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호

흑인 인권 투쟁가에서 백인국 자유시민으로

  • 안병찬│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 ann-bc@daum.net

    입력2012-01-19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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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킨슨병에 걸린 알리. 평생 흑인의 정체성과 인권을 위해 싸워온 그는 이제 인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세계의 영웅으로 거듭난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점화하고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하고 백악관에서 ‘대통령 자유메달’을 받는다. 2002년 알리의 피에 아일랜드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제7장 / 파킨슨병과 어린이의 꿈

    1. 영웅에게 닥친 불치병

    흑인 인권 투쟁가에서 백인국 자유시민으로
    무하마드 알리는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점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알리가 입은 흰색 체육복은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횃불 든 손을 뻗어 점화할 때 그의 손이 파킨슨병으로 떨리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알리가 파킨슨병 확진을 받고 10년이 지난 때였다.

    일찍이 알리는 ‘백인전용’ 식당의 인종차별에 격분해 올림픽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물에 던져버리고, 흑인의 정체성을 위해 온몸을 던져 ‘알리의 1인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냉전체제 속에서 반쪽짜리 올림픽 행사를 주관하게 된 미국 정부는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에게 올림픽 금메달의 모사품을 만들어 증정하며 유화책을 편다.

    미국 주류 언론은 알리가 스포츠 세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 사람들이 알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준다고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 사연으로 알리가 성화대에 점화하는 장면은 역설적이었다. 흑인의 정체성을 찾아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온 알리가 이제는 미국의 정치와 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주류세력과 타협하고 인도적인 사업에 눈을 돌리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 한국 사진작가 김명중이 본 알리 /

    근년에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알리를 가까이서 본 사람은 알리의 전담 사진작가이던 김명중이다. 김명중에 따르면 알리는 한 마디 한 마디 떼어서 겨우 말을 하고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얼굴 근육은 굳어져서 탈을 쓴 것처럼 표정이 없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지만 눈빛이 살아 있고 정신이 맑다고 했다.

    권투를 하다가 큰 주먹을 맞으면 충격 때문에 휘청댄다. 미국 사람들은 이것을 ‘펀치 드렁크’라고 말한다. 강타를 당해 술에 취한 듯 비틀댄다는 뜻인데 흔들흔들하는 ‘그로기’ 상태와 뜻이 비슷하다.

    알리가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은 것은 1984년이다. 파킨슨병은 뇌 신경계의 만성 퇴행성 질환으로 안정 떨림, 경직, 자세불안이 증세의 특징이다. 알리는 헤비급 선수로 수없이 싸우면서 머리가 가공할 살인 펀치에 수없이 노출되어 누적된 펀치 드렁크가 그의 뇌 신경계를 병들게 했을 것이다. 파킨슨 진단을 받은 알리는 의연하게 처신하며 꾸준히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 부인 로니의 간병 /

    알리의 네 번째 부인인 로니 알리는 파킨슨병 환자와 보호자 두 사람이 좋은 삶을 살자면 질병이 주는 스트레스를 인내하는 길뿐이라고 말한다. 21년 전 알리가 막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녀는 지체 없이 알리를 간병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파킨슨병은 행동을 제어하는 두뇌세포가 기능을 정지하는 진행성 중추신경계의 질환이다. 이 병은 떨림·근육 경직·동작 퇴행·자세 불안정·보행 곤란 등의 증세를 보인다. 처음에 무하마드 알리는 그의 몸이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2. 무하마드 알리 센터

    2004년 2월 알리는 단일 이벤트로는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미국 프로풋볼(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 경기장에 등장해서 ‘미래는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해 여름에는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다.

    2005년 11월 9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무하마드 알리에게 민간인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주고 포옹했다. 알리의 부인 로니 알리가 옆에서 지켜봤다. 부시는 9·1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이슬람 국가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차례로 침공한 주역이므로 ‘이슬람 민족’을 신봉하는 무하마드 알리에게 최고 훈장을 주는 것은 운명의 장난 같기도 했다. 그해 알리의 나이 63세였다.

    2005년 11월 19일 건축비 8000만 달러를 들인 ‘무하마드 알리 센터’가 알리의 고향 루이빌의 오하이오 강변에 문을 열었다. 연면적 8988㎡의 6층 건물은 기념관, 문화관, 전시실, 권투 링, 타원형극장, 광장으로 이루어졌다. 뒤이어 2006년에는 알리의 이름과 문화적인 유산을 지속해서 함양한다는 취지로 ‘무하마드 알리 기업’이 설립됐다.

    로니 인터뷰

    다음은 로니 알리가 의료전문 자유기고가인 신시아 람나라스와 인터뷰(온라인 건강진단 정보망인 ‘에브리데이 헬스’ 2007년 게재)한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문 : 간병인으로서 하루는 어떤가?

    답 : 매일 24시간을 돌보는 문제이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하루다. 설사 잠시 쉬는 시간이 나도 환자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가 별일 없는가. 그가 예정대로 약을 먹고 하루를 뜻있게 활동하는가. 이런 것을 살피며 하루 단위로 삶에 의미를 준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문 : 보호자 한 사람이 환자의 육체적 치료뿐 아니라 삶의 질에 책임을 지므로 너무 어깨가 무거운 일이 아닌가?

    답 : 그래서 파킨슨병 간병인은 경험담을 듣거나 충고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적 수단이 필요하다.

    문 : 당신은 자책감이 드는 일을 한 적은 없는가?

    답 : 나는 진심으로 남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던 알 바가 아니다. 자기들은 남을 돌보지도 않으면서 이러쿵저러쿵 판정하려 드는 것이 가장 해로운 일이다.

    문 : 진이 빠지는 것을 어떻게 피하는가?

    답 : 많은 계획을 짠다.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난 적이 없다. 남편이 나와 같이 있기를 좋아하므로 나도 남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좋다. 주말에도 무하마드와 단둘이 있다. 볼일이 있으면 그도 함께 간다. 그는 채소상점에 가고 카트를 미는 것을 좋아하지만 계산대를 나가기 전에 과자를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런 일은 무하마드에게 하나의 모험이므로 즐긴다. 그를 보고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챔프! 어떠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생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인생은 삶이다. 그는 삶을 즐긴다.

    문 : 파킨슨병이 무하마드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답 : 파킨슨병은 퇴행성 신경장애 병이다. 신의 뜻으로 새로운 치료법이나 수술방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갈수록 악화한다. 우리는 정말 행운이다. 무하마드의 파킨슨병은 진행 속도가 대단히 늦다. 그의 건강 상태는 썩 좋다. 문제는 무하마드의 목 부위 척추의 협착증이다. 그래서 오늘 보행보조기를 썼다. 2년 전에 수술을 받았다.

    문 : 파킨슨병이 무하마드의 의사소통에 주는 영향은?

    답 : 말에 문제가 있다. 몸의 상태는 늦은 저녁보다는 아침이 좋다. 약을 섭취할수록 말하는 데 장애가 된다.


    알리 센터에서 눈을 끄는 것의 하나는 5층 전시관 벽을 메운 길이 16m, 높이 3m의 대형 미술 설치작품 ‘희망과 꿈’(원제 Hope · Dream)이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설치미술가 강익중의 작품이다. 세계 141개국 어린이들이 장래의 꿈을 담아 그린 그림 5000여 점을 타일로 구어서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비둘기가 지구를 안고 날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의 그림도 있고, 유전 위로 무지개가 떠오른 이라크 어린이의 그림도 있다. 그 옆에 있는 미국 어린이 그림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1960년생인 강익중은 1984년부터 뉴욕에 머물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1994년에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백남준과 2인전을 열고 1997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작가다. 그는 어린이들의 꿈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해’10만의 꿈’(1999년 파주), ‘놀라운 세상’(원제 Amazed World·2001년 유엔본부), ‘꿈의 달’(2004년 일산호수공원)을 설치했다.

    강익중은 알리 센터 개관식 축하연설에서 “아이들의 꿈은 그동안 우리를 갈라놓은 편견과 반목의 벽을 허무는 마법의 힘을 가졌다. 아이들의 꿈은 국적, 인종, 종교가 다르더라도 때 묻지 않고 얼마나 순수한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필자는 강익중 화백에게 어떻게 알리 센터에 ‘희망과 꿈’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경과를 알려주기 바란다고 e메일로 물었다. 얼마 후에 그에게서 친절한 답신이 도착했다.

    일주일 사이 출장이 두 번 겹쳐 이제야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알리 씨는 내가 2001년 유엔에 설치한 작품 ‘놀라운 세상’을 계기로 만났습니다. 유엔 평화대사이기도 한 알리 씨는 유엔을 찾을 때마다 로비에 설치된 아이들의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알리 씨는 내게 측근을 보내 루이빌 고향에 세워질 자신의 기념관을 아이들의 꿈으로 채워달라고 부탁해왔습니다. 나는 전 세계 아이들의 꿈이 담긴 작품 5000점과 그 아이들이 자기 말로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작품을 완성해 무하마드 알리 센터의 개관 기념 작품으로 설치했습니다.

    기념관을 열던 날에는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수천 명이나 되는 무하마드 알리의 친구들이 모여들어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주최 측은 알리 씨와 특별히 인연이 깊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비비 킹 등은 따로 무대에서 소개했습니다. 저도 무대 위에 올라가 알리 씨의 친구들에게 그동안 제가 해온 어린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유엔본부에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으로 채워진 희망의 벽을 세워 개막한 날이 2001년 9월 11일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뉴욕 다운타운의 세계무역센터는 테러로 무너졌습니다. 유엔은 두 달간 잠정 휴관했으나 ‘놀라운 세상’은 2002년 12월까지 전시됐습니다.

    공공미술은 세상을 바꾸는 ‘명랑한 혁명’입니다. 예술에도 학파가 있다면 내가 속한 학파는 명랑학파일 것입니다. 공공미술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은 신명이 나고 재미있는 일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데, 이는 커뮤니티와의 소통, 재료에 대한 이해, 사회적인 책임이 따르는 미술이기 때문입니다.

    보내주신 따뜻한 메일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익중 드림

    / 알리와 어린이 /

    아이들의 그림은 작은 창문이다. 멀리 서 있으면 큰 창문도 아무 소용없지만 아이들이 웃고 노는 작은 창은 모든 게 다 보인다. 아이들의 생각은 작은 꽃씨다. 가벼워 높이 오르고 자유로워 어디든 돌아다닌다.

    이런 강익중의 상상력이 알리의 영감에 가 닿았던 모양이다. 알리 센터를 장식한 강익중의 설치미술은 어린이의 마음을 통해 평화와 꿈을 형상화했으므로 알리가 실천하려는 인도주의적 사업과 딱 들어맞았다.

    알리는 어린이를 사랑한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다. 그는 ‘정글의 혈전’을 벌이기 위해 킨샤사로 떠나던 날 뉴욕 공항에서 기자들을 만났는데, 그때도 어린이에 관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알리 : 세계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으러 자이르로 가는 길이오.

    기자 : 챔피언,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죠.

    알리 : 영어를 쓰는 미국 어린이들한테 말하겠어요. 마약을 멀리하고 건전한 생활을 하라고. 그러면 나처럼 될 수 있는 거지. 마약을 하면 나라를 망치는 짓이 돼요. 지금 조지 포먼을 꺾으러 가는데 곧 그 광경을 보게 될 거요.

    참, 어린이들한테 사탕을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 해야겠군. 난 충치가 세 개였는데 하나를 뽑아야 했거든. 그래서 씹는 것이 전 같지 않아요. 하나는 오른쪽 여기에, 또 하나는 여기 있지. 자연식을 섭취해야 충치를 이기지.

    알리는 1976년 5월 말에 40명의 수행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일본 도쿄에서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와 만나 프로복싱과 프로레슬링의 이색 대결을 벌였으나 경기는 졸전의 무승부로 끝난 뒤였다.

    5월 27일 국기원을 방문한 무하마드 알리에게 김운용 국기원장(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은 명예태권도 단증과 하얀 태권도복을 주었다. 알리는 그때도 어린이를 만났다. 남대문초등학교를 방문해서 어린이 선수들의 태권도 시범경기를 넋이 나간 표정으로 관람했다. 시범이 끝나자 알리는 어린이 선수들에게 기립 박수를 보내고 어린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김운용 국기원장은 최근 기고문에서 “그때 알리가 어린이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내던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 여섯 가지 가치 /

    무하마드 알리는 특히 관용과 이해를 강조한다. 이제 기아와 빈곤을 구제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일이 그의 목표가 됐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의 종교인 이슬람을 탐구한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서 그는 세계를 여행하며 빈곤한 어린이에게 손을 뻗치고 기아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돕는 사업을 펴고 있다. 무하마드 알리는 인간을 사랑하고 이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알리 센터는 알리가 1년에 200일 이상을 여행하며 그간 줄잡아 2200만 명분의 음식을 지원했다고 말한다. 어떤 미국 인명록은 알리를 ‘박애가’ 또는 ‘자선가’로 분류한다. ‘무하마드 알리 센터’는 알리의 인도주의적 가치를 신뢰·정신·존경·믿음·헌신·나눔의 여섯 가지로 내걸고 이를 ‘알리 어록’으로 설명하고 있다.

    신뢰 :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믿지 못한 채 얘기하게 한 적이 없다.”

    정신 : “강·연못·호수·시냇물은 모두 다른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모두 같은 물을 담고 있다. 물은 곧 정신이다. 종교들이 모두 정신을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존경 : “나는 새 사람을 만날 때 인종이나 종교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의 내면을 본다. 우리는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서로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신념 : “나는 언제나 나의 믿음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행한다.”

    헌신 :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챔피언은 그들 내면 깊숙이 들어있는 욕망·꿈·통찰로 헌신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나눔 : “남에게 봉사하는 일은 지구에 살면서 주택 임대료를 내는 것이다.”

    /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헌사 /

    라마단은 이슬람 최대 휴일이다. 이슬람교도는 천사 가브리엘이 무하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 라마단 기간에 단식하고 기도한다. 2009년 9월 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라마단을 축하해서 백악관에 내외 인사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이슬람교도에게 특별 메시지를 보냈다. 백악관의 라마단 행사는 아랍과 전쟁을 벌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이슬람 세계를 의식해서 시작한 것이다. 알리도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축하연에 초청을 받았으나 다른 사정으로 불참했다. 오바마는 연설하면서 알리를 거명했다.

    ……물론, 아메리카를 고무한 체육인들을 거명하자면 ‘가장 위대한 자’로 불리는 인물이 명단에 포함될 것입니다. 오늘 밤 무하마드 알리는 우리와 동석하지 못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그의 뚜렷한 기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링 위의 투사로 상대가 없었으며 자기가 믿는 바에 따라 부단히 투쟁하면서 높은 위엄과 기품을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신조를 가진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자세입니다.

    몇 년 전에 알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강·연못·호수·시냇물은 모두 다른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모두 물을 담고 있다. 종교들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다.”

    종교는 모두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진실 가운데는 평화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3. 아일랜드 조부의 피

    알리의 혈통에 아일랜드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진 것은 2002년이다. 그해 2월 9일 영국 BBC방송(영국방송협회)은 ‘알리는 아일랜드 조상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헤비급 권투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아일랜드 뿌리를 가졌다고 가계연구자들이 밝혔습니다. 알리는 18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한 아일랜드인의 후손입니다. 가계학자들은 에이브 그래디라는 사람이 켄터키에 정착한 후 아프리칸-아메리칸(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인과 결혼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궁극적으로 알리는 이 결합의 후손입니다…….

    알리에게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니, 그토록 온몸으로 흑인성을 위해 진력한 그에게 운명이 얄궂은 장난을 하는 것만 같다. 당초 아일랜드 텔레비전 방송국은 이런 사실을 전문기관에 조사를 의뢰해서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기록을 뒤져본 아일랜드 클레어 주의 상속센터 소속 가계학자 안트와넷 오브라이언은 알리의 고조부가 되는 존 그래디가 1855년에 에니스 마을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당시 가격 15실링에 임차한 기록도 나왔다고 밝혔다.

    존 그래디의 아들 에이브 그래디가 태어난 것은 1860년께로 여겨진다. 에이브 그래디는 미국 켄터키로 이민한 후 노예에서 해방된 여인과 결혼했으며 그들의 아들도 흑인과 결혼했다. 이어서 손녀인 오데사 그래디 클레이는 캐시어스 클레이 시니어와 결혼해서 1942년에 알리를 낳았다.

    가계학자 안트와넷 오브라이언은 “에이브 그래디는 알리의 증조부임에 틀림없으나 알리가 이것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BBC방송은 미국 뉴저지에 있는 알리의 홍보담당자 질 시겔에게 문의한바, 알리는 이미 자기 선조가 아일랜드 사람임을 알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 환호하는 백인국 /

    아일랜드 소도시 에니스 시는 ‘세계적인 영웅’ 알리가 이 고장에 혈통적인 연고가 있음을 알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시의회 의장인 마이클 콜레이는 “우리는 20세기의 영웅 알리와의 연고를 명예롭게 생각한다. 여기에 초청하고 싶다”고 크게 반겼다.

    아일랜드가 유난스럽게 미국에 친근감을 드러내고 알리를 환영하는 이유는 알 만하다. 미국에는 아일랜드 이민이 유난히 많다. 미국 언론은 미국 역대 대통령 44명 중 17명이 아일랜드 핏줄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케네디와 로널드 레이건이 그렇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계도 아일랜드 오팔리 주의 부유한 제화공(1794~1861) 집안으로 알려졌다. 오바마는 상원시절부터 유독 챔피언 알리를 좋아해서 그의 집무실 책상머리에는 알리가 프레이저를 넉 아웃시킨 유명한 장면의 사진을 걸어놓은 정도였다.

    알리의 아일랜드 혈통이 밝혀지고 6년이 지난 2009년 8월 말, 파킨슨병 중환자인 67세의 무하마드 알리는 뿌리를 찾아서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인 아일랜드 이니스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알리에게 백인의 피가 4분의 1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반전이다. 알리는 미국에서 설움 받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싸워왔고 아프리카에서 흑인 정체성의 본 뿌리를 찾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투챔피언의 삶만이 아니라 흑인을 철저히 사랑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세기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알리가 아일랜드를 찾아서 혈통의 뿌리를 찾는 감상 여행을 하다니 인생 후반기에 역설적인 운명을 관조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알리가 도착하는 날, 몇 주일 동안 퍼붓던 아일랜드의 줄기찬 장마가 청명하게 갰다. 알리의 먼 사촌뻘 되는 백인 이멜다 오 그래디는 섀넌 비행장에서 알리를 맞아 포옹한 후에 “봐요, 태양이 나왔어요. 햇빛이 알리한테 비쳐요” 하고 인사했다. 이니스 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거리에 깃발을 내걸고 상가 점포마다 진열장에 알리의 포스터를 다투어 전시했다. 학교는 수업을 단축하고 학생들을 조퇴시켰다. 연도에는 시민 수천 명이 나와서 알리의 자동차 행렬을 환영했다. 알리가 다소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자 광장에 운집한 관중은 큰 환성을 터뜨렸다.

    / 백인국 자유시민 되다 /

    프랭키 네일론 시장은 알리에게 클레어 주에서 갖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자유시민증’을 주면서 “최고의 특권은 공짜 주차권이다”라고 농담을 건넸다. 시장은 또 ‘알리-그래디 혈통서’의 두루마리를 선물했다.

    현지 언론은 알리의 부인 욜란다 로니 알리의 말을 인용했다.

    “알리의 증조부가 살아 계셨다면 알리의 투사다운 기질과 수다 벽은 자기를 닮았다고 말하실 거예요. 아일랜드 목로주점에 가서 그렇게 자랑삼아 떠드실 거예요.”

    알리는 그래디 일가의 친척들을 만나고 최고급 호텔 드로모랜드 캐슬의 기부금 모금 행사에 참석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영국과 미국 언론은 알리의 아일랜드 여행을 뿌리를 찾는 ‘감상여행’이라고 보도했다.

    8월 말부터 9월 3일까지 일주일간 알리가 감상여행을 하는 동안 카메라로 밀착취재를 한 사람은 한국의 젊은 사진작가 김명중이다. 런던에서 활동하며 이름이 알려진 김명중은 알리 재단의 연락을 받고 이번 행사에 전담 사진작가로 참가했다. 그는 공식 행사와 알리의 여러 모습을 사진에 담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알리 어록

    - 복싱은 두 흑인이 서로 치고 맞는 것을 수많은 백인이 관람하는 것이다.

    -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미워한다면 어떤 색을 미워하든 정말 나쁘다.

    - 나이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달렸다.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나이가 든다.

    - 우정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다르다.

    그렇지만 우정의 의미를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 나는 권투의 우주비행사다. 조 루이스와 뎀프시는 제트기 조종사다.

    나는 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위대함을 알기 전부터 이 말을 했다.

    - 나는 훈련의 매분을 혐오하지만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멈추지마. 지금 고통을 감내하면 인생의 나머지를 챔프로 산다.”

    - 나는 내가 갈 바를 알고 진실을 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인간이 될 필요가 없다.

    나는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인간이 되겠다.

    - 나는 패배를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패배했다.

    지금 할 일은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패배를 겪는다.

    - 나는 그를 너무 흠씬 두들겨 패서 그가 모자를 쓰려면 구둣주걱이 필요할 것이다.

    -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곱빼기로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상대를 넉 아웃시킬 뿐 아니라 라운드째 뿌리를 뽑아낼 것이다.

    - 당신들이 나를 때리고 싶은 꿈이 있거든 먼저 각성하고 사과하라.

    - 당신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올라가야 할 눈앞의 산이 아니라 구두 속의 자갈이다.

    - 풀이 자라고 새들이 날고 물결이 모래를 치듯이 나는 사람들을 고무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 사람들이 도전을 겁내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다. 나는 나를 믿는다.

    - 반복해서 단언하면 믿음에 이른다. 믿음이 깊은 신념으로 바뀌면 해야 할 일이 생긴다.

    - 인생은 도박이다. 부상할 수도 있고 비행기 추락으로 죽거나 자동차 사고로 팔다리를 잃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매일 죽어간다. 투사도 같다.

    죽고 다치고 살아서 싸운다. 이런 일이 당신한테 일어난다고 믿지 않아야 한다.

    - 내가 농담하는 법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

    - 늙은 나이는 단지 한 사람의 전 인생의 기록이다.

    - 패배를 당한 것이 뭣인지 아는 사람만이 자기 영혼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경기에 이길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얻어 떠오를 수 있다.

    - 좋은 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침묵이 금이다.

    -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날개가 없다.

    - 세상에는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보다 기쁜 일이 많이 있다.

    - 국가 간의 전쟁은 지도를 바꾸려는 것이다.

    빈곤의 전쟁은 바뀐 지도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은 단 한 번이다. 곧 과거사가 된다. 신을 위해 행한다면 모든 것은 지속한다.


    나가며

    / 알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

    2011년 11월 7일 미국 헤비급 복서인 조 프레이저가 67세에 간암으로 죽었다. 그의 전적은 32승 27케이오(KO) 4패 1무다. 프레이저는 무하마드 알리와 세 번 대결한 전설의 챔피언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대결은 ‘마닐라의 전율(스릴러 인 마닐라)’이다. 알리는 경기 시작부터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인파이팅의 복서 프레이저에게 3전 2승 1패의 전적을 거두어 한발 앞섰다.

    알리는 조 프레이저의 부음에 접하자 “세상이 위대한 챔피언을 잃었다. 나는 존경하는 그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추모했다. 파킨슨병 중증인 알리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 누구와 싸우고 싶나?”하는 질문을 받자 “조 프레이저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미국의 시사지‘타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가 캐시어스 엑스(x)와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두 번 바꾸면서 중앙 무대의 조명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지적한 일이 있다. 이 시사지는 그가 걸어온 역정을 시간대에 따라서 ‘올림픽 금메달 수상-루이빌의 떠버리-건방진 챔피언-흑인 무슬림 개종-징집거부-증오-순교-챔피언 재탈환 로드쇼로 이어진다고 썼다.

    이런 관점은 다분히 백인 주류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튼 알리의 파란 많은 역정을 잘 짚어낸 면이 있다. 무하마드 알리를 평가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철저한 이슬람교도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잊으면 그의 진면목을 놓치기 쉽다.

    / 사탄과 싸우는 마술가 /

    미국 이슬람계 인터넷 통신인 ‘사운드비전’(Sound Vision.com)은 무하마드 알리를 인터뷰(2003년 3월 31일자)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를 보면 알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알라를 믿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인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인터뷰할 당시 알리는 미국 갱 두목 알 카포네의 농장이던 시카고 교외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파킨슨병으로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의사소통이 여의치 않아 부인 로니 알리와 유명한 사진작가인 친구 하워드 빙엄의 도움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인터뷰는 매우 예리하게 알리의 마음을 캐고 들어간다. 짧은 시간에 이만큼 알리의 일생과 현재 심정, 그리고 알리의 선택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매우 뛰어난 저널리즘 탐구의 솜씨라고 평가한다. 이 인터뷰가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 알리가 자기 감각과 의지를 탁월하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알리 인터뷰

    질문: 당신은 항상 자신에 대한 최고의 확신으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자처한다. 이런 자기 확신은 이슬람교가 강조하는 겸양의 미덕과 상충하지 않는가?

    알리: 알라는 가장 위대하다. 나는 다만 가장 위대한 복서일 뿐이다.

    질문: 올림픽 성화대에 점화한 유일한 무슬림이라는 것이 당신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알리: 무슬림으로서 올림픽에서 점화한 일이 이슬람교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행복하다.

    질문: 당신이 이슬람에 온 것이 마이크 타이슨(전 세계헤비급권투선수권자)과 카린 압둘 자바(미국 농구연맹전 역대 최다득점왕)가 들어오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가?

    알리: 오직 알라만이 안다.

    질문: 당신이 무하마드 알리라고 이름을 바꾸자 모든 스포츠 작가와 기자가 무하마드 알리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당신의 기독교도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로 부르지 않았나?

    알리 : 난 그들을 두들겨 패줬다. (알리는 장난스럽게 주먹을 휘두르고 소리친다.) 내 이름이 뭔데? 내 이름이 뭔데? 하고.

    질문 : 당신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슬람의 기도가 어떤 도움이 됐는가?

    알리 : 기도는 나를 강하게 만든다.

    질문 : 당신은 베트남전쟁에 징집당하는 것을 거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았다. 당국은 선수권을 박탈하고 여권을 몰수하고 3년 반 동안 권투시합을 금지했다. 어떻게 견뎠는가?

    알리 : 모두 알라를 위해 행동했다.

    부인 로니: 무하마드는 악감정이 없다. 그는 모든 인생의 장애를 오직 알라의 이름으로 이겨내왔다.

    질문 : 켄 노턴과의 대전에서 턱이 깨졌는데도 12회전을 모두 싸웠다. 소니 리스턴과 싸울 때는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는데 싸워서 이겼다. 어떻게 그렇게 극복했나?

    알리 : (이슬람식 기도를 해보이며) 기도했다.

    질문 : 지금 누구와 싸우고 싶나?

    알리 : 조 프레이저다.

    질문 : 아, 알리-프레이저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 그런가?

    이때 무하마드 알리는 잠시 잠에 떨어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는 병들어서 쉽게 지친다. 환각 속에 잠든 가운데 그는 프레이저에게 펀치를 휘둘렀다.

    질문 : 타이슨도 무슬림인데 대결하면 이길 수 있나?

    알리 : 쉽게. 한 라운드도 못가서 녹 아웃시킨다.

    질문 : 당신은 어떻게 성공에 대처하는가?

    알리 : 알라에게 감사한다.

    질문 : 링에서 패배하고 인생에서 패배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알리 :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알라에게 맡겼다.

    질문 :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

    알리 : 첫 아내와의 이혼이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부인 로니: 왜 그랬는지 설명해야지 안 그러면 이해하지 못한다.

    알리 : 그녀는 믿음을 따르지 않았다.

    질문 : 당신은 세계헤비급선수권 3회, 선수권 방어 19회를 기록했다. 지금 목표는?

    알리 : 이슬람교 선전이다. 그것이 전부다.

    알리는 고향 루이빌에서 어린이를 위한 미술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목표를 위해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의미 있는 일을 한다.

    질문 :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나?

    알리 : 아니, 전혀 아니다.

    질문 : 당신은 아량이 넓다고 알려졌다. 모르는 사람을 도와서 돈을 쾌척한 일화가 수없이 많다. 부(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길바닥의 집 없는 사람에게 옷을 사주면 술을 사 마시기 십상 아닌가?

    알리 : 내 의도는 내 마음이 선해지자는 것이다.

    질문 :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

    알리 : 이슬람 가입이다.

    질문 : 되돌아간다면 무었을 하겠는가?

    알리 : 열 살에 무슬림이 될 것이다.

    질문 : 좋아하는 책은?

    알리 : 어리석은 질문을! 코란이다.

    질문 : 기호 식품은?

    알리 : 닭고기와 쌀밥. 무슬림 국가에 가면 양고기와 쌀밥이다. 아이스크림도.

    질문 : 좋아하는 색깔은?

    알리 : 검은색.

    질문 : 좋아하는 꽃은?

    알리 : 장미. 그보다는 알라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질문 : 어느 나라가 가장 좋은가?

    사진작가 하워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놀라웠다. 무슬림 7만 명이 알리를 보러 모였다.

    이렇게 인터뷰가 끝나고 취재진이 떠나려 할 때 알리가 손짓해 불렀다. 그는 주먹을 쥐고 손바닥 안으로 손수건을 틀어넣은 후 두 손바닥을 펴 보인다. 손수건이 사라졌다. 그는 오른손을 쥐고 천천히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손수건을 가짜 손가락에 감추어 속임수를 쓴다고 설명했다.

    “나는 사탄이 어떻게 인간을 속이는지 보여주려고 이 마술을 했다.”

    안병찬

    흑인 인권 투쟁가에서 백인국 자유시민으로
    경찰에 앞서 살인사건 2건을 해결해 이름을 날린 사건기자 출신. 한국일보 베트남 특파원 시절이던 1975년 남부 베트남 패망(베트남 통일)의 마지막 현장을 취재하고 탈출한 후 르포르타주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발간해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한국일보 주불특파원·논설위원을 거쳤고 시사저널 편집·발행인을 역임한 후 경원대 언론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민영통신 뉴시스의 고정칼럼 ‘기자 49년차―안병찬의 영상르포르타주’(http://www.newsis.com)를 집필하고 소셜뉴스 위키트리의 개인 데스크 ‘안병찬 기자 49년차’(http://www.wikitree.co.kr)를 운영하며 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문 발행인의 권력과 리더십’ 등 저서 1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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