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의미는커녕 줄거리조차 파악 못할 대여섯 살 때다. 스크린에서 주인공이 클로즈업 될 때 화면 속 어마어마하게 큰 얼굴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깜짝 놀라 뒷좌석으로 옮겨 앉은 기억이 생생하다. 흑백영화로, 중간 중간에 총소리가 들리고, 여주인공의 오빠가 누군가를 죽이는데 희생자가 여주인공의 애인이던, 그런 스토리였다.
영화가 끝날 때쯤 주제곡이 나왔다. “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 버림을 받았을 땐 죽음을 생각했다/ 아련한 추억 속에 미련도 없다만/ 너무나 빨리 온 인생의 종점에서/ 속절없이 속절없이 꺼져만 가네.” 훗날 성장해서야 알게 된 그 주제곡은 최희준이 부른 ‘종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종점이 주는 의미에 대해 가끔 생각했다. 종점.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끝에 왔다는 말이 아닌가. 이 두 음절이 주는 깊고 절망적인 뜻에 사람들은 가끔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낀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산업화 시대의 정서와 맞지 않는 퇴영적인 노랫말 때문에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종점 다방’이나 ‘종점 주점’이란 간판을 보면 물기 어린 비감에 젖어든다.
종점, 그 물기 어린 悲感
이 데카당한 단어인 종점을 개발연대 한국인들에게 보다 구체화한 것은 ‘마포종점’이란 노래다. 고향을 등지고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살게 된 사람들은 마포종점이 어디 있는지, 또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이 노래는 개발기인 1960~70년대를 서울에서 보내거나 서울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호소력을 지닌다.
입학 또는 취직 때문에 뒤늦게 이 거대한 도시에 합류한 사람들은 가끔 등장하는 ‘그때를 아십니까’ 류의 복고 시리즈물에서도 서울 풍경에는 대개 흥미를 잃는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런 다큐멘터리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는 것과 같다. 1970년대 말 대학 시절을 시작한 나 역시 남의 얘기 같던 서울의 풍경들이 언제부턴가 내 얘기가 되면서 비로소 나이 듦과 함께 서울이 제2의 고향으로 굳어짐을 실감한다. ‘마포종점’은 바로 이 같은 변화를 확인해 주는 상징적인 매개체가 된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가사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 외로움, 슬픔 등 인간의 온갖 페이소스가 서려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듀엣 ‘은방울자매’가 부른 노래다. 그러나 노래엔 은방울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도시의 변두리 전차 종점이 던지는 슬픔, 서러움이 배어 있다.
서울을 노래한 또 다른 노래가 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서울 사람은 물론 한국 사람 모두가 아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다. 1960년대 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한 노래들이지만 정한은 너무 다르다. ‘서울의 찬가’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황당한 노래다. 그 시절, 서울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새들이 떠나가고 먼지와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가 아니었나. ‘마포종점’은 ‘서울의 찬가’의 대척점에 있는 노래다. 저마다 살기 위해 서울에 몰려들었지만, 수도 서울을 동서로 오가던 전차 종점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던 변두리 서울 사람들의 현실적인 슬픔과 지친 삶의 고단함을 노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