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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서자’는 재산 몰아주기 위한 차별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서자’는 재산 몰아주기 위한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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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지지한 서자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는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였다.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의 초상화.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퐁파두르는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였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정국이 오랫동안 혼미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1769~1821)이 집권하자 정치적 안정이 회복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나라를 차례로 정복하며 ‘독점과 세습’이라는 기존 관습을 타파했다. 귀족 가문의 서자들이 이에 환호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1828~1910)는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전쟁과 평화’에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소설에 따르면 당시 서자인 피에르는 재력가였는데도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나폴레옹이 ‘세습’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에르는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며 나폴레옹을 증오하지만 처음에는 달랐다. 

유럽에서는 왕의 서자들조차 상당한 차별을 받았다. 영국 왕 찰스 2세(재위, 1660~1685)에게는 서자 몬머스(Monmouth·1649~1685) 공작이 있었다. 그러나 왕위는 찰스 2세의 아우 제임스 2세(1633~1701)에게 돌아갔다. 불만을 품은 몬머스 공작은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하고 만다. 왕의 서자가 이럴진대 당시 귀족의 서자들이 어느 정도 차별을 감수했을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서양의 왕들은 정부(情婦)를 통해 정념을 해소했다.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왕과의 은밀한 사랑이 정부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16세기부터 유럽의 왕실에는 ‘왕의 공식적 정부’가 등장한다. 이를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라고 불렀다. 

왕의 정부는 자신과 왕을 위해 정치적 음모에 가담했다. 그 대가로 권력과 막대한 재물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왕의 총애가 사라지면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의 정부는 50명이 넘었다. 그중 특히 총애를 받은 이는 가브리엘 데스테레(1573~1599)였다. 데스테레는 왕에게 3명의 서자를 안겨줬고, 넷째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다. 앙리 4세에게는 그 외에도 서자가 여럿이었다. 그러나 왕위는 두 번째 왕후이던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정식’ 왕자(루이 13세)에게로 돌아갔다. 메디치 가문이라면 당대 최고의 은행가요,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였다. 

역사상 가장 이름난 정부는 퐁파두르(1721~1764)였다. 그는 프랑스 왕 루이 15세(1715~1774)의 정부였다. 

그녀의 미모는 프랑수아 부셰(1703~1770)가 그린 초상화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퐁파두르는 건축, 예술 및 문학 등 다방면에서 박학다식했다. 당대의 살롱 문화를 이끌었고, 왕을 대신해 정계에서도 활약했다. 

마담 퐁파두르는 불감증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자신을 대신해 루이 15세의 정욕을 충족시켜줄 여인을 직접 고르기도 했다고도 한다. 43세를 일기로 그녀가 세상을 뜨자 루이 15세는 무려 한 달 동안이나 국정을 돌보지 못했다. 

중국 황제의 권한은 막강했다. 서양의 이른바 ‘절대군주’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했다.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이기에 중국에서는 서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희박했다. 황제들은 자신의 통치에 가담할 인재의 출신 배경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고 믿었다. 

중국의 황제는 자신의 아들이 왕후가 낳은 적자(嫡子)이든, 후궁이 낳은 서자이든 무조건 작호(爵號)를 주었다. 10세 전후에 황제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존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만일 황실에 마땅한 적자가 없으면 황위는 서자에게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1861년 청나라의 함풍제(1831~1861)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황제의 서자, 곧 의귀비(懿貴妃)의 아들 재순(載淳)이 보위를 계승해 동치제(1856~1875)가 되었다. 

동치제의 나이가 어려 섭정 공친왕이 실권을 쥐었다. 공친왕 또한 황실의 서자였다. 공친왕 애신각라(愛新覺羅) 또는 혁흔(奕訢·1833~1898)은 도광제(1782~1850)의 서자였다. 

중국에서 서자가 처음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원전 3세기다. 진시황의 서자 호해(胡亥·기원전 230~기원전 207)는 황제의 18번째 아들이었으나, 조고(趙高·미상~기원전 207)의 간계에 힘입어 2세 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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