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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명칭과 나

  •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탈북자 명칭과 나

가장 오래된 탈북자 단체는 ‘숭의동지회’다. 숭의동지회 새 회장으로 선출된 ‘탈북자 1호 박사’ 안찬일이 탈북자 명칭을 ‘자유민’으로 개칭하겠다고 해 논란이 인다. 

필자는 같은 탈북자이자 ‘탈북자’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제시한 당사자로서 이 말의 기원을 적으려 한다. 6·25전쟁 이전과 전쟁 중 한국에 온 이들은 월남자, 실향민으로 불렸다. 전후에는 귀순자, 귀순용사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었다. 탈북자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은 1990년대다. 탈북자는 정부가 정한 용어가 아니다. 정부가 내놓은 명칭으로는 ‘북한이탈주민’ ‘새터민’이 있는데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귀신 느낌 나는 ‘귀순자’ 거슬려서

1994년 9월 12일 유엔난민기구가 발행한 필자의 난민증서.

1994년 9월 12일 유엔난민기구가 발행한 필자의 난민증서.

탈북자 명칭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한 월간지 1994년 4월호다. 레닌그라드대 전임강사이던 황성준이 나를 찾아왔다. 러시아 벌목공 실태를 취재해 월간지에 실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황성준은 벌목공이 어디 있는지 몰라 수소문하던 중 모스크바에 사는 서울대 동창이 나를 소개해줬다고 했다. 조영철 목사가 황성준의 동창이다. 조영철이 김명배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정무공사와 황성준을 나에게 소개해줬다. 황성준은 현재 문화일보 논설위원이다. 

생애 처음으로 황성준과 인터뷰라는 것을 했다. 인터뷰 시작부터 거슬린 게 ‘귀순자’라는 말이었다. 어감에서 귀신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적에게 항복한 자’란 뜻풀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으로 전쟁 시기에나 쓰는 말 아닌가 하고 되뇌었다. ‘귀순용사’라는 표현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한 게 탈북자다. 말 그대로 북한을 탈출했으니 탈북자로 부르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하자 순발력 있는 황성준도 그게 좋겠다고 해 기사에 탈북자라고 적었다. 그게 탈북자라는 명칭의 시작이다. 



나는 러시아 교회에 은거한 벌목공들을 잘 알고 있었다. 황성준은 내가 소개해준 이들을 만나 실태를 취재했다. 나로서는 평범하게 느껴진 이 취재가 한국에서 대(大)특종이 됐다. ‘러시아벌목공 탈북러시 25’ 제하 월간지 기사가 국내외를 뒤흔들었다. 

벌목공은 아니었으나 나 역시 주목을 받아 유명해졌다. 한국 일간지와 방송은 물론이고 미국, 일본 언론과 셀 수 없이 많은 인터뷰를 했다. 모스크바 주재 북한 요원들이 나의 존재를 알면서도 잡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될 정도였다. 정치인과 경실련 사무총장이던 서경석도 나를 찾아왔다.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중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가장 높은 이들은 미국인이었다. 로제트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여성 기자에게 인터뷰 말미에 “우리는 분명 망명자인데 보호받을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질문을 듣고는 유엔난민기구(UNHCR)를 알려주었다. 알아보니 1993년 모스크바에 사무소가 개설돼 있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한국 지역신문들의 모스크바 공동 특파원이던 송강호 강원일보 기자와 함께 UNHCR 모스크바 사무소를 찾았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여성이 사무관이었다. 그는 내가 북한 사람으로서 난민으로 등록된 첫 사례라고 했다. 어느 나라로 망명하고 싶으냐고 묻기에 첫째가 한국, 둘째가 독일이라고 답했다. 한국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통일을 이뤄낸 독일에 가려고 했다. 

처음에 모스크바의 한국대사관은 유엔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형식을 마뜩잖게 여겼다. “유엔까지 문제를 끌고 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절대 받지 않겠다”라고 통고할 정도였다. 1994년 4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자 북한이탈주민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황성준의 기사로 난리가 난 데다 서구 언론이 관심을 가지자 한국 정부는 유엔을 통해 해결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뒤늦게 결론짓는다. 내각에 통일 문제를 다루는 장관을 뒀으며 북한 연구에 많은 돈을 쓰면서도 탈북자 대책 하나 세워놓지 않았던 것이다. 

UNHCR를 거쳐 북한을 탈출한 이들을 받아들이면 “한국이 납치한다”고 억지를 부리던 북한도 꼼작 못하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웃기는 점은 나를 받지 않겠다던 한국대사관이 이번에는 한국으로 최대한 빨리 들어가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탈북자 문제에서 예나 지금이나 우왕좌왕한다. 탈북자가 거의 없던 시기에는 금덩어리를 주겠으니 어서 오라고 하다가 그 수가 늘어나니 받지 않겠다고 돌변했으며 그 명칭도 ‘귀순용사’에서 ‘북한이탈주민’으로 바꿔버렸다.


‘새터민’ 명칭 몰아붙인 노무현 정부

서독은 냉전 시절 수많은 탈동독인을 시종일관 받아들였다. 심지어 돈을 주고 데려오기도 했다. 인권은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의 현재 집권 세력은 대화가 안 되는 북한 통치자에게 매달리는 식의 대북정책을 구사한다. 이런 식이라면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통일이라는 배가 산으로 가는 형국이다. 

북한은 반대로 깔끔하다. 한국 사람이 넘어오면 ‘의거 입북자’라고 칭한다. 정부가 정한 탈북자의 법률적 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이다. 노무현 정부는 여론 수렴 과정에서 내심 ‘새터민’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원했다. 각계 인사 20명을 선정해 통일부 청사로 불렀다. 탈북자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참여했다. 

20명이 내놓은 각이한 견해를 두고 투표를 했다. 정부가 내세운 새터민이 아니라 내가 주장한 ‘탈북동포’를 70%가량이 선호했다. 그 뒤를 자유북한인, 자유민, 북향민이 이었다. 새터민을 선호한 사람 수가 가장 적었다. 나는 지금도 투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발표 때 보니 정부가 원한 대로 ‘새터민’으로 확정돼 있었다. 그러려면 의견 수렴 절차는 왜 밟은 걸까. 

새터민 명칭은 황장엽을 비롯한 탈북 사회의 강한 반발을 가져왔다. 김정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었다. ‘탈북자동지회’ 홈페이지에서 ‘새터민’을 입력하면 글이 나타나지 않게 조치할 정도였다. 그 같은 반발 때문이었는지 이명박 정부에서는 “새터민이란 용어를 가급적 쓰지 않기”(2008년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로 했다.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한 용감한 자’

현재 쓰이는 명칭은 탈북자,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자유북한인, 자유민이다. 새터민, 자유민은 어디서 온 사람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한국에 새로 와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해당된다는 얘기다. 북한이탈주민은 어감이 별로인 데다 6자로 너무 길다. 한국 사회에 익숙한 재일동포, 재미교포라는 표현처럼 ‘탈북동포’가 좋아 보이나 단점은 3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북한인은 5자나 되는 데다 이념적 치우침이 강해 보인다. 탈북자의 ‘놈 자(者)’가 싫어 탈북민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생전의 황장엽이 ‘백성 민(民)’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차라리 ‘탈북인’으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북한에서 온 몇몇 사람이 탈북자란 명칭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 중엔 범죄자 느낌이 든다는 것도 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하기 나름이다. 탈북자를 달리 해석하면 ‘지옥 같은 북한을 탈출한 용감한 자’ 아닌가. 북한이 힘들 때 굶어죽으면서도 탈출할 생각을 못 한 이들과 비교하면 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인생 아닌가. 어떤 명칭이라도 자존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탈북자 명칭과 나

이민복 

● 1957년 황해 서흥 출생
● 남포대학 졸업
● 남포농업과학원 연구원




신동아 2019년 9월호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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