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허문명이 만난 사람

미국이 지소미아 재고 요구하는 진짜 이유

‘국제정치학 석학’ 하영선이 말하는 ‘한국 외교의 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19-10-23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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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공주(共主)의 시대

    • 지소미아 파기는 상상력 부족이 빚은 잘못된 선택

    • 복합적 상상력으로 新태평양 질서 대비해야

    • 친중정책 폈다가 굉장히 당혹스러운 처지 될 수 있어

    • 서로 배려하는 2인3각 ‘사랑의 국제정치’ 요구돼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난세일수록 기본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으며 무엇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분열됐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 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국내 문제에 매몰된 사이 외부 질서는 지각 판이 흔들린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다시 시작될 것 같던 북한과 미국의 대화도 중단됐다. 

    하영선(72) 동아시아연구원(EAI)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이 최근 펴낸 ‘사랑의 국제정치’와 ‘한국외교사 바로보기’가 눈에 띈 건 그 때문이었다. 50년 가까이 세계정세와 국제정치에 천착해온 그의 지적 여정과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외교 담론이 담겨 있는 두 책을 읽다 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밑그림이 그려진다.

    핵을 끼고 경제성장? 북한의 딜레마

    그를 만난 날은 토요일인 10월 5일 저녁이었다. 전날 저녁 런던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는 그는 이날도 서울 을지로 동아시아연구원에서 오전 9시부터 공부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었다. 대학원생들과의 공부 모임을 막 마치고 나온 그와 저녁 도시락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 방금 스마트폰에 뉴스가 떴는데 스톡홀름에서 북·미가 실무협상을 시작한다는군요. 이번엔 뭔가 좀 나올까요. 

    그는 이날 회담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제시했다. 며칠 후 스톡홀름 협상은 ‘노딜’로 끝났다. 예상이 적중한 셈이다. 

    “스톡홀름 협상의 키워드는 ‘새로운 계산법’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과거, 현재, 미래 핵을 쪼갠 3단계 비핵화 구상을 가진 것으로 보여요. 1단계로 기존 핵 시설 중 핵실험장과 미사일엔진 생산 시설 일부는 이미 폭파했고, 2단계로 영변 핵 시설까지는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각오가 돼 있는 거죠. 분명 선대(先代) 김일성, 김정일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완전한 체제보장, 제재 해제 같은 상응조치 없이 완전한 비핵화는 어렵겠죠. 이번 스톡홀름 회담이 돌파구가 되기 어려운 것은 미국도, 북한도 하노이 회담 이후 입장 변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측이 마지막 단계의 결심을 하기엔 현재 구도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 이러다 결국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세계 질서를 운용해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 북한은 한쪽으로는 대화를 말하면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까지 쏘아 올렸습니다. 

    “이전에 쏘아올린 단거리미사일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잠수함용 미사일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는 있겠지만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는 압박용이라고 할 수 있겠죠. 1960년대 초반 쿠바 미사일 위기처럼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미국을 현실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근접한다면 미국은 결코 용인하지 않아요. 북한도 그런 현실적 한계를 잘 알고 있으니 그 한계 내에서 미국에 ‘더 많은 양보를 하라’고 압력을 주려는 것이죠.”

    전혀 예상 못 한 냉전 해체

    - 김정은 체제는 안정적입니까. 

    “한반도 핵 문제를 40여 년간 들여다본 경험에서 보자면, 김정은이 가는 길은 선대(先代)보다 훨씬 더 복잡한 방식임에는 틀림없어요. 유훈통치를 바탕으로 하되 자신의 색깔을 가미한 것이지요. 핵실험장을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든지 영변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비핵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도 분명하거든요. 

    최근 평양을 다녀온 사람들의 소감도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북한이 완전히 바뀌어서 핵과 경제 병진노선을 끝내고 경제우선주의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슨 소리냐, 아직도 대다수 인민은 절대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핵은 절대 포기 안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현재 경제제재에 따른 부작용이 크니까 현재와 미래 핵은 협상 카드로 내놓되 최소한의 핵 억지력을 위한 과거 핵은 유지하는 선에서 체제보장과 제재를 풀어보려는 병진노선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 수준에서 해결을 모색한다면 북한 인민들이 잘 사는 날이 올까요. 

    “그게 핵심이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제재 국면에서 과연 경제성장이 가능할까요. 심지어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 해도 한 자릿수 성장으로는 희망이 없어요. 중국이 지난 40년 동안 연평균 두 자릿수 성장을 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경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북한이 2050년대 아시아·태평양(아태) 질서에서 제자리를 잡으려면 향후 30년, 즉 한 세대 동안 두 자릿수 성장을 계속해야 현재 1인당 1200달러 경제가 1만 달러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북한 비핵화를 조심스럽게 이끎과 동시에 북한이 걱정하는 체제 보장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북한 경제를 21세기 아태 질서에 걸맞게끔 성장시킬 일종의 마셜플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금 김정은이 생각하는 정도의 변화 갖고는 큰 기대를 하기 어렵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냉전 해체

    -가장 부정적인 시나리오는 뭘까요. 

    “이대로 30년 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시장화, 정보화 등 분명 내부에서 변화는 일어나고 있거든요.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게 정치 공간인데 변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변화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계속 현 상태로 있으면 세계의 딜레마가 될 텐데 말이죠. 부정적인 시나리오는 외부의 군사적 옵션이나 내부의 혁명적 옵션 같은 건데 모두 국내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치러야 하기에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불가능해요. 이상적인 방법은 내부 리더십의 점진적인 진화인데 이게 가능할지는 현재로선 누구도 모르는 일이죠.”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편으로 갈려 ‘예스냐 노냐’를 들이대는 현실 속에서 그의 답은 명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깊이와 무게감이 있었다. 복잡한 현실만큼 복잡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과 시종일관 맞닿아 있었다. 이 지점에서 한평생 이론에 천착해온 그에게 평소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라고 볼 때,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서 이론의 무력함을 느낀 적은 없나요. 

    “야구랑 마찬가지라고 봅니다(웃음). 확률 게임이지요. 지난 50여 년을 돌아볼 때 나로서는 크게 틀린 것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냉전 해체였습니다. 1985년 5월 1일로 기억하는데 도쿄 유엔대학 초청으로 소련 타슈켄트에서 열린 노동절 기념식에 북한 대표들과 동석한 적이 있어요. 당시 한국은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어서 비자 받느라 도쿄에서 일주일을 기다렸죠. 어떻든 소련 땅에서 생전 처음 북한 사람들과 함께 앉았어요. 감회가 깊었지만 내 생전에 두 번 다시 이런 날이 올까 했는데 이후 불과 4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시 2년 뒤 소련이 무너졌습니다. 내가 소련에 갔을 즈음 고르바초프가 ‘미소관계는 더는 적대관계가 아니다’라고 평화 공존 선언을 했지만 그야말로 레토릭이라고 생각했죠. 돌이켜보면 탈냉전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한 소련 땅에서 북한 연구자들과 난생처음 마주 앉은 거였는데 세계사적 변화가 오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거죠. 국제정치 공부를 다시 해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지소미아 파기는 잘못된 선택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8월 23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8월 23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두 번째 틀린 건 뭡니까. 

    “북핵이죠. 핵은 원래 내가 하고 싶은 토픽은 아니었어요. 1994년 제네바 핵 합의가 끝나면서 ‘아, 드디어 핵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해방감에 히로시마를 혼자 여행하면서 ‘핵과의 이별 여행’까지 했을 정도였어요(웃음). 그런데 웬걸, 아직도 이렇게 질문을 받고 있으니…. 아까 ‘무력함을 느끼지 않느냐’ 물었는데 ‘인간이 가진 한계 안에서 겸손하게 읽을 수 있는 데까지 드러내보려는 노력은 계속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논어에 나오는 표현으로 성인의 말을 옮길 뿐 지어내지는 못한다는 뜻)을 이야기한 공자 말대로 인간이 어떻게 작(作)을 하겠습니까. 인간의 눈에는 우연일지라도 신의 눈에는 필연일 텐데 그저 세상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받아 전하는 노력을 할 뿐이죠. 특히 남북관계는 예상치 못한 일이 많잖아요.”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요즘 답답한 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전제로 외교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역사나 국제정치 안목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서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예로 들었다. 

    “대표적인 게 지소미아를 바게닝 칩(bargaining chip)으로 쓰는 겁니다. 한일 간 역사 문제를 놓고 일본이 규칙을 어겨 경제제재를 하니까 우리는 군사카드로 대응한 건데 매우 소박한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죠. 국제정치적 상상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결정을 하기 전에 미국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따져봤어야 합니다. 한미관계를 오래 본 저 같은 입장에서 안타깝게 느낀 것은 우리가 미국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국은 지금 21세기 복합 세계 질서 운용의 키(key)를 인도태평양 질서 구축에 두고 있어요. 

    신질서 복합 무대에서 군사와 경제는 여전히 19세기 20세기를 이어가는 중심 무대이지만, 21세기는 중요한 두 개의 무대가 추가되고 있어요. 정보기술과 에너지입니다. 군사, 경제, 정보기술, 에너지 4개 무대를 종합해 보면, 미국에 지소미아는 정보기술과 군사가 결합된 무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매우 상징적(symbolic)인 협정입니다.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 파기를 그저 한일 간의 작은 부속품 하나를 떼어낸 것으로 생각하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아태 질서의 기층을 무너뜨릴 정도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소미아 파기 결정 후 미국이 계속해서 언급한 ‘디서포인트먼트(disappoinment·실망)’라는 말의 무게감을 우리는 제대로 못 느끼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이런 국제정치적 안목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국제정치 안목을 읽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복합 질서에 필요한 복합적 연기력

    - 저 역시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21세기는 정보·지식이 기층 무대가 되고 군사·경제·에너지가 중심 무대, 정치 무대가 상층 무대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군사 무대는 혁명에 가까울 정도의 변화를 겪고 있어요. 전통적 병력의 중요성이 빠르게 줄고 핵무기를 넘어서 첨단 기술 무기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의 혁명적 발달과 함께 정보전(情報戰)의 중요성도 엄청나게 커지고 있습니다. 21세기 아태 질서에서 군사 정보 질서는 핵심 요소입니다. 지소미아는 북한의 군사력 정보를 미리 읽으려고 하는 그물망의 일부입니다. 미국이 왜 저렇게까지 과민 반응하나 하고 의문을 가진다면 다가오는 신질서에 그만큼 둔감하다는 이야기죠.” 

    -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라면 미국이 한일 간 중재 노력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미국은 아마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 카드까지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 지소미아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겐 국가 대전략이 뭔지 큰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작금의 변화를 ‘복합 세계 질서의 도래’라고 말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액터(actor) 즉 주인공 차원에서는 국가가 여전히 중심이지만 국가를 넘어선 네트워크 조직이 생겨나고 있고 스테이지(stage·무대)도 부국강병만 외쳐갖고는 촌스러운 나라가 되는 상황입니다. 신흥 무대를 빨리 준비해야 합니다. 싸움이나 협력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연기력을 키워야 한다는 거죠. 세계질서가 어떻게 재건축되고 있는지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대체 뭐기에 지소미아가 필요 없다고 여겼을까’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해봐야 할 때입니다.” 

    - 미·중 갈등은 어떻게 봅니까. 

    “지나친 비관도 낙관도 위험합니다. 중국을 냉전 질서의 소련과 비교하기엔 너무 커졌습니다. 중국도 미국을 상대로 21세기 복합 무대에서 정면 승부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미·중은 어떻게 해서든 접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 갈등의 봉합이 아니라 향후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를 얼마나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팍스아메리카나 상당 기간 지속”

    그는 이 대목에서 21세기 미·중 무대를 조목조목 조망했다. 

    “우선 국민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21세기 군사력 면에서 미국은 중국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2030년 중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가 돼 미·중 경제 규모가 비슷해집니다. 2050년에는 중국이 경제 면에서 미국보다 커지고 군사비는 1조 달러에 육박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군사비의 지속적 축적량이나 첨단무기의 질적 수준을 보면 21세기 후반에도 아태 공간에서 미국이 중국을 여전히 앞설 것입니다. 

    경제 무대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중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미국 경제에 미치는 후폭풍도 큽니다. 실제로 최근 미국 경제도 내려가고 있지요. 미·중 무역 갈등은 그래서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 또 다른 두 개의 무대가 군사와 경제 외에 정보기술과 에너지라고 했는데, 미국은 에너지 무대에서는 셰일가스로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했어요. 하지만 정보기술 무대에서는 중국이 빠르게 추격하고 있죠. 이 무대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가 미·중의 굉장히 중요한 싸움입니다.” 

    -미국 정치도 트럼프의 등장으로 그야말로 혼돈입니다. 미국의 미래는 어떻게 보나요.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의 장래와 관련해 세 가지 관전 포인트를 주었다고 봅니다. 첫째, 이른바 ‘트럼프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죠. 세계화의 시대는 갔고 애국주의 시대가 왔다는, 최근 트럼프의 유엔 총회 연설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과연 미국의 이런 외교 전략이 트럼프의 재선과 관계없이 장기화될 것이냐는 게 중요한 포인트죠. 둘째, 만약 장기화된다면 미국도 세계 질서에 혼란을 일으킨 빚을 스스로 갚아야 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글로벌 리더십 부재에 따라 불확실성이 커지는 소위 ‘킨들버거 함정(찰스 킨들버거 전 MIT교수가 만든 개념으로 영국의 뒤를 이어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신흥 리더 역할을 제대로 못해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와 트럼프적 세계 질서를 적절하게 혼합해 새로운 복합형 운용 방식을 개발하면 ‘팍스아메리카나’는 상당 기간 지속 가능하리라 봅니다.”

    “광장민주주의는 해결책 내놓지 못해”

    - 중국의 대전략은요? 

    “지난 9월 중국 정부가 발간한 ‘신시대의 중국과 세계’ 백서 목차만 봐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트럼프의 힘을 통한 평화에 맞서 ‘인류 운명 공동체’를 명분 외교로 내걸고 있지만 ‘신형국제관계’를 계속 강조하고 있어요. 이 전략의 핵심은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입니다. 첫 번째 원칙이 ‘불(不)충돌 부(不)대항’ 다시 말해 군사적으로는 싸우지 않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가 ‘상호존중’, 세 번째가 ‘협력공영’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대전략이 ‘신형주변국관계’인데 이 대목에서는 자신들의 ‘핵심 이익’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겠다고 했습니다. 미국과 직접적으로 싸우지 않는 한도 내에서 한반도에서 센카쿠 열도, 남태평양까지 불가피하면 군사력을 행사하면서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우리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전략입니다.” 

    - 중국의 전략이 세계에 통할까요. 

    “명분상으로만 인류 운명공동체를 내걸 것이 아니라 세계가 지금의 중국을 보고 ‘매력 중국’이라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국내 정치와 국제정치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겁니다. 당장 홍콩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듯 중국이 아태 신질서 건축의 중심적 건축가가 돼 설계, 건축, 운영을 담당하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국면의 미·중관계 속에서 한국이 좌표 설정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중국의 급부상만 강조해 읽어 소박한 친중 정책을 폈다가 미국이 21세기 아태 질서를 주도해나갈 경우 굉장히 당혹스러운 처지가 될 수 있죠. 안타깝게도 우리 내부의 담론은 중국이 문명 표준이 될 것이라는 주장과 미국의 세기는 지속 가능하다는 소박한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중시하자는 논의도 걸음마 수준이지요. 한반도 생존 번영의 전략을 제대로 짜려면 21세기 복합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관계를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 구체적으로 읽어내고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치 리더십이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정치 지도자들이 촉을 곤두세우고 바깥 상황을 예민하게 읽어야 합니다. 저마다 생업에 바쁜 5000만 국민이 광장에 나오는 직접민주주의만 갖고 해결책을 낼 수는 없잖아요.”

    위기 때마다 서민이 피해 보는 이유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미·중이 놓는 바둑판을 외면하면 다음 세대에 힘든 시간이 다가온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미·중이 놓는 바둑판을 외면하면 다음 세대에 힘든 시간이 다가온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 대한민국이 이대로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 정치의 주류인 이른바 586세대에 연민의 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학을 다닐 때 상상의 공간이란 게 1차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였고 2차적으로 남북관계였잖아요. 한마디로 국내적 삶과 남북관계가 고작이었습니다. 일부 586들을 제외하고 거의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그런 시공간을 깨는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치적 상상력이란 게 1차적으로 국내 정무적 판단일 수밖에 없고, 2차적으로는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 에만 머물고 있지요. 컴퓨터에 비교하면 파일 시스템이나 데이터 입력 공간이 아예 없는 겁니다. 외장하드라도 장착해야 하는데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먹고사는 건 이제 세계 10위권이지만 여전히 제국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안을 국내정치적으로만 해석하니 국제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빠른 속도로 커져서 일단 서민들 삶부터 힘들어지는 겁니다.” 

    - 국제정치적 상상력의 부재가 서민들 삶의 빈곤으로까지 어떻게 이어진다는 말씀인지요. 

    “힘이 약한 나라일수록 세계 체제 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잖아요. 만약 미국 중소도시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국제정치를 모르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강대국 아닌 나라 국민의 삶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세력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정치 지도자들은 세계 질서의 판을 잘 읽어야 하고 이를 잘 조종할 수 있는 묘수를 찾아야 합니다.” 

    - 현재 우리 정치를 생각하면 암울한데요. 

    “이번 세대에 희망을 가지기 어렵다면 다음 세대라도 제대로 키워야 합니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보다 북한이 잘살았잖아요. 그런데 북한이 두 세대가 흐르는 60년을 허송세월하는 동안 세계 최빈국이 됐고 한국은 중진 국가가 됐어요. 한 세대만 길을 잃어도 다음 세대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걷잡을 수 없어요. 우리는 더구나 지정학적으로 아프리카나 중남미와 달리 미·중·일·러 제국들에 둘러싸여 있어요. 열심히 페달을 앞으로 굴려도 모자란데 자꾸 뒤로 밟으면 미래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일본이 가련하다”고 말한 안중근

    - 어떻게 하다가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나라에 태어나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야 하나 싶다가도 모든 것은 또 해석하기 나름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전의 상상력도 있을 법한데요. 

    “역설적으로 또 미래 지향적으로 보면 중국 일본을 다 같이 안고 21세기 무대에 올라가는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요즘 저도 거의 내전과 다름없는 국내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역사에 지름길이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서가는 길은 없을까 생각이 들 때는…. 안중근이 남긴 글을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한국 외교사 연구에 천착해오면서 구한말 근대의 인물들로부터 한국적 외교 상상력의 뿌리를 찾아온 그였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안중근’이라는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다. 

    - 안중근의 어떤 글을 말하는지요. 

    “그가 사형당하기 전에 일본 재판부에 책 ‘동양평화론’을 마무리하고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그래서 서문만 남아 있는데, 비록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는 못했어도 안중근이 남긴 짧은 유묵(遺墨·생전의 글이나 그림)들만 봐도 뭘 말하려 했는지 대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죽기 직전 생각을 가장 축약적으로 남긴 칠언절구 자작시가 있어요.” 

    그게 뭔지, 말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동양 대세를 생각하니 아득하고 어두운데 뜻이 있는 남아(男兒)로서 어찌 편안히 눈을 감겠는가. 평화로운 국면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아서 처량한데 일본의 정략이 바뀌지 않으니 정말 가련하구나’라는 내용의 시입니다. 저는 이 글을 떠올릴 때마다 국제정치란 것은 역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한다는 걸 깨닫습니다. 어떻게 국제정치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젊은이가 이렇게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공동체의 삶과 죽음을 개인의 삶과 죽음으로 일체화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일본이 가련하다’는 마지막 구절이에요. 일본 제국주의에 그저 적개심을 불태운 게 아니라 사형당하는 처지에서 오히려 가련하다고 연민의 정을 보인다는 건 간단히 넘어갈 대목이 아니죠. 우리도 이런 안중근의 품 정도는 돼야 한다고 봅니다.”

    허생전에서 배우는 제국을 다루는 법

    - 너무 단순하고 위험한 질문일 수 있지만(웃음) 제국의 경험은 고사하고 지배당한 경험만 있는 우리의 상상력에 국제정치적 안목을 장착하기에는 근원적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 질문에는 연암의 상상력을 소개하고 싶군요.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에 보면 제국을 통치하는 전략은 없지만 제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탁월함이 있습니다. 당시에 제국은 알다시피 청나라였죠. 요즘 사람들은 돈에 제일 관심이 많으니까 ‘허생’ 하면 다들 돈 번 얘기로만 기억하는데 후반부를 보면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가 나와요. 한마디로 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느냐에 대해 허생이 계책을 내놓습니다.” 

    -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허생이 내놓은 계책이 뭔가요. 

    “우선 천하의 최고 전문가를 쓰라는 ‘지식 외교’와 지식인과 장사꾼들이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중국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하는 ‘그물망(네트워크) 외교’를 하라는 거였습니다. 허생은 당시 힘의 역학관계를 고려해볼 때 청을 군사적으로 치는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대안으로 청의 중심세력과 유대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소프트파워 외교론인 북학론을 제시한 거죠. 역사를 길게 내다보고, 후세들을 위해 길을 내려고 했던 지성사의 맥이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나는 연암에게서 봅니다. 

    요즘을 19세기 말과 자주 비교하는데 동학도, 의병도, 애국계몽운동도 모두 나름의 명분이 있었지만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국내 역량을 단결시킨 뒤 고도의 국제 역량을 활용한 일본 견제가 필요했는데 말이죠. 거듭 말하지만 아태 질서의 축이 바뀌고 재건축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삶터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주변 세력과 공생하느냐가 한반도적 천하질서의 시작입니다. 현재 우리 담론의 넓이는 기껏해야 ‘남북통일’ 정도인데 통일해봐야 인구 8000만입니다. GDP 합쳐도 2조 달러가 안됩니다. 남북에 국한하지 않고 범위를 더 넓혀야 합니다. 

    21세기는 더 이상 자주의 시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주(共主)의 시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 분별력이 필요하지만 더욱 더 소중한 것은 서로 배려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와 가슴을 조화롭게 쓰면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건축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습니다. 미·중이 놓고 있는 바둑판을 외면하고 열차를 놓치면 다음 세대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이 다가옵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공존, 공영

    석양 무렵 시작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처음에 ‘사랑의 국제정치’라는 제목의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이 거친 국제 무대에 ‘사랑’이라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복합 세계 질서’ 무대라는 건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공존, 공영의 가치가 중시되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중 갈등이나 한일 갈등의 후폭풍이 보여주듯 어느 한쪽만 살아남기에는 지구촌은 이미 너무 묶여버렸다. 

    이제 인류는 싫으나 좋으나 2인3각처럼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는 ‘사랑의 국제정치’란 말로 표현한 것 아닐까. 새로운 문명 표준이 바뀌는 시대 이 복합 무대에서 자유자재한 연기력을 펼치려면 무엇보다 상상력과 안목의 범위가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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