화가 뒤따랐다. 그중의 하나가 출판시장의 통제 완화였다. 10년 동안 중단되어 공백상태에 있던 민간신문의 발행이 허가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림이 신문사에 출근해 첫 신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나 현대식 출판기업들이 창립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 것이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1년 경운동에 준공된 천도교 새 교당.

    80m 쯤 더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이 있다. 비스듬히 올려다뵈는 곧바른 길 막다른 곳에 보성학교로 통하는 후문이 멀찍이 보인다. 그 안에 보성사(普成社)도 들어 있다. 손병희의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는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新文館)과 함께 지난 10년간 암흑기의 출판계를 짊어지고 왔다. 지난해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써서 신문관에서 조판되어 보성사로 넘겨져 인쇄되었다.

    보성사는 1910년 설립 이래 적자가 누적되어 천도교의 자금력에 기대어 겨우 버텨오고 있다. 경영진이 손병희에게 폐쇄를 건의했을 정도라 한다. 1907년 문을 연 신문관 역시 최남선이 부친에게서 받은 자금을 소진해가고 있다. 책을 쏟아 낼수록 돈은 말라가고 있다. 출판시장 전체로 보면 아직도 도서 출판 판매에서 부동의 1위는 여전히 족보책이 차지하고 있다. 신소설과 고대소설이 그 뒤를 잇고, 옛 유교 경전과 문집들이 그 다음이다. 10년 전 20년 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언론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지난 10년, 신문관은 잡지에서부터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서적들을 광범하게 펴내어왔다. 보성사는 천도교의 풍족한 재정을 바탕으로 각종 서적을 인쇄하고 간행해왔다. 한림이 10대 청소년기에 읽어온 책 상당수가 이 두 곳에서 만들어져 나왔다. 이 양대 선구적 출판사와 인쇄사는 이제 한성도서나 조선도서의 기업적 분위기에 비추면 어느새 구시대적인 인상마저 주면서 옆으로 한발 비켜서는 느낌이다. 1910년생과 1920년생은 매우 다르다.

    사상을 담은 글, 그 글을 대중화하는 출판에서 1910년대의 대표 자리에 있던 최남선과 손병희는 지금 감옥에 있다. 그들이 주도한 3·1운동의 희생으로 미약하나마 얻어진 결과물이 출판과 언론의 통제 완화다. 그렇게 생겨난 1920년대의 도서와 신문 잡지가 제한된 언론 출판의 자유 속에서 막 태동하고 있다.

    보성학교 구내에 있는 푸른 벽돌 2층 양옥건물의 보성사는 3·1 만세 3개월 뒤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된 후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옛날 옛적부터 꾸부정히 마당에 서 있는 백송과 회화나무가 그을린 벽체만 앙상히 남은 보성사를 굽어보고 있다.

    목욕탕은 없어도 이발소는 많다

    양복점을 비롯한 각종 상점들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일본상점도 눈에 많이 띈다. 한림은 우측 수송동 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을 건너 경성지방법원 뒤편으로 들어섰다. 이번 봄에는 대형 재판들이 속속 벌어질 것이다. 재판소 담장을 따라 다시 양복점과 모자점을 위시한 다양한 상점이 줄줄이 이어진다. “조선인 목욕탕 하나 없는 경성에 이발소는 많고 양복(洋服)점 양화(洋靴)점이 즐비하다.” 천도교 청년회의 박달성(朴達成)은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곱게 보일까를 늘 궁리하는 조선인의 기풍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는 그를 한림이 처음 만난 것은 이번 달 천도교당 강연회에서였다. 천도교는 3월에 청년회를 발족했다. 지난해 9월 만든 교리강연부를 개편한 조직이다. 경성은 물론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을 벌이고 있다. “조선인이 세운 도서관 하나가 없는데 주점은 셀 수도 없이 늘어가고, 집집마다 방방에 있는 것이라곤 신소설과 가요노래집뿐, 실생활에 귀감이 될 만한 서적은 보기가 힘들다.” 박달성은 계몽강연에서 그런 말을 종종 한다.

    법원 담장가에 붙은 인력거 대기소를 지나 법원 입구에 닿는다. 저마다 사연 하나씩 들고 이 스산한 곳을 분주히 들고난다. 전차는 무심히 종로 사거리를 지난다. 한림은 동쪽으로 길을 건너 모퉁이 2층 목조건물 화신상회 앞에 선다. 거기서 남쪽 건너편으로 바라보이는 보신각 앞에는 행인들이 노점을 둘러싸고 서 있다.

    왼쪽 종로 2정목 쪽으로 눈을 돌리면 연이어 선 종로경찰서와 기독교청년회관(YMCA) 아래 행인들이 분주히 오간다. 종로경찰서 정면 옥상 위로 힘차게 솟은 원통 돔형 첨탑의 정면과 측면에 부착된 둥근 시계는 4시 반을 알리고 있다. 한림이 막 태어났을 때의 한성전기회사 시절부터 달려 있던 이 아름드리 지름의 시계는 한미전기, 경성전기를 거쳐 회사가 저 아래 남대문통의 명치정 입구로 이전한 지금도 20년 전 모습 그대로 달려 있다. 그래서 종로경찰서는 속칭 시계집으로 불리곤 한다. 교통의 중심 종로의 남쪽 동쪽 서쪽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세 개의 명물 시계는 언제부턴가 제각기 가리키는 시간이 다 다르다.

    시계에서 눈을 뗀 한림은 종로사거리를 버리고 몸을 돌려 오던 길 반대편 북쪽으로 거슬러 오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역시 우측통행이다. 인사동을 바라보는 공평동을 지나 관훈동을 바라보는 견지동까지 올라왔다. 샛길 초입에 경찰파출소가 있고 그 안쪽으로 시천교(侍天敎) 교당이 보인다. 을사조약 전부터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친일적 활동을 해오던 동학의 이용구(李容九)가 천도교에서 떨어져 나와 설립한 종교단체다. 견지동 대로를 사이로 서쪽 천도교의 보성학교 보성사 단지를 건너다보고 있다.

    개화당이 개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견지동 집에서 나선 듯한 윤치호(尹致昊)가 마주쳐 지나간다. 사뿐한 걸음, 날씬하고 꼿꼿한 체격. 작은 키에 가는 눈, 유달리 번쩍이는 안경. 길고 듬성한 수염의 55세이지만 40대 초반으로 보인다. 종로 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는 그 활발하고 경쾌한 보폭은 아마 기독교청년회관으로 향하는 것일 게다.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출옥한 이후 그는 주중에 종로의 YMCA에서 일하고 주일에 도렴동의 종교교회 가서 예배 보는 일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교회는 가족들을 이끌고 걸어서 간다. 그는 자동차든 인력거든 어지간해서는 탈것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교회는 일찍이 1895년부터 윤치호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종교(琮橋)다리 부근 한옥들에서 목회를 해오다 1910년 이 자리에 고딕양식의 2층 벽돌집으로 건축한 것이다. 종교다리는 종침교(琮琛橋)로 불리기도 하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성종 시절 재상 허종과 아우 허침이 이 다리에서 떨어져 다쳤다는 핑계로 연산군 생모 윤 씨의 폐비문제를 논의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뒷날 화를 면하였다는 일화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그는 어쩌면 은행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대를 이은 대부호이지만 잔돈푼도 꼬박꼬박 저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식전 산보를 거르지 않는 그이므로 별 볼일 없이 그냥 산보하러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에 미국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고 영어를 그만큼 잘 하는 사람이 없다는데 그는 거의 양복을 입지 않고 조선옷 차림으로 다닌다. 추운 날 겉옷만 양식 외투를 걸친다. 미국식 실용주의가 몸에 배어있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884년 푸트 주한 미국공사가 윤치호의 집을 방문했다. 우측 첫번째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윤치호이고 그 옆이 푸트 공사다.

    그는 1898년 10월 독립협회 제2대 회장으로서 1만 명이나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대외적으로 자주국권을 수호하고 대내적으로 자유민권을 보장하는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자는 운동을 주도했다. 12월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까지 2개월이 그에겐 정치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비 오는 날이면 그는 꼭 장화를 신고 흙 안 튀게 가만가만 마른 땅을 골라 짚고 다닌다 한다. 이슬비 그쳐 먼지 없이 촉촉한 길을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내려간다.

    저기 종각 사거리에 22년 전 33세의 그가 만민공동회의 열기를 뿜어내던 그 광장이 있다.

    길 맞은편 아까 걸어 내려오며 보았던 보성사 후문 입구와 그 위 한성도서 예정지의 중간쯤에 우정총국(郵政總局) 옛터가 바라보인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의 그날. 두 해 전 임오년의 군란을 청나라의 3000 구원 병력으로 진압하고 재집권하는 데 성공한 민비 정권이 청국의 속방화 정책에 순응하면서 개화당의 자주근대화 정책을 억누르는 데 대한 반격으로 벌인 무장정변이었다.

    근대적 우편제도를 담당하는 행정관서의 낙성식 날 그 축하연회장에서 개화당 행동대와 일본인 협력대원들의 몽둥이와 일본도가 난무하는 그 유혈 참극으로 우정국은 막 열었던 문을 바로 닫았다. 우정국 서울 총국(總局)의 총판 홍영식은 3일간 신정부의 우의정이 되었다가 피살되었고, 그의 주선으로 인천 분국(分局)의 분국장이 된 이상재(李商在)는 34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 얻은 관직을 잃고 낙향했다. 영국 홍콩 일본과 맺은 우편물교환협정은 쓸모없이 되었고 발행한 다섯 종의 우표도 써볼 일 없게 되었다. 조선의 우편제도는 다시 구식 역참(驛站)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11년 뒤인 1895년 근대식 우편제도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청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우세가 뚜렷해져 있었다. 그리고 두어 달 뒤 민비는 시해된다.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일본유학시절부터 각별히 친했던 윤치호는 우정국 행사장에 초대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주사로 참석해 현장을 목격하고 정변 실패 후 중국으로 도피했다. 그가 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은 정변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3일천하가 끝나자 유배되었다.

    거사 직전까지 미국공사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김옥균과 서광범에게 푸트 공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시기를 기다려 지사를 모으고 황제의 총애를 견고히 하여 세력을 삼아나가되 함부로 과격한 일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성급히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도리어 개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김옥균은 옳다고 답했다. 이런 대화는 모두 윤치호의 귀와 입으로 통역됐다. 개화당이 개화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역설을 개화당의 두목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흐름의 복판에서 독보적인 각도에서 현장을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던 윤치호의 뇌리에는 그 어떤 조선인의 상념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구전으로만 듣던 윤치호라는 존재의 실물을 길가에서 이렇게 다른 시간대에 마주 보는 한림의 심정이 착잡한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윤치호가 그렇게 중국으로 떠나 3년 반을 머무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더 오래 머무르며 10년 세월을 보낸 뒤 중국인과 결혼해 함께 귀국한 것이 1895년이었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몰라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미수호통상사절단. 앞줄 왼쪽부터 통역관 로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서광범.

    견지동 길 막바지에 이르러 관훈동 인사동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한림은 섰다. 다시 안국동 사거리다. 길모퉁이 동덕여학교 담장가에서 한림은 사거리 건너 북쪽 안동별궁을 정면으로 올려다본다. 별궁의 담장 너머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상체를 드러내고 또 한 번의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립 동덕여학교는 다년간 천도교가 재정을 지원하고 운영하기도 했으나 작년 손병희의 투옥 이후 다시 독립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학교 이층 건물 뒷마당에서 비에 젖지 않은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소녀들이 사방치기를 하며 놀고 있다. 발그레한 뺨에 댕기를 나풀거리며 납작한 돌을 차고 한쪽 다리로 깨금발을 뛰고 있다. 내일은 개학 날이다. 지난주에는 졸업식이 있었다.

    관훈동 내려서는 길목에서 행인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시비가 붙은 모양이다. 오십가량 된 갓 쓴 노인과 삼십가량의 모자 쓴 청년 하나가 서로 밀고 당기며 험한 말을 퍼붓고 있다. 조선인은 주로 말로 싸운다. 싸우는 방식은 주로 말꼬리 잡기다. 조선어는 대개 말꼬리가 길고 다양하다. 말의 몸통보다 꼬리에 더 영향을 받는다. 변화무쌍한 토씨와 어미는 감정을 쉽게 담으며 감정을 쉽게 자극한다. 몸통말은 주로 한자어에서 왔고 어미가 주로 국산이다. 누가 말리고 나서자 신식 모자 쓴 삼십대는 이제 말리는 사람을 상대로 시비조로 분풀이를 해댄다. 땔나무 짐짝 수북이 싣고 지나는 수레를 사이에 두고 마주 걷던 두 사람이 서로 엮이며 노인이 청년의 발등을 밟은 게 싸움의 발단이었단다. 노소막론하고 참 용서하는 기질이 부족하고 감정 노출이 헤프고 성급하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몰라. 박달성이 일전에 해준 말을 되새기며 한림은 사거리를 건넌다. 그때 어디서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려온다. 구경거리가 없어져 시들하게 흩어지던 사람들이 다시 이목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둘러본다. 신문 배달부가 사거리를 질주한다. 허리춤에서 울리는 솔방울 크기만한 요령 소리 때문인가, 배달부의 발놀림이 유독 경쾌해 보인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11년 무렵 경성고보 교문.

    한림은 달리기 시작했다. 별궁 담을 따라 뛰어올랐다. 완만한 경사로이지만 내려올 때와 달리 이내 숨이 가빠온다. 갑신정변 때 초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일단의 무리가 별궁 앞 사거리를 질주하던 것이 36년 전이다. 이 별궁에 불을 질러 거사의 신호로 삼으려 했으나 불길은 우정국 뒷집에서 피어올랐다. 별궁 뒤편 어딘가에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한다.

    올라가는 길 왼편 송현동(松峴洞)에는 천도교당 2층 양옥이 있다. 여기는 교당이면서 동시에 천도교 수뇌부의 중앙총부가 들어 있는 곳이다. 손병희를 필두로 천도교 인사들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 교당을 비우고 있지만 지은 지 10년 되는 교당은 늘 비좁다고 한다. 작년 3월 1일 낭독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 사람이었다.

    교당과 중앙총부가 함께 들어설 웅장한 건물을 경운동에 새로 짓고 있다.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완공을 목표로 한다지만 교주가 공석 중이라 어딘지 허전한 분위기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보성사에서 인쇄되고 배포되기 꼭 석 달 전에 착공되었으니 이제 공사는 중반을 넘어섰다. 동학 창시 이래 최제우 최시형 두 교주가 당한 고난 이후 최대의 시련이 제3대 교주 손병희와 그의 천도교에 찾아들었다.

    졸업의 계절

    오르막길이 끝나가고 저기 북편 언덕 위에 경성고등보통학교가 서 있다. 신문사는 학교 앞 언덕 아래에 있다. 경성고보는 지난주 화요일 졸업식을 치렀다. 창간 준비로 바쁜 신문사 앞 좁은 길이 미어지게 인파가 오르내렸다.

    조선 고등보통 교육의 중추기관이 되어 있는 경성고등보통학교 제10회 졸업식을 23일 오전 10시에 동교의 넓고 넓은 운동장에서 거행하게 되었는바, 정각 열시가 되자 총독의 대리로 송영(松永) 외사과장(外事課長)이 착석하매 일동은 정중한 경례를 한 후 국가(國歌)로써 의식에 엄중한 색채를 더하였으며, 그 다음 교장 강원보(岡元輔) 씨의 경건한 칙어 봉독(勅語 奉讀)이 있었으며 그 다음 송영 외사과장이 총독 각하의 고별사를 대신 낭독하였는바…

    매일신보는 그렇게 전하고 있었다. 졸업의 계절이다. 일본식 교육제도를 이식한 조선교육령이 시행된 지도 10년째다. 모든 학사일정은 매년 4월 1일에 시작해 3월 31일에 종결된다. 경성고보 다음 날 양정고보도 성대한 졸업식을 했다. 학교 귀하고 학생 귀한 조선에서 졸업식 행사는 중요 소식이다. 지난 10년 동안 조선인들은 유일한 조선어 신문인 매일신보가 비중 있게 취급하는 기사를 통해 몇 안 되는 학교의 졸업식 소식을 소상히 전해 들어왔다.

    경성 남대문의 만리재 등성이에 높이 솟아 있는 양식의 벽돌 이층집은 재단법인 사립 양정고등보통학교인데 예년과 같이 졸업식을 24일 오후 2시부터 거행하였다. 정각 2시가 되자 당국에서 나온 내빈, 곧 수야(水野) 정무총감, 궁삭(弓削) 학무과장, 공등(工藤) 경기도지사, 이등(伊藤) 비서관 기타의 조야의 명사가 식장으로 들어와 임석하기가 무섭게 의식이 거행되었는바, 학생 내빈 일동의 국가(國歌) 고창이 있었고 그 다음 소삼(小杉) 부 교장의 칙어(勅語) 낭독이 있었으며 동시에 부교장의 학사보고가 있은 이후 동교 교장 엄주익(嚴柱益) 씨의 증서 수여식이 있었음과 동시에 교장의 간절한 고별사가 있었고 이를 다음하여 임석한 정무총감의 훈시와 경기도지사의 고별사 낭독이 있었으며…

    순헌황귀비 엄 씨의 조카 엄주익이 엄 귀비의 재정지원으로 설립한 양정의숙에서 출발한 학교다. 엄주익은 엄비의 소생인 영친왕 이은(李垠)이 1907년 이등박문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인질처럼 건너갔을 때 그를 모시고 따라간 11명의 사절 중 한 명이었다. 총독부의 제2인자인 미즈노 정무총감이 경기도지사와 함께 직접 참여한 것은 왕실 관련 학교에 대한 예우로 보인다.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 만년 이어지리라, 모래가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여느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제창되었다. 기미가요의 가사야 천년 가까이 된 전통시 구절이라지만 그 곡이 만들어져 불리게 된 것은 40년 전이다. 궁내성 직원이 지은 곡을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완성한 것이라 한다. 1880년이었다. 일본 해군의 군무국에서 일하던 에케르트는 20년 뒤인 1900년 대한제국에 군악대가 창설되자 다음 해 교사로 초빙되어 독일식 50인조 정통 군악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다음 해 대한제국 국가를 만들었다. 고종 즉위 40주년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군악대는 매주 목요일에 탑골공원에서 모차르트를 비롯한 독일 고전음악 콘서트를 열곤 했다.

    “…우리 신민이 지극한 충과 효로써 억조창생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대대손손 그 아름다움을 다하게 하는 것이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인바, 교육의 연원 또한 여기에 있을 터이다…”

    교문을 나설 졸업생들 앞에 교육칙어가 엄숙히 낭독되었다. 일본 제국 신민들의 수신과 도덕 교육의 기본 규범을 정하고 있는 교육 칙어는 1890년 메이지 천황의 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기미가요는 이제 10년이 흐르는 동안 다들 능숙하게 부른다. 조선인은 노래 솜씨가 좋아 기미가요도 일본인보다 더 잘 부른다고 일본인 교사들은 칭찬한다. 발음도 훌륭하다. 국어(國語) 과목으로 일본어는 전 교과목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업시간을 할애하여 10년 동안 집중 학습되고 있다. 조선어는 그 절반도 못되는 시간으로 외국어(영어 독어 불어)보다 낮은 비중이다.

    양정고보보다 한 시간 앞서 보성고보에서도 졸업식이 열렸다.

    박동(薄洞) 골목을 들어서면 벽돌로 쌓은 담장 안에 정면으로 들여다보이는 웅장한 이층 건물은 우리 경성에 있는 여러 학교 중에 가장 역사가 많고 또 우리 조선사람의 일반 정신계로 하여금 잊지 못할 무엇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간에 수많은 영재를 이 집안에서 산출하여 우리 사회에 공헌이 적지 않은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이다. 24일은 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학제가 변경된 뒤 제3회 졸업식이 거행되게 되었고 겸하여 동 초등학교의 제13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정오부터 학생과 학부형과 내빈들이 연속하여 착석하고 경기도청으로부터 유성준(兪星濬) 참여관(參與官), 연상 시학(淵上 視學)과 중앙학교장 최두선(崔斗善) 씨,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장 고원훈(高元勳) 씨 등 다수의 명사가 착석한 후 벽상에 걸린 시계가 한 시를 알리자 땅땅 울리는 종소리로써 졸업식은 제일 강당에서 엄숙히 열리었다. 보성고등학교장 정대현(鄭大鉉) 씨의 간단한 식사가 있은 뒤에 ‘기미가요’의 국가를 아뢰인 후에 먼저 경기도청으로부터 우등생에게 주는 상품을 유 참여관이 등단하여 수여한 후에 동교 소송기(小松崎) 강사의 호명으로 고등보통과 졸업생 대표에게 정 교장으로부터 졸업증서의 수여가 있었고…

    유성준은 유길준의 동생이다. 1907년에 보성학교 2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최두선은 최남선의 동생이다. 이날 역시 졸업식을 가진 숙명여학교는 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붉은재를 넘어간 사람

    졸업생들은 나갔고 내일이면 신입생들이 들어온다. 경성고보 담장 너머 홍현(紅峴)고개 위 어디에 김옥균의 집이 있었다 하나 집도 주인도 산산조각 나 아무 흔적도 남은 게 없다. 흙이 유독 붉어 붉은재라 불리던 이 고갯마루 너머 동쪽으로 내려서면 스무 살 무렵의 김옥균이 사숙하던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그 집 가는 길에는 박규수의 문하에서 함께 개화사상을 접하던 네 살 아래 홍영식의 집도 있었다.

    정변 주도자들이 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한 뒤 끝까지 왕과 함께 있던 홍영식은 중국의 명장 관우를 모시는 사당 북관묘에서 왕을 넘겨받은 청나라 군대와 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기선을 얻어타고 조국을 빠져나간 김옥균은 10년 뒤 망명지 일본에서의 고초를 견디다 못해 청국의 상해로 건너갔다가 조국에서 보낸 자객의 칼에 숨졌다. 그리고 죽은 채로 고국 땅에 실려와 양화진의 참수터에서 능지처참당했다.

    그렇게 고약한 역모였을까. 지금처럼 나라를 통째로 외국에 넘겨준 것만큼의 역모였을까. 한림은 생각한다. 왕에 대한 반역은 삼족을 멸할 정도의 대역죄다. 하지만 나라에 대한 반역은 그것이 반역인지 아닌지 왕이 판단할 문제다. 죄가 되고 안 되고는 왕의 마음이다. 그것이 왕조다. 조선은 왕의 나라이지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변은 많은 사람을 죽였고,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도 죽었다. 김옥균이 부관참시당하듯 두 번 죽음한 지 4개월 뒤, 갑오경장으로 개화파 정부가 수립되어 분위기는 일변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도피할 때 망명처를 미국으로 선택했던 서광범은 10년 만에 돌아와 법부(法部)대신이 되었고 갑신정변 개화파의 사면복권을 요청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이리하여 김옥균과 홍영식은 사후에 죄가 사라지고 규장각대제학의 벼슬을 받게 됐다. 두 사람에게는 충(忠)자가 붙은 시호가 아울러 내려졌다.

    새로운 정치란

    낡은 기와집 두어 채를 이어 붙여 널빤지와 양철판으로 얼기설기 엮은 집이 신문사다. 한때 학교가 있던 곳이다. 지금 거기서 다들 신문 한 장씩을 펼쳐들고 있다. 그냥 커다란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은 4면 신문이다. 오늘은 창간호라 특별히 종이 두 장에 8면이 인쇄되어 나왔다.

    많은 기사가 그 두 장의 종이 앞뒷면에 주판알처럼 빼곡히 실려 있다. 제때를 놓친 개혁처럼, 제때에 처리되지 못한 사연들이 날과 달과 해를 넘겨 뒤늦게 활자로 되살아나 몰려드는 형국이다. 많은 것이 이미 되담기에는 시효가 한참 지났다. 그럼에도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의 신문이 조선어로 씌어 자유롭게 배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신문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조선문, 혹은 언문(諺文)으로 읽을 수 있는 신문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매일신보 하나뿐이었다. 그 밖에 많은 신문이 유통됐지만 죄다 일본글 신문이었다.

    창간신문의 기사는 프랑스 총리가 하원 연설에서 제국주의와 무단주의적 사상을 비판했다는 소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제국주의 원조국들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요즘 대세다.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생겨난 풍조다. 압록강 너머 길림과 조선 간 경계에 있는 조선인을 중국 지방관헌이 무력으로 해산했다는 소식이 그 다음에 있다. 그곳 일본 영사(領事)의 요구에 따른 조치라고 한다. 여기서 조선인이란 무장독립운동과 관계된 사람을 뜻한다.

    조선은행권 발행액은 나날이 팽창한다. 일본과 만주의 금융이 긴축하는데도 조선에는 자금 수요가 격증한다. 투기열이 치열하고 물가가 상승세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의 조선은행에 대한 자금수요도 늘어난다. 일본과 만주의 일반금리는 이미 인상하였기에 조선의 자금이 일본과 만주에 유출될까봐 대출 금리를 인상한다는 소식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3선 출마를 포기할 것이라 한다.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해 작년 조선민족에 온갖 설렘과 고통과 실망을 안겨준 그는 정치생명을 다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의 말과 신념은 한때 대외적으로는 ‘구세주의 복음’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국내적으로 ‘윤리적인 이상주의자’ ‘교조적 민주주의 예언가’라는 혹평에도 부딪혔다.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0년의 신문사.

    조선시대의 유습인 태형(笞刑)이 마침내 폐지되었다는 소식도 있다. 조선 500년간 백성들을 떨게 한 공포의 곤장은 이제 맞을 일이 없게 되었다. “조선인의 민도가 과거에 비할 바 아니어서 육체에 직접 고통을 주는 제도는 철폐함이 지당하다고 인정될 뿐만 아니라, 일본인 조선인 간에 형법제도상 차별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정치의 취지와 맞지 않으므로” 폐지되었다는 정무총감의 담화가 있다. 새로운 정치란 작년 9월 신임 총독 부임에 즈음해 시행된 대대적인 제도개정을 말한다.

    국가 존재의 이유

    많은 일이 작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신임 총독 부임과 더불어 ‘문화정치’가 선포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조선인 발행의 민간신문 허가 역시 그 일환이었다. 이 모든 것이 3·1만세운동의 결과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만세운동의 관련자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감옥에 복역 중이고, 일부는 아직도 심리가 진행 중이다.



    일년 동안을 두고 예심을 끌던 손병희 일파 47인에 대하여 지난번에야 그 죄명이 내란죄가 아니고 보안법 위반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서 결정을 하여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치게 된 일에 대하여 지방법원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예심기록 쌓아놓은 것이 사람 키로 세 길이나 되고 피고 수효가 84명이나 되니까 여간 시일이 걸리지 아니할 터이라 판사가 세 명, 검사가 여섯 명이 매달려 전력을 다하여 조사하는 중인데, 더디어도 금년 여름 안으로는 속히 결말을 내릴 작정으로 전력을 다하여 조사를 진행하는 중이다.”

    3·1운동 주도자들은 1년이 넘도록 미결수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심리절차에 골병이 들고 있다. 손병희를 비롯한 고령자들은 건강을 크게 해치고 있다 한다. 작년 9월 신임 총독을 암살하려 한 강우규(姜宇奎)에 대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돼 벌써 1심 재판이 끝났다. 구형은 사형이었다.

    남대문역에서 재등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한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강우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에 불복하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는데, 5일에 공판을 개정한다.

    대형 공판들이 잇달아 열리려 하고 있다.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을 겸하고 있는 이상협(李相協)은 이들 공판 취재를 직접 맡을 예정이다. 기자 한두 명으로는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그 자신이 이 방면 최고 경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3·1운동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관련자들이 거의 수감되고 난 5월까지 7년간 매일신보 기자로 있었다. 임박한 것은 공판만이 아니다.

    이왕세자 전하의 가례는 4월 29일로 택일되었으며 예식은 동경 왕세자저에서 순전한 일본식으로 거행하신다.

    무슨 말인가. 열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왕세자 이은이 23세가 되어 일본 황실과 혼인을 맺는다는 말이다. 백성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실상 이씨 왕조의 백성이 아니다. 과거의 체제와 제도는 사라지고 왕과 백성 간의 관성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서서히 소멸해가는 그 관성적 감정을 한 번씩 격하게 요동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곤 하는데 지난해 1월 고종임금 승하 때가 그랬다. 그 국상에 즈음해 3월에 만세운동이 일어나 해가 바뀐 지금까지 그 여진이 있는데 또 한 번 지난날의 아픔을 되살리게 하는 행사가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어떻게 통치권을 갖는지, 개인이 어찌해서 타인의 의사에 복종해야 하는지, 개인이 왜 국가 전체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할 의무가 있는지― 이 문제의 답안은 왜 개인이 국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달아 아는 데에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 생소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담은 글 한 편이 신문에 실려 있다. 필자는 촉망받는 변호사이자 유명 지식인인 김우영(金雨英)이다. 경도제국대학 법학부를 나온 그는 “국가 존재의 이유는 윤리적 문제다”고 단언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인류의 목적이 윤리 실현에 있는 것이라면 국가는 윤리상 필요물이고 국가 성립의 이유는 윤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하여튼 국가 존재의 이유를 바로 이해해야 국민의 행동 준칙이 선다고 서양의 학설들을 종합해 역설하고 있다. 시국사건 재판에 불철주야 바쁜 변호사 김우영은 이번 봄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상대는 나혜석(羅蕙錫)이다.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하고 소설을 발표하고 여성운동도 하는 이 화가는 3·1운동 관련으로 몇 개월 옥고를 치르고 나서 김우영의 오랜 구애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한다.

    학식보다 말이 능해

    완고한 가정에 숨었던 처녀와 시집간 부인네의 여학교 지원이 퍽 늘어가는 모양이라, 이제는 여자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구실을 못하며 배우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이 깊어가는 듯하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실화인데, 백발노인이 쪽을 찐 며느리를 이끌고 와서 동경 가 있는 아들이 편지하기를 제 아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이혼을 하거나 첩을 얻겠다 하였으니 기예과에라도 넣어달라고 탄원을 하였다 한다.

    기예과는 재봉과 수예를 배우는 부설 학과다. 많고 많은 기사들 중에서도 한림은 유독 학생들에 관한 기사에 눈이 간다. 졸업과 입학. 이제 인생의 출발선에서 20대로 접어드는 청춘들의 개화(開花)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전쟁일지도 모른다.

    어느덧 눈이 녹아 김이 터지고 뜰가에 누른 풀잎 사이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솟아나오니 시내 각 학교에서는 졸업생을 보내고 신입생 맞기에 한창 분망하게 되었다. 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곳은 학생과 학교였으나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과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은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언제까지고 이전의 지경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일어 산술 책을 집어던지고 천하대세를 두루 논하며 수틀과 골무를 뿌리치고 여자해방을 부르짖는 등 별별가지 현상이 많았던 터이라 이에 잠깐 금년 봄 중등 정도의 남녀학교 졸업생과 입학생의 상황을 살펴보면, 졸업생은 대개 학식보다는 말이 능하며 매사에 대담 민활한 것이 한 가지 특징이라 하겠고, 다음에는 일본 유학가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니 적어도 한 학교에 대여섯은 안 가는 곳이 없는 듯하며 유학생은 대개 지방부호의 자녀인 듯한데 그들은 흔히 말하기를 “서울 밥값이나 동경 밥값이나 별로 큰 차이가 없는 바에야 동경 가서 배우는 것이 낫지 않으냐” 하나 그들은 벌써 싱겁고 느린 경성 학군에는 마음이 멀어진 것이 사실인가 싶다.

    개조해야 살고 자각해야 일어선다는 풍조는 작년을 기점으로 더욱 뚜렷해졌다.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의 학생은 이전의 학생이 아니었다. 새로운 총독으로 교체되면서 지난 10년을 짓눌러온 사회 분위기도 일신했다. 구체적인 제도변화가 뒤따르고 있다. 그것이 설혹 사이비 변화라 할지라도 변화는 변화다. 병합 이전 10년과 병합 이후 10년, 두 10년 사이에 생의 전부가 녹아들어 있는 이 20세기의 첫 신세대 앞에 파도와 같이 몰려오는 새로운 문명과 대면해야하는 일대 도전(挑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유행하는 말로 실존적 도전이었으며, 20세기의 20년대에 20대를 시작하게 된 청춘들의 운명적 응전(應戰)이기도 했다.

    총독도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죽지말라 하심인가

    기미년 3월 1일의 민심 폭발과 3월 3일의 임금 장례로부터 꼭 6개월 뒤인 1919년 9월 2일.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쌍두마차가 남대문 정거장을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흰색의 해군대장 예복 차림의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부인과 함께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사이토 총독은 경부선 기차에서 내려 일본인 조선인 외국인 출영객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빈실에 잠시 머물다 나오는 길이었다. 눈앞을 덮칠 듯 펼쳐진 남산의 한양공원에서 예포가 울려 퍼지고 군인 경찰 귀족 관리 기자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역 주변 길목은 온통 흰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남대문에서부터 용산 방면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가늠하기 힘든 인파였다. 그들은 환영객이라기보다는 무언의 시위대처럼 보였다.

    그 순간 예포와는 소리가 다른 또 하나의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마차 주변에 있던 30명 이상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마차 앞 땅바닥에 수류탄 하나가 떨어져 폭발한 것이었다. 파편은 마차와 총독의 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장 헌병들이 몰려들고 사상자가 실려 나가는 가운데 총독은 “비가 내려야 땅이 단단해지는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관저로 향했다.

    61세의 노회한 정객 사이토가 백발을 덮은 해군모를 다시 한 번 눌러쓰고 떠나자 10m 거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64세의 강우규도 파나마 모자로 백발을 눌러쓴 채 서서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허리춤에 폭탄을 싸서 찼던 명주수건과 양산을 들고서 저고리와 두루마기 차림에 허름한 가죽신을 신고 걸어가는 이 시골풍의 노인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훗날 강우규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던졌으니까 총독은 죽었으리라 하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였을 뿐이다. 나는 춤을 추며 내가 지은 시를 읊으려 하였는데 총독은 죽지 아니하고 마차는 똘똘똘 굴러갔다. 나는 실망 낙담하였다. 소동은 일어났으나 아무도 나를 잡지 아니하므로 나는 천천히 돌아 나왔다. 총독은 죽지 아니하고 나는 잡지 아니하므로 내 생각에 하나님이 총독도 불쌍히 여기시고 나도 죽지 말라 하심인가 하고 아무데로도 달아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

    60대 노인들 간의 전쟁이 역 광장에서 끝난 다음 58세의 이완용은 역 구내 귀빈실에서 웅성대며 우왕좌왕하는 귀족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다만 새끼손톱을 씹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10년만이다. 이등박문이 하얼빈 역전에서 총을 맞고 그 자신이 서울의 천주교회당 앞에서 칼을 맞은 것이. 다들 검은색 서양예복을 갖춰 입고 나왔다. 어떤 이의 양화 구두는 찢어졌고 중산모에는 수류탄 파편 자욱이 선명했다. 이완용은 중절모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매일신보 기자를 갖 시작한 유광렬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대감, 놀라셨지요.”

    이완용은 조용히 웃으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놀라기는 뭘….”

    1910년대는 어느덧 저물어가고 저만치 1920년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아일보/ 매일신보 / 개벽 / 동광 / 별건곤 / 송우혜, 마지막 황태자 1, 푸른역사, 2010 /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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