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호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문희·남정임·윤정희, 여배우 트로이카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2-07-24 09: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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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시기다. 재능 있는 배우와 의욕 넘치는 감독,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관객이 삼위일체가 돼 그때껏 볼 수 없던 걸작을 쏟아냈다. 그 중심에 갓 데뷔한 여배우 3인방, 문희·남정임·윤정희가 있었다.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흥행으로 시작된 ‘신파 반동’ 탓에 채 꽃피기도 전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눈부시게 화려했던 트로이카의 전성시대를 추억한다.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 발랄하고 거침없는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남정임. 2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으로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배우 문희. 3 이지적인 현대 여성부터 비운의 여주인공까지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배우 윤정희.

    1964년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청춘이란 단어를 불러들였다. 고무신 부대의 눈물을 짜내는 것이 목표였던 신파 멜로 영화판에 새로운 기운을 가져온 것이다. 젊고 혈기 넘치지만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에 불과한 신성일의 우울하고 반항적인 연기와 싱싱하고 발랄한 여대생이라는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엄앵란의 연기. 이 커플의 사랑은 현실로까지 이어졌고, 영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신성일이 입은 터틀넥 스웨터와 트위스트김의 청재킷·청바지가 유행했고, 엄앵란의 톡톡 쏘는 여대생 연기는 이후 한국 영화 속 여대생의 전형이 되어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비슷비슷한 날림 영화가 우후죽순 만들어지는 법. ‘맨발의 청춘’ 아류작이 쏟아졌다. 그리고 1965년 10월, 이만희 감독의 ‘흑맥’이 개봉됐다. 남자 주인공은 신성일, 상대역은 문희라는 이름의 신인이었다. 서울역 주변을 무대로 소매치기를 하며 연명하는 일당의 두목 신성일이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문희를 만나 사랑하고, 범죄에서 벗어나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또 ‘맨발의 청춘’ 아류작인가? 엄앵란이 시집가고 없으니 신인 여배우를 하나 급히 만들었나보다 했다. 그런데 서울 뒷골목과 그곳에서 기생하는 어두운 청춘의 이야기를 ‘맨발의 청춘’보다 더 뛰어나게 담아낸 게 아닌가. 그 중심에 신인 배우 문희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스산한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쏘냐’를 떠올렸고, 함께 연기한 배우 신성일은 옷이 흘러내려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모른 채 연기할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에게 감탄한다. 이만희 감독은 이 배우에게 최고 여배우 문정숙의 ‘문’과 자신의 이름 끝 자인 ‘희’를 따서 ‘문희’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1세대 트로이카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968년 제7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은 신성일과 문희.

    1960년대 중반. 1950년대를 주름잡던 스타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195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희갑은 겹치기 출연으로 매번 지각을 하는 민폐를 끼쳐 스태프들의 원성을 사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깡패 출신 제작자 임화수에게 폭행까지 당했던 스타다. 그가 이제는 신인 코미디 스타 서영춘이 겹치기 출연으로 촬영장에 늦게 나타나는 데 분개해 호통을 치는 시대가 됐다. 영원한 청춘 김진규가 맡았던 배역은 새로운 스타 신성일과 신영균에게 돌아갔다. 과거의 신인이 중견이 되고, 새로운 신인이 나타난 것이다.

    여배우의 세계도 그랬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스타 최은희가 영화감독으로 나서며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편수를 과감히 줄여나갔고, 김지미는 최무룡과의 스캔들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어 흥행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떠오르던 샛별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해 아기를 출산한 뒤 영화 출연을 사실상 접어버렸다. 새로운 얼굴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였다. 이때 문희가 나타났다. 스타는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을 만나야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흥행이 돼야 스타가 나온다. 문희의 매력적인 분위기는 감독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가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흑맥’ 개봉과 비슷한 시기인 1965년 11월, 이번엔 김수용 감독이 만든 ‘갯마을’에서 매력적인 얼굴을 지니고 연기력도 제법인 신인이 탄생했다. 영화의 도입부, 마을 여자들이 모두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끄는 장면에서 소녀 과부 고은아는 땀에 젖어 엉겨붙은 귀밑머리와 고개 숙인 옆모습 하나로 관객의 머리에 ‘에로틱’이 무엇인지 각인시켰다. 문희와 고은아 두 신인 여배우 모두 대학 재학 중 감독에게 발탁됐다. 이른바 여대생 출신 여배우의 탄생이었다. 이들 전의 여배우는 악극단 출신이 대부분이라 학력을 내세우며 선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말하자면 미모와 지성을 갖춘 여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 무렵 또 한 명의 스타도 조용히 태어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단역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신인 여배우 한 명이 김수용 감독의 영화 ‘유정’의 신인 여배우 오디션에 참가한 것. 이 신인 공모에는 유례없이 상금 50만 원이라는 큰돈이 걸려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이민자라는 이름의 신인 여배우는, 이후 소설 여주인공의 이름 ‘남정임’을 예명으로 얻었다.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이 아름다우니 그쪽으로 찍어달라고 촬영 기사에게 당돌하게 요구할 만큼 거리낌 없던 여배우 남정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6년 영화 ‘유정’이 개봉됐고, 순애보적인 사랑을 설득력 있게 연기한 남정임은 적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작 ‘성춘향’(신상옥 감독, 1961)의 관객 수 36만 명에 필적하는 35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고은아·문희·남정임, 이 세 명의 신인 여배우는 여왕 자리를 넘보는 후보로 극장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배우는 고은아였다. 당시 최고의 흥행 감독이던 김수용은 고은아를 “동양적이고 정적인 분위기를 지녔고,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배우 문예봉과 6·25전쟁 후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 두 사람의 인상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배우의 적통을 이은 배우로 평가한 것이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무룡과 연기하는 윤정희.

    고은아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물레방아’(1966)에서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도발적인 여인을 연기한다. 한여름 숲 속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여자. 청순하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풀을 베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잠시 감았던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뜬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불만과 욕정이 가득 차 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 신영균은 힘도 좋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도 고은아를 사랑한다. 마을 지주 허장강이 평생 호강시켜주겠다고 그녀를 유혹하지만 고은아는 신영균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웃음이 헤프다. 그것도 모르는 신영균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는 무리수를 두며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첫날밤. 고은아는 어서 잠자리에 들자며 간절한 눈빛을 신영균에게 보내지만 바보 같은 그는 곰방대만 뻑뻑 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달도 밝다”고 하는 등 못나게 군다. 답답한 고은아, 벌떡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우물가로 가서 찬물을 쫙쫙 끼얹는다. 동네에서 바람기라면 최고를 자부하는 신영균의 상전이 고은아의 벌거벗은 뒤태를 보고 침을 흘린다. 그는 신영균과 고은아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인물. 언젠가 고은아를 자신의 품에 들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신영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씨구. 이젠 뜸만 들이면 되는 것이다. 고은아는 신영균이 드르렁드르렁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 화가 난다. 이게 뭔가? 남자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영화에서 고은아는 항상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현명하지도 못하다. 말하자면 백치 같은 여자다. 대사가 거의 없어,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만으로 모호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아름답지만 지능이 낮고 정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성욕만 따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자. 갓 스무 살 된 신인 여배우는 이 배역을 성심성의껏 연기했다. 고은아의 연기력이 좀 더 무르익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배역을 기성의 스타급 여배우에게 주문했다면 고분고분 잘했을까? ‘물레방아’는 의욕 넘치는 신인 여배우와 여자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66년 늦봄에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상류층의 최고급 저택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고, 지나치게 따갑지 않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다. 드넓은 마당 위,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스러운 털이 난 애완견과 함께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외국 영화잡지들이 있고, 가슴에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그 화면 위에서 생기발랄한, 톡톡 튀는,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구김살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저택의 식모 문희다. 이 집 주인은 프랑스 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고, 안주인은 밤낮없이 자수만 놓는다. 그들에겐 병 걸린 딸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다. 대사가 아름다운 프랑스제 비옷을 선물해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버리느니 차라리 식모에게”라며 건네준 덕에 아름다운 비옷은 문희 차지가 된다. 쨍하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희. 드디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 ‘비!’ ‘비!’ 를 외치는 문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1966년 데뷔한 정진우 감독은 대사에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함과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은 문희에게 적역이었다.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렸다. 문희는 비옷을 입고 나가 차량 정비공이지만 손님의 고급 외제차를 끌고 나와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 속이는 신성일을 만난다. 식모이지만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라고 속이는 문희와 상승욕이 가득한 신성일은 비극으로 치닫는 청춘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하이힐 부대의 등장

    후발 주자 남정임이라고 가만있었겠는가? 그는 데뷔 첫해에 ‘유정’‘학사와 기생’(김수용 감독, 1966), 단 두 편의 영화로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이 한 해에만 무려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상을 타는 행운까지 누린다. 정진우 감독은 그녀를 주연으로 ‘초연’(1966)을 만든다. 남정임은 첫사랑 신성일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리자 또 다른 남자 이순재와 사귄다. 신성일이 돌아와 남정임을 놓고 이순재와 한 치 양보도 없는 사랑의 결투를 벌인다. 두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자 남정임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 둘 다 놓치고 만다.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당돌하다. ‘초연’ 이전의 여주인공은 두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괴로워했지만 남정임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어느 놈이 더 나을까?’ 저울질한다. ‘어쩌지? 둘 다 괜찮은데. 두 남자 모두 마음에 드는데, 일처이부(一妻二夫)는 안 되나? 하하하.’ 남정임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영화였다.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엄청난 시대였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1966)가 개봉되자,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 여겼던 교양인들이 쌍수를 들고 항복했다. 흥행감독 김수용은 잇달아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내놓았고, 젊은 감독 정진우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스타 대우를 받으며 나날이 몸값이 높아지고, 건방진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나왔다. 새로운 여배우의 등장과 신성일·신영균 등 남자 배우의 듬직한 지원, 그리고 감독의 왕성한 창작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한국 영화 최고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고은아·문희·남정임의 출현 전까지 우리 영화 중 여배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 배우의 등장으로 여배우 주연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정진우의 ‘초우’와 ‘초연’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는 신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영화 관객은 고무신 부대에서 하이힐 부대로 바뀌었다.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신인 여배우 공모를 벌인다.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할 뿐 아니라 덤으로 50만 원의 상금까지 줬다. 이제 스타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누구나 응모해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또 하나의 신인이 윤정희다. 영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 1967) 주연 여배우 공모에서 윤정희가 당선됐다는 신문 기사 옆에는, 고은아의 약혼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운명처럼 새로운 별이 뜨고 다른 별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고은아의 인기는 약혼 발표와 함께 주춤해진다.

    서늘한 문희, 괄괄한 남정임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1972년 제9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은 박노식과 윤정희.

    신인 윤정희가 영화 ‘청춘극장’으로 시험대에 오른 그 순간,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밀월’(1967)에서 문희는 더 이상 인형 같은 연기를 하는 신인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무더운 여름 컴컴한 방 안에 속옷 차림으로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 한 여자가 보인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뭔가 권태로운 것 같고,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문희는 암흑가 두목 박암의 아내. 교도소에서 출소한 박암은 과장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문희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하다. 데뷔작 ‘흑맥’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차갑고 서늘한 눈매와 표정이 부활한 것. 문희보다 서른 살 넘게 많은 박암은 섹스에서도, 대화에서도, 젊고 아름다운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문희는 박암의 품에 안겨 딴 생각을 하는 여자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문희의 고독과 절망은 그만큼 깊고 어둡다. 박암은 문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을 보며 괴로워한다. 그때 박암이 친자식처럼 사랑하는 신성일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다. 영화가 시작된 뒤 신성일과 첫 대화를 나누기까지 30분 동안 문희는 대사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 초반의 무언극이 눈부셨다는 평가를 받으며 문희는 신인 여배우가 흔히 듣게 마련인 연기력 부족이라는 비판에서 단숨에 벗어난다. 그는 이제 날개를 달았다.

    1967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기적’에는 남정임이 출연한다. 이만희의 걸작 중 하나로 격찬을 받은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열차 안에서 사과를 파는 소녀로, 쫓기는 남자 최무룡을 돕는다. 영화는 배경 음악 없이, 오로지 기차에서 나는 실제 음향만을 배경으로 촬영됐고, 대사도 극도로 억제돼 박진감을 자아낸다. 문희와 남정임은 이제 당당하게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남정임은 진정한 배우라면 자기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한다며,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녹음을 고집한다. 물론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1967년 상반기 결산 결과 데뷔 2년차 문희가 출연한 영화는 13편이었다. 열 편 이상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 중이던 남정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다. 문희는 출연작마다 새롭다는 칭찬을 받았고, 남정임은 괄괄하고 당돌한 말괄량이 여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그 사이 고은아는 영화제작자 곽정환과 결혼하면서 연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동시에 재미있는 일이 터진다. 곽정환에 의해 신인 배우로 발탁된 윤정희가 그를 상대로 소송을 낸 것. 공모 상금 50만 원 중 15만 원만 주고 나머지는 10개월이 지나도록 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이 다른 영화사의 작품에 출연하고 받은 개런티 중 30%를 곽정환이 챙기며 폭리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신파여, 다시 한 번!

    이 와중에 윤정희의 진가가 드러난 영화 ‘안개’(김수용 감독, 1967)가 개봉했다.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할 것도 없는 권태로운 시골 무진에 은거 중인 음악선생 역을 맡아 이질적인 환경에 놓인 현대 여성의 무기력과 절망을 표현했다. 이후 그녀는 이지적인 여성의 표상이 된다. 이만희 감독의 스릴러 영화 ‘여섯 개의 그림자’(1969)에서는 남궁원에게 학대당하고 신성일의 거짓 사랑에 속아 목숨을 위협당하는 절망적인 배역을 맡았다. 윤정희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 다 죽이기로 결심한다. 남궁원을 죽이러 가기 전 말없이 화장을 하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은 놀랍다. 그때까지 아무 매력도 없던 그녀가 갑자기 놀라운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다.

    윤정희는 도회적인 이미지로 첩보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가 하면 검객 영화에서 여검객 역을 맡기도 하고, 구시대의 비극적인 여인상을 연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였다. 윤정희가 문희와 남정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스타로 등극하면서 1960년대 말 사람들은 이 세 여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지 않고는 한국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 못할 상황에 놓였다. 이른바 트로이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68년,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단숨에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사상 최고의 흥행 영화로 등극한다. 영화 내용은 오래전 이모와 고모, 어머니들이 고무신 신고 하얀 손수건을 든 채 보던 바로 그 신파영화였다. 아역 배우 김정훈의 “엄마. 왜 나는 엄마와 같이 살 수 없는 거예요?” 한 마디가 첨가됐을 뿐. 공전의 히트를 한 이 영화로 인해 한국 영화계는 다시 과거로, 손수건 적시는 신파 멜로 영화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너무나 단숨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사이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창조적인 작업을 통해 쌓아 올렸던 새로운 시대가 한방에 무너지고 극장가는 다시 고무신 부대의 영화들로 채워지게 된다. 영화적인 실험도 사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해 깡패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지면서 재능 있는 세 명의 여배우는 깡패 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들러리를 서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정임은 자신의 장점이 부각되는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면서 서서히 재능을 갉아먹는다. 게다가 본래 갖고 있던 발랄하고 거침없는 말괄량이 기질로 크고 작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그중 유명한 것이 제작부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이후 1971년, 남정임은 수억 원대 자산가라는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버린다. 문희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수없이 많은 속편에 출연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아들로 나온 아역 배우 김정훈의 아내가 되는 수모를 겪으며 ‘꼬마신랑’ 시리즈에 출연하는 등 빛나는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가다 1971년, 남정임의 뒤를 이어 결혼한 후 은퇴해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2년 뒤, 트로이카의 마지막 여왕 윤정희도 공부를 하겠다며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몇 해 뒤 결혼해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이리하여 한국 영화계에서 최초로 여배우가 영화의 중심에 서던 시대는 저물고 만다.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과 졸업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영화제 각본상 수상


    몇 해 뒤, 남정임이 돌아왔다. 결혼 직후부터 ‘선데이 서울’ 등의 주간지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됐던 불행한 결혼에 대한 소문의 종지부는 이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남정임은 그녀를 발굴해 데뷔작을 찍었던 김수용 감독의 영화 ‘웃음소리’(1978)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재기를 꿈꾼다. 당시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들과 별다를 것이 없는 작품이었다. 남정임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그녀의 가슴에 묻어둔 사랑의 기억들이 너무나 진부하고 상투적인 졸작이었다. 게다가 이미 30대 초반에 접어든 남정임의 상대역이 파릇파릇한 청년 이영하였으니, 둘이 마주칠 때마다 남정임의 나이가 떠오를 수밖에 없던 건 또 다른 의미로 비극이었다. 진부한 졸작으로 재기를 노린 남정임은 몇 년 후 암에 걸리고, 1992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생애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영화화할 것을 꿈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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