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 : 전남 화순, 함평, 보성

“입 세 개 달린 괴물의 실체를 파악하라”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19-11-07 1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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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돼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아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행운의 편지’다. 15세기 조선에서도 이런 편지가 크게 유행한 일이 있다. 그 편지는 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여기 적힌 내용을 소문내면 행운을 얻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궐까지 보고돼 임금의 관심을 끌었던 조선판 ‘행운의 편지’ 사건을 살펴보자.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가끔 한국 옛 괴물 이야기를 상징이 가득한 신화로 해석하는 사람을 본다. 괴물 이야기에 우리 철학과 사상의 정수, 고유의 얼이 스며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내가 괴물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나는 괴물 전설을 읽으며, 그 이야기가 퍼지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고방식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소문으로 떠돌던 이야기 속에는 임금과 신하 중심으로 기록한 정사(正史), 혹은 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삼구일두귀 이야기도 바로 그런 자료라고 생각한다.

    입 셋, 머리는 하나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성종 1년인 1470년 음력 5월 26일, 조선 궁전에서 시작된다. 이날 업무 중이던 성종이 이상한 소문에 대한 보고를 받는다. “하늘에서 입이 셋, 머리는 하나인 귀신이 내려왔다”는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실록)은 이 괴물을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라고 기록했다. 

    실록에 따르면 삼구일두귀가 처음 내려온 곳은 능성. 지금의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해당한다. 삼구일두귀가 이 지역 한 부잣집에 나타나자 집주인이 밥을 차려줬다. 이 괴물은 거기서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전설을 보면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가 곧 놀라운 능력의 상징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백범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도 그런 대목이 있다.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해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삼구일두귀가 밥을 한 동이나 먹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무언가 신비한 재주, 많은 사람을 휘두를 수 있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암시로 보인다. 



    이에 걸맞게 삼구일두귀는 주위 사람들에게 예언을 했다.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질 것이라는 거창한 얘기는 아니었다. 삼구일두귀는 소박하게도 “이번 달에는 비가 안 오고, 다음 달 스무날에 비가 올 것이다”라고 날씨를 일러줬다. 기이한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평범한 일기예보를 한 셈인데, 전설 속의 예언가들처럼 금기도 하나 내놓았다. “만에 하나 다음 달 스무날에 비가 오지 않으면 밭을 매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늦봄 혹은 초여름이라 할 만한 때다. 언제 비가 오느냐는 농민들에게 한 해 농사를 좌우할 만큼 절박한 문제였을 것이다. 당시 능주지역 사람들은 괴물의 예언을 상상 이상으로 진지하게 여겼던 듯하다. 삼구일두귀 이야기는 함평에 살고 있던 김내은만이라는 사람의 아내 귀에 들어갔고, 그가 임효생이라는 사람에게 들려주면서 더욱 널리 퍼져서 결국 조정에까지 전해지게 된다. 그 와중에 능주 함평 일대의 점치는 사람이 그 해에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까지 했다고 한다. 나이가 무려 149세에 이르는 어느 승려가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니 삼구일두귀 이야기가 지금의 화순에서 함평까지 전해졌고, 사람들이 그 소문을 제법 믿어 근처 지역 분위기가 상당히 흉흉해졌다는 얘기다.

    끼니 때마다 쌀 한 말씩 먹는 괴물

    유언비어는 민심을 어지럽힌다. 성종은 관리들에게 전남 일대에 도는 소문에 실체가 있는지, 그 이야기가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 상세히 조사해보라고 지시한 것 같다. 두 달 정도가 지난 뒤인 1470년 음력 8월 3일 실록에는 삼구일두귀 소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야기의 뼈대는 앞선 내용과 비슷하다. 한 부잣집에 하늘에서 내려온 이상하게 생긴 귀신이 들었고, 밥을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단 세부 내용은 달라진 점이 많다. 전에는 능성의 어느 부잣집에 삼구일두귀가 내려왔다고 했다. 이번에는 보성 박석로라는 부잣집에 귀신이 내려온 것으로 돼 있다. 이 괴물이 먹은 밥의 양도 달라졌다. 전에는 밥 한 동이를 먹었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끼니 때마다 쌀 한 말로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양이 더욱 늘었다. 

    괴물 겉모습도 달라졌다. 이번에는 머리 하나에 입이 셋이라는 묘사가 없다. 대신 “몽두만을 썼다”고 한다. 몽두는 머리에 뒤집어써 얼굴까지 가리게 돼 있는 복면 비슷한 것이다. 보통 죄인들에게 씌웠다. “몽두만 썼다”는 묘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괴물이 옷을 입지 않았거나, 혹은 매우 볼품없는 옷차림을 한 상태에서 몽두만 쓰고 있었다는 얘기 같다. 덩치는 아주 커서 키가 한 길, 그러니까 3m가량 되는 거인이었다고 한다. 

    실록은 이 이상한 괴물이 “내 아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큰 풍년이 들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전한다. 앞서 능성에 나타난 삼구일두귀가 이 괴물의 아우인 걸까. 그러면 풍년이 든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괴물 하나가 하늘에서 또 내려올 거라는 뜻인가. 수백 년 전 뜬소문의 정확한 내용을 지금에 와서 따지기란 불가능하다. 

    실록은 이 이야기를 무당 ‘단정’과 ‘막가이’라는 사람이 퍼뜨렸다고 밝혔다. 막가이는 여성 이름이다. 성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보인다. 무당 역시 조선 건국 이후 처지가 계속 나빠졌던 존재다. 삼구일두귀 이야기가 낮은 신분 사람들 사이에서 먼저 퍼졌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8월 3일 실록에는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149세 승려가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소문에 대한 조사 내용이다. 알고 보니 이 승려는 전라도 지역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중국 명나라 운남성에 원광사(圓廣寺)라는 절이 있는데, 거기 살던 승려가 149세에 세상을 뜬 뒤 혼백으로 나타나 미래에 난리가 날 거라는 예언을 했다는 것이다.

    “편지 내용을 소문내면 태평하게 산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보낸 한글 편지.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보낸 한글 편지.

    실록에 따르면 그 예언은 편지에 쓰여 있었다. 편지에는 예언 외에 이런 말도 덧붙어 있었다고 한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믿지 않으면 눈이 먼다. 
    - 여기 적힌 내용을 한 번 더 전하면 쓴 사람 한 명이 재난을 피할 수 있다.
    - 여기 적힌 내용을 두 번 더 전하면 쓴 사람 집안이 재난을 피할 수 있다.
    - 여기 적힌 내용을 세 번 더 전하면 태평한 시절을 볼 수 있다.

    즉 삼구일두귀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는 ‘체인 레터(chain letter)’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현대에는 ‘행운의 편지’로 친숙한 수법이다. 이것이 1470년 전남에서도 유행했다는 게 이색적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또 있다. ‘행운의 편지’ 내용 중엔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됐다”는 부분이 있다. 소문이 매우 멀리까지 퍼져 있음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삼구일두귀 소문 편지에도 이런 방식이 적용됐다. 실록에 따르면 이 편지를 처음 쓴 사람은 요동에 사는 ‘신강화상(新降和尙)’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까 조선 밖 머나먼 외국에서부터 전래된 편지라는 얘기다. ‘행운의 편지’를 또 한 번 떠올리게 한다. 

    내가 아는 한 ‘행운의 편지’ 같은 체인 레터가 한국사에서 확인되는 사례는 이 사건이 처음이다. 유럽에서도 체인 레터가 지금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18세기, 19세기 무렵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 15세기 조선에서 전형적인 체인 레터 수법이 확인되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다. 

    이런 편지가 퍼져나가려면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15세기 전남 지역에 글을 아는 사람이 상당히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1470년이면 한글이 창제된 이후다. 어쩌면 이 편지가 한글로 쓰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체인 레터가 유행하려면 사람들이 종이를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15세기 조선의 지방에서 종이 값이 높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이 사건은 결국 의금부가 나서서 소문 유포자를 검거하고 처벌하면서 마무리됐다. 보성 부자였다는 박석로는 담양까지 도망쳤지만 붙잡혀 조선의 북쪽 국경 의주로 귀양을 갔다. 다른 사람도 여럿 체포됐다. 매질당한 사람이 많았고, 김내은만은 지금의 개성 즈음에 있는 산예역서 노비가 되는 벌을 받았다. 

    실록이 이 사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한 건 이후 5년이 더 흐른 뒤인 1475년이다. 성종이 “그만하면 충분히 벌을 받은 것 같으니 그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했다”고 적혀 있다. 

    아마도 성종은 5년이 지나기까지 그 일을 잊지 않았나 보다. 입이 셋 있다거나 몽두만 쓰고 다닌다거나 하는 신기한 괴물 모습 때문에 성종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던 건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몽두만 쓰고 있었다”는 묘사는 커다란 둥근 헬멧을 쓴 우주비행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이 소문이 외계인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혹은 미래에서 조선 시대로 시간 여행을 갔던 사람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한 번 상상해본다.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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