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평밭마을 입구에서 주민들이 한전의 송전탑 공사 재개에 반대하며 진입로를 줄로 막은 뒤 농성을 하고 있다.
밀양송전탑반대주민대책위원회(이하 주민대책위)는 고압송전탑 건립 공사를 주민 생존권을 박탈하는 일로 인식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 인근에 초고압 송전선로가 들어서면 전자파가 건강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로 인해 주변 일대 땅값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따라서 건강과 재산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기장군 울주군 양산시 밀양시 창녕군 등 5개 시·군을 지나는 신고리∼북경남노선에 계획된 총 161기 철탑 중 약 43%인 69기가 밀양 지역에 들어선다는 사실이 밀양시민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동의도 없이 한전과 시공사가 건장한 용역인부를 고용해 물리력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바람에 시골 노인들이 발끈해 ‘내 고향 산천을 내가 지켜 후손에게 물려주겠다’며 생업을 전폐한 채 투쟁전선에 나선 것이다.
주민의 대척점에 선 한전의 처지 또한 절박하다. 2011년 9월 15일 전국적으로 사상 초유의 순환정전사태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올해 초 전력사용량이 겨울철 정점을 찍은 1월 13일 전력예비력이 419만kW로 예비율이 5.5%에 불과했다.통상적으로 예비전력이 500만kW 이하면 비상상황에 돌입, 전력수급 준비단계에 따라 ‘관심’‘주의’‘경계’‘심각’ 수준으로 상향된다. 한마디로 전력수급 비상상황에 돌입한 것이다.
국민권익위 중재도 해결 못해
한전은 당초 신고리 원자력 3호기 발전전력을 경남 창녕군에 위치한 북경남발전소까지 송전하기 위해 765kV 송전선로를 2012년 12월까지 준공할 예정이었지만 밀양 지역 일부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공사가 답보 상태에 있다.
한전은 이 송전선로가 경과하는 다른 지역(울산 울주군,부산 기장군,경남 양산시,경남 창녕군,밀양 청도면)은 초기에 반대가 심했으나 합의가 이뤄져 철탑공사가 완료된 상태인데, 유독 밀양에서만 반대가 심해 전력수급의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며 ‘블랙아웃(정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밀양 주민들을 압박하고 있다.
밀양 송전탑 갈등의 시작은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서경북~신충북으로 송전할 계획이 마련됐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한전에 의해 송전선로 노선이 북경남~서경북~신충북으로 급선회했다. 2005년 8월에야 경과지로 편입된 북경남의 밀양시 5개면(단장면, 산외면, 상동면, 부북면, 청도면)에서 주민설명회가 개최됐고, 이곳 주민들은 이때서야 고압 송전선로가 자신들의 마을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밀양시는 발끈했다. 이에 2009년 12월 국민권익위원회 산하 갈등조정위원회가 꾸려져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권익위 중재를 통해 제도개선위원회 구성과 초전도 케이블에 대한 포럼 등을 통한 합의안이 마련돼 주민과 한전 간의 갈등이 해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2010년 8월 한전 측은 밀양시장과 창녕군수 및 관계 공무원 등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하고, 이어 20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밀양시는 토지수용재결 신청에 따른 열람공고를 시행했다.이 공고 이행은 송전선로가 지나가는 지역 주민들의 토지를 한전이 강제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전국 100곳에서 송·변전시설 놓고 갈등
밀양시는 2011년 1월 17일까지 열람공고를 마친 뒤, 같은 해 1월 28일 토지수용재결 신청서 열람공고 결과를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제출했다. 주민들은 이에 강력 반발해 2011년 2월 8일 3만133명의 서명을 받아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토지수용심의보류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이를 보류했다. 이어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2011년 4월 1일 토지수용재결(강제수용)을 통해 한전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따라 한전은 같은 해 4월 4일 오전 8시부터 밀양지역 경과지 5개면의 철탑부지에서 공사 강행과 일시 중단, 공사 재개를 반복해왔다.
이 과정에서 지난해 1월 한전의 공사 강행에 반대하던 밀양시 주민 이치우 씨가 분신 사망하면서 주민대책위가 결성돼 현재까지 한전과 공사현장 곳곳에서 부딪치며 갈등이 격화됐다. 그 후 국회가 중재에 나서 지난 5월 29일부터 40일간 공사를 잠정 중단하고 전문가협의체를 구성, 쟁점을 조사 중이다.
한전과 주민대책위 간의 주요 쟁점은 전자기파의 위해성, 전력대란 공방 등 여럿이지만, 최대 쟁점은 우회로를 포함한 지중화(地中化) 문제로 귀결된다. 주민대책위는 고압 송전선을 땅속에 묻는 지중화 3대안(초전도체, 밀양구간 345kV 지중화, 울산-함양고속도로 지중화)을 한전에 강력하게 요구한다. 밀양시 단장면 82호 송전탑에서 부북면 132호 송전탑까지 송전선로를 땅속에 묻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전은 초전도체 지중화의 경우 변전소와 케이블 구조물 건설 등에 2조7000억 원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설계와 인·허가 기간을 제외하고 터널 및 케이블공사와 공구를 4개로 분할해 병행 시공한다 해도 완공까지 12년이나 소요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또 신고리~북경남 구간의 345kV 지중화 문제도 지중화 에 1조 원이 들고 완공까지 10년이 걸리는 등 시공기간 장기화에 따른 신고리 3, 4호기의 전력공급 불가로 전력수급 불안만을 야기할 뿐이라고 항변한다.
특히 함양~울산 간 고속국도 병행구간을 이용한 지중화 방안의 경우 1조4000억 원에 달하는 공사비용과 지반침하로 구조물 시공이 불가능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전력공급 시기는 2013년 말인 데 비해 도로건설 시기는 2019년으로 병행 시공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原電에 대한 국민적 컨센서스 필요
이에 반대대책위는 “지중화 비용 2조7000억 원과 공시기간 12년의 근거가 무엇이냐”며 정확한 자료 제시를 요구한다. 이를 근거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입장이다.
고압 송전선로 공사를 둘러싼 주민 반발은 비단 밀양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밀양과 인접한 경북 청도면 삼평리 주민 20여 명은 2012년 10월부터 주민의 건강권과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고압선로 지중화를 요구하며 23호기 건설현장 진입로 입구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북 군산의 군산산업단지와 새만금산업단지 간 송전선로 설치 사업 역시 2008년 이후 6년이 지났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현재 사업 진행이 중단된 상태다. 이를 비롯해 송·변전시설 건설을 둘러싸고 한전과 지역주민이 마찰을 빚었거나 빚고 있는 지역은 전국적으로 100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은 전문가협의체가 제대로 활동한다면 주민의 뜻이 반영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만에 하나 다수결을 앞세워 공사 강행 쪽으로 보고서를 채택한다면 다시 철탑저지투쟁에 나설 것이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반면 초창기 반대운동을 주도했다가 현재는 한전과의 협상을 강조하는 밀양 5개면 주민대책위는 “그동안 할 만큼 했다. 이제 송전탑 문제는 전문가협의체 결정에 따르고 생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송전탑이 지나가지 않는 읍·면과 밀양 시가지 주민 대부분은 7, 8년을 끌어온 이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끝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라도 전문가협의체의 공정한 활동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함께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가동에 대한 국민적인 컨센서스가 필요하다. 한전이 ‘송전선로 지중화 주장’을 원전 가동 중단 및 원전 폐기 정책으로 해석하고 공사를 강행한 것도 원전 가동정책, 나아가 원전 수출정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