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맥도날드 vs 버거킹

빅맥 對 와퍼, 패스트푸드 大戰

  • 조창현 |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입력2013-06-19 17: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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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날드 vs 버거킹
    2008년 세계적 오지(奧地)에 사는 태국 몽족,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루마니아 트랜실바니아 농부들 앞에 모양과 크기가 다른 햄버거 2개가 놓였다. 하나는 버거킹의 대표 메뉴 ‘와퍼’, 다른 하나는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 ‘빅맥’이었다.

    이들에게는 두 햄버거를 차례로 먹어본 뒤 더 맛있는 것을 골라달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테스트에 응한 이들은 한 번도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버거킹이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맛의 테스트’를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한 광고 이벤트였다.

    두 햄버거를 먹어본 이들은 최종적으로 버거킹이 만든 와퍼의 손을 들어줬다. 버거킹이 ‘와퍼 버진(처녀)’이라는 주제를 붙여 벌인 이 이벤트를 광고에 대대적으로 활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맥도날드와 버거킹 간의 버거 시장 광고전(戰)은 대학 광고 마케팅학의 대표적 비교광고 사례로 인용될 만큼 치열하다. 한번은 버거킹이 빅맥 상자에 와퍼를 담으려 했으나 상자가 작아서 와퍼가 들어가지 않자 ‘와퍼! 이 바보야, 그건 빅맥 상자야!(와퍼가 빅맥보다 크다는 것을 강조)’라고 핀잔을 주는 광고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걸 보고 가만있을 맥도날드가 아니다. 맥도날드는 햄버거 크기를 XL, L, M, S의 기호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며 ‘너희가 우리보다 크다고? 대신 우리는 칼로리가 낮지!’라고 반격을 가한다.

    버거킹은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로날드’ 아저씨가 긴 외투로 온몸을 가린 채 버거킹의 햄버거를 사 먹으려고 가게 앞에 줄을 서 있는 모습을 광고로 만들기도 했다. 버거킹의 햄버거가 로날드가 몰래 사 먹을 정도로 맛있다는 것을 표현한 비교광고다.



    맥도날드는 곧바로 더욱 자극적인 광고로 맞불을 놓았다. 한 소년이 맥도날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사서 공원에 앉아 먹으려는 순간 갑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 먹어치운다. 울상이 된 소년은 다시 햄버거를 사와 먹으려고 했으나 또 빼앗기고 만다. 결국 소년이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버거킹 봉투로 가리고 먹자 그제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간다.

    열정의 크록, 명석한 맥라모어

    맥도날드 vs 버거킹
    버거킹과 맥도날드의 불꽃 튀는 라이벌 의식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두 회사의 창업자인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 제임스 휘트먼 맥라모어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1954년 작은 주방용품 회사 영업사원이던 크록은 미국 전역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한꺼번에 5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멀티믹서를 팔았다. 하지만 성과는 기대만큼 시원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캘리포니아 주 샌베르나르디노의 작은 드라이브인 식당에서 멀티믹서를 8대나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란다.

    호기심이 발동한 크록은 이 식당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야 멀티믹서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햄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사려는 손님들이 줄을 지어 식당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크록은 순간 ‘이 식당을 전국의 도로변에 세우면 성공하겠다’고 확신했다. 이 식당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맥도날드(Mcdonald′s)’였다.

    당시 맥도날드는 햄버거, 치즈버거, 감자튀김, 밀크셰이크, 소다수 등을 판매하는 일반적인 식당이었다. 하지만 간편하고 효율적인 시스템과 청결한 분위기에서 싸고 맛있는 버거를 팔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록은 즉시 맥도날드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고, 쌍방은 매장 이름은 물론 메뉴, 매장 구조, 운영방식, 상징인 금색아치 등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맥도날드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크록은 당시 52세였다.

    이듬해 4월 15일, 크록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연고지인 시카고 디플레인스에 맥도날드 1호점을 개장하며 사업 첫걸음을 뗀다. 맥도날드를 만나기 전 크록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파란 많은 삶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사업에 재능을 보인 크록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5세 때 나이를 속이고 적십자 구급차 운전사로 처음 취직했다. 이후 종이컵 판매원과 피아니스트, 재즈뮤지션, 외판원, 라디오DJ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이에 반해 맥라모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 토머스 밀턴은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맥라모어가 다 자라기도 전에 전 재산을 잃는다. 아버지는 칠면조 농장 일을 시작해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어머니 마리안 플로이드 휘트먼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맥라모어는 졸업 후 레스토랑 매니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던 중 햄버거 프랜차이즈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코넬대에서 함께 공부한 데이비드 R 에저턴을 설득해 1954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 있던 ‘인스타버거킹’이라는 햄버거 가게를 인수했다.

    인스타버거킹은 한꺼번에 12장의 패티(햄버거에 들어가는 다진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인스타 브로일러’를 사용해 햄버거를 만들고 있었다. 맥라모어가 인수한 식당은 1953년 키스 J 크레이머와 매슈 번스가 설립한 햄버거 체인업체 인스타버거킹의 마이애미 가맹점이었다.

    맥라모어는 식당을 인수한 이듬해 각고의 노력 끝에 패티의 부드러운 육즙을 유지해주는 가스 그릴을 만들어내고, 곧바로 ‘버거킹’이라는 이름의 법인을 설립해 독립한다. 그가 28세 때였다.

    270만 달러에 맥도날드 꿀꺽

    크록의 맥도날드가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아니다. 장사는 잘됐지만 프랜차이즈 권리 사용료가 저렴해 본사 수입이 몇몇 지점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 적었다. 크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지역 매장을 본사가 소유하고 점주에게 장기 임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런 경영방식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사업 초창기 크록은 무엇보다 청결을 강조했다. 매일 아침 매장에 나가 직접 청소를 할 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맥도날드는 소비자에게 좋은 품질의 음식과 청결, 서비스를 완벽하게 제공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업을 차츰 확장하던 크록은 법인 설립 6년째 되던 1961년 맥도날드 형제에게 270만 달러를 주고 공동으로 갖고 있던 경영권을 독식한다. 그때부터 맥도날드는 급성장하며 글로벌 기업의 기틀을 하나하나 다져갔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의 마스코트인 어릿광대 ‘로날드 맥도날드’를 탄생시켜 미래 고객인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로날드는 한때 미국에서 산타클로스에 버금갈 정도로 어린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맥도날드의 고객 연령층이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이에 비해 버거킹은 상대적으로 10~30대까지의 젊은 층이 비교적 많이 찾는다.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서 경영권을 인수한 지 2년 만에 매장 수를 30개에서 500개로 늘리고, 1965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상장 당시 1주당 22.5달러의 평가를 받았던 주가는 불과 1개월 만에 2배로 뛰어올랐다.

    크록이 1961년 맥도날드 형제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것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흥미롭다. 맥도날드 형제는 당시 매출의 0.5%를 받기로 한 로열티와 ‘맥도날드’라는 상표권을 포기하는 대신 크록에게 현금 270만 달러를 요구했다. 자신들이 30년간 일한 대가로 세금을 떼고 각각 100만 달러씩 나눠 갖겠다는 계산이었다. 그해 맥도날드 형제가 받았던 로열티 금액으로 따지면 15년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큰 금액이었지만 크록은 주저하지 않고 돈을 건넸다. 맥도날드 형제는 돈을 챙긴 뒤 크록에게 사업권을 넘기고 미련 없이 은퇴했다. 만약 그들이 현금 270만 달러 대신 0.5%의 로열티를 계속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연매출(2012년 기준)을 대략 270억 달러로 계산했을 때 그들의 후손은 해마다 1억3500만 달러를 가만히 앉아서 거둬들였을 터. 그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셈이다.

    8년 만에 매장 수 6배 늘려

    맥라모어는 인스타버거킹 본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1959년 사업권 전체를 인수한다. 당시 인스타버거킹의 매장은 40여 개에 불과했다. 맥라모어는 경영권을 확보하자마자 미국 전역으로 가맹점을 확장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67년에는 매장이 250개까지 늘어났다. 불과 8년 만에 매장 수를 6배로 늘린 것이다. 1963년엔 푸에르토리코에 매장을 열며 첫 해외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맥도날드보다 4년이나 빠른 해외 진출이다.

    버거킹은 매장을 신속하게 늘려 규모의 경제로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맥도날드와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지역 단위로 사업권을 판매해 그 지역 실정에 맞춰 자유롭게 매장을 열도록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큰 성공을 거둬 미국은 물론 세계 전역에서 무서운 속도로 매장을 확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와 달리 맥도날드는 본사가 매장을 설치하고 일정기간 운영한 뒤 점주에게 매장을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맥라모어는 사업이 안정권에 들자 1967년 식품업체 필스버리에 경영권을 넘기고 자신은 1970년까지 CEO로 남는다. 이후 6년간 버거킹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경영에 관여했다. 그 뒤 버거킹은 주류업체 디아지오에 인수됐고, 현재는 미국 뉴욕에 있는 사모펀드 3G캐피털 매니지먼트가 경영권을 갖고 있다. 이는 맥도날드의 크록이 20여 년간 회사를 지키며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과는 상반된다.

    버거킹은 경영권이 자주 바뀌면서 맥도날드와의 경쟁에서 조금씩 뒤처졌다. 버거킹의 올해 1분기 실적은 매출 3억2770만 달러, 순이익 3580만 달러로 맥도날드(매출 66억1000만 달러, 순이익 12억7000만 달러)에 한참 못 미친다.

    미국의 경제지 ‘포춘’은 버거킹이 지난 23년간 CEO를 13번이나 교체한 사례를 들며 “빈번한 CEO 교체가 버거킹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러는 사이에 경쟁사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 업계 1위 자리를 굳혔다”고 평가했다.

    맥도날드는 창립 21년 만인 1976년, 세계 22개국에 4177개의 매장을 거느리고 총수입 10억 달러를 넘어선 거대 기업이 됐다. 1980년대에는 총수입 100억 달러에 매장 1만 개를 돌파했고, 2008년엔 119개국 3만1000개 매장에서 총수입 200억 달러를 기록했다.

    두 회사의 전쟁은 메뉴를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패스트푸드 시장은 특성상 그 시대가 원하는 트렌드를 재빠르게 따라가거나 앞서가는 메뉴를 내놓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만약 그런 메뉴를 개발하지 못해 뒤처졌다면 경쟁업체의 메뉴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맥도날드가 1968년 출시한 ‘빅맥’이 대표적이다.

    빅맥은 버거킹이 1957년 출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와퍼’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한 메뉴. 버거 사이에 ‘클럽’이라는 빵을 놓고 양쪽에 패티를 2장 끼워 넣어 만들었다. 와퍼에 길든 소비자의 입맛을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빅맥은 출시 1년 만에 50억 개가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와퍼와 빅맥으로 대표되는 두 회사의 경쟁은 날로 심해져 결국은 서로를 직접 깎아내리는 광고를 내보내기에 이른다. 일례로 버거킹이 ‘버거를 찾는 소비자는 와퍼를 가장 선호한다’는 광고를 내보내자, 맥도날드는 소고기가 20% 더 들어간 MBX를 출시해 ‘소비자가 와퍼보다 MBX를 더 좋아한다’고 광고했다. 경쟁상대와 직접 비교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광고 방식은 이전에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기법이었다.

    빅맥-와퍼 다음엔 커피 싸움?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경쟁구도는 최근 커피사업으로까지 번졌다. 맥도날드가 경기침체 이후 맥카페를 출시해 커피와 음료를 아침식사 메뉴에 곁들여 싼값에 판매하자 버거킹도 커피 메뉴를 강화해 승부를 걸고 있다.

    버거킹은 최근 커피 전문 업체 스타벅스의 자회사 시애틀베스트커피와 원두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기존 5가지의 커피 메뉴를 10가지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아침 메뉴도 보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응해 맥도날드는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햄버거와 음료를 속속 내놓고 있다. 또한 인테리어를 현대식으로 교체하고 영업방식도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바꿨다. 지난해에는 중국 시장에 진출해 250개의 매장을 열었으며, 올해 말까지 1700~2000개로 늘릴 계획이다. 현재 맥도날드의 주가는 100달러 선이고, 시가 총액은 1000억 달러에 달한다.

    버거킹은 2011년 매출 기준 3위 업체이던 웬디스에 2위 자리마저 빼앗기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버거킹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구조조정의 달인 베르나도 히스가 2010년 버거킹월드와이드 CEO로 부임하면서 마이애미 본사 직원 600명 중 절반을 해고하고 불필요한 공간을 줄여 운영경비의 30%를 절약하는 등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덕분이다. 그는 스무디와 샐러드 등 메뉴 다양화를 통해 매출 회복을 이끌었다.

    최근엔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다이넬 슈워츠를 CEO로 임명해 히스의 뒤를 잇게 했다. 2010년부터 버거킹의 재무를 담당한 슈워츠는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에서 높은 성장을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현재 튼튼한 사업전략이 있고 이는 변동이 없을 것이다. 버거킹은 해외시장은 물론 북미지역에서 이룰 것이 아직 많다”며 미래를 낙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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