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행히 관대한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집에 돌아가니 이런 사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런 불행이 부인의 잘못도 아니고 불가항력적으로 당한 일임을 이해하면서도 가정생활을 계속할 수 없어 결국 고향도 조국도 등지고 말았다. 그런 상처를 입힌 국가기관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 최근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스캔들이다. 한국 사회의 정예 고관이 국가가 자신에게 위임한 권력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막대한 치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과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화가 있다. 그가 오래전 6000원짜리 차표를 1만 원에 팔아 4000원의 이익을 남긴 암표상을 구속 기소했다는 것이다. 4000원 챙긴 죄를 그리 엄하게 다스린 사람이 정작 자신은 100억 원대 불법 이득을 취하고도 처음엔 “잘못한 일이 없다”고 했으니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암표상이 초범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두 사건의 차이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이득의 액수나 죄의 경중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국가권력이 배경이 된 범죄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피해는 있고 책임은 없다
좀 더 무게감 있는 사례를 찾아보자. 영국이 2003년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에 참전해 2009년 철군할 때까지 토니 블레어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조사 결과(칠콧 보고서)가 최근 영국에서 발표됐다. 2009년부터 7년간 150여 명의 증언을 듣고 15만 건의 문서를 분석한 결과물인 이 보고서는 “전쟁 자체뿐 아니라 이라크 점령도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런 잘못된 결정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13년 동안 혼란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피살된 사람만 25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정작 잘못된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법적 조치가 따르지 않는다. 한동안의 흥분이 잦아들면 세상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다. 최근 일본의 태평양전쟁 참전 결정 과정에 관한 책 ‘일본, 1941년(Japan 1941)’을 읽었다. 저자 에리 호타는 일본 정부, 특히 군부 지도층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결론은 ‘한심할 정도의 무책임과 타성에 의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책임질 수도 없는 전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갔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산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도 ‘미국의 요구에 응하든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어느 누구도 책임 있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국민을 확신도 전망도 불투명한 전쟁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결과는 전사자만 300만 명. 두 차례의 원폭 투하에다 도쿄 대폭격 같은 참사를 당하면서도 끝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국민은 애국심이라는 명분으로, 혹은 천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전쟁에 생명과 재산을 바쳤다.
국가에 대한 환멸과 불신
슬픈 얘기를 하나만 더 보태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퇴임 후 중국을 방문해 중국 지도층과 나눈 대화를 자신의 저서에 소개했다. 만찬 도중 중국의 지도층 인사가 흔히 언급하는 화두를 꺼냈다. 중국의 인민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탈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자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성격인 대처 여사가 이렇게 되물었다. “제국주의 나라들의 침략으로 중국 인민이 큰 희생을 한 건 맞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정권 통치하에서 중국 인민이 당한 피해에 비하면 오히려 작은 편 아닌가.”좌중은 일순간에 어색한 분위기에 휩싸였고 주객 간의 대화는 더는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 후 중국 측에서 그날 만찬에서 나눈 대화는 외부에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은밀히 부탁했다는데, 대처 전 총리는 이런 부탁을 받은 일까지 자신의 저서에 그대로 공개했다.
마오쩌둥 시대에 관한 근래 저술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새로운 독립국가 통치 아래서 겪은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 예로 최근 번역서가 출간된 문화대혁명 피해자 펑지차이의 저서 ‘백 사람의 십년’의 내용은 어찌나 잔혹한지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 기간 중 70만 명이 박해를 받고, 3만48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른바 대약진운동 기간을 오랫동안 연구한 프랭크 디코터 홍콩대 교수는 저서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에서 이 기간에 아사(餓死)한 사람이 4500만 명에 달한다고 기술했다. 4500만 명이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굶어 죽다니! 그렇지만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멋대로 휘두른 사람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일반 국민의 처지에서 외국의 침략으로 인해 겪는 고통과 자국 정부로부터 받는 고통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특히 북한의 경우 국가권력을 한 집안이 사유화해 세습하며 인민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다. 단지 국가가 가르치는 것만을 믿고 국가가 지시하는 것만을 하게 돼 있다.
역사상 근대국가만큼 그 성원들에게 강력한 충성을 요구하고, 또 그런 충성을 받은 정치체도 없을 것이다. 지난 세기 유럽에서도 이런 애국심에 고취된 국민들이 전쟁터로 내몰려 희생을 당하는 참사가 두 차례나 빚어졌다. 이후 시작된 유럽 공동체 운동도 국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이 상당 부분 작용한 결과로 안다.
‘권력을 농단하는 그루프’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 지역에서는 아직도 사람들 대부분이 국가가 정하는 국익에 따르고 이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만이 올바른 것으로 안다. 반세기도 전에 유치환 시인은 종달새가 국가에 관한 진실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읊은 바 있다.바깥 새장에선 사뭇 조잘 조잘-국가란 권력을 에워 그것을 농단하는 그루프들의 구실밖에 아니다!고 향수에 꾸겨 있는 이방인의 귀에다 종일 조잘거려 들려주는 것이다.
-‘종달새와 국가’ 중에서(‘그루프’는 ‘그룹’의 옛 표기)
라 종 일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정치학)
● 경희대 교수, 우석대 총장
● 駐영국 대사, 일본 대사
●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 現 가천대 석좌교수, 대통령직속 통일준비위 외교안보분야 민간위원
● 저서 : ‘현대서구정치론’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장성택의 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