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영화 ‘300’과 스파르타의 ‘쌩얼’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2-07-20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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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흔히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는 것을 일컬어 ‘스파르타(Sparta)식 교육’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 그 어디를 봐도 그에 대한 근거를 찾기 힘들다. 최근 식스팩 근육을 자랑하는 출연배우로 유명해진 영화 ‘300’도 마찬가지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싸운 테르모필레 전투가 그 배경이 됐지만, 역사적 기록과는 차이가 크다. 과연 영화처럼 스파르타인들은 이성적으로 완벽한 인간성을 가진 반면, 페르시아인들은 광포하고 미개한 종족이었을까. 그 베일을 벗긴다.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영화 ‘300’. 만일 ‘300’의 모티프가 기원전 480년경 페르시아와 싸운 테르모필레 전투가 아니라, 스파르타가 같은 도시국가 아르고스와 싸운 코미디 같은 전투에서 유래했다면 이 포스터의 카피는 어떻게 바뀔까?

    고개를 넘어 몇 필의 말이 달려온다. 스파르타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페르시아 사신. 사신은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의 왕 해골을 보여준다. 사신을 대면한 자리에서 있던 대화.

    왕비 : “속임수를 부렸다간 무사할 수 없다.”

    사신 : “대장부들 하는 말에 여자가 끼어들다니요.”

    왕비 : “스파르타의 여자들은 대장부를 키운다.”

    사신은 흙과 물을 원했다. 흙과 물은 곧 그 땅이다.



    사신 : “백성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잘 생각하십시오. 황제의 군사력은 막강해 거대한 군대가 움직이면 땅이 흔들리고 물을 들이켜면 강이 마릅니다.”

    왕 : “복종? 그건 좀 힘들겠다.”

    주변의 신하, 백성과 산천, 그리고 왕비의 얼굴을 보다가 이렇게 정리한다.

    “네놈들은 정복한 왕의 해골을 가져왔으며 내 백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왕비를 모욕했다.”

    그러곤 사신을 발로 차 거대한 우물 속에 빠뜨리면서 말한다.

    “이게 스파르타다!”

    설정

    마지막 스파르타 전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300’의 내용이다. 이 영화의 내레이터는 “걸음마를 배우는 순간부터 검술을 배웠다. 절대 물러서거나 항복해서는 안 되며 스파르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배웠다”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전사, 7세가 되면 엄마의 품을 떠나 아고게라 하는 성인식을 치른다. 스파르타의 왕은 자신의 아들과 씨름을 한 뒤 말한다.

    “스파르타의 힘은 옆에 있는 전사다. 그를 존경하고 명예를 지키면 너도 존경을 받는다.” 영화는 그 시대적 배경을 “병사와 말로 이루어진 맹수가 끈기와 자신감으로 먹이를 노리고 있는 때”로 상정한다.

    “노예들로 구성된 페르시아가 이성과 정의를 중시하는 작은 그리스를 노리고 있다.”

    야만의 페르시아와 문명의 그리스. 그리고 데자뷰. 지난번에 살펴본 중국의 ‘능지처참’에 대한 서구의 적반하장(賊反荷杖)식 인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낱말로 기억하는 바로 그 스파르타의 얘기다. 태릉선수촌의 선수들도 훈련이 힘들면 스파르타식 훈련이라고 상투적으로 말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또 그 어디에서도 스파르타식 교육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일러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게 오늘의 주제도 아니다.

    얘기를 진전시키기 전에 두 가지 전제를 말해둬야겠다. 첫째, 그리스나 로마같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나 여타 삶의 양식을 살펴보는 것은 본고의 관심이 아니다. 그중 아주 일부가 필자의 관심 속에서 검토될 것이다. 둘째, 영화 같이 역사적 사실을 허구화할 수 있는 장르에서 역사의 진실과 왜곡을 문제 삼는 것이 본고의 과제는 아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가 펼쳐 보이는 상상의 나래를 막을 수도 없거니와 또 그 장르들은 그 나름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연설

    ‘300’이란 영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스파르타 전사(戰士) 300명을 이끌고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내용이다. 식스팩 복근(腹筋)과 함께 기억되는, 아니 식스팩 복근 빼면 거의 기억할 것이 없는 영화인데, 꽤나 인기를 끌었다. 실은 이게 문제다. 그 설정이 너무 익숙하다는 뜻이니까. 그리스 ‘스파르타 대 페르시아’의 구도가 ‘문명 대 야만’의 구도로 설정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바로 그 부분. 이런 설정의 내면화야말로 정작 불쾌하게 기억되어야 할 것을 기억나지 않게 하는 기제다.

    특히 영화 ‘300’은 마지막 전투를 앞둔 아침, 다른 동맹군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군에게 한 연설을 덧붙임으로써 ‘완성도’를 높였다. 이 연설은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형식을 띠면서, 마치 사실이었던 것처럼 배치됐다. 작가의 상상을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능력, 이러니까 할리우드 영화가 장사가 된다.

    “수백 세대가 지나 사람들이 이곳에 올 것이다. 아마 바다 멀리 학자들과 여행객들은 고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과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올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평야를 돌아보고 돌과 파편을 보고 우리의 조국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겠는가? 그들의 삽은 아름다운 궁전이나 사원을 발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곡괭이는 영원한 건축이나 예술 작품을 파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인들은 무엇을 남기겠는가?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이 아니라 바로 이것,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행하는 것을 남길 것이다.”

    멋있다. 나라도 듣고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연설은 초기 전투 뒤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레오니다스 왕을 설득하다가 실패한 뒤 분에 못 이겨 하는 말과 아주 선명히 대비된다. 참으로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반(反)역사적, 반(反)문명적 발언이라고 느끼기에 족한 스크립트였다.

    “스파르타의 역사마저 지워버릴 것이다.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 없애버릴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의 눈을 뽑아버릴 것이다.”

    점령

    첫째,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싸운 일이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 중이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있기는 했다. 기원전 480년경의 일이다. 스파르타 300명, 테게아 등 1000명, 아르카디아 1000명, 보이오티아 등 1500여 명에, 포키스 군대 1000명이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페르시아의 정예부대에 레오니다스 왕의 군대가 전멸하면서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섬으로 후퇴하고, 크세르크세스 왕은 아테네로 입성한다(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페르시아 전쟁’, 책과 함께, 2006).

    스파르타인 300명은 레오니다스 왕의 친위병이었다. 그리스 동맹군 등이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시아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전투에 참가한 병사를 300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300명의 모티프가 다른 데도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 중 하나인데, 레오니다스 왕의 연설과는 너무 동떨어진, 차라리 희극이라고나 할 아르고스와의 전투가 그것이다.

    둘째, ‘300’에서 묘사하듯이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렇게 야만적이거나 흥분 잘하고 신비주의적 사고에 심취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중하고, 그 신중함 때문에 일을 그르칠 정도로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300’은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흔히 하는 표현대로라면 ‘쌩얼’로 보여준 영화임에 틀림없다. 거듭 말하지만, 상상의 허구 때문에 ‘300’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관점의 차이 때문도 아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몽고군과 싸웠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영화, 세종대왕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다고 하는 영화라면 그냥 지나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300명’의 기원

    먼저 ‘300’에 등장하는 300이란 숫자의 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스파르타인 300명이 전원 전사하면서 전설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유골을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로 옮겨 매장했고 그 묘소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비에 300명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너무도 흡사한 300의 모티프가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스파르타는 티레아라는 지역을 둘러싸고 아르고스와 분쟁에 돌입했다. 티레아는 본래 아르고스의 일부였는데 스파르타가 이곳을 떼어내서 자기들 땅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고스의 서쪽 말레아 곶에 이르기까지의 지역도 본토에 있던 부분은 물론, 키테라 섬을 비롯한 그 밖의 섬들까지 아르고스령이었다(지도 참조). 아르고스 사람들은 빼앗긴 자국령을 되찾기 위해 달려갔다.

    회담 끝에 쌍방으로부터 300명씩 병사를 출전시켜 이기는 측이 문제의 지역을 소유하기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양군의 본대는 각각 자국으로 철수해 전투하는 곳에는 남아 있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본대가 그곳에 남을 경우 어느 쪽이든 자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응원하러 달려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양군은 이러한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쌍방에서 선발된 병사들이 뒤에 남아 싸웠다. 양쪽은 서로 백중지세로 싸웠는데, 마침내는 각각 300명씩, 600명 중 3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즉 아르고스 쪽에서는 알케노르와 크로미오스 두 사람이, 스파르타에서는 오트리아데스 단 한 사람이 남았다. 이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해가 졌다. 아르고스 쪽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달려서 아르고스로 되돌아갔지만, 스파르타 측의 오트리아데스는 아르고스군의 전사한 시체에서 무기를 빼앗아 그것을 자군 진영으로 가져왔다.

    이튿날 양군은 결과를 보기 위해 도착한 뒤 서로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한쪽은 살아남은 자의 수가 많으므로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상대는 도망쳐 돌아갔지만 자기편의 병사는 남아 적의 전사자 무기까지 빼앗았기 때문에 승리라고 주장했다. 듣고 보면 둘 다 일리가 있었다. 마침내 이러한 말다툼 끝에 전투가 벌어져 쌍방 모두 다수의 전사자를 낸 뒤 스파르타군이 승리했다.

    이후 아르고스인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던 관습을 버리고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러고는 티레아를 탈환하기까지는 아르고스 남자는 누구도 머리를 기르지 못하며 여자는 황금 장신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관례를 만들었다. 스파르타는 반대의 관습을 채택해, 이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았던 것을 이후 머리를 기르기로 했다. 또한 300명 중 오직 홀로 살아남은 오트리아데스는 같은 부대의 전우들이 전사했는데 자기 혼자 스파르타로 돌아온 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티레아에서 자결했다고 한다(나중에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살아남은 판티테스 역시 치욕을 견디다 못해 목매 죽었다).



    ‘역사’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같은 도시국가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을 전해준 사람은 서유럽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다(헤로도투스 지음, 박광순 역, ‘역사’, 범우사, 1987).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룬 ‘역사’라는 책을 썼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역시 헤로도투스의 ‘역사’와 같은 제목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마천과 헤로도투스라는 두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역사학도들인 셈이다.

    그의 ‘역사’ 권7이 영화 ‘300’의 근거였다. 우물에 사신을 차 넣는 장면, 300명의 친위대 등은 물론 전편에 걸쳐 모든 사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현명한 왕비 고르고의 일화도 그렇다. 단 고르고의 어린 시절은 권5에 실려 있다.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고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도. 스파르타와 아르고스는 그리스 내의 도시국가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했고, 아테네보다도 가까운 거리였다.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480년대부터 420년대까지 살았다. 참고로 공자(孔子)는 73세까지 살았고, 그의 생존 연대는 기원전 551~479년이다. 맹자(孟子)는 84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생몰연도는 기원전 372~289년 설이 유력하다. 그러므로 헤로도투스는 대략 공자와 맹자 사이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소아시아 남부 할리카르낫소스(현 터키) 지방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오니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 숙부 파니앗시스가 서사 시인이었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리그다미스 왕대에 이르러 독재자 타도를 목표로 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파니앗시스가 목숨을 잃었고, 헤로도투스는 사모스 섬으로 망명했다. 당시 체재 기간이 상당히 길었는데, 여기서 ‘역사’ 3권을 저술했다. 이 경험도 사마천과 비슷하다.

    기원전 450년경 리그다미스 왕이 타도되고 민주정이 성립되었는데 헤로도투스도 뭔가 이 혁명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자료는 없다. 귀양살이에서 귀국한 뒤, 기원전 444년경 1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여행을 갔고 아테네에 매우 오래 체류하면서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과 교유했다.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아테네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계획한 남이탈리아 투리오이 식민지 건설에 참여한다. 그의 여행 거리는 동쪽으로는 바빌론/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바르케, 남쪽으로는 나일 상류의 시에네(현 아스완), 북쪽으로는 흑해 북안의 그리스 식민도시인 오르비아를 중심으로 크리미아 반도, 우크라이나 남부 주변에 이른다. 이 역시 사마천이 세 번에 걸쳐 중국 양쯔강 등 남부 지역, 제나라 등 중부 지역, 쓰촨 지방 등 서남 지역을 답사했던 경험에 비견될 수 있다.

    ‘역사’는 총 9권이다. 헤로도투스는 1권 첫머리에서, “이 책은 할리카르낫소르 출신의 헤로도투스가 인간 세계의 사건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잊혀가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이룬 놀라운 위업들, 특히 양자가 어떠한 원인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연구, 조사한 바를 서술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헤로도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저서 ‘역사’는 지중해 지역의 세계사로 보는 편이 타당하며, ‘역사’의 내용을 페르시아 전쟁으로 환원시켜 읽는 것은 무례한 일로 보인다. 우선 당시 지중해 지역을 ‘유럽 대 중동’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중국의 전국시대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실상에 부합할 것이다.

    그는 “크든 작든 관계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도시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술하면서 이야기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일찍이 강대했던 나라 대부분이 오늘날에는 약소국이 되었고, 우리 시대에 강대하게 된 나라도 전에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운이 결코 오래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치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대국도 소국도 똑같이 다루면서 서술해가고 싶다”고 덧붙였다.

    배경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 신비주의, 오만, 무력, 노예, 짐승, 괴물 등으로 표상되는 동양의 또 다른 모습이다.

    처음부터 헤로도투스가 스파르타와 아르고스의 전투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거기에는 다른 배경이 있었다. 터키 지역에 리디아라는 왕국이 있었는데 원래 헤라클레스 가(家)에 있던 주권이 메름나스 가라 불리는 크로이소스 가문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크로이소스는 세력이 점점 커지는 페르시아와 그 왕 키로스를 경계하면서 아테네나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려 했고 동시에 페르시아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키로스는 크로이소스의 전략이 어긋난 틈을 이용해 사르디스로 진격해 크로이소스를 사로잡으라고 명했다. 전초전은 키로스의 승리였다. 키로스가 낙타 군대로 하여금 기병에 대항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말이란 낙타를 두려워해 그 모습을 보거나 그 냄새를 맡기만 해도 견디지 못한다. 키로스는 이 점에 착안해 크로이소스가 눈부신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던 기병대를 무력화했다.

    이런 전략 때문에 크로이소스는 사르디스에서 키로스 군에게 포위됐다. 크로이소스는 동맹군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스파르타는 아르고스와 전쟁 중이었다. 그 전쟁이 바로 300 대 300으로 싸우고도 모자라, 한판 더 싸웠던 그 우스운 전투였다. 페르시아 전쟁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대립을 서술할 때 첨부했던 스파르타와 아르고스 전투, 여기서 헤로도투스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메시지였을까? 말 그대로 사실을 전해주는 것뿐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잔인한 어리석음을 덤덤한 척 말해준 것이었을까?

    스파르타는 결국 리디아를 지원하지 못했고 사르디스가 함락되었으며,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는 생포됐다. 키로스 군대는 사르디스 아크로폴리스 남쪽 절벽으로 침투했는데, 어떤 리디아 병사가 절벽을 내려와 위에서 떨어뜨린 투구를 주워 올라가는 것을 기억해두었다가 그 길로 공격했던 것이다. 사르디스 성이 함락되었을 때, 페르시아 병사가 크로이소스를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죽이려고 다가갔다. 그때 크로이소스의 벙어리 아들이 공포에 젖은 목소리로, “이봐, 크로이소스 왕을 죽이면 안 돼!”라고 소리쳤다. 이 아들이 이때 처음 입을 열었던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크로이소스 왕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의 키로스 왕은 사로잡은 크로이소스 왕을 장작불에 올려 화형을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크로이소스가 눈물을 흘리며 신의 이름을 부르자 맑은 하늘에 구름이 차고 거센 비가 쏟아져 불이 꺼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헤로도투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평화 시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장사지내지만 전쟁 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장사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크세르크세스

    영화 ‘300’은 페르시아 왕인 크세르크세스를 포악한 군주로, 미신에 빠진 괴물로 묘사했다. 이는 스파르타인들의 ‘이성적 용맹’과 대비되는 야만성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역시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자.

    ‘역사’ 권7에는 그리스 침략을 준비하던 시기 페르시아 조정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당시 그리스를 침략하려던 크세르크세스의 결정을 대부분의 신하는 지지했다. 거기에는 영토의 확장과 노예의 확보라는 고대 국가의 욕구가 담겨 있지만, 또한 부왕 다리우스 1세가 아테네군에게 당했던 악행에 대한 복수심이 내재해 있었다. 아테네가 사르디스에 침입해 성스러운 삼림과 성전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숙부인 아르타바노스만이 홀로 “황금을 감정할 때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면서 “그리스 원정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면서 크세르크세스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스키타이를 공격했다가 패퇴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아울러 원정을 찬성하는 마르도니오스에게도 “그리스인을 가볍게 보고 있다”며 “왕을 그렇게 모셔서는 안 된다”고 꾸짖었다. 아울러 “원정을 꼭 해야겠거든 왕은 페르시아에 남아 있고 자신과 마르도니오스 둘만 출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은 대개 충신이나 할 수 있는 제안임을 역사는 경험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숙부를 벌주려던 크세르크세스는 이틀 동안 생각한 뒤, 자신의 판단을 번복한다.

    “여러분, 내가 돌연히 마음을 바꾸는 것을 용서하기 바라오. 그것은 내 분별력이 아직 충분히 성숙지 못한 데다가 그 계획을 권유하는 자들이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는 아르타바노스가 제시한 의견을 들었을 때는 한순간 젊은 피가 솟구쳐 올라 연장자에 대해 해서는 안 될 폭언을 내뱉고 말았소. 그렇지만 지금은 그가 말한 바가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아르타바노스의 주장을 채택하기로 했소. 나는 생각을 바꾸어 그리스 원정을 중지하기로 결정했으니, 그대들도 이에 따라 행동해주기 바라오.”

    이후, 미심쩍은 꿈으로 인해 아르타바노스의 동의 아래 아테네 원정을 결정하기는 했으나, 그때도 크세르크세스는 4년 동안 준비한 뒤 출발한다. 다른 장면에서도 크세르크세스에게서 영화 ‘300’에서 보여주었던 ‘광적인 미개인’의 표상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그리스 연합군에 패해 귀국했지만, 각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역시 ‘300’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그가 동생 마시스테스의 아내에 이어 그의 딸 아르타윈테(자기 아들과 정혼시킨 여자)를 취함으로써 자기의 아내 아메스트리스의 질투를 유발했고, 그로 인해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여후(呂后)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한고조 유방(劉邦)의 척부인 꼴이었다. ‘역사’ 권9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런 스토리는 또 다른 영화로 만들면 인기를 끌지 몰라도 적어도 영화 ‘300’의 맥락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페르시아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는 그 기록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페르시아 근거 없이 비난…삐뚤어진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
    오항녕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국가기록원 팀장으로 기록관리도 공부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고대 민연) 등 10여 편의 저·역서가 있으며, 그 외 논문 50여 편이 있다.


    “페르시아인은 우상(偶像)을 비롯한 신전이나 계단을 짓는 풍습이 없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자는 어리석게 여긴다.… 페르시아인은 술을 매우 좋아하지만, 페르시아에서는 사람 앞에서 토하거나 방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일은 엄중히 지켜지고 있지만, 중요한 일은 술을 마시면서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 회의에서 모두 찬성한 것이라도, 회의장으로 제공된 집의 주인이 이튿날 술에서 깬 일동에게 전날의 결정사항을 재론해 술 깬 상태에서도 찬성을 얻으면 채택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마찬가지로 내가 칭송하고 싶은 점은 국왕조차 단 한 번의 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없다는 것, 또한 기타 일반 페르시아인들도 자기 하인에게 단 한 번의 과실로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주인은 잘 생각해 하인이 저지른 실수가 그 공적보다 많거나 또는 크다고 확인될 때 비로소 벌을 내린다.… 페르시아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또한 입 밖에 내서도 안 된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돈을 빌리는 것이다. 돈을 빌리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을 빌리면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상의 풍습이 없다는 것, 결정한 내용을 재심하는 관례가 있다는 것,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 처벌을 신중히 한다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등. 이 대목에 이르면 문득 헤로도투스가 영화 ‘300’을 보았다면 뭐라 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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