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근본 없는’ 여당 대표 ‘불통 女帝’에 천군만마

친박 르네상스!

  • 허만섭 기자 | mshue@donga.com,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 song@yeongnam.com

    입력2016-08-18 17: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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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당 대표 처음으로 ‘찰떡 케미’
    • 與, ‘집 나간 토끼’ 불러들인다?
    • 비주류·야당과 ‘총성 없는 전쟁’
    8·9 전당대회를 통해 새누리당 당권을 잡은 이정현 대표는 당선 이틀 후인 8월 11일 신임 최고위원들을 비롯한 새 지도부를 이끌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마련한 취임 축하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며 청와대 참모들과 환담을 하고 있을 때 이원종 비서실장과 김재원 정무수석이 이 대표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통령께서 들어오시면 너무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꼿꼿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30도 인사, 90도 인사

    여당 사령탑이 된 이 대표가 과거 주군(主君)인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나면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언론이 주목하고 있으니 당당하게 대하라는 당부였다. 실제로 그날 기자들은 두 사람의 만남에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오찬장에 입장한 박 대통령과 인사하면서 고개를 30도 정도만 숙였다. 과거 당 대표들이 대통령에게 했던 정도의 예의만 표한 것이다.



    같은 날 오후 취임 인사차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을 찾은 이 대표는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정세균 국회의장,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를 만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에겐 30도, 야당 대표에겐 90도. 이 대표는 향후 정국에서도 이 자세를 유지할까. 대통령에게 거의 대등하게 할 말을 하고, 야당의 의견을 경청할까.

    이 대표는 당 지도부와 함께 박 대통령과 110분 동안 오찬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현안에 대해 여러 말을 쏟아냈다. 그는 박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전기료 누진제를 재검토해달라고 요청할 때는 “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한번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했다. 개각과 관련해선 “인사권자인 대통령께서 다 판단하실 문제지만 어쨌든 건의를 드리자면…탕평인사, 균형인사, 능력인사, 소수자에 대한 배려인사, 이런 데 대해서도 늘 그렇게 해오셨지만…”이라고 했다. 당·청 관계를 얘기할 때도 “언론에 많이 나오는 말씀을 좀 드리겠다”고 전제한 뒤 말을 꺼냈다.

    오찬 후 박 대통령과 이 대표는 25분간 독대했다. 김무성 전 대표 시절엔 없던 긴 시간이다. 이 대표는 “국정, 민생, 당 운영에 대한 제 복안을 말씀드렸고, 제일 중요한 결론으로 ‘자주 연락을 드리겠다’고 했다. 대통령께서 기꺼이 ‘알았다’고 답해 주셨다”고 설명했다. 만약 두 사람이 실제로 자주 연락한다면 초유의 일이 될 것이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연락하는 일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새누리당 한 의원은 “대통령과 당 대표가 ‘찰떡 케미’다. ‘친박 르네상스(Renaissance, 부활)’를 실감한다”고 촌평한다.



    이제야 시작된 소통

    반면, 이 대표는 90도로 인사를 한 야당 대표들과는 덕담을 나누는 중에 뼈 있는 말을 건넸다. 같은 호남 출신인 박지원 위원장에겐 “워낙 독하고 무서운 야당이다. 하지만 절대로 쥐를 끝까지 몰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퇴로를 항상 열어준다”며 야당의 양보를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장면을 보면, 이정현 체제에서 대통령과 여당 대표 사이에 소통이 비로소 제대로 시작되는 것처럼 비친다. 또한 이 대표가 여당의 핵심 가치에선 야당에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 대통령도 아마 이런 모습의 여당 대표를 고대해왔는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8·9 전당대회에 직접 참석해 이정현 체제의 출범을 축하했다. 박 대통령은 축사에서 “우리 앞에는 남은 1년 반의 국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다”며 “새로운 지도부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나라가 흔들리거나 분열되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연설의 키워드는 ‘분열되지 않도록’일 것이다. ‘앞으로 당 대표와 좀 안 싸웠으면 한다. 나도 그간 힘들었다’는 박 대통령의 속마음이 느껴진다.

    이정현 대표는 본인을 ‘근본 없는 놈’이라 칭한다. 호남 출신 말단 당직자로 출발한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빗댄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을 제안했고 “민생 현장을 찾아다니며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한 당직자는 “앞으로 이 대표가 자기 말을 어떻게 실천하는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근본 없는 놈’ 이정현 대표의 이런 메시지는 ‘불통 여제(女帝) 이미지’의 박 대통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 대통령은 ‘미래 권력’ 시절인 2009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당시 ‘대변인 격’으로 불리던 이정현 의원을 비롯한 현역 의원 8명이 수행했다. 방문 일정 마지막 날 동행 취재한 기자들이 박 대통령에게 말했다. “이번에 이정현 의원이 기자들을 안내하느라 무척 고생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박 대통령의 답변. “참으로 헌신적인 분이시죠.”

    그로부터 7년이 흘러 이 대표는 박근혜 정부의 임기 후반기 국정 운영을 돕고 차기 대선후보 경선을 관리할 여당 사령탑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에 대한 이 대표의 ‘헌신’은 여권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대표 앞엔 넘어야 할 3개의 큰 산이 있다. 박 대통령, 여당 비주류, 야당이다.


    “참으로 헌신적인 분”

    먼저, 박 대통령이 내리는 ‘오더’를 이 대표가 어느 정도까지 흡수할 지가 관건이다. 이 대목은 여권의 앞날에 가장 중요하다. 벌써부터 야당은 “여당 대표실이 청와대의 여의도 부속실이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린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8월 11일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와 함께 한 오찬에서부터 여러 요구사항을 쏟아냈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노동개혁, 김영란법, 원격의료, 청년취업 등에 대한 여당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한 것이다. 이에 이 대표는 “우리 대통령님이 이끄는 이 정부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당·정·청이 완전히 하나, 일체가 되고 동지가 돼서 국민에게 약속한 것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특히 집권 세력의 일원으로 책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나를 대통령의 내시(內侍)라고 해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 대표가 대통령의 오더에만 충실할 경우 정국 파행은 불가피해진다. ‘포스트 박근혜’ 구도와 관련해 이 대표가 경선 관리 역할을 넘어 ‘친박계 후보 킹메이커’를 자임하면 여권의 혼란은 불 보듯 뻔하다.



    대표, 원내대표가 각 세우면…

    두 번째 ‘산’인 여당 비주류와 관련해선, 정진석 원내대표와의 불화 가능성이 당내에서 거론되고 있다. 여소야대 체제에서 거야(巨野)와의 협상에 나서야 할 정 원내대표와 순혈 친박계인 이 대표 사이엔 간극이 있다.

    더구나 정 원내대표는 ‘나는 이정현과 차별화해야 앞날이 열리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정 원내대표는 4선, 이 대표는 3선이다. 이 대표는 원내대표는 물론 원내수석부대표를 해본 경험도 없다. 정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냈고 이번에 원내대표가 돼 국회 원 구성 협상을 해봤다. 원내대표가 당 대표의 리더십을 어느   선까지 따라줄지가 관건이다. 정 원내대표가 “대표가 현장의 어려움을 아느냐”고 이 대표에게 대들 수도 있다. 친박과 비박 사이에 ‘낀박’이라고 자칭한 정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이 대표와 각을 세운다면 새로운 갈등 구도가 형성된다.

    당청 관계에서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이 이 대표와 ‘직거래’를 할 경우에도 당내에서 분란이 일 수 있다. 김 수석이 취임 축하 인사차 이 대표를 찾았을 때 두 사람은 긴밀한 사이임을 과시했다. 이 대표가 “밤늦게라도 전화할 테니 휴대전화를 항상 켜놔라”고 했고, 김 수석은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시죠”라고 했다. 청와대 오찬 회동을 앞두고 김 수석은 의전 방식도 조언했다.

    당청 관계에도 룰이 있다. 보통 당 대표는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와 호흡을 맞춘다. 여기서 큰 틀의 국정 운영 방향을 조율한다. 각론은 여당 원내대표, 청와대 정무수석,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이 협의한다. 여당 대표와 정무수석이 직거래하면 스텝이 엉킨다. 특히 여당 원내대표가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당 최고위원회의도 이 대표에겐 간단치 않다. 유일한 비주류인 강석호 최고위원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 최고위원은 김무성 전 대표의 중동고 후배로 최측근이다. 회의를 ‘김무성 메시지’의 대외창구로 활용하려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대표는 최고위원회의 모두발언을 없애고 완전 비공개로 바꿨다. 샅바싸움이 시작된 것일까. 강 최고위원은 8월 12일 전화 인터뷰에서 만만찮은 각오를 밝혔다.

    ▼ 새 지도부는 당청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나.

    “우선 박근혜 대통령의 소통 부재, 고집불통 이미지를 불식시켜야 한다. 이것은 대통령 스타일의 문제다. 박 대통령의 고집불통이 애국애족의 한 방식이라고 누군가는 얘기한다. 그러나 애국애족하는 마음은 친박이나 비박이나 야당이나 다 같다. 애국애족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서 해야 한다. 이정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 수평적 관계에서 그런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는 일단 지켜봐야 되겠지만 좀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



    “김무성이라면 뒤집어졌다”

    ▼ 앞으로 당청이 수직적 관계가 된다고 보는 건가.

    “다만 이 대표에게 장점은 있다. 대표가 되고 나서 대통령과 처음 만나서 통 큰 사면과 탕평 인사를 얘기 했는데, 박 대통령은 ‘잘 알겠다, 검토하겠다’고 했다. 만일 김무성 대표가 그런 건의를 했다면 박 대통령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뒤집어졌을 거다. 이정현 대표가 건의하니까 대통령의 그런 반응이 가능한 거다. 사전에 김재원 정무수석과 발언 수위에 대한 교감이 있었을 걸로 본다. 이 대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정제’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일단 대통령과 여당 대표 사이에 소통은 된다고 봐야 한다.”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강 최고위원은 김성회 전 의원 회유 녹취록 파문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안부터, 국민의 민생부터 살펴야 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에 대해 강 최고위원은 “이 대표가 거부한 건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내각 개편, 전기료 인하, 사드, 추경 같은 현안이 있으니 이 부분들을 먼저 진행하고 녹취록 파문 같은 당내 문제는 천천히 풀자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렇다고 공천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덮어둘 순 없다. 한번은 털고 가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공천 공방 2라운드를 예고한 것이다. 강 최고위원은 비주류 유일의 지도부 멤버로서 자신의 역할을 ‘포장 벗기기’에 비유했다.

    “자칫 이정현 대표가 너무 청와대 옹호론으로 갈 수 있다. 청와대가 10개를 잘했을 때 이 대표는 20개를 잘했다고 포장할지 모른다. 과장하지 말라며 포장을 벗기는 역할을 내가 하겠다.”

    이 대표 앞의 세 번째 산인 야당은 더 거칠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8월 27일 선출되는 더민주당 지도부는 ‘강적들’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대표 경선에 출마한 추미애, 이종걸, 김상곤 후보 모두 ‘박근혜라면 치를 떨 것 같은 골수 원리주의자’로 평가돼왔다. 사드 배치에 반대하지 않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와 비교조차 안 된다.

    9월 정기국회는 이 대표의 첫 시험대다. 더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이 공조해 정부에 십자포화를 퍼부을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는 박 대통령의 요청을 국회에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한다.



    “밀어붙이면 밀려야지”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업적을 남기려고 서두를 것이다.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고 여당에 요구할 것이다. 야당은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박 대통령을 돕지 않을 것 같다. 반대를 위한 반대도 서슴지 않을 듯하다. 여소야대 지형이므로 야당의 집권 가능성은 꽤 높아졌다.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관료조직은 초조한 박 대통령과 달리 피동적으로 느긋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정치권은 이 대표에 대해 ‘우려 반, 기대 반’이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김무성 당 대표 시절의 당·정·청 엇박자는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이정현 체제에서 이 엇박자가 해소될까. 그러기엔 이 대표는 대통령과 너무 가깝다. 그가 때로는 청와대를 설득하고 때로는 정부를 독려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반면, 여당 일부 인사들은 이정현의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 ‘민생 속으로’ 메시지에 주목한다. 한 여권 인사는 “이정현은 ‘집 나간 토끼(새누리당에서 이탈한 보수·중도 층)’를 다시 불러들일 어떤 ‘프레임’을 만들 줄 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정현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낀다는 사람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그는 대표가 되자마자 고향인 전남 순천을 찾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보수 성향 시민들은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화합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안도감을 느낀다. 여소야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야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밀려야지. 새누리당에 실망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얻는 것이 더 중요한데, ‘고만고만한 정치인’으로 인식되던 이정현이 대표가 되더니 이 일을 놀랍도록 잘 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정현에게 비주류·야당과의  ‘총성 없는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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