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엄앵란-이영옥-강수연 이은 청춘영화 막내 헤로인

  • 오승욱 │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3-03-20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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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발의 청춘’의 엄앵란, ‘바보들의 행진’의 이영옥,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의 강수연. 한 시대를 풍미한 청춘영화 여주인공들이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그 뒤를 이었다. 아니, 완벽하게 뛰어넘었다. 미모, ‘너 죽을래?’같은 전지현식 협박, 남자를 주도하는 독립적인 캐릭터에 관객은 매료됐다. ‘엽기적인 그녀’를 추월할 만한 청춘영화는 10년 넘게 안 나오고 있다.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2001년 여름. 영화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감독)가 개봉됐을 때, 나는 솔직히 짜증이 났다. ‘또 엽기냐?’는 생각이 앞섰다. 199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엽기’는 이미 끝물을 타고 있었다. 2000년에 등장한 ‘엽기토끼’가 자동차 뒷유리창이며 침대와 소파까지 점령한 뒤였다. 인터넷 자유게시판을 도배한 주제도 온통 ‘엽기’였다. 그럴 때 나온 영화라 그런지, 일단 제목부터 식상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엽기적인 그녀’는 바로 몇 해 전 프린터 광고에 나와 섹시한 테크노댄스를 추던 신인 배우 전지현이었다.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등장인물이 입었던, 우주복 비슷한 옷을 입고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동여맨 그녀를 보면서 나는 10여 년 전 심혜진이 등장했던 코카콜라 광고를 떠올렸다.

    광고 속에서 그녀들은 당당했다. 세상에 대해 당당했고, 무엇보다 남성에 대해 당당했다. 아니, 당당함을 넘어 비교우위에 선 느낌도 들었다. 그녀들은 남자에게 의존하는 여자들이 아니었고, 무엇이든 혼자서 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로 보였다. 전지현은 지적이고 섹시한 직업여성 이미지의 심혜진에 비해 3배쯤 업그레이드 된, 밀레니엄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SF 영화의 주인공 같았으며, 섹시함과 지적인 느낌은 강인한 여전사와 비슷했다.

    코카콜라 CF와 영화 ‘결혼 이야기’로 심혜진이 1990년대 여성의 롤모델이 된 것처럼,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2000년대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아름다운 외모, 터프한 행동, 남성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됐다.

    연기 못하는 배우, 10년 휴업 감독



    CF로 얼굴을 알린 전지현은 심혜진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 진출했다. ‘화이트 발렌타인’과 ‘시월애’ 였다.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시월애’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전지현의 연기력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 번째 영화였던 ‘엽기적인 그녀’는 달랐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를 만든 곽재용 감독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흥행에도 성공하고 주제가도 히트했지만, 영화의 만듦새가 너무 허술해 비평적으로는 상당히 무시당했다. 전편의 흥행 성공에 힘입어 만든 ‘비 오는 날의 수채화 2’(1993)는 너무나 엉성해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후 10년 넘게 곽재용 감독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연기가 안 되는 여배우, 흥행에 실패하고 10여 년간 휴업한 감독의 만남에 사람들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대단했다. 전지현은 물 만난 고기처럼 싱싱했고, 10년간 절치부심한 곽재용 감독의 연출력은 합격점을 받았다.

    영화가 시작되면 연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남자 주인공 차태현이 술을 마시고 있다. 1960~7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군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은 ‘전방에서 근무한 공익’이라며 허세를 떨던 차태현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술집 창밖으로 지나가는 한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키, 투피스 정장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차태현은 이렇게 말한다.

    “제 이상형입니다. 이상형이 지나가면 저는 못 참습니다. 말을 붙여봐야죠.”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은 차태현이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같이 술집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데 이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엄마다. 일곱 살 때까지 차태현을 여자 목욕탕에 데려갔던 무서운 엄마의 전화. 야수와 같던 차태현의 눈빛은 분홍색 털을 가진 애완견의 눈빛으로 변한다. 엄마는 외아들 차태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군주로 나온다.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태현은 전철 플랫폼의 맨 끝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술에 떡이 된 그녀, 바로 전지현이다. 순간 차태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저 여자 위험한데’가 아니라 ‘앗! 나의 이상형’이다. 그러곤 ‘아무리 이상형이라도 술에 떡이 되어 비틀거리는 여자는 싫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 먹는다.

    복학생 차태현의 모든 촉수는 오로지 하나에 꽂혀 있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키, 여배우 같은 얼굴의 ‘이상형’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상형 외모를 지녔다고 해도 조건이 하나 있다. 한국적인 현모양처형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이야긴가.

    전철 플랫폼 끝에서 차태현이 안쪽으로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술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추한 모습에 게슴츠레 술에 취한 눈으로 차태현을 바라보던 ‘긴 생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전철이 오자 휘청거리며 올라탄다. 여자는 전철 손잡이 기둥에 매달린 채 인사불성이다. 쇠기둥에 퉁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부딪히기를 반복하다 잠깐씩 정신을 차리는데, 그때마다 술주정을 부린다.

    일단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자기 또래의 청년에게 시비를 건다. 분홍 형광색 티셔츠를 입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청년 앞에는 할아버지가 서 있다. 잠깐 정신이 든 사이 두 사람을 번갈아본 여자는 대뜸 반말로 “노인네가 서 있는데 안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청년이 무시하자 여자는 청년의 뒤통수를 퍽!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이 여자, 정말 겁도 없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청년이 항의하려 하자 여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히도 청년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술 취한 여자를 피해 다른 칸으로 가버리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청년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한다. “야, 분홍색 옷 입지마.”

    “너 죽을래?”

    헛구역질을 하던 여자는 식도를 타고 역류한 음식물이 밖으로 분출되는 것을 간신히 억눌러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미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음식물은 소 되새김질 하듯 씹어 삼킨다. 그러나 곧 다시 역류한 음식물이 자리를 양보 받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 졸지에 봉변을 당한 할아버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전지현은 차태현 쪽으로 돌아서며 “자기야!” 하고는 쓰러진다.

    고스란히 뒷감당을 하게 된 차태현, 그는 이제 전지현의 포로가 돼버렸다. 전지현은 할아버지가 토사물이 묻은 가발을 벗자마자 드러난 민머리 위에 확인사살을 하듯 또다시 토사물을 쏟아내고, 졸지에 전지현의 애인으로 오인받은 차태현은 자신의 분홍색 스웨터를 벗어 토사물을 닦아낸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차태현은 뻗어버린 전지현을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밤거리를 걸어 여관을 찾아내 데리고 들어갔다가 치한으로 오인받아 파출소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다음 날, 어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해 찾아온 전지현의 태도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물고는 “너 죽을래?” 하면서 차태현을 질질 끌고 다닌다. 차태현, 아니 남성 수난사의 막이 오른다.

    20대 초반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수많은 한국 영화 중 이렇게 황당한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없었다. 10여 년 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규형 감독, 1987)에서 자기네 학교 농구팀이 경기를 잘 못하자 소주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농구팀 선수들에게 달려가 따귀를 올려붙인 강수연, 이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 박중훈이 강수연을 따라 버스에 타서는 잡상인 흉내를 내며 구애하던 첫 만남은 ‘엽기적인 그녀’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다.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에서 건달 신성일이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는 여대생 엄앵란을 구해주다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이 영화에 댈 게 아니다.

    청춘영화의 당돌한 첫 만남

    ‘엽기적인 그녀’에 대적할 만큼은 아니지만, 1970년대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감독, 1975)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도 신선한 장면으로 꼽힌다.

    주인공 병태는 여대 불어과 학생들과 미팅을 하는 자리에 나간다. 당시 불어과 여대생은 신부 후보감 일순위로 인기를 끈 ‘퀸카’였다. 양복을 빌려 입고 미팅 장소로 가던 병태가 장발 단속에 걸린다. 경찰에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육교 난간에 매달리는 아찔한 상황까지 연출하며 도망친 병태는 가까스로 미팅 장소에 도착한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트너가 오지 않는다. “오늘 일진이 아주 안 좋군” 하고 중얼거리며 일어나는데 안내하는 아가씨가 “파트너가 밖에서 기다리니 가보라”고 말한다.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 전지현

    ‘엽기적인 그녀’의 한 장면.

    밖으로 나가니 빨간 우산을 들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보인다. 토끼 같은 눈망울, 아담한 키, 빨간 머플러에 나팔바지를 입은 여주인공 영자, 바로 이영옥이다. 그녀는 늦은 것을 사과하면서 “급한 일이 있는데 기다리고 있을 파트너가 불쌍해서 잠깐 와본 거다. 친구가 병에 걸렸는데,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할 일이 없었던 병태는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이영옥이 찾아간 곳은 친구가 아닌 교수의 집이었다. 그녀는 교수를 찾아가 학점을 고쳐달라고 떼를 쓴다. 어떻게 해서든 F학점을 면하려던 그녀는 급기야 교수의 집 거실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난감해하던 교수는 “내일까지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리포트를 써오면 F학점은 면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훌쩍이며 교수의 배웅을 받고 나온 이영옥. 하지만 교수의 집 대문이 닫히자마자 훌쩍이던 얼굴은 금세 생글생글거리고, 기다리던 병태에게 “철학과 학생이니 책을 많이 읽었겠네”라고 말한다. 병태가 그렇다고 하자 이영옥은 토끼 같은 눈을 반짝이며 ‘이방인’을 읽었느냐고 묻고, 병태는 자신 있게 읽었다고 답한다. 그러자 이제는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조른다. 병태는 뭐 아무려면 어떠냐는 얼굴로 해주겠다고 한다. 이영옥과 헤어진 후 병태가 발에서 불이 나게 서점으로 달려가 “카뮈 이방인 주세요”라고 말하며 병태와 이영옥의 첫 만남 시퀀스가 끝난다.

    1970년대의 이영옥과 1980년대의 강수연을 보면 한국 청춘영화 남녀 주인공의 첫 만남 장면에서 여주인공들은 거의 다 당돌하고 생기발랄하게 그려진다. 1960년대 영화 ‘맨발의 청춘’의 엄앵란 역시 수줍은 듯 조신하지만, 그 시대 여성들에 비하면 여간 당돌하지 않다. 엄앵란은 특유의 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건들거리는 신성일을 보고는 귀엽다는 듯 미소 짓는다. 아마 당시 여성들도 엄앵란을 보고 ‘저 여자처럼 쿨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01년의 전지현은 당돌함과 생기발랄함을 넘어 자신의 확고한 주관이 남자 때문에 변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차태현에게 끊임없이 이벤트를 요구한다. 차태현이 난감해하면 바로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라리며 “너 죽을래?”하며 협박한다. 차태현의 학교로 약속 없이 들이닥치는 전지현, 화사한 봄 날씨에 어울리게 원피스 정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었다. 전지현은 “하이힐을 신으니 다리가 아프다”며 차태현에게 신발을 바꿔 신자고 한다. 난감한 차태현이 그냥 맨발로 가면 안 되냐고 하자 전지현은 바로 “너 죽을래?” 하며 주먹을 들이댄다. 차태현의 운동화를 신고 “나 잡아봐라”하며 앞서 달리는 전지현. 차태현은 자신을 보고 킥킥거리는 주변의 시선보다 하이힐을 신은 고통으로 죽을 맛이다. 자기를 잡으러 뛰어오지 않자 전지현은 다시 주먹을 든다. 어쩔 수 없이 전지현을 쫓아가는 차태현. 발을 죄어오는 하이힐의 고통이 이만저만하지 않다.

    1970년대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영옥도 약속 없이 병태의 학교를 찾아간다. 남녀공학인 병태의 학교는 여대생 이영옥에게는 신기한 공간이다. 여대와는 달리 그 무렵 남자들의 대학에는 시대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마침내 병태를 찾아내는 이영옥. 병태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공을 몰고 상대 골대를 향해 돌진하는 병태. 골문을 향해 슛을 날리는데 공이 아니라 병태의 운동화가 골대를 향해 날아간다.

    병태와 이영옥은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미래에 우리는 무엇이 될까를 이야기한다. 병태는 이영옥에게 기습 키스를 하려다 걷어차이고는 운동장으로 달려가 옷을 벗어던지고 “한국적 스트리킹이다”라고 외치며 미친 듯이 달린다. ‘바보들의 행진’의 학교 방문이 당시 군사독재 치하 한국 청춘들의 고통과 상심이 담긴 우울한 장면이었다면, ‘엽기적인 그녀’의 학교 방문 장면은 ‘하이힐 신고 달리기’를 통해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고역을 유쾌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바보들의 행진’이 1970년대 남성들의 억압과 우울을 담았다면 ‘엽기적인 그녀’는 2000년대 여성들의 억압과 욕망을 그려낸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여성의 억압과 욕망이 극명하게 드러난 때는 전지현이 쓴 영화 시나리오를 차태현이 억지로 읽게 하는 장면이다. 전지현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결말이 마음에 안든다며 스토리를 이렇게 고치겠다고 말한다.

    ‘어리바리한 시골 소년으로 분장한 차태현은 예쁜 세일러복을 입은 전지현과 함께 놀다가 소나기를 만난다. 그리고 며칠 후, 잠을 자려 돌아누운 차태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는데, 그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소녀는 죽으면서 소원을 말했는데, 소년을 자기 무덤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장면이 바뀌면 차태현이 어른들에게 붙잡혀 소녀의 무덤 속으로 던져진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무덤에서 기어 나오려고 기를 쓰는데, 무표정한 어른들은 차태현을 삽으로 내려치고는 흙으로 덮어버린다.’

    2000년대 인터넷 문화의 힘

    영화의 클라이맥스. 만난 지 100일 기념으로 전지현이 생각한 이벤트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술집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춤추러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나이트클럽 문 앞에서 당당하게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이며 걸어 들어가는 고속촬영 장면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그들의 불안과 억압을 단순명쾌하게 표현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잘 만든 청춘영화는 그 시대 청춘들의 욕망과 불안을 극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청년들의 문화가 농익어 탄생한다. ‘바보들의 행진’이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들인 최인호, 송창식, 하길종과 아마추어 대학생 연기자들에 의해 탄생했듯 ‘엽기적인 그녀’도 2000년대 초 활발해진 청년들의 PC통신 문화를 기반으로 태어났다. PC통신 게시판에 견우라는 닉네임의 남자가 자신의 여자친구와 있었던 일들을 글로 써서 올린 것이 인기를 얻고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베스트셀러 소설도 아니고, PC통신 게시판에 올린 개인적인 소소한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2000년대 인터넷 문화의 힘이었다.

    ‘엽기적인 그녀’가 만들어진 지 10여 년이 흘렀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전지현은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CF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는 모델로 전락했다가 영화 ‘도둑들’과 ‘베를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2013년. 세상은 바뀌었고, 남성들의 생각이 바뀌었듯 여성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리고 영화도 바뀌고 있다. 영화가 처음 태어났을 때, 영화 제작자들의 고민은 ‘어떤 방식으로 관객과 영화가 만나야 돈을 벌 수 있을까’였다. 영화의 발명가로 알려진 뤼미에르는 다수의 관객을 한 장소에 모이게 해서 필름을 영사하는 방식을 생각했다. 연극을 보는 관람 행위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에디슨은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한 사람의 관객 앞에 그림 상자가 있어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생각했다. 도서관과 비슷한 관람 방식이었다. 결국 뤼미에르가 승리했고, 에디슨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TV가 탄생하고, 비디오에 이어 DVD 시대가 오고, 이제는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혼자서 영화를 보는 영화 관람 방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관람 방식과 거의 비슷한 비율이 됐다.

    한국 영화의 가장 중요한 관객층을 형성해온 20대들이 요즘 극장에 잘 오지 않는다. 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고, 웬만하면 자기 방의 모니터 앞에서 파일을 다운로드해 영화를 본다. 그래서인지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감탄할 만한 청춘영화는 나오지 않고 있다. 내 생각에 가장 아름답고 싱싱한 영화는 20대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영화다. 시대마다 청춘영화가 있었고, 그 시대 젊은 여성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여배우들이 있었다. 1960년대엔 ‘맨발의 청춘’ 엄앵란이 있었고, 1970년대엔 ‘바보들의 행진’ 이영옥이 있었다. 그 암울했던 1980년대에도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강수연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있었다. 2010년대에는 과연 어떤 청춘영화가 나와 관객을 기쁘게 할까. 이 시대를 대표할 여배우는 과연 누구일까. 아니면 이제는 멋진 청춘영화가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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