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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古都의 무덤 앞에선 사랑도 권력도 바람이다

‘경주’와 경주 오릉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古都의 무덤 앞에선 사랑도 권력도 바람이다

4/5
의도적 군더더기

2시간25분의 비교적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영화 ‘경주’는 그런 만큼 의도적인 군더더기가 많다. 이 작품이 만약 상업영화의 수익성만 앞세웠다면 제작자 처지에선 20여 분을 들어냈을, 그런 장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예컨대 경주의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친다는 박 교수(백현진)가 술자리에서 주인공 최현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장면은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다. 박 교수는 문학이 전공인 최현에게 정치, 사회, 경제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 하는데, 그건 어떤 답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무도 듣지 않는 자신의 얘기를 또다시 만날 것 같지 않을 타인에게라도 실컷 떠들고 싶은 욕구 탓이다.

박 교수가 최현이 곤란해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건 꼭 술에 취해서 만은 아니다. 그는 배설하고 싶은 것이다. 머릿속에 뭉쳐 있는 딱딱한 똥을 싸고 싶은 것이다. 그런 그를 피해 복도를 배회하던 최현이 착각하고 다른 문을 여는데 거기서 또 일군의 취객을 만난다. 한 남자(제작자 이준동)는 엉망으로 취해 밥상 위에 올라가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고, 갑자기 나타난 최현 때문에 불쾌해진 또 다른 남자(국회의원 송호창)는 그를 밀치듯 문을 닫으며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충분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 모두가 다 불필요한 장면일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장률은 역사성이 녹록히 밴 공간인 경주에서조차 경박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 특히 지식인 따위들의 짓거리를 보여주고 싶었던바, 어쩌면 자신도 어쩌지 못하게 속해 있음으로 해서 역시 어쩌지 못하게 일상에서 저지르는 위악스러운 짓을 솔직한 심정으로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지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의 압권은 역시 최현과 윤희가 출입이 금지된 왕릉에 올라가는 것이다. 둘의 뒤를, 둘의 관계를 의심하는 치졸한 성격의 형사 영민(김태훈)이 뒤따른다. 영민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윤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는 윤희에게 대범하고 너그러운 사랑을 베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다. 영민은 미인인 윤희의 주변에 남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다. 그는 자기가 옹졸하고 의심이 많으며 불안해하는 것을 스스로 창피해한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영민은 최현의 신원조회까지 해가며 그의 접근을 막아내려 한다.

사랑을 한다는 건 불안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그걸 잘 안다.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를, 혹은 여자는 남자를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의심하고, 집착한다. 그 모두는 사실 열등감에 기초하는 감정이다. 이 셋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윤희만이 그런 두 명의 치졸한 감정에서 초월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여자는 대개 남자들의 그런 치졸함에 익숙하고 또 너그럽다.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

어쨌든 그 모든 아수라가 셋이 함께 어찌어찌 오르는 왕릉의 맨 위에서 한꺼번에 확 풀리는 느낌을 준다. 세상을 살다보면 무지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이 사실은 영겁의 과정에서라면 먼지보다 못한 극히 사소한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그 각성은 꼭 뭔가 준비되고 배우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마치 바람처럼 훅 하고 다가선다. 마치 이들 셋이 우연찮게 왕릉에 올라갔을 때처럼.

밤의 별은 총총하고 주위의 모든 것은 잔뜩 잠들어 있다. 이들의 소란은 세상을 깨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치기의 장난일 뿐이다. 그래서 하늘이 웃고, 무덤 안의 누군가도 웃고, 주변의 숲과 바람도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셋은 지금 한창, 삶이 엄숙하고 고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우주는 그것이 모두 귀여울 따름이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은 왕릉 관리인에게 발각돼 쫓기듯 내려온다.

이들이 관리인에게 혼이 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전 과정이 비교적 코믹하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맞다. 그 모든 건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왕릉(=인생의 산)을 하나 올라갈 때와 거기서 내려온 후에 이들은 사뭇 달라져 있다. 윤희의 아파트로 간 최현이 결국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왕릉을 올라갔다 내려왔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릴 때나 나이를 먹을 때나 어쨌든 조금씩이라도 정신적으로 커 나가기 마련인바, 영화 속 인물들도 결국 성장을 이뤄낸다. 그런데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여서, 영화를 보고 나면 스스로 조금은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경주’를 보는 묘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장률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하려는 듯 자신이 좋아하는 한시를 인용한다. 중국 만화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펑즈카이의 시구다. ‘人散後, 一鉤新月天如水.’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 사랑과 욕망 역시 흩어졌다가 초승달과 맑은 하늘을 본 후에는 조금은 나아진 상태로 다시 모인다. 그리고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집착 아닌 순수한 욕망을 배우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게 된다.

古都의 무덤 앞에선 사랑도 권력도 바람이다

경주 오릉은 인적이 끊긴 뒤 마주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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