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만날 것처럼 굴고…”
박진표 감독의 영화 ‘오늘의 연애’에서 남녀 주인공은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하며 스킨십까지 하지만 연인 사이임을 부정한다. 여자주인공은 다른 남성과도 썸을 탄다. 젊은 관객은 여기에 공감한다. 가요 ‘밀당의 고수’엔 “금방 만날 것처럼 굴고 약속할 땐 오빠 나중에 만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음대로 변덕 부리고 멋대로 해도 되며, 정 안되면 안 보면 그만인 것이다. 썸타기는 ‘이성관계의 모든 의무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한다. 동국대생 J(25)씨는 이렇게 말한다.
“호감을 비치는 듯하다가 막상 관계를 진전시키려 하면 마음을 닫아버리는 모습은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비일비재하다. 한없이 가벼운 인간관계를 지향한다. 관계를 끊기도 쉽다. 나는 주로 연락 횟수를 줄인다. 그러면 상대가 알아서 연락을 끊는다.”
몇몇 대학생은 “썸의 상대가 어떤 마음을 갖든 그 관계 자체를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를 금방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일부 대학생들은 처음부터 ‘쉽게 끝낼 대상’을 찾는다. 대표적인 게 교환학생과의 썸타기. 고려대생인 L(22)씨는 1년 코스로 한국에 온 외국인 교환학생과 썸타기를 했다. 그는 “시한부 연애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환학생과의 연애는 끝이 정해져 있기에 기본적으로 가볍게 만날 수 있다. 감정 소모를 많이 안 해도 된다”고 했다.
김연수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은 “썸타기의 성행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라다보니 이성관계에서 파생될지 모르는 어려움을 우선 피하려 든다”는 것. 연애를 아예 안 함으로써 실연에 따르는 좌절감을 경험하지 않으려 한다는 얘기다. 그는 다른 요인으로 군중심리를 꼽는다. ‘내 친구도 이성을 가볍게 만나니 나도 그래볼까?’ 하는 동조심리가 20대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등장이 썸타기의 기술적 터전을 제공했다고 본다. 과거엔 전화통화와 대면접촉으로 이성을 사귀었다.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비용, 진정성이 요구됐다. 요즘엔 카카오톡 메시지 같은 SNS를 주로 이용한다. 대신 전화통화와 대면접촉은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남녀 간 가벼운 관계 형성이 용이해졌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리스크(risk)’로 여겨 동거로 눈을 돌리는데, 사회적으로 아직 동거에 관용적이지 않으므로 가벼운 만남으로 귀착되고 있다고 한다. 방송 분야를 연구하는 한 대학교수는 “TV의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썸타기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연애 못해 죽을 상황 아니면…”
취업이나 결혼을 하기 힘든 사회적 환경도 썸타기 양상을 부채질한다. 동국대생 L(23)씨는 “취업 준비 때문에 진지한 연애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한숨을 내쉰다.
“20대 취업적령기 몇 년이 지나면 ‘절벽’으로 떨어져요. 그전에 갖춰야 할 스펙도 많고 경쟁도 치열하고. 취업 준비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취업 준비는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연애는 아웃풋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죠. 그러니 연애에 신경 쓸 시간도 에너지도 없어요. 삼포세대, 칠포세대가 과장이 아니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S대생 O(23)씨도 취업 준비 때문에 연애를 미룬다고 했다. O씨는 얼마 전 취직이 보장된 A씨를 만났다. 스펙 쌓기로 전전긍긍하는 O씨로 인해 둘은 자주 다퉜고 결국 헤어졌다. O씨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연애하지 않고선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취업준비와 연애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취업 준비만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썸타기는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지정된 궤도만 도는 ‘값싼 금욕적 관계’다. 로버트 스턴버그 미국 예일대 교육심리학과 교수는 진정한 사랑이 친밀함, 열정, 개입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본다면 썸타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람은 파트너와의 취약한 관계로 인해 한층 초조해질 뿐이며 점점 부서지기 쉬운 상태로 변한다”고 했다. 썸타기는 개인을 더 자유롭고 강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묘약이기는커녕 그 반대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그래도 수많은 젊은이는 오늘도 썸을 탄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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