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1-19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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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이코프스키는 40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백발에 시력이 나빠졌고, 치아도 빠졌다. 발음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40대에 갑자기 늙어버린 것은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부인과의 불화에서 오는 스트레스, 동성애에 대한 집착,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결국 1893년 53세의 나이로 교향곡 제6번 ‘비창’이 초연된 지 몇 주 후 콜레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다. 민족정서를 가미해 러시아 고전주의를 완성한 차이코프스키. 그의 음악은 6만여 군중의 애도 물결이 대변하고 있었다.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대형 마트에 들러 쇼핑을 할 때, 경쾌하고 빠른 비트의 ‘마트 송’에 빨려들어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란다. 즐거운 멜로디와 경쾌한 박자에 맞추어 빠르게 많은 물건을 구매하게 되지만, 나중에 계산서를 보면 후회막급이다. 음악이 사람의 감성적인 면을 자극해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욕망에 충실하게 만드는 마케팅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백조의 호수(Swan Lake)’를 떠올린다. 그리고 ‘백조의 호수’ 1막 2장에서 지그프리드 왕자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는 백조들을 보는 장면과 이 장면에 맞추어 흐르는 테마 멜로디를 떠올린다.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백조의 호수’란 제목은 ‘호수의 백조’가 되어야 본래의 의미에 부합한다. 일본에서 이 작품을 번역할 때 생긴 오류를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백조의 호수’라는 제목으로 굳은 것이다. 아마 소설이나 희곡 제목이었으면 잘못된 번역 사례로 지적되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발레의 명칭이기 때문에 ‘백조의 호수’라는 제목보다는 작품의 테마 멜로디나 발레리나의 춤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애국가도 마찬가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이별의 노래(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을, 1936년에 작곡가 안익태가 곡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는 한국어 문법을 고려할 때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도록’이 더 분명한 표현이겠지만, 과거의 가사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애국가에 이성적인 방식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접근하며 정확한 문법적 표현보다는 정서적 느낌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처럼 음악은 대중의 합리적 사고보다는 감성적인 감동으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의 힘이다.

    차이코프스키는 풍부한 관현악적 색채와 체계화된 화성, 동작의 변화를 고려한 다양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발레 음악을 작곡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음악만 들어도 어디선가 토슈즈를 신고 튜튜를 입은 가냘픈 발레리나가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작곡한, 발레사의 명곡으로 꼽히는 ‘백조의 호수’(18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호두까기 인형’(1892) 등은 러시아 발레의 기술적인 토대를 만들어줄 본질을 제시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작곡 활동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작곡한 ‘백조의 호수’가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때 관객의 반응은 너무나 싸늘했다. 차이코프스키가 프랑스 극음악의 여러 요소를 의욕적으로 흡수해 러시아 음악에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의 음악, 그중 특히 관현악법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또 프랑스 작곡가인 카미유 생상스(1835~1921)와도 돈독한 친분을 쌓으면서 우아하고 감미로운 프랑스 음악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무엇보다 차이코프스키의 극음악은 1876년에 파리로 가서 오페라 ‘카르멘’ 등 많은 작품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 그 출발의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초연은 실패했다. 오데트 역을 맡은 발레리나가 환갑 나이의 노장이었다는 것과, 안무와 무대장치가 부실했다는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었지만 그것보다 당시 러시아 관객들의 수준에 비해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뛰어났다는 사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러시아 발레공연에서는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음악의 비중은 낮았다. 러시아 발레에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테크닉이었으며, 음악은 단지 병풍과 같은 존재로, 은은하게 나왔다가 관객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러시아적 환경에서 관객들은 극을 이끌며 안무를 선도하고 더구나 인물묘사까지 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생소한 음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이 관객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레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발라레(Ballare·‘춤추다’는 뜻)이다.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발레는 르네상스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시작된 발레는, 그러나 여러 고증에 따르면 몸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행진 수준이었다. 많은 이탈리아 문화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발레는 카트린 드 메디치(카타리나 메디치)와 앙리 4세의 결혼식 때 카트린이 지참금 명목으로 가지고 간 수많은 재산과 영지 목록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평민 출신의 메디치 가문이 프랑스 왕가와 정략적인 계약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간 선물 중에는 요리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그리고 발레가 들어 있었다. 이후 발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예술로 자리 잡았다.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백조의 호수’



    ‘춤추다’는 뜻의 발레 … 피렌체에서 시작

    발레는 프랑스에서 왕실의 주요 공연으로 발돋움했고,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른 세력으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공연 장르로 변모해나갔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위엄을 드높이고 과시하기 위해 발레 학교를 창설하고 직업적인 무용수를 양성했지만, 이런 일은 결과적으로 발레의 성격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발레의 성격이 궁전에서 왕실과 소수의 명문귀족만을 위한 공연에서 일반 대중도 즐기는 공연으로 바뀌었고, 작품 소재가 다양해졌으며, 여자무용수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또 대중 유료관객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고도의 기술적인 동작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발레 대중화’ 과정을 밟고 있던 프랑스 발레에 커다란 타격을 가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혁명파의 공포정치 기간에 발레는 봉건귀족 문화로 간주되어 공연을 금지당했고, 무용수들은 ‘귀족에 동조해 서민들로부터 착취한 세금을 낭비하는 자들’로 규정됐다. 그래서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은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공포정치가 물러간 후 발레에 대한 탄압은 없어졌지만 프랑스 발레가 누리던 예전의 영화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는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정반대에 위치하고 기후, 종교, 문화 등이 너무나 다른 나라였다. 제도와 관습뿐만 아니라 국민의식에서도 폐쇄된 중세의 농경사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던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서구화 개혁으로 변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귀족들과 지식인 사회에는 서유럽의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는 풍조가 생겼고, 서유럽의 지식인, 예술인들은 러시아에서 환대를 받았다.

    프랑스어는 러시아 귀족사회의 필수 언어가 되었고, 귀족들의 집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두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많은 무용수가 러시아로 이주했고 그 결과 러시아 발레는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러시아 발레는 무용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했지만, 음악은 양상이 사뭇 달랐다.

    러시아는 외국의 유명 작곡가에게는 몹시 관대했지만 자국의 작곡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러시아 작곡가들과 러시아의 전통 멜로디를 천시하는 경향이 상류층을 지배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민족음악 5인조’라고 일컬어지는 5명의 러시아 작곡가(보로딘, 쿠이, 발라키레프, 무소르크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하나같이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또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형성된 서유럽식 가치관과 민족주의 배척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5인조의 출신과 직업을 보면, 발라키레프는 권위 있는 수학자였으며, 보로딘은 탁월한 화학 교수였다. 그리고 무소르크스키는 육군 장교이자 공무원이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 장교였다. 이렇듯 민족음악 5인조는 모두 음악과는 관련이 없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러시아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와 원리를 계승, 발전시키길 열망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개혁으로 발전한 발레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

    그래서 그들은 서유럽적인 음악기법을 교육하는 음악 정규교육기관을 최초로 설립한 유대인이자 전설적인 연주자였던 루빈슈타인 형제(안톤 루빈슈타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를 비난하는 동시에, 그 형제가 설립한 모스크바 국립음악원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을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루빈슈타인 형제가 세운 음악원에서 서구식 음악교육을 받은 차이코프스키는 행운아였다. 러시아 음악을 유럽 전통음악과 결합시키면서 러시아 민족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차이코프스키는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민족주의 5인조와는 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비난의 화살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우랄산맥 서부의 광산촌인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감독관을 하는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여섯 형제와 함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몹시 예민하면서도 다정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닌 아이였던 그는 오케스트리온(Orchestrion)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귀를 틔웠다. 오케스트리온은 사람의 손길 없이 미리 입력된 기계적 장치에 따라 자동으로 연주되는 악기로, 뚜껑을 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도 오케스트리온의 하나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서는 생계를 꾸리기조차 힘든 당시 현실에서 그가 전문적인 음악가로 대성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10세 때 엄격한 훈육으로 유명한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앞길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부에 직장을 얻어 생활인이 되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자비한 제국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영혼은 음악에서 위안을 얻었다. 견딜 수 없는 예민함을 가졌던 그는 결국 흡연, 음주, 동성애를 통해 탈출구를 찾았다. 특히 18세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차이코프스키는 상실감에 빠지면서 더욱 내성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는 조울증에 가까울 정도로, 우울함과 명랑함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되었다. 당시의 차이코프스키는 표면적으로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음악에 대한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곡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차이코프스키 역시 좋은 직장을 박차고 나와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23세의 나이로 러시아에서 최초로 설립된 정규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가 학창시절에 작곡한 작품은 학생 수준으로는 뛰어났지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가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졸업과 함께 지휘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원장의 동생이 신설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채용된다. 현재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은 그의 이름을 딴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의 음악원 교수 자리는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지만 먹여 살려야 할 식솔이 없었던 그는 생계 걱정 없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시절 그는 운명의 장난처럼 너무나 상반된 영향을 끼칠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14년간 편지로만 주고받은 사랑,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와의 독특한 사랑이야기로 많은 TV 프로그램과 영화, 책에 소개된 네데즈다 폰 메크(1831~1894)부인은 철도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업가의 미망인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있었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도 접하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소품과 편곡을 의뢰하면서 짧은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고, 이내 큰 후원금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는 절대 만나지는 말고 서신 왕래만 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서로 모른 척 지나치는 관계를 지속하며 14년 동안 1100통이 넘는 서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평생 가장 친밀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다른 한 인물은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그에게서 화성법 강의를 들은 안토니나 밀류코바(1848~1917)다. 그는 처음부터 다정하고 상냥하며 열정적인 편지를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둘은 공식적인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바르샤바에서 바리톤 가수와 사랑에 빠져 그를 배신한 벨기에 출신 메조소프라노 데지레 아르토(1835~1907)와 헤어진 이후 이성교제를 하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아는 주변 인물들은 그의 독신생활을 당연시했다. 그 때문에 37세의 차이코프스키는 어린 제자에게 호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결혼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열렬한 구애와 함께 협박성의 문구까지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제자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불과 며칠 만에 끔직한 악몽이 되고 말았다. 그의 결혼 생활은 모든 면에서 서로 맞지 않는 안토니나에게 짜증을 내고 경멸하다가 마침내 증오하며 시작됐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이미 파국을 예견하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가 결혼 2개월 만에 파경을 맞고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며 장문의 신세한탄 편지를 보내자, 폰 메크 부인은 당시 고급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많은 월 6000루블의 지원을 해주었다. 이 시점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매사에 완벽하고 꼼꼼한 폰 메크 부인이 파산 위기를 겪으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파산은 하지 않았지만, 그 충격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손에 통증이 너무 심해져 편지를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편지 왕래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역사상 가장 로맨틱하면서도 특이한 러브스토리는 허무하게도 식어버린다. 1890년 어느 날 폰 메크 부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편지와 함께 돌연 침묵에 들어가버린 것. 여전히 부유했던 폰 메크 부인이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동성애자와 교유하는 것을 반대한 가족들과 부딪쳐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영감(靈感)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인 문제는 이미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의 정신 상태는 그렇지 못했던 까닭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와 음악적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모두 허사가 되면서 두고두고 세간의 화제로 남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의 특별한 사랑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한 2개월 뒤 그 또한 지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슬픈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안토니나와 차이코프스키의 관계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안토니나는 결혼 초기에 차이코프스키의 극심한 짜증에도 더욱 행복한 표정과 말투로 사랑스럽게 행동해 차이코프스키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또 별거에 들어간 후에도 안토니나는 끝까지 차이코프스키 부인으로 남기를 원한다며 법적으로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그녀의 동의 없이 이혼문제로 법정에 서게 되면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연애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에 이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는 평생 안토니나를 증오하며 살았고, 그녀 또한 일종의 편집증을 보이며 차이코프스키가 새로 이사한 집의 윗집으로 이사를 하는 식으로 괴롭혔다. 안토니나는 차이코프스키보다 아홉 살 어리고 24년이나 더 살았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도 무척 불행했다. 3명의 사생아를 출산했으나, 당시 사회적 통념상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야 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조로(早老)와 두 여인 동성애 속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 음악


    지독한 사랑, 안토니나

    우리에게 익숙한 차이코프스키 사진은 노년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수염이 가득하고 주름이 자글거리는 사진 속 차이코프스키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는 차이코프스키가 장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코프스키는 40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머리가 백발로 변하고 시력이 나빠졌으며, 치아도 빠지기 시작했다. 음식물 섭취뿐만 아니라 발음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 이런 그의 모습 때문에 미국 순회공연 당시 50세의 차이코프스키를 ‘뉴욕 헤럴드’는 60대 노인이라고 썼다. 그가 40대에 갑자기 늙어버린 것은 우울증과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부인과의 불화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동성연애에 대한 집착,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쌓아올린 모든 명성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동성애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집착과 불안이 그를 조로(早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1893년 53세의 나이로 교향곡 제6번 ‘비창’이 초연된 지 몇 주 후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황제가 주관한 그의 장례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성당에서 6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거리에서는 6만여 명의 군중이 그를 애도하며 장례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는 만년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 등 국제적인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세계의 뉴스가 되었다. 그의 공식적인 사인인 콜레라가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그의 사생활이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다.

    차이코프스키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조카에 대한 사랑과 연결시킨다. 그는 유독 조카인 밥 다비도프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았는데, 이것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밥에 대한 동성애를 의심하는 누군가가 차이코프스키를 고발하는 문건을 황제에게 전했고, 법률학교 동급생인 친구가 차이코프스키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음악이 많은 사람의 환호를 받으며 정점에 있을 때 떠나기로 결정하고 콜레라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죽음을 둘러싼 논란

    이와 같은 ‘자살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당시 러시아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파리처럼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엄격한 제재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반인뿐만 아니라 일부 고위층에서도 암암리에 동성애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평소 깔끔한 성격의 그가 자살 방식으로 설사와 구토가 지속되는 콜레라를 선택했다는 것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논리를 들어 ‘자살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이 세간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컸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인 것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면서 세계를 향해 러시아 음악의 우수성을 보여준 차이코프스키였다. 서양음악에 민족정서를 가미한 러시아 고전주의를 완성한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차르 체제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은 그가 타락한 반동분자이며 서구화된 작곡가라고 비판하고, 그의 음악을 노동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1940년(차이코프스키 탄생 100주년)까지 금지했다. 그러다가 전 노동자를 아우르는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과 발레 육성정책으로 그를 더 이상 비난할 수 없게 되자 슬그머니 그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 러시아 민족의 국민음악을 새로이 정립해서일까? 어쨌든, 어둡지만 화려하고 밝지만 우울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대한 러시아 민족의 사랑은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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