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흔적도 추억도 사라진 곳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은방울자매 ‘마포종점’

  • 글·김동률 |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석재현 | 대구미래대 교수, 사진작가 | 동아일보

    입력2015-08-20 0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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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점. 기차든 버스든 더 나아가지 못하고 내려서야 하는 곳. 비약하자면 인간의 삶에도 해당되는 무섭고 소름 끼치는 단어다. 그래서 종점을 포함하는 단어는 대개 퇴폐적이고도 말세적인 느낌이다.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에도 은방울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도시의 변두리 전차 종점이 던지는 온갖 슬픔, 서러움이 배어 있다.
    흔적도 추억도 사라진 곳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내가 처음 본 영화는 ‘종점’이다. 산골에 사는 아이가 지방 대도시에 사는 고모집에 나들이 왔다. 고모는 내게 사촌이 되는 당신의 아이들과 나를 극장에 데려갔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오스카 극장’. 그 무렵 극장들은 보란 듯이 영어식 이름을 붙였다. 키네마, 피카디리, 허리우드, 오스카, 아카데미….

    영화의 의미는커녕 줄거리조차 파악 못할 대여섯 살 때다. 스크린에서 주인공이 클로즈업 될 때 화면 속 어마어마하게 큰 얼굴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아 깜짝 놀라 뒷좌석으로 옮겨 앉은 기억이 생생하다. 흑백영화로, 중간 중간에 총소리가 들리고, 여주인공의 오빠가 누군가를 죽이는데 희생자가 여주인공의 애인이던, 그런 스토리였다.

    영화가 끝날 때쯤 주제곡이 나왔다. “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 버림을 받았을 땐 죽음을 생각했다/ 아련한 추억 속에 미련도 없다만/ 너무나 빨리 온 인생의 종점에서/ 속절없이 속절없이 꺼져만 가네.” 훗날 성장해서야 알게 된 그 주제곡은 최희준이 부른 ‘종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종점이 주는 의미에 대해 가끔 생각했다. 종점.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끝에 왔다는 말이 아닌가. 이 두 음절이 주는 깊고 절망적인 뜻에 사람들은 가끔 소스라치는 전율을 느낀다.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산업화 시대의 정서와 맞지 않는 퇴영적인 노랫말 때문에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종점 다방’이나 ‘종점 주점’이란 간판을 보면 물기 어린 비감에 젖어든다.

    종점, 그 물기 어린 悲感



    이 데카당한 단어인 종점을 개발연대 한국인들에게 보다 구체화한 것은 ‘마포종점’이란 노래다. 고향을 등지고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살게 된 사람들은 마포종점이 어디 있는지, 또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이 노래는 개발기인 1960~70년대를 서울에서 보내거나 서울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더욱 큰 호소력을 지닌다.

    입학 또는 취직 때문에 뒤늦게 이 거대한 도시에 합류한 사람들은 가끔 등장하는 ‘그때를 아십니까’ 류의 복고 시리즈물에서도 서울 풍경에는 대개 흥미를 잃는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이런 다큐멘터리에 흥미를 느끼게 됐다는 것과 같다. 1970년대 말 대학 시절을 시작한 나 역시 남의 얘기 같던 서울의 풍경들이 언제부턴가 내 얘기가 되면서 비로소 나이 듦과 함께 서울이 제2의 고향으로 굳어짐을 실감한다. ‘마포종점’은 바로 이 같은 변화를 확인해 주는 상징적인 매개체가 된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가사에는 왠지 모를 쓸쓸함, 외로움, 슬픔 등 인간의 온갖 페이소스가 서려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듀엣 ‘은방울자매’가 부른 노래다. 그러나 노래엔 은방울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움보다는 도시의 변두리 전차 종점이 던지는 슬픔, 서러움이 배어 있다.

    서울을 노래한 또 다른 노래가 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 서울 사람은 물론 한국 사람 모두가 아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다. 1960년대 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등장한 노래들이지만 정한은 너무 다르다. ‘서울의 찬가’는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황당한 노래다. 그 시절, 서울은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새들이 떠나가고 먼지와 매연으로 가득한 도시가 아니었나. ‘마포종점’은 ‘서울의 찬가’의 대척점에 있는 노래다. 저마다 살기 위해 서울에 몰려들었지만, 수도 서울을 동서로 오가던 전차 종점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던 변두리 서울 사람들의 현실적인 슬픔과 지친 삶의 고단함을 노래했다.

    흔적도 추억도 사라진 곳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지리적, 시대적, 정서적 상징

    흔적도 추억도 사라진 곳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종점. 기차든 버스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내려서야 하는 곳. 그것은 비약하자면 인간의 삶에도 해당되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단어다. 그래서 종점을 포함하는 단어는 대개 퇴폐적이고도 말세적인 느낌을 준다. 종점에 있는 다방에선 촌스러운 다방 아가씨가 설탕과 크림을 듬뿍 넣은 달달한 값싼 커피를 내올 것 같고, 종점 한구석의 주점에선 덕지덕지 지분(脂粉) 냄새 풍기는 늙은 작부가 대폿잔을 따를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래서 어느 시인은 ‘종점다방’이란 제목의 시에서 종점을 ‘퇴화를 꿈꾸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며 성긴 삶들이 커피 한잔, 대포 한잔에 의지하는 곳이 종점 다방, 종점 주점의 풍경쯤 된다. 종점은 낱말이 안기는 묘한 슬픔 때문에 여러 비극적인 얘기의 단골 제목으로 등장한다. 영화 제목도 있거니와 잊힐 만하면 ‘종점’이 들어간 제목의 주말 드라마가 나온다.

    마포종점은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협궤전차의 서쪽 끝이다. 지금 불교방송이 있는 마포대교 북단 어디쯤엔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기념표지석을 만들고 조그만 공원을 조성해놓았다. 그 시절, 이른 새벽 마포 종점에선 가난한 승객들이 하루벌이를 위해 전차를 기다렸을 것이다. 산업화의 열매를 맛보기 훨씬 이전, 모두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었다. 고만고만하게 살았다는 것은, 세 끼는 굶지 않되 삼시 세끼에 쌀밥 대신 수제비나 국수가 한두 번 섞여 있었다는, 그런 얘기다. 그래서 그런 세월을 살아온 서울 시민, 나아가 한국인에게 마포종점은 지리적 상징이자 시대적, 정서적 상징이 된다.

    사실 클래식이나 재즈 등 마니아층에게 집중되는 장르의 음악과 달리 가요가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강한 공감 능력에 있다. 누구나 겪음직한 사랑과 이별, 아픔, 삶의 기쁨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노랫말은 사람들을 교감하게 하며 하나로 묶어준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이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한계령, 부용산, 박달재, 고모령, 미아리고개 같은 지명은 노랫말이 갖는 공감의 힘을 더 높여주는 효과적인 장치다. 현명한 작사자들은 그래서 노랫말에 구체적인 지명을 집어넣었을까. 구체적 지명이 들어간 노래는 실재성이 부여돼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마포종점’도 이런 논리에 딱 들어맞는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 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흔적도 추억도 사라진 곳 나는 왜 거기에 갔을까
    고단한 삶들이 똬리 틀고 살던 곳

    이 노래를 듣는 많은 이는 저마다 서울의 옛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숲과 아파트촌으로 변한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다는 노랫말은 한 시대가 훌쩍 지났음을 현실감 넘치게 보여준다.

    ‘서울화력발전소’로 문패를 바꿔 단 노랫말 속 당인리발전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증거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 한강변 마포언덕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화력발전소다. 매연과 소음으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자 폐쇄까지 고려하다 지하화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지금은 지하화 공사가 대부분 마무리돼 예전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인리발전소가 이곳에 세워진 데는 마포종점이 한몫했다. 세종로-서대문-마포로 이어지던 전차 노선의 종점이 마포로 결정되자, 발전소는 사고 위험 때문에 도심에서 멀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조선총독부는 1929년 마포종점 인근에 간이 발전소를 세우는데, 이것이 당인리발전소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화력발전소는 원자력발전소가 등장한 1980년대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날 당인리발전소가 공급하는 전력은 서울시 소비전력의 3%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도심을 관통하는 밤차의 종착지 마포는 강 건너 영등포와 함께 1960년대만 해도 변두리였다. 살기 위해, 아니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온 고단한 삶들이 똬리를 틀고 살던 곳. 그래서 사람들은 마포나 영등포를 생각하면 뭔가 싸고 허름한 이미지를 함께 떠올린다.

    고향을 떠나온 소시민들의 정서는 개발연대 한국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다. ‘59년 왕십리’도 그렇다. 객지에서 올라온 가난한 인생들은 주변에 도살장이 있어 집값이 상대적으로 싼 왕십리 일대로 몰려들었고, 도살장에서 흘러나오는 허드레 곱창과 함께 독한 소주를 쓰라린 가슴에 부어 넣으며 타향살이 외로움을 달랬다. ‘마포종점’이나 ‘59년 왕십리’를 들으면서 이 땅의 장년들은 그 시절의 서럽고 곤고하던 풍경을 어제 일처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는 옛 풍경을 찾지 않으리

    마포종점은 이제 없다. 한때 새우젓 장사로 유명했다는 포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질펀한 먹자골목으로 변한 지 오래다. 토박이 마포 사람들은 대부분 일찌감치 떠났다. 떠나야만 성공하는 것처럼 모두들 떠났다. 지금의 마포 일대는 귀빈로를 중심으로 재개발돼 광화문 못지않은 위용을 보여준다.

    새우젓 장수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고 허접한 고기를 주물러 구워 팔았다던 마포 주물럭이니 최대포도 강남 열풍에 밀려 과거의 영광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종점도 새우젓도 없어진 마포에 이제 갈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포 재개발은 이제 거의 끝났다. 가끔 그 옛날 유명 음식점을 찾는 지인들에게 등 떠밀려 마포를 찾았지만 내가 한때 들락거리던 그 시절의 모습은 간 데 없다.

    새우젓 장수가 흥청거리던 포구 인근은 먹자골목 네온사인이 찬란하다. 먹자골목 중간쯤에 있는 설렁탕집만 예전 모습 그대로다. 60년 넘는 세월 한자리를 지켜왔지만 뒤편의 무성했던 갈대 숲은 공영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나는 무엇을 찾으러 그곳에 간 것일까. 직장 초년병 시절 선배들의 강권에 떠밀려 갔던 최대포집을 찾고 싶었을까. 옛 흔적을 찾으려는 이런 내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을 만한 풍경이 사라졌다는 건 슬픈 일이다. 서울은 산업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탈바꿈했고, 옛 풍경은 상상 속에만 남아 있다. 서울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의 추억까지 완전히 빼앗아갔다. 나는 다시는 옛 풍경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서울의 여름은 저만치에 가 있고, 초대하지 않은 가을이 문밖에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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