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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③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문희·남정임·윤정희, 여배우 트로이카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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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황금기

풋풋한 매력으로 한국 영화의 청춘 이끈 여왕들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무룡과 연기하는 윤정희.

고은아는 이만희 감독의 영화 ‘물레방아’(1966)에서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도발적인 여인을 연기한다. 한여름 숲 속 풀밭에 누워 있는 한 여자. 청순하고, 정숙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가 풀을 베다 잠깐 눈을 붙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잠시 감았던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뜬다.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성욕 때문에 몸을 배배 꼰다. 얼굴은 정숙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불만과 욕정이 가득 차 있다.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남자 신영균은 힘도 좋고 잘생겼으며 무엇보다도 고은아를 사랑한다. 마을 지주 허장강이 평생 호강시켜주겠다고 그녀를 유혹하지만 고은아는 신영균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웃음이 헤프다. 그것도 모르는 신영균은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는 무리수를 두며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한다. 첫날밤. 고은아는 어서 잠자리에 들자며 간절한 눈빛을 신영균에게 보내지만 바보 같은 그는 곰방대만 뻑뻑 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참 달도 밝다”고 하는 등 못나게 군다. 답답한 고은아, 벌떡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우물가로 가서 찬물을 쫙쫙 끼얹는다. 동네에서 바람기라면 최고를 자부하는 신영균의 상전이 고은아의 벌거벗은 뒤태를 보고 침을 흘린다. 그는 신영균과 고은아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준 인물. 언젠가 고은아를 자신의 품에 들이겠다는 속셈 때문이었다. 신영균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까지 알았으니, 얼씨구. 이젠 뜸만 들이면 되는 것이다. 고은아는 신영균이 드르렁드르렁 코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다. 화가 난다. 이게 뭔가? 남자란 하나같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이 영화에서 고은아는 항상 성욕에 굶주려 있으며 현명하지도 못하다. 말하자면 백치 같은 여자다. 대사가 거의 없어, 꼭 필요한 말 몇 마디만으로 모호한 심리 상태를 표현한다. 아름답지만 지능이 낮고 정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며 성욕만 따르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여자. 갓 스무 살 된 신인 여배우는 이 배역을 성심성의껏 연기했다. 고은아의 연기력이 좀 더 무르익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런 배역을 기성의 스타급 여배우에게 주문했다면 고분고분 잘했을까? ‘물레방아’는 의욕 넘치는 신인 여배우와 여자의 어두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1966년 늦봄에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 ‘초우’가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상류층의 최고급 저택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산들바람이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고, 지나치게 따갑지 않은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다. 드넓은 마당 위, 잘 관리된 잔디밭에 아름다운 아가씨가 탐스러운 털이 난 애완견과 함께 누워 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외국 영화잡지들이 있고, 가슴에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그 화면 위에서 생기발랄한, 톡톡 튀는, 싱그러운 젊음이 넘치는, 구김살 한 점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저택의 식모 문희다. 이 집 주인은 프랑스 대사로 프랑스에 가 있고, 안주인은 밤낮없이 자수만 놓는다. 그들에겐 병 걸린 딸이 있는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다. 대사가 아름다운 프랑스제 비옷을 선물해도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버리느니 차라리 식모에게”라며 건네준 덕에 아름다운 비옷은 문희 차지가 된다. 쨍하고 햇살 따가운 한여름,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희. 드디어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고 마당으로 달려 나가 ‘비!’ ‘비!’ 를 외치는 문희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1966년 데뷔한 정진우 감독은 대사에 의존하기보다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며 감각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함과 그 뒤에 감춰진 그늘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은 문희에게 적역이었다. 감독은 그녀의 연기에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렸다. 문희는 비옷을 입고 나가 차량 정비공이지만 손님의 고급 외제차를 끌고 나와 자신을 대기업 직원이라 속이는 신성일을 만난다. 식모이지만 프랑스 외교관의 딸이라고 속이는 문희와 상승욕이 가득한 신성일은 비극으로 치닫는 청춘의 드라마를 완성한다.

하이힐 부대의 등장

후발 주자 남정임이라고 가만있었겠는가? 그는 데뷔 첫해에 ‘유정’‘학사와 기생’(김수용 감독, 1966), 단 두 편의 영화로 서울 관객 40만 명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됐다. 이 한 해에만 무려 15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시아영화제에서 신인 연기상을 타는 행운까지 누린다. 정진우 감독은 그녀를 주연으로 ‘초연’(1966)을 만든다. 남정임은 첫사랑 신성일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버리자 또 다른 남자 이순재와 사귄다. 신성일이 돌아와 남정임을 놓고 이순재와 한 치 양보도 없는 사랑의 결투를 벌인다. 두 남자가 병원에 입원하자 남정임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하다 둘 다 놓치고 만다. 이 영화에서 남정임은 당돌하다. ‘초연’ 이전의 여주인공은 두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면 괴로워했지만 남정임은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큰 눈을 또르르 굴리며 ‘어느 놈이 더 나을까?’ 저울질한다. ‘어쩌지? 둘 다 괜찮은데. 두 남자 모두 마음에 드는데, 일처이부(一妻二夫)는 안 되나? 하하하.’ 남정임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영화였다.



1966년과 1967년은 한국 영화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 엄청난 시대였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1966)가 개봉되자,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 여겼던 교양인들이 쌍수를 들고 항복했다. 흥행감독 김수용은 잇달아 문학작품을 영화화해 내놓았고, 젊은 감독 정진우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최고 스타 대우를 받으며 나날이 몸값이 높아지고, 건방진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 나왔다. 새로운 여배우의 등장과 신성일·신영균 등 남자 배우의 듬직한 지원, 그리고 감독의 왕성한 창작력. 이 모든 것이 합쳐져 한국 영화 최고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고은아·문희·남정임의 출현 전까지 우리 영화 중 여배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성춘향’(1961)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 세 배우의 등장으로 여배우 주연 영화가 대거 등장한다. 정진우의 ‘초우’와 ‘초연’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더욱 특별한 것은 관객을 억지로 울리려는 신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제 영화 관객은 고무신 부대에서 하이힐 부대로 바뀌었다.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신인 여배우 공모를 벌인다. 신인 공모에 당선되면 주연 여배우로 캐스팅할 뿐 아니라 덤으로 50만 원의 상금까지 줬다. 이제 스타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누구나 응모해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또 하나의 신인이 윤정희다. 영화 ‘청춘극장’(강대진 감독, 1967) 주연 여배우 공모에서 윤정희가 당선됐다는 신문 기사 옆에는, 고은아의 약혼 소식이 나란히 실렸다. 운명처럼 새로운 별이 뜨고 다른 별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고은아의 인기는 약혼 발표와 함께 주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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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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