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작성 시점부터 불공정 거래가 만연한 이유는 원도급사가 우월적 지위에 있는 탓이다. 공사에 참여하려는 하도급사는 많지만 원도급사는 적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불공정 거래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의 유찰로 저가 하도급 유도
건설 경기가 악화된 이후 전문건설사들은 “원청사들의 불공정 하도급 행위로 고사(枯死) 위기에 놓였다”고 아우성이다. 한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는 “하도급업자인 전문건설사들은 경기 침체에 따른 어려움에 불공정 거래 관행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불공정 하도급 행위는 공사발주 단계에서부터 계약서 작성, 공사 이행과 마무리까지 시공 전(全) 과정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건설조합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시공 능력 100대 종합건설업체 중 23개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거나 법정관리를 받고 있고, 이들 업체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4100여 개 하도급사까지 동반 부실로 이어져 부도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2004년 39.1%였던 중소건설사의 공사 수주 비율은 2010년 30.5%로 급감했고, 2012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내거나 자진폐업한 전문건설업체는 360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건설사의 평균 영업이익률 역시 -6%로 급감해 ‘일하고 돈 못 버는’ 상황에 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건설사들이 적자 공사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초저가로 하도급 대금이 결정되는 구조에서 기인한다. 하도급업체를 선정할 때 원도급자들은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가격보다 높은 금액으로 하도급사들이 입찰에 참가하면 고의로 유찰시킨다. 그 후 2~3회 재입찰을 실시해 초저가 하도급을 유도한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최저가 낙찰을 받은 하도급업체들은 원청사로부터 다음 공사에서 손실 보전을 약속받고 공사에 참여하지만, 손실 보전 약속은 구두선에 그치기 일쑤다.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건설 현장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며 “다음 공사에서 손실을 보전해주겠다는 원청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전문건설사는 드물다”고 단언했다. 유찰에 따른 재입찰이 일상화하면서 원도급 공사금액 대비 하도급공사 금액은 공공공사의 경우 64.6%, 민간공사는 66.4%로 평균 65%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원도급 낙찰률조차 발주공사 금액의 70%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10년간 최저가 발주공사의 원도급 평균 낙찰률은 69.1%였다. 1억 원 발주공사의 원도급 낙찰금액은 평균 7000만 원이 안 되는 수준에서 결정됐고, 하도급 계약 금액은 7000만 원의 65% 수준인 4550만 원 선에서 하도급 공사가 이뤄지는 셈이다.
‘위약벌’ 조항에 이중고
더 심각한 문제는 하도급계약 자체가 불공정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국내 굴지의 D사는 ‘전쟁 또는 사변, 지진, 폭동, 반정부 시위 등의 불가항력적 상황으로 인한 공사 진행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갑(D사)은 별도의 이행 최고 없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도급사와 계약을 맺고 있다.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는 “전쟁이나 지진 같은 불가항력적 상황 때문에 공사 이행을 못해도 그 책임을 모두 하도급사가 지도록 한 계약서는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시한 표준하도급계약서는 계약 해제 또는 해지를 위해서는 ‘서면으로 상당한 기간을 정해 계약의 이행을 최고한 후 기간 내에 계약이 이행되지 아니하는 때에 당해 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해제 혹은 해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표준계약서 내용이 전혀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전문건설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하도급계약 때 발생하는 대표적인 불공정 행위는 공사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부담을 ‘특수조건’ 등의 명목으로 하도급사에 전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사 이행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민원처리 비용과 야간, 돌관작업(24시간 공사), 산재처리 비용까지 모두 ‘특수조건’으로 간주하고 하도급사 책임으로 돌려 원청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
서울 강북에서 활동하는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하도급 계약을 체결할 때 원청사들은 각종 특약조건을 내걸어 공사 도중 발생할 수 있는 추가 비용을 보전해주려 하지 않는다”며 “불공정한 하도급 계약서는 결과적으로 하도급 대금 감액 수단으로 악용된다”고 폭로했다.
1군 건설업체인 D사가 건설 현장에서 하도급계약 때 사용한 계약서에는 특수조건으로 ‘위약벌’ 조항을 두고 있다. 공정위가 제시한 표준하도급계약서는 ‘계약이행 및 공사대금지급보증’을 규정한 제7조에서 “을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여 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해제 또는 해지한 경우, 갑은 계약의 해제 또는 해지에 따른 손실에 상당하는 금액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도급사가 공사 이행 의무를 다하지 않아 계약을 해제하거나 해지할 때에는 그에 따른 손실분만큼의 금액을 청구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D사는 이 조항에 ‘위약벌’이란 특수조건을 붙였다. D사가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하도급계약서에 따르면 “계약이행보증금은 갑에게 실제 발생한 손해와 관계없는 위약벌로 하며 계약 위반시 공정률과 관계없이 을은 갑에게 계약이행보증금을 전액 납부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다시 말해 D사와 하도급계약을 체결한 하도급사는 공사 도중 계약 해제 또는 해지를 당하면 공사 과정에 투입된 비용 외에도 위약벌로 ‘계약이행보증금’ 전액을 납부해야 한다. 전문건설업계는 이 같은 위약벌 조항이 원청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대표적 불공정 계약이라고 지적한다.
건설 현장에서 이뤄지는 불공정 거래는 불공정한 계약서 작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이미 투여된 것”이라며 “그럼에도 위약벌 조항 때문에 하도급사가 지출한 공사비는 공사비대로 날리고, 계약 해제에 따른 보증금까지 납부토록 하는 것은 원청사가 이중으로 착취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건설 현장에서는 원청사들이 위약벌 조항을 악용해 일부러 계약을 해제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다음은 한 전문건설 관계자의 증언이다.
“위약벌 조항은 원청사에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다. 위약벌을 적용하면 원청사는 최소 2배의 이익을 남긴다. 예를 들어 B하도급사가 A원청사에 10억 원의 하도급 공사를 받았다고 치자. B사가 1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공사를 진행한 뒤 계약 이행을 못하면 A사는 B사가 계약이행을 제대로 못했다며 계약을 해지한다. 이 경우 B사가 투입한 1억 원만큼의 공사 시설물은 그대로 남고, 거기에 더해 A원청사는 계약서에 명시된 위약벌 조항을 적용해 보증금까지 챙길 수 있다. A사는 이후 C하도급사와 하도급 계약을 맺어 공사를 이어가면 된다. 극단적인 예지만 위약벌 조항은 우월적 지위에 있는 원청사가 얼마든지 악용할 소지가 있다.”
계약조건 변경도 다반사
전문건설업계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위약벌 조항은 그 자체로도 불평등할 뿐 아니라 원청사가 도덕적 해이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나쁜 조항”이라며 개선을 요구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1월 원청사들의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해 건설업 표준하도급계약서 전문을 개정했다. 개정된 표준계약서에서는 ‘하도급계약의 추정’ ‘부당한 하도급대금의 결정 금지’ ‘물품 등의 구매강제 금지’ ‘부당한 위탁취소 금지’ 등 약자인 하도급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 대폭 강화됐다. 그러나 일부 원청사들은 하도급사 보호를 위해 마련한 표준계약서를 실제 하도급계약 때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1군 종합건설사인 H사는 최근 표준하도급계약서 가운데 하도급사 보호를 위해 마련한 조항을 대부분 삭제한 채 하도급계약을 체결해오다 몇몇 하도급사로부터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당했다. H사를 공정위에 제소한 하도급사들은 “H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부당약관 사용을 강제하고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를 자행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며 “수십 년간 피땀 흘려 일궈놓은 사업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고 호소했다.
H사는 ‘특약조건’으로 모든 민원 처리를 을의 책임으로 전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H사의 하도급계약서는 특약조건으로 “을의 하도급 이행에 있어 필요한 대관 대민업무는 을의 비용과 책임으로 시행한다” “을은 하도급계약의 이행과 관련 민원이 발생 시는 동 공사 및 전체 공사의 이행에 차질을 주지 아니하도록 을의 비용과 책임하에 조속 처리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원청사들이 특약을 활용해 계약 단계에서 추가 비용을 하도급사에 떠넘기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전형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하도급 금액 산출내역서에 없는 항목을 현장설명서, 견적 특수조건으로 기재하는 경우 △도면이나 설계내역상 제외된 부분도 감독관이 원하는 대로 시공하도록 하고 금액을 조정해주지 않는 경우 △물가상승으로 인한 단가 변동이나 연동제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 △사유를 막론하고 ‘을’이 계약금액 변경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시공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을 넣는 경우.
‘권장사항’의 한계
공정위가 권장한 표준하도급계약서는 나 몰라라 하고 건설 현장에서 특수조건 기재, 계약서 변경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은 표준계약서 사용이 ‘권장사항’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현행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사업자 또는 사업자단체에 표준하도급계약서의 작성 및 사용을 권장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대한전문건설협회 실태조사에 따르면 하도급계약 체결에서 공정위 권장 표준계약서 사용 비율은 2010년 70.3%에서 2011년엔 75.4%로 상승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사결과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많다.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하면 공공공사 입찰이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동반성장지수 평가에서 가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하는 것처럼 ‘신고’는 하되, 실제 하도급사와는 이면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는 것.
대한전문건설협회가 지난해 13개 대형 종합건설사의 주요 하도급계약 126건을 분석한 결과, 표준하도급계약서 원안을 그대로 사용한 사례는 16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예 계약서를 사용하지 않은 사례가 25건이었고, 표준계약서에 특약을 덧붙인 변형 사례가 85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건설 현장에서는 ‘보고용 표준계약서’와 실제 공사에 적용할 ‘변형된 계약서’ 등 두 건의 계약서가 작성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표준계약서가 ‘무늬만 표준’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는 법 개정을 추진했다. 2012년 9월 노회찬 당시 의원을 비롯한 14명의 국회의원은 원청사(사업자) 등이 하도급계약을 체결할 때 공정거래위원회가 정한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사용케 하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전문건설사 관계자들은 “건설 현장에서 이뤄지는 불공정 거래 관행 대부분은 불공정한 계약서 작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표준하도급계약서만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해도 건설 현장의 불공정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데, 법 개정이 무산돼 아쉽다”고 말했다. 한 전문건설사 대표는 “고질적인 건설업계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을 고치려면 표준계약서가 작성되는지, 또 계약서 내용이 제대로 이행되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