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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서자’는 재산 몰아주기 위한 차별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서자’는 재산 몰아주기 위한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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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콜럼버스, 그리고 (논란이 있지만) 황희의 공통분모는 서자라는 점이다. 유독 조선 사회가 ‘첩의 자식’에 대해 가차 없었지만, 서양에서도 서자는 여러모로 푸대접을 받았다. 서자 차별은 한정된 재산과 권력을 일부 후손에게만 ‘몰아주기’ 위한 사회적 장치였다.
신동헌 화백이 그린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1967).

신동헌 화백이 그린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1967).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속에서 배제되거나 제한을 받는 ‘계층’이 있다. 서자(庶子)다. 서양에서도 그랬고,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서자는 여러모로 푸대접을 받았다. 서자란 정식 결혼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들을 말한다. 이른바 정처(正妻)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아들이다. 

조선시대 식으로 말하면, 혼서(婚書)를 받지 못한 여성이 낳은 아들이다. 춘향과 이몽룡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영락없이 서자가 될 것이다. 한국과 중국 등에서는 첩을 거느리는 것이 합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불법이자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서자를 ‘불법적 아들(illegitimate son)’이라 한다. 

세상의 자원은 유한하다. 그 때문에 재산을 모든 자녀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서자가 상속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서자여서 성공했다”

서양에서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도리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이가 상당수다. 르네상스 시대를 주름잡은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다빈치는 서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직업도 계승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 세르피에르는 화려한 상업도시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다. 어머니는 농촌 빈치 출신의 평범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다섯 살짜리 레오나르도를 놔둔 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레오나르도를 직업학교에 보냈다. 이후 자신의 친구로 피렌체에서 공방을 경영하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문하로 들여보냈다. 레오나르도는 고된 수련 끝에 스승을 넘어서는 화가로 성장한다. 

만일 서자가 아니었다면 레오나르도는 당당한 중산층의 일원으로 공증인이자 지주가 되어 부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서자 출신이라는 운명의 장난으로 레오나르도는 다른 길을 걷게 됐고 뛰어난 화가로서 신분의 한계를 돌파했다. 통쾌하면서도 왠지 뒷맛이 좀 씁쓸한 일이다. 

서양의 역사책을 뒤적이다 보면 누구나 알만한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서자였다.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뎠다는 콜럼버스(1451~1506)도 서자였다고 한다. 16세기 아메리카 정복 활동에 나선 스페인 사람들 가운데는 유독 서자가 많았다. 잉카를 멸망시킨 피사로(1475~1541)가 대표적이다. 그는 귀족인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돼지를 키웠다. 문맹이었던 피사로는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신대륙으로 진출하는 모험을 선택했다.

프랑스혁명 지지한 서자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는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였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는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였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정국이 오랫동안 혼미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1769~1821)이 집권하자 정치적 안정이 회복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며 ‘독점과 세습’이라는 기존 관습을 타파했다. 귀족 가문의 서자들이 이에 환호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전쟁과 평화’에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소설에 따르면 당시 서자인 피에르는 재력가였는데도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나폴레옹이 ‘세습’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에르는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며 나폴레옹을 증오하지만 처음에는 달랐다. 

유럽에서는 왕의 서자들조차 상당한 차별을 받았다. 영국 왕 찰스 2세(재위, 1660~1685)에게는 서자 몬머스(Monmouth·1649~1685) 공작이 있었다. 그러나 왕위는 찰스 2세의 아우 제임스 2세(1633~1701)에게 돌아갔다. 불만을 품은 몬머스 공작은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만다. 왕의 서자가 이럴진대 당시 귀족의 서자들이 어느 정도 차별을 감수했을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서양의 왕들은 정부(情婦)를 통해 정념을 해소했다.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왕과의 은밀한 사랑이 정부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16세기부터 유럽의 왕실에는 ‘왕의 공식적 정부’가 등장한다. 이를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라고 불렀다. 

왕의 정부는 자신과 왕을 위해 정치적 음모에 가담했다. 그 대가로 권력과 막대한 재물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왕의 총애가 사라지면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의 정부는 50명이 넘었다. 그중 특히 총애를 받은 이는 가브리엘 데스테레(1573~1599)였다. 데스테레는 왕에게 3명의 서자를 안겨줬고, 넷째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다. 앙리 4세에게는 그 외에도 서자가 여럿이었다. 그러나 왕위는 두 번째 왕후이던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정식’ 왕자(루이 13세)에게로 돌아갔다. 메디치 가문이라면 당대 최고의 은행가요,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였다.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는 퐁파두르(1721~1764)였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15세(1715~1774)의 정부였다. 

그녀의 미모는 프랑수아 부셰(1703~1770)가 그린 초상화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퐁파두르는 건축, 예술 및 문학 등 다방면에서 박학다식했다. 당대의 살롱 문화를 이끌었고, 왕을 대신해 정계에서도 활약했다. 

마담 퐁파두르는 불감증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 루이 15세의 정욕을 충족시켜줄 여인을 직접 고르기도 했다고도 한다. 43세를 일기로 그녀가 세상을 뜨자 루이 15세는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국정을 돌보지 못했다. 

중국 황제의 권한은 막강했다. 서양의 이른바 ‘절대군주’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했다.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이기에 중국에서는 서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희박했다.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에 가담할 인재의 출신 배경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고 믿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의 아들이 왕후가 낳은 적자(嫡子)이든, 후궁이 낳은 서자이든 무조건 작호(爵號)를 주었다. 10세 전후에 황제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존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만일 황실에 마땅한 적자가 없으면 황위는 서자에게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1861년 청나라의 함풍제(1831~1861)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황제의 서자, 곧 의귀비(懿貴妃)의 아들 재순(載淳)이 보위를 계승해 동치제(1856~1875)가 되었다. 

동치제의 나이가 어려 섭정 공친왕이 실권을 쥐었다. 공친왕 또한 황실의 서자였다. 공친왕 애신각라(愛新覺羅) 또는 혁흔(奕訢·1833~1898)은 도광제(1782~1850)의 서자였다. 

중국에서 서자가 처음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진시황의 서자 호해(胡亥·기원전 230~기원전 207)는 황제의 18번째 아들이었으나, 조고(趙高·미상~기원전 207)의 간계에 힘입어 2세 황제가 된다.

중국은 달랐다

중국은 일반 가정에서도 가부장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을 따라 성(姓)도 바꿨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왕(王)씨 성을 가진 여성이 이(李)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면 이왕(李王)이란 성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은 철저히 부계 사회여서 모계의 사회적 지위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서양을 비롯해 이슬람 사회와 일본에서도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성을 따른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혼전의 성을 사용하는 한국 사회는 예외적이다.) 

서자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중국인은 많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내각태학사(內閣太學士)’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이들의 과반수가 서자였다. 

일부에서는 명나라 때는 서자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거가 부족하다. 16세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조헌(趙憲·1544~1592)은 자신이 목격한 명나라의 실상을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성헌(成憲)은 비첩(婢妾)의 아들이지만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인재를 기용할 때 문벌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조헌, ‘중봉집’) 

정확히 말해 성헌은 ‘얼자’(孽子·어머니가 노비인 서자)였다. 그러나 그는 1568년(선조 1년) 명나라의 사신이 되어 황태자가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조선에 전한다. 나중에 그는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가 되는 등 요직에 기용됐다. 이런 일은 당대의 조선 사회에서는 불가능했다.

황희가 노비의 아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황희 초상화. 황희가 서자였다는 역사 기록이 몇 가지 존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황희 초상화. 황희가 서자였다는 역사 기록이 몇 가지 존재한다.

‘홍길동전’을 보면 홍길동은 홍정승의 얼자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였다. 가정의 분위기에 따라 서자에 대한 차별에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의 대세는 ‘차별’이었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은 상속에 관한 항목에서 양첩자녀(良妾子女), 즉 양인 신분의 첩이 낳은 서자녀는 적자의 7분의 1만 상속받도록 했다. 천첩자녀(賤妾子女)에 대한 차별은 더욱 혹독했다. 적자의 10분의 1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에는 서자(얼자 포함)의 재산 상속이 법 규정보다도 더 축소된다. 

서자는 벼슬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예외를 인정받아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설사 합격해도 요직에 등용될 가능성은 없었다. 

서자에 대한 차별은 도를 넘었다. 당시 향촌에서 지도층으로 행세하려면 향안(鄕案), 유안(儒案) 등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서자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려움을 뚫고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한 서자들에게도 고난의 가시밭길이 이어졌다. 그들은 성균관에서 적자 출신인 양반들과는 자리를 나란히 하지 못했다. 

조선 사회의 지나친 서자 차별에 분노한 왕도 있었다. 무수리의 아들로 알려진 영조(1694~1776)였다. 정조(1752~1800) 역시 서자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혀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했다. 

헌데 고려 시대까지는 한국 사회에 서자를 차별하는 악습이 없었다. 태종 때 대신 서선(徐選·1367~1433)의 건의로 차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건국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서자였다. 개국공신 조영규(趙英珪·미상~1395), 태종의 명신 하륜(河崙·1347~1416), 개국공신 함부림(咸傅霖·1360~1410) 등도 서자였다. 사육신으로 이름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고려의 문신 차원부(車原頫·1320~미상)를 위해 쓴 글에 그렇게 나온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대의 명신 황희(黃喜·1363~1452)도 서자라고 한다. 사관 이호문(李好問)이 남긴 사초(史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황희는 얼자(孼子)이다”

또 “황희 또한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정실(正室)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단종실록’, 단종 즉위년(1452) 7월 4일(을미))라는 기록도 있다. 황희의 출신에 대해서는 논란의 불씨가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15세기 초까지도 서자 차별의 악습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자에 대한 차별이 완고한 관습으로 자리 잡은 것은 16세기였다. 조헌은 차별의 시원을 고려 후기로 올려 잡았다. 권세가들이 자기들의 자손에게 정치적 특권을 물려주기 위해 신진 세력의 등장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중봉집’). 

대체로 조선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서자에 대한 차별 완화를 주장했다. 가령 심수경(沈守慶·1516~1599)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국법(國法)에 서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으나, 이는 옛날에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근래에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 또한 무슨 이유인지를 모르겠다.”(심수경, ‘견한잡록(遣閑雜錄)’) 

18세기의 실학자 유수원(柳壽垣·1694~1755)은 기득권층인 문벌(門閥)에 그 책임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송(宋) 나라 이후로 중국에서는 문벌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인재를 쓰고 버리는 법이 없어졌다. 오직 우리 왕조(조선)만 고려의 나쁜 풍속을 좇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유수원, ‘우서’, 제2권) 

과연 15세기 이래 중국에서는 두부 장수와 머슴의 아들까지 학업에 정진해 가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기는 했다. 18세기 후반 당사자인 서자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1772년(영조 48) 12월 28일자 ‘영조실록’(119권)에 보면, 경상도의 서얼 김성천(金聖天) 등 3000여 명이 자신들도 고향의 ‘향안(鄕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9세기 후반 서자들은 ‘규사(葵史)’라는 책을 간행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서자들의 가문이 등장했다. 여러 집안의 족보와 향촌의 향안에서도 서얼 차별의 관행이 사라지기도 했다. 

구한말의 서자 김가진은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했다. 1894년 그는 군국기무처의 일원으로서 갑오개혁을 주도한다. 이제 적어도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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