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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과학

  • 김학순│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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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끼친 ‘혁명적’ 영향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이 책이 나오자마자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모호성 탓이다. 언어학자 마거릿 매스터먼은 쿤이 패러다임을 무려 22가지나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고 꼬집었다. 패러다임이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담는 보자기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자연스레 숱한 반론과 논쟁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논쟁이 1965년 7월 영국에서 열린 토론회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명성 높은 칼 포퍼와 쿤이 벌인 이 토론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가장 유명한 과학철학 논쟁으로 꼽힌다. 쿤은 과학 탐구가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론과 맞지 않은 변칙 사례가 나올 때마다 패러다임을 폐기한다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맞서 포퍼는 어떤 패러다임이나 이론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주저 없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쿤이 패러다임의 안정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포퍼는 패러다임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어떤 과학철학자는 쿤이 과학을 ‘군중심리’로 격하했다고 분노 어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갖가지 논란이 쿤의 위상을 떨어뜨리기는커녕 외려 명성과 권위를 한결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출간 자체로 혁명이었다. 당시 과학철학은 지식 축적을 통해 진보한다는 논리실증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실증주의는 과학 활동이 인간의 인식·가치·마음 등과 분리돼 자연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직접 경험으로 관찰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쿤의 독창적인 이론은 과학이론의 논리적인 분석이 아니라 실제 과학자들의 활동과 과학사를 근거로 했기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과학철학을 넘어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박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 곳은 과학계가 아니라 비과학 분야였다. 과학을 보는 사람의 관점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 책은 과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으며 과학을 둘러싼 신비의 그림자를 걷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 덕분에 과학은 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찾아내는 활동이 아니라 과학자라는 사람이 복잡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자 그 결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쿤의 ‘다름’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적 상대주의, 다문화주의, 다양한 학파의 평화적인 공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쿤이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창조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이 책을 근거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웃지 못할 현상도 빚어졌다. 창조설이 진화론과 다를 뿐, 틀린 과학은 아니라는 논리를 이 책으로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려운 학문 서적임에도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100만 권 이상 팔려나갔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쿤의 이름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대학입시 논술시험 덕분에 쿤과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을 정도다. ‘여행의 뉴 패러다임’이라는 상품명이 등장할 만큼 일상생활에서조차 보편화됐다.

신동아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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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순│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북칼럼니스트 soon34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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