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사모님法’ 만들어 ‘사법 구멍’ 막아라!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 변호사의 분노

  • 엄상익│변호사 eomsangik@daum.net

    입력2013-06-19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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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막강한 재력 덕분에 변호사의 조력과 실세(實勢)의 지원을 받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는 현실을 개탄한다.
    •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이런 ‘구멍’이 있어도 되는 것인가.
    • 그들이 목숨을 빼앗은 여대생은 한 줌 재로 변해 납골당에 머물러 있는데….
    ‘사모님法’ 만들어 ‘사법 구멍’ 막아라!

    2003년 4월 15일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서 실시된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 현장검증. 2002년 3월 여대생 하모 양은 공기총을 맞고 살해됐다.

    SBS에서 전화가 왔다. 국회에서 ‘사모님법’이 발의되는 것과 관련해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다. ‘사모님’은 판사인 사위와 불륜관계라고 의심한 여성을 청부살인한 모 중견기업 회장 부인을 지칭한다.

    나는 그 사건에서 ‘살인 심부름’을 했던 남자를 변호했다. 그러니 드러내고 TV 화면에 나갈 주제는 못된다. 하지만 진실을 위해, 조심스럽게 사실과 그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를 세상에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광란의 청부살인극

    2002년 여대생 하모 양 청부살인 사건은 ‘회장 사모님’이 판사 사위에게 흠이 있는 걸로 알고 벌인 한바탕 광란극이었다. 회장의 회사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친척 회사를 먹은 것이라는 둥 주가조작의 명수라는 둥 부(富)의 축적과정을 놓고 갖은 의혹이 떠돌았다. 하기야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습디다”라고 사돈에게 으스댄 것이 회장의 인격이라면 의심을 살 만도 하다.

    회장은 국무총리와 골프를 치는 막역한 사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에겐 권력이라는 든든한 방파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판사 사위도 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판사에게 흠이 있다고 속삭였다.



    광란의 청부살인극이 빚어졌다. 사모님에게는 삼류 추리극을 흉내 낸 장난 같은 짓이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던 여대생은 뼈가 조각나고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차가운 야산에 시체로 버려졌다. 여기까지는 1막에 불과했다. 그 뒤가 더 놀라웠다.

    돈은 법정을 연극무대로 만들었다. 진실이 가짜로, 허위가 진짜로 둔갑하려고 했다. 나는 그 연극에 출연해야 했다. 이젠 그 기억들이 뿌연 청록색 안개 저쪽에 실루엣처럼 남아 있다. 그걸 꺼내어 세상이 궁금해하는 것의 일부라도 알려야겠다.

    황사가 뿌옇게 도심을 점령하던 날 구치소를 찾아가 다른 사건으로 내가 변호하고 있던 한 살인범을 만났다.

    “변호사님, 족집게처럼 살인범을 감별하는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제가 있는 방엔 살인범들만 있는데, 잠이 들면 다들 가위에 눌려 끙끙거려요. 죽은 사람이 귀신이 돼, 살인범들의 꿈에 나타나요. 잘 자는 사람은 살인하지 않은 거죠. 그런데 같은 감방에 있는 한 친구를 보니까 불쌍해요. 재벌 회장의 사모님이 시켜서 살인 심부름을 했는데, 그 사모님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거예요. 이용만 당하다가 혼자 사형당할 것 같아요. 젊고 애도 있는데 안됐어요. 좀 멍청한 게 탈이지만요….”

    옛날에는 양반인 주인 대신 머슴이 전쟁에 나가고, 곤장도 맞아줬다. 지금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사장님이 운전을 하다가 뺑소니 사고를 내자, 기사가 대신 감옥에 가주는 것을 봤다. 사장이 밀수를 하다가 걸리면 자재부장이 뒤집어썼다. 교주들이 광신도를 시켜서 살인을 하고 자기는 법망을 빠져나갔다. 여대생 청부살인 사건도 비슷한 구조였다.

    돈이냐, 남편이냐

    어느 날 초라한 모습의 30대 후반 여성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살인범이 소개했다는 게 찜찜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번 와봤습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엄마예요. 죽은 여대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남편이 극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게 남편 잘못입니다.”

    괜찮은 사람이다. 아무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남이야 어떻든 내 가족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이다.

    “남편에게 살인을 부탁한 회장 사모님이 변호사를 붙여줬어요. 그런데 그 변호사가 남편 스스로 범행한 것으로 조작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될까요?”

    여자의 예민한 감각은 이미 본질을 꿰고 있었다.

    “회장 부인은 무죄가 되고, 남편은 사형될 가능성이 있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장 사모님은 제가 총대를 메면 50억 원을 주겠다고 하시는데요.”

    ‘남편이냐 돈이냐’ 양자택일이라는 얘기였다. 그녀의 남편은 내복 장사를 하다가 망했다고 했다.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 남편은 회장 사모님의 기사로, 아내는 파출부로 일했다. 기사 자리를 구한 것은 사모님이 남편의 고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부부는 고모를 “고모”라고 부르지 못하고 “사모님”으로 불렀다.

    “솔직히 진실을 털어놓고 각자 지은 죄만큼 대가를 치르는 게 어떨까요. 정직하면 그 보답을 받지 않을까요?”

    부부가 진실을 말해야 정의가 산다. 자백하면 정상참작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진실 쪽에 서기로 결심하고 나를 선임했다.

    아내의 용기, 남편의 자백

    구치소로 가서 그녀의 남편을 만났다.

    “왜 사람 죽이는 심부름을 했죠?”

    “중간에 괜히 껴 버렸어요. 나쁜 짓이긴 하지만 돈 받고 계약을 했으니 이행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속으로 경악했다. 도덕관념이 약했다.

    여대생 살인범의 아내가 나를 변호사로 선임한 이유는 이랬다.

    “사모님은 대형 로펌의 변호사들을 붙여, 자기는 미행만 시켰지 절대로 살인은 교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쪽 변호사님이 제게 법정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했어요. ‘작전을 잘 짜야 한다’는 거예요. 남편이 뒤집어쓰고 사모님을 빨리 빼내야 저도 살 수 있다는 거죠.”

    수사 기록을 보면 남편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말을 바꾸는 무척추동물 같았다. 그의 아내가 설득해서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 가난하지만 양심적인 그의 처가 아니었으면, 이 사건은 평범한 상해치사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공판정은 회장 부인의 응원단과 그들의 변호사들로 꽉 차 있었다. 회장 부인은 자신을, 검사의 공명심 때문에 억울하게 얽혀든 불쌍한 여자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검사도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부부가 진실을 얘기하기엔 너무나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친척들도 가난한 그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기로 한 아내가 판을 뒤엎기 위해 증언석에 앉아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남편이 베트남에서 잡혀오기 전이었어요. 사모님이 지방에서 저를 보자고 했어요. 사모님은 어찌나 치밀한지 기록이 남는 비행기는 절대 타지 않았어요. 남의 이름으로 빌린 차나 버스로 다녔어요. 빌린 차를 길거리에 대놓고 제게 타라고 했죠. 챙이 넓은 모자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어요. 자신을 철저히 감추는 거죠. 인사를 했는데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녹음할까봐 그런 거죠. ‘제가 남편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용기를 내서 따졌죠. 그러다 언성이 높아졌는데 ‘어디 이따위 버릇이 있냐’면서 따귀를 때리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 시누이의 남편을 통해 연락이 왔어요. 총대를 메주면 50억 원을 주겠다고요.”

    목숨을 건 폭로였다.

    그녀는 이 사건에서 이상한 게 있다고 했다. 여대생의 머리에 총을 여러 발 쏜 건 원한의 표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모님이 직접 쏜 걸로 짐작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회장 부인이 팔짱을 낀 채 비웃는 얼굴로 듣고 있었다.

    나는 회장 부인을 보면서 물었다.

    “총대를 메주면 50억 원을 주겠다고 흥정하셨다면서요?”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마슈. 저것들이 오히려 돈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50억 원이 아니라 5억 원만 줘도 저것들은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니까.”

    회장 부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녀에게 ‘저것들’은 하찮은 미물이었다. 재판장은 죽은 여대생의 뼈가 세 동강이 난 사실을 추궁했다. 죽기 전에 잔인한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안 했다. 회장 부인이 재판장에게 넉살 좋게 변명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어떻게나 언론몰이를 하는지, 방송에서는 벌써 내가 살인을 사주한 걸로 기정사실화했어요. 검찰은 그 내용대로 나를 몰아쳤고요. 제가 딸에게 평생 죄인이 됐습니다. 엄마가 구속되어 있는 걸 알면 시부모나 남편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요? 우리 딸은 정말 순수합니다.”

    ‘사주’라는 단어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아니면 잘 쓰지 않는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돈에 오염된 변호사가 입력시켜준 말들이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사모님의 살인 심부름을 한 남자가 증인석에 올랐다. 살인교사냐, 아니냐는 그의 입에 달려 있었다. 정의가 실현되려면 그가 진실을 토해내야 했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사모님이 살인청부업자를 알아보라고 해서 심부름을 했고, 그 여대생을 죽이는 현장에도 가서 직접 확인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사모님이 두려운 듯 벌벌 떨었다.

    서릿발 같은 사모님

    사모님 측 변호사가 그를 다그쳤다.

    “지금 말 한마디 잘못한 것 그 자체로 처벌 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 아시죠?”

    흔히 하는 위증에 대한 경고였지만, 그에게는 협박처럼 들렸을 것이다.

    “평소 회장 사모님을 어떻게 생각했죠?”

    다시 사모님 변호사가 물었다.

    “재산도 많고, 자식들 학벌도 좋고, 판사가 사위라 부모님같이 존경하며 항상 우러러보면서 순종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고 하는 입에 발린 말이다. 옆에 앉은 사모님이 독사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래서 나를 이렇게 하는 거니?”

    바늘 같은 사모님의 눈초리가 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죠?”

    사모님의 변호사가 물었다. 그가 옆에 있는 회장 부인을 보면서 당황해서 더듬었다.

    “지…, 지금도 존경합니다.”

    아니었다. 그들 부부는 속으로 회장 부인에게 한이 맺혀 있었다. 그걸 드러내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결혼할 때 사모님이 식장에 오셨나요?”

    조카의 결혼식에 고모가 오는 건 당연했다.

    “사모님은 바쁘셔서 못 오셨어요.”

    그는 눈치를 보며 얼버무렸다. 방청석의 아내와 회장 사모님 사이에서 흔들리는 약한 모습이었다. 법정 한구석에선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외로운 섬’같이 앉아서 그 광경을 영원히 새겨놓으려는 듯 사모님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딸보다 그가 먼저 청부살해의 대상이었다. 사모님의 명령을 받은 살인범들은 여러 차례 그를 죽이려 했었다. 독극물을 탄 주스를 먹이려고 했고, 골목길에서 벽돌로 머리를 내리치려고도 했다. 공판이 끝나고 여대생의 아버지에게 살인범의 아내를 데리고 가서 진실을 말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분노와 한으로 검게 죽어 있던 그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딸의 죽음을 보고 ‘세상에는 귀신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딸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가 달려갔어요. 제가 보는 순간 죽은 딸아이가 갑자기 한쪽 눈을 뜨는 거예요. 한이 맺혀서 아빠, 엄마가 갈 때까지 영혼이 거기 있었나봐요. 제 손으로 그 눈을 감겨줬어요. 정말 시간을 쪼개면서 바쁘게 살던 아이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다 가려고 새벽시간까지 아껴 쓴 것 같아요. 저는 그 사람들이 딸의 얼굴에 총을 쏜 줄 몰랐습니다. 양미간에 구멍이 보여서 그냥 뭔가에 찔린 줄 알았어요. 경찰이 이미 얼굴의 피를 닦아놓았어요. 정말 당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남자의 진술에 따라 공판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연막이 진실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살인범이 참회하고 진실을 얘기하면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는 합의서를 써 줄 것 같았다.

    ‘사모님法’ 만들어 ‘사법 구멍’ 막아라!
    “사형을 선고해주십시오”

    그리고 드라마보다 더 치열한 심리(審理)가 있었으나 그 기나긴 과정은 생략한다. 모든 게 끝나고 정성윤 검사의 논고가 시작됐다.

    “오랫동안 검사생활을 해오면서 이렇게 뻔뻔스럽고 소름끼치는 여자를 처음 봤습니다.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고 범인들이 해외로 도피했을 때 수사검사였던 저는 회장 부인에게 살인혐의를 걸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장 부인이 검사실로 찾아와 ‘빨리 범인이 잡혀서 진상이 드러났으면 한다’며 교양 있는 지도층 인사를 가장했습니다.

    조카가 용의자로 잡혀오자 회장 부인은 검사실을 다시 찾아와 마치 가문이 망신이라도 당한 듯 한탄했습니다. 이 여자가 살인청부자금을 현찰로 만들어 전하는 모습은 007 영화를 방불케 합니다. 한번은 실수로 10만 원짜리 수표를 준 적이 있습니다. 기겁을 하고 수표를 바로 회수하고 단돈 1원까지 현찰로 줬습니다. 검사실에 와서 너무 억울하다고 우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회장 부인이 살인을 지시한 게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혐의는 배제하고 체포 감금 정도로만 조사했습니다. 검사 앞에서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뒤로는 범인들을 베트남으로 도피시켰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자신은 무관한 것처럼 말하게 하고 그걸 녹음해 증거로 확보해뒀습니다. 그러면서 검사인 제게 접근해 천사같이 행동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람을 죽여 놓고도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소송에 걸리자 오히려 그 많은 재산을 빼돌리기 바빴습니다.”

    정 검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범죄에 분노하는 검사가 있어야 정의가 산다. 검사가 소리쳤다.

    “재판장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악마를 보십시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 여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사형을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의로운 검사였다. 이렇게 소금 같은 사람이 곳곳에 있어 우리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회장 부인 측 변호사가 일어나 살인 심부름을 한 조카의 자백을 공격했다.

    “살인교사의 증거는 오직 운전기사의 진술뿐입니다. 그가 고백한 진실은 순수한 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어눌한 모습을 하면서 철저하게 계산된 얘기입니다. 신빙성 없는 그의 거짓만으로 유죄를 선고할 수 없습니다. 검사는 재판부가 확신을 가질 정도의 입증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회장 부인 측 응원단에서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회장 부인의 최후진술 차례가 됐다. 그녀는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난간을 잡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도와 표정 변화가 영화배우 뺨치는 것 같았다.

    “환갑이 되어 이렇게 법정에 섰습니다. 판사 사위의 명예를 실추하고 법조계에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억울한 수감생활을 하느라 병을 얻었고 가족에게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됐습니다. 회한만 가슴에 사무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 검사가 쓴 더러운 삼류소설을 보지 마시고, 현명한 판단으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저 또한 딸을 가진 부모입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는 저주받을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제2의 피해자가 되어 이렇게 서 있지 않습니까….”

    모든 심리가 끝났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유죄와 무죄가 갈릴 수 있었다. 이랬다 저랬다 했던 운전기사 조카의 말 중에 재판부가 어떤 걸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재판부에 대한 로비가 치열했을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들었다.

    공판이 끝나자 회장 부인은 마치 경기에 출전한 선수처럼 방청석의 응원단에게 미소를 지으며 “내일 면회들 와”라고 말했다. 구석에서 돌같이 지켜보던 여대생의 아버지가 오열했다.

    “제 딸을 죽인 저 여자도 죽어야 합니다.”

    그는 재판 때마다 딸이 선물했던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살인 심부름을 했던 남자의 처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속삭였다.

    “사모님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감옥에서 꼭 나올 여자입니다. 석방되면 반드시 저를 죽이려 할 거예요.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변호사님도 앞으로 조심하세요.”

    그냥 겁먹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사건에서 손 떼주세요”

    선고일이 됐다. 신영철 부장판사가 회장 부인에 대한 판결 이유를 밝혔다.

    “피고인은 자신의 가정과 딸만을 위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의심만으로 살해 지시를 하고, 살해과정도 죽은 여대생에게 분쇄골절이 있는 걸 보면 상당한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이 사건은 판사인 사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장모가 의심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오해를 풀도록 노력하는 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판결 이유를 말한 후 결론을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재판부에선 사형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꺼리는 게 요즈음의 추세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법관 생활을 하면서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습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피고인들을 모두 무기징역에 처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사형까지 갔다가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러나 남자도 똑같은 무기징역을 받았기에 나는 곤혹스럽게 됐다.

    “자백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으면 어떻게 해요? 이럴 거면 차라리 사모님이 부탁한 대로 말을 맞춰줄 걸 그랬어요.”

    살인 심부름을 했던 남자가 구치소를 찾아간 내게 항의했다. 나는 진실하면 형이 감경될 거라고 부부에게 확신을 줬었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들의 진실을 고백이 아니라 계산으로 보았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도 계산으로 한 엉거주춤한 참회에 합의서를 써줄 수 없었다고 내게 솔직히 털어놨다.

    살인 심부름을 한 남자의 아내는 가난하지만 바른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가득했다. 목숨을 걸고 진실을 택한 걸 후회하는 것 같았다.

    “변호사님, 앞으로는 이 사건에서 손을 떼주세요.”

    그녀의 말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5년이면 지워지는 법원 기록

    시간이 흘렀다. 회장 집안은 여전히 잘 사는 것 같았다. 사업이 번성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위도 계속 법관으로 활동했다.

    그들의 다음 공작이 영화 장면같이 펼쳐졌다. 지방 작은 도시의 법원을 택해 재심을 신청할 것이다. 작은 법원의 단독판사라면 주무르기 쉽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살인자 두 명은 증인으로 나가 사모님의 말에 입을 맞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검의 검사는 가만히만 있어도 손해볼 게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회장 측은 어떻게든 형 집행정지를 받아내려 할 것이다.

    법원 기록은 5년이면 폐기된다. 시간이 지나면 법정에서 있었던 모든 구린내가 증발해 없어지는 것이다. 그때 사모님은 감옥에서 나와 ‘검은 웃음’을 흘리며 세상을 활보할 것 같았다.

    이 사건에서는 나만 듣고 보고 느낀 귀중한 것이 많았다. 잊히기 전에 나는 그것들을 기록해둘 필요가 있었다. 논객 조갑제 씨가 나의 글을 ‘여대생 살해사건’이란 제목을 붙여 책으로 내줬다. 나의 불길한 예상들이 족집게처럼 적중했다. 어느 날 지방도시의 검사가 나를 소환했다. 나는 갑자기 피조사자 신분이 됐다.

    “당사자들은 그런 말들을 전혀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왜 이런 글을 썼습니까.”

    검사가 다그쳤다. 살인범들이 말을 바꾼 것이다.

    “저는 들었습니다. 보았고 또 느꼈죠.”

    “재미를 위해 창작하신 허구가 아닌가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증명해보시죠.”

    “제가 왜 증명해야 하는 거죠?”

    “살인범들이 위증을 했다고 자백했기 때문이죠.”

    “진실게임은 앞으로 법정에서 검사님이 직접 하셔야 할 몫일 것 같네요.”

    나는 검사가 정의로운 사람이기를 기도했다. 내가 조사받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 사람들은 재심을 신청하고 형 집행정지를 받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이 붙어 있는 날까지 그 악마들과 싸울 겁니다.”

    나는 재심을 맡은 지방법원장을 만났다. 공정하게 재판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법원장은 “그 사건을 단독판사에게 배정했는데, 다시 배당해서 신중한 심리를 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느새 회장 사모님은 형 집행정지가 되어 감옥 대신 큰 병원의 좋은 병실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었다.

    도대체 회장 부부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2006년 회장과 국무총리의 골프 로비 의혹 사건이 터졌다. 골프는 사모님이 징역을 살고 있을 때 쳤다고 했다. 회장이 총리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의혹이 일었다. 국회에서 쟁점이 되고 연일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회장과 실세 총리의 막역한 관계, 사모님의 재심, 형 집행정지, 그리고 검찰 조사는 연관 없이 일어난 우연일까. 회장 부부는 집에 현찰을 감춰두고 뇌물이나 범죄에 사용했다. 그 돈을 아내가 살인 자금으로 쓰는 걸 회장은 몰랐을까.

    세상은 악마 쪽이 우세한 것 같았다. 재판은 게임이다. 30년 변호사를 하면서 법정에서 악마가 더 논리적이고, 돈도 많다는 것을 많이 봤다. 판사들은 막연한 진실을 밝혀내기보다는, 상부로부터 깨지지 않을 논리와 그럴듯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을 더 중히 여기는 듯했다.

    논리 조작으로 먹고사는 게 변호사다. 악마 변호사 팀은 흑을 백으로 바꾸고 승리의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들끓는 여론

    허위가 진실을 밀어내고 가짜가 진짜같이 판을 친다. 꿈과 희망이 가득했던 죽은 여대생만 납골당에 재가 되어 있었다. 회장 부인이 감옥을 빠져나와 편안하게 지내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가 외로운 1인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악마의 세상은 아닌 것 같았다. 국민적인 분노가 폭발했다. 방송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사모님을 고발했다. 글을 올려놓았던 나의 블로그에 130만 명이 방문해서 들끓고 있었다. 대중의 분노가 쓰나미같이 몰려왔다.

    국회에서 사모님법을 만든다는 연락이 왔다. 돈이 있다고, 권력자를 안다고 함부로 형 집행정지의 특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자는 게 취지라고 했다. 죄를 지었으면 참회를 하고 그 대가를 꼭 치르게 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게 정·의·로·운· 사·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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