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호

‘간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독일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결혼식

30년간 청첩장 한 번 받지 않아

  • 입력2018-02-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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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가 간통죄를 폐지한 뒤 결혼 문화에 큰 변화가 밀려왔다. 이혼수속이 복잡해졌고, 우선 동거부터 하고 보자는 커플이 늘어났다. 요즘엔 결혼식 자체도 거의 올리지 않고 시청에 신고하고 끝내는 커플이 대부분이다. 간통죄가 폐지된 한국도 그런 길을 걸을까.
    2010년 10월 첫 일요일 오후였다. 뮌헨에서 열린 맥주축제인 ‘10월제(옥토버페스트)’의 200주년 행사를 알리는 소식이 TV에 요란스럽게 방영되고 있었다. 1810년 10월 12일 바이에른주의 황태자 루드비히 결혼식을 축하하면서 시작된 10월제가 바이에른주 200년 역사와 나란히 유구하게 이어져 온 것에 감탄하며 초가을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무심코 받았더니 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큰아들이었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아들에게 무슨 급한 용건이 있나 싶어 정신을 집중했다. 의대를 다니는 손자가 결혼을 하는데 결혼식에 와서 축사를 해달라고 했다. 의대 졸업 전 결혼이라니 조금 이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독일에 반세기 이상 거주하는 동안에 결혼식이란 단어가 내 머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최근에는 결혼한다고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도 거의 없다.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애도 낳고, 동성연애자는 남남, 또는 여여가 동거생활을 한다. 필요하면 소문 없이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서에 서명을 한다. 그러면 법적 부부가 된다. 교회에서 행해지던 성스럽고 경사스러운 결혼식은 잊힌 지 오래다. 간혹 유럽 왕족의 결혼식이 TV로 중계될 뿐이다. 최근 약 30년간 독일에서 타인의 결혼식에 가본 적이 없다. 늦가을 아침 햇볕에 사라지는 안개처럼 나는 어느덧 결혼식이란 단어를 잊고 말았다. 유럽 사회의 생활관습 변화가 너무 빠른 것 같다.

    중매는 독일에서 찾아볼 수 없다

    2005년 독일 레지스트리 사무실(등기소)에서 결혼하는 한 커플. [Ralf Roletschek]

    2005년 독일 레지스트리 사무실(등기소)에서 결혼하는 한 커플. [Ralf Roletschek]

    독일에서는 유치원부터 대학 졸업까지 모든 교육비는 국가가 부담하고 만 16세가 돼 성인이 되면 부모는 아이의 인생 문제에 간섭해서도 안 되며,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에 의지하려 하지 않고 결혼 문제도 자신들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여긴다. 부모가 자처해서 할 일이 없다.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은 법적으로 부모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2015년 8월 10일 자 일간신문 ‘디벨트’에는 ‘연간 3000명의 소녀가 독일에서 강제결혼의 위험에 처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났다. 독일연방가족부의 발표를 인용한 기사였다. 주로 독일에 거주하는 이슬람권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인데, 부모가 고향에 갈 때 딸의 배우자를 미리 결정해두고 딸 방학 기간에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한 것이다. 독일은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 이슬람권에서 온 시민권자로 어린 자식의 동의 없이 강제결혼을 시키려는 부모는 2011년부터 6개월 이상 5년 이하의 형을 받도록 형법237조에 명시했다. 그러니 독일에서 부모는 절대로 자녀의 결혼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1949년 봄 사범학교 1년 후배의 결혼식이 대전에서 있었다. 딸 부자인 어머니가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에 중매인을 여러 사람 두고 며느릿감을 골랐다고 한다. 어머니가 집안이나 인물을 보고 좋은 신부 후보자를 여럿 골랐는데, 내 후배는 전부 거절했다. 무려 선을 32회나 보고 32번째 여인을 결혼 후보자로 결정했는데, 어머니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고 후배는 내게 하소연했다. 하지만 결혼 당사자가 결정했기에 결혼식은 성대히 거행됐다. 선택의 자유는 내 후배에게 있지 그 어머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30회 이상의 선을 보는 데 적어도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그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다고 그의 어머니는 내게 귀띔했다.



    전후 독일에 흔했던 가정 파탄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매는 수천 년의 전통을 간직한 배우자 선택법이다.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몸종 에리저를 메소포타미아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옛날 상류사회에서는 중매에 의한 신랑신부 결합이 양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매결혼의 장점은 상대방의 사회적, 종교적인 환경을 참작해 결혼할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 독일에 유학 왔을 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제작된 일본영화 ‘아버지와 딸’을 본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어머니를 잃은 후 딸이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며 같이 살아왔는데, 딸이 30세 가까이 되어가자 딸을 중매로 택한 사위와 결혼시키면서 결혼식 전날 아버지가 한 말이 기억난다. 

    “결혼한다고 해서 애정이 바로 싹트는 게 아니다. 애정은 여러 해를 같이 살아가는 동안에 싹터 커간다. 너의 어머니도 결혼 후 방에 혼자 앉아 울고 있던 것을 내가 자주 봤다.” 

    이것은 결혼 후에 이혼이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봉건사회 결혼생활의 일면이다. 21세기에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남녀동권인 사회구조하에서는, 특히 유럽 사회에서는 중매란 옛 유물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독일 사회에서 남녀 결혼 문제는 아주 보수적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젊은 군인이 대거 희생되면서 수많은 가정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 생존자는 포로수용소를 거쳐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온 후였다. 

    1967년 여름 내가 근무하던 병동에 한 22세 간호보조원이 북독일 하노버지방에서 왔다. 미모에 건강하고 키가 큰 여자였다. 간호사들 커피 타임에 같이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자기는 이혼했지만 자기 잘못이 없다며 법원 서류를 보여줬다. 당시만 해도 부부가 이혼할 때 한쪽이 간통죄에 의해 처벌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또한 당시의 결정적 이혼 사유였다.

    사민당 간통죄 폐지가 야기한 변화

    그러나 1969년 동방정책을 주도한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전후 20년간 통치해오던 보수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형법에서 간통죄를 제일 먼저 폐지했다. 이로 인해 자연적으로 이혼율은 상승했고, 사회당 정책의 일환으로 이혼 시 재산 분배, 위자료, 그리고 자녀 양육 문제 등에 대한 법 개정이 이뤄졌다. 그로 인해 이혼 수속 자체가 복잡해졌다. 또 이혼 시에 여자의 권리가 보수당 정권 때보다는 더 보장받았다. 반면 남녀동권이란 견지에서 여자의 수입 여하에 따라 여자가 남자에게 위자료, 또는 생활비를 지불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혼 수속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1980년대에 들어서 젊은 세대는 우선 동거생활을 해보고 각자의 이상에 부합된다고 생각될 때 결혼하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즉 두 사람이 서로 이상에 맞지 않을 경우 재판상 이혼의 복잡성을 피하자는 차원이었다. 내 막내아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젊은 조카아이들도 그랬다. 내가 아는 의과대학 학생들도 대부분 결혼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독일에 여러 해 거주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가끔 식사 초대를 받아 들르면서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1980년대 여름 어느 일요일 점심때 갔더니 두 사내아이가 여자친구들과 같이 왔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가는데 내 친구는 남은 음식을 두 아이의 여자친구들에게만 싸줬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사내들은 굶으라는 거냐?” 

    “아이들이 동거생활하고 있어.” 

    그것이 독일 사회의 당연한 관습임은 이해했음에도 아직도 옛 한국적 관습에 젖어 있는 나는 아쉬운 감이 들어 즉흥적으로 “결혼은 했나?”라고 물었다. 

    “요즘 결혼한 후에 동거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결혼하게 되면 알려드리지.” 

    내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친구가 참으로 독일 사회에 잘 동화된 우수한 미그란트(이주자)라고 생각했다.

    아이 낳아도 결혼식은 나중에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친구 아들들의 여자친구들이 바뀌었다. 어느 날 주말모임엔 친구 아들 하나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어린애를 데리고 왔다. 

    “아저씨, 애가 예쁘지요.” 

    “결혼했느냐?” 

    “아직 안 했어요. 뭐 급하지 않은데요. 아직 결혼까지는 생각 않고 있어요.” 

    나는 이 대답에 놀랐다. 애를 낳고 기르면서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니…. 애를 낳고 같이 살면서도 헤어질 가능성을 고려해 결혼을 미루는 젊은 세대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 성은 엄마 성, 또는 아버지 성?” 

    “저희들이 엄마 성으로 하기로 합의해서 신고했어요.” 

    2년 후에 그 친구 아들은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채 두 번째 아이를 가졌다. 아마도 헤어지지 않고 평생 동거할 가능성이 높아진 모양이었다. 내 친구는 그들이 외출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두 손자를 봐주느라 바빴다. 여러 해가 지나 애들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동거생활 10년쯤 될 무렵 크리스마스 축하카드를 받았는데 그 인쇄물에 ‘Mr.○○ & Mrs.○○’라고 써 있었다.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해에 결혼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결혼은 독일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거생활은 역시 결혼함으로써 안정된 궤도에 오른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이라고 해봐야 별다른 것 있어? 둘이서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서에 서명만 하고 왔는데, 결혼 후에 여자의 성만 바뀌었을 뿐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동거생활의 연장이 결혼생활이니 결혼식도 결혼 축하파티도 안 했어. 그래서 연락 안 했네.” 

    나에게 이 커플이 결혼한다고 연락을 안 했으니, 나는 축하한다는 인사도 안 했다. 결혼생활은 동거생활의 연장이니 본인들 자신도 결혼 전후에 별 변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결혼신고로 다른 동거생활 후보자를 물색하는 생각은 접게 되는 경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막내아들 중매하려다 난처해져

    내 막내아들도 마찬가지다.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생활을 하면서 여친과 같이 동거생활을 하다 헤어지고 두 번째 여친과 동거하다 어느 날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를 했다. 결혼 후에 여자가 직업상 자기 성을 그대로 사용하겠다니 동거할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형식적이라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니 부모가 자식 결혼식 비용을 보조할 필요가 없다. 결혼한다고 연락을 주지 않으니 축의금 들고 친구 또는 친지의 결혼식장에 가봐야 할 번거로움도 없다. 동거생활은 방 한 칸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고 형편이 닿는 대로 필요한 가구를 사면 좋으니 남녀의 동거생활은 시작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침대와 단출한 살림살이면 족하다. 

    1998년 어느 날 나는 함부르크시에 회의가 있어 호텔에서 1박 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테이블 반대쪽에 40대의 한 부부가 식사하고 있어 인사를 건네며 “당신 부인이 참 예쁜 분입니다”라고 추켜주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저의 부인이 아니고, 생의 반려자입니다”라고 정정하기에 나는 좀 놀랐다. 우리 같으면 결혼을 안 했더라도 그저 인사만 하고 결혼한 척했을 것인데. 

    동거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독일 정부는 가정법 등을 변경해 동거인들이 가정생활을 하고 애를 낳고 기르고 교육하는 데 기혼자와 차별이 없게 제도를 갖췄다. 세금 혜택, 자녀수당도 똑같이 받게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결혼한 가정에서 자란 애들과 사회생활을 하는 데 차별받지 않도록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예컨대 세금 정산을 하기 위해 세무서에 제출하는 신청서에도 ‘배우자/생의 반려자’라고 구분돼 있다. 사회 전반에서 결혼한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생의 반려자가 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되도록 국가가 배려한 것 중의 한 예다. 또한 동거자가 기른 애들이 이력서를 쓸 때도 사회에서 사생아라는 차별이 없게 부모 이름을 적는 칸을 없앴다. 

    1950년대 말에는 “나는 교육부장관 ○○와 그 부인 학교 교사 ○○와의 사이에 두 번째 아들로 19○○년 ○월 ○일에 ○○에서 태어났다”라고 이력서에 부모의 직업을 정확하게 썼다. 근년에는 출생증명서에 부모 이름도 넣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은 동거자와 갈라설 때의 재산분할문제 등도 결혼한 자가 이혼할 때의 원칙에 준해 법에서 처리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즉 사회 환경의 변화에 국민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국가가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젊은 세대는 더욱더 결혼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유부남 대통령 다른 반려자와 대통령궁에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은 비단 젊은 세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독일의 최고 통치자 연방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도 결혼한 대통령이 부인과 이혼하지 않은 채 20세 연하 생의 반려자를 퍼스트레이디로 맞아 대통령궁에서 동거생활을 하며 국내외 여러 손님을 맞이하고, 같이 행사에 참여했다. 2012년 3월에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 요아힘 가우크 전 대통령이 그랬다. 그는 구동독의 루터교 목사 출신이며 독일 통일 때까지 동독에서 목회를 했다. 대통령 재임 시 아주 신망이 높았다. 2017년 연임할 것을 독일 국민과 독일 각 정당이 희망했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가 77세라 대통령직을 더 수행하기엔 무리라며 사양해 많은 이가 아쉬워했다. 

    그는 1959년에 구동독에서 대학 재학 중에 한지 가우크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가우크와 이혼하지 않고 별거하면서 ‘디 차이트’ 신문사의 여기자 헬가 히어시와 1990년부터 1998년까지 8년간 동거했다. 2000년부터는 20년 연하인 생의 반려자 다니엘라 샤트와 동거를 시작했다. 샤트는 남부독일 뉘른베르크시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정치부 기자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이제 샤트와 결혼할 계획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고려해보겠다”고 답했으나,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샤트 부인과 같이 대통령궁에 입성했다. 샤트는 임기 중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2016년 12월 25일 WDR방송국의 제3방송에서 크리스마스 특별 프로그램으로 독일 역대 퍼스트레이디들을 다뤘다. 당연히 가우크 대통령의 생의 반려자 샤트도 현역 퍼스트레이디로 언급됐지만, 결혼 유무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생의 반려자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도 독일 사회는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독일의 현실이다. 샤트는 독일 제2 TV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는 자기가 설계했던 인생행로와 부합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도 항시 자기 인생의 계획에 맞게 이뤄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사랑하게 되면 어떤 형태건 즐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두 남녀가 동거생활 하게 되는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결혼식을 올린 후에 비로소 부부생활을 시작한다는 옛 윤리 관념과는 너무나 다른 진전된 현대인의 남녀관계인 것이다. 이렇듯 독일에선 결혼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사랑하면 손쉽게 동거생활을 하게 되니 결혼이란 절차가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독일 사회는 올바르게 발전해가고 독일은 유럽 내에서 아주 건전한 모범적인 국가로 성장해간다.

    한국식 중매했다간 낭패

    독일에서 반세기 이상을 보냈어도 나 자신은 아직도 평생을 살아갈 배우자를 찾는 데는 중매가 좋은 관습이라고 본다. 같이 살아갈 남녀를 제3자가 소개하고, 두 사람이 여러 가지 환경을 고려해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은 이상적일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은 수학 방정식처럼 풀어가는 방식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어느 동포 한 분에게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그가 모처럼 한국을 방문했는데 아는 분들이 아들 중매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가 농담 삼아 중매를 부탁했더니 여름휴가 중에 예비 신부 후보자가 배낭여행 겸 독일까지 왔다. 중매하겠다고 한 친구는 신부 후보자의 이력과 가정환경까지 적어서 편지로 보냈다. 이 동포는 아주 당황했다. 더욱이 신부 후보자가 신랑 후보자를 만나려고 호텔에서 기다렸는데 동포 2세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부모가 알아보니 아들은 이미 독일 여자와 동거 중이었다. 결국 선을 보기 위해 독일까지 온 예비 신부의 체면이 말도 못 하게 망가진 것이다. 

    독일 사회에선 중매란 생각도 해선 안 된다. 중매 이야기가 나오면 2세는 자신이 여친 한 사람도 선택하지 못하는 부족한 젊은이가 아니라고 반항한다. 동포 2세와 한국인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도 한국과 독일의 생활 철학은 이토록 상이하다. 

    나의 막내가 의과대학을 5년째 다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내가 마침 독일 서남부에 있는 프라이부르크대학병원에 회의하러 갔다가 저녁식사를 한국식당에서 했다. 식당에서 마침 20대 중반의 우리 동포 여학생과 같이 식사하게 됐다. 이분은 음대생인데 독일에 유학 온 지 3년이 됐다고 했다.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어서 내가 중매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속으로 나의 막내아들 배우자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절대 중매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막내는 비록 한국인 2세지만 독일에서 성장했으니 독일 학생과 생활관이 동일하다. 우선 아들에게 여자분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와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자신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동포 며느리를 구해보려던 것이 허사가 됐다. 결국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손자에게 결혼 축하한다고 하지 못한 이유

    서울의 손자며느리가 될 사람도 의사라고 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있어서 부부가 의사일 경우엔 여자는 개업을 하고 남자는 대학에서 연구에 임하는 것도 좋겠다는 게 평소 내가 가진 생각이다. 그래서 결혼을 앞둔 손자를 만났을 때 나는 예비신랑에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런 충고를 건넸다. 

    “네가 대학에서 차분히 근무하며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너의 처 될 사람은 전문의를 끝낸 후 개업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을 이 예비신랑이 이해할 리가 없고, 처를 개업시키라는 충고를 하는 것도 이해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독일식 사고방식을 가진 할아버지의 잔소리쯤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최근 한국의 이혼율이 크게 높아졌다 한다. 간통죄가 폐지된 것 시기가 독일이 1969년인 반면 한국은 2016년이니 앞으로 반세기 후엔 한국에서도 독일처럼 결혼식이란 단어가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면 자녀의 결혼비용 준비에 동분서주하는 부모도 그 시름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첫 이야기로 돌아가면, 결국 큰아들의 요청에 따라 나는 서울의 손자 결혼식에 참석하긴 했다. 하지만 결혼식 축사는 정말 고민이었다. 독일식 사고방식으로 굳어버린 내가 한국말도 서툴 뿐만 아니라 아들과 손자가 바라는 “결혼 축하”라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종수
    ● 1929년생
    ●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 저서: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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