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심신환은 화증을 치료하는 보약이다. 진짜 열이 아니라 허화(虛火)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잘 놀라면서 뼈와 살이 말라들어가는 증상 치료에 적합하다. 허증을 기반으로 처방했다는 건 정조가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여름이 되면 소화기능이 떨어지듯 정조는 열이 나서 음식을 챙기지 않았다. 대다수 임금이 하루 5번 음식을 먹었지만 그의 행장에 따르면 하루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고 한다.
청심연자음도 마찬가지다. 연꽃의 씨앗인 연밥이 주재료인 처방이다. 연꽃이 마음의 평정을 이루듯 번뇌를 씻어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보양하면서 허한 증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이다.
首醫 강명길의 인생유전
가미소요산은 정조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애용한 처방이다. 이는 ‘장자(莊子)’의 ‘소요유편(逍遙遊篇)’ 내용과 관련이 있다. 큰 물고기가 대붕(大鵬)이 되어 우주에서 날개 치는 이야기인데, 소요산을 복용하면 마음이 상쾌해져 넓은 천지에 대붕이 자유롭게 날개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가미소요산은 본래 부인에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생리 전에 화를 내거나 어깨결림, 두통, 불면, 변비 증상이 있을 때 효험이 있다. 주로 갱년기 여성의 열이 오르는 증상에 쓰는 약을 강명길이 추천해 복용함으로써 정조는 신기한 효과를 봤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에 갱년기 증세가 포함된 것을 파악한 강명길은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 저작을 기획한다. 정조 23년 완성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그 결과물이다. 동의보감의 최종 업그레이드판인 이 책은 흔히 강명길의 저작인 줄 알지만 정조가 만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란 책의 증보판이다.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영조의 수발을 위해 10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한 것은 진맥에 대한 비결과 탕약에 대한 이론이다. (…) 몇 차례에 걸친 수정을 거듭한 끝에 제중신편을 완성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만큼 강명길을 감쌌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과 채홍원이 발의해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힌 일이 있다. 정조는 가장 사랑하던 정약용이 “재결(災結·자연재해를 입은 전답)은 훔쳐 먹고 군보(軍保·군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정군의 복무 비용을 부담하는 장정)에게는 첨징해 허다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용서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그를 탄핵했음에도 강명길을 귀양 보내는 척하다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켰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았다. 초기의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인삼을 기피했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을 합한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조는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 사후 강명길은 노륙(·#54906;戮)형에 처해졌다. 본인은 극형에 처하고 아들은 외딴섬으로 보내는 것인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게 된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벌이었다. 정조의 신임 아래 최고의 권세를 누린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떨어졌다.
종기 치료하는 우황

정조가 몸의 열을 내리기 위해 애용한 금은화(왼쪽)와 평소 즐겨 먹던 깍두기의 재료인 무.
쓸개즙은 본디 검은색이지만, 약간 희석하면 푸른색이 되고 많이 희석하면 노란색이 된다. 황달은 소장으로 빠져나와야 할 담즙이 나오지 못하고 역류해 전신의 혈액으로 퍼지면서 희석된 담즙의 색깔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한의학에선 아이들이 놀랐을 때 푸른똥을 싸는 것을 담이 놀라 차가워지면서 반쯤 희석된 상태로 파악한다. 음식을 입에서 씹고 위에서 반죽하고 나면 자연 그대로의 색을 띤다. 밥은 흰색, 홍당무는 붉은색, 김은 검은색이다. 그러나 대변은 황금색이다. 반죽된 음식이 소장을 통과할 때 쓸개즙이 골고루 침투해 완전히 삭혀지면서 누렇게 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