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 수요’ 압도하는 ‘공간 수요’
- 한 층 털어 ‘고시 붙을 학생들’ 조련
- 도서 대출은 계속 감소
- “대학의 순수학문 추구 정체성 잃어”
그런데 요즘 대학 중앙도서관의 자료실은 한산하다. 자리 잡기 경쟁은 열람실에서만 일어난다.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은 자료실로 통하는 입구와 열람실로 통하는 입구가 구분돼 있었다. 자료실은 도서와 정기간행물 등의 ‘자료’가 대형 서가에 보관된 곳이다. 열람실은 이용자가 공부나 독서 같은 개인적인 ‘열람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으로 칸막이 책상이나 스탠드를 갖춰놓았다.
자료실 입구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열람실 입구는 수많은 학생으로 북적였다. 학생들은 좌석 배정기 앞에 늘어서 있었다. 한 학생에게 왜 줄을 서 있느냐고 물으니 “좌석이 마감돼 새 좌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열람실 내부는 이미 학생들로 포화상태였다.
이와 딴판으로 자료실 내부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책이 꽂힌 서가 쪽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읽은 책을 올려두는 수레 위엔 두어 권의 책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학생은 “일상적인 풍경”이라며 “학생들 사이에서 ‘도서관에 간다’는 말은 ‘열람실에 공부하러 간다’는 뜻이지 ‘책을 빌리거나 읽으러 간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독서는 노동?
대학 중앙도서관은 본래 책이나 논문 같은 학술자료를 탐독해 학문을 익히는 용도로 지어졌다. 그러나 요즘엔 ‘거대한 독서실’을 방불케 한다. 대기업 입사시험이나 공무원 고시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변질된 것이다.교육부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대학 재학생 1인당 도서대출 건수는 7.4권으로, 4년 전인 2011년의 10.3권에 비해 크게 줄었다. 반면, 열람실 좌석 수는 늘고 있다. 2013년 대학 도서관 열람실 좌석 1석당 재학생 수는 5.8명이었지만 2015년엔 5.6명으로 줄었다. 이처럼 대학 도서관의 정체성은 ‘책 읽는 공간’에서 ‘자습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대체로 전공서적이든 교양서적이든 책을 진득하게 탐독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외국어대 2학년 도모(24) 씨는 대학 입학 이래 중앙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이 10권 남짓하다. 도씨는 주로 태블릿PC를 통해 ‘e-Book’을 본다고 한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반납하는 것도 번거롭다. 늘 갖고 다니는 태블릿PC로 원하는 책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e-Book을 이용하면서 독서량이 크게 줄어든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컴퓨터 화면으로 책을 읽다 보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중간 중간 웹 서핑을 하거나 SNS를 이용하게 된다. 전공서적도 끝까지 정독하기보다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요약본 위주로 보게 된다.”
다른 몇몇 학생도 “수업에 필요한 책을 숙독하지 않는다. 원문을 읽기보단 요약본을 본다. 학점을 잘 받았다고 해서 전공지식을 심도 있게 탐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고려대 4학년 김모(여·23) 씨는 이렇게 말한다.
“취업 준비로 너무 바빠 한가롭게 독서할 시간이 없다. 소설이나 자기개발서를 가끔 접하지만, 문득 이런 책들이 당장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안 읽게 된다. 결국 취업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게 된다. 여가시간에도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대개 휴대전화나 웹툰이나 SNS를 본다.”
‘중도 통학’ 풍속도
‘대학내일’에 따르면, 전국 대학생의 76%는 한 해 동안 목표한 독서량을 채우지 못한다.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거나 다른 즐길 거리가 다양해서다. 이들은 책을 읽는 것을 ‘노동’으로 여기는가 하면 깊이 있는 서술에 부담을 느낀다고 말한다.서울시내 여러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기업 입사시험 준비생들 외에 각종 고시 준비생들로 붐빈다. 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부 4학년 심모(26) 씨는 신림동 고시촌 대신 학교 도서관에서 변리사 시험을 준비한다. 심씨는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졸업하지 않고 휴학을 연장했다고 한다. 그는 “고시촌에 거처를 구하는 게 번거로울 뿐 아니라 경비도 많이 든다. 휴학이나 졸업유예 신분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게 훨씬 낫다”고 설명했다.
서울지역 대학 4학년생들 중 상당수는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교과과정만 수료한 상태에서 안간힘을 쓰며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않고 있다. 그런 다음 학교 중앙도서관으로 ‘통학’하면서 취업·고시 준비에 매달린다. 졸업을 해서 학교에서 밀려나면 당장 오갈 곳이 사라지므로 이러한 ‘중도 통학’ 풍속도가 나타나는 것.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듯, 서울시내 여러 대학에선 자체적으로 고시 준비반을 운영한다. 이는 졸업해야 할 학생들을 중앙도서관에 계속 붙들어두는 또 다른 요인이다. 심씨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예전엔 주로 고시촌에서 고시와 관련된 고급 정보가 유통됐다. 요즘엔 학교 내 전문 고시 준비반에서 이런 정보를 빨리 얻을 수 있다. 고시 준비반에 지도교수가 붙고, 학교 차원의 지원도 이뤄진다. 이런 고시 준비반에 들어가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는 게 더 유리하다.”
고려대 이공계열 단과대학 소속 교수들은 이공계 졸업생들이 응시하는 국가고시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학내 고시 준비반’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균관대에선 이러한 학내 ‘고시 준비반’이 아예 도서관의 한 층을 단독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 명륜캠퍼스 중앙도서관 5층 전체가 사법시험, 행정고시, 언론사 시험 등을 준비하는 ‘고시생을 위한 특수 열람실’로 조성돼 있다. 이곳은 대학가에서 ‘한국 대학교육의 현실을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 고시 준비반에 소속된 한 학생에 따르면, 고시 준비반에 들어가려면 자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경쟁이 치열하다. 고시 준비반 열람실은 일반 열람실과는 다르게 비밀번호를 알아야 출입할 수 있으며, 학생별로 지정석이 마련돼 있다. 관련 학과 교수가 지도교수실에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전용 공부방도 구비돼 있다고 한다.
“5층 입성은 큰 특전”
이 학생과 동행해 5층 고시 준비반 특수 열람실에 들어가 봤다. 대학 도서관이 아니라 노량진 학원가나 스파르타식 입시학원을 연상케 했다. 전용 열람실 문이 열리자 높게 솟은 열람실 책상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행여 발걸음 소리가 공부를 방해할까 염려해 열람실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모두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학생이 많아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도서관 꼭대기인 5층에 위치한 이곳은 따로 엘리베이터가 없어 오르내리기 힘들었다. 이 때문인지 대형 자판기, 간식, 음료가 다양하게 구비돼 있었다. 취재에 동행한 학생은 “5층에 입성하는 건 큰 특전이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밀려난다. 아래층에선 매일 자리 잡기 경쟁을 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고려대 과학도서관 5층도 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특수 열람실’로 꾸며졌다. 성균관대처럼 학교가 나서서 고시 준비 공간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우수한 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배타적 공간’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이 열람실을 이용하는 한 고시 준비생은 “이른 아침에 이 열람실로 등교해 자정이 될 때까지 계속 고시 공부만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책상 칸막이 위로 커다란 널빤지를 덧대 자기만의 고립된 성을 쌓은 뒤 그 안에서 수험서를 파고 있었다. 슬리퍼, 담요, 도시락, 참고서 같은 개인용품이 좌석 주변에 쌓여 있었다. 이곳도 학생별로 지정석처럼 운영되는 듯했다.
“유일한 터전이자 안식처”
이처럼 대학 도서관은 장기화한 취업난으로 갈 곳을 잃은 학생들이 운집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방학 중이든 학기 중이든 언제나 취업·고시 준비생들로 포화상태다. 일부 대학 도서관은 소수에게 특전이 주어지는 특수열람실과 99%가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하는 일반 열람실로 나뉘어 있었다.도서관에서 만난 학생들은 “취업 준비든 고시 공부든 장기 레이스가 되고 있다. 언제 합격할지 기약이 없다. 그나마 도서관이 갈 곳 없는 우리의 유일한 생활 터전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안호용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취업 준비기간이 길어지면서 대학 도서관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이것은 ‘자료’에 대한 수요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수요다. 도서관이 물리적 공간을 더 확보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정 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특수 열람실에 대해선 “순수학문의 가치를 전파해야 할 대학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것 같다”고 했다.
일부 대학은 폭발적인 열람실 수요와 대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조화시키는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2015년 문을 연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관정도서관은 열람실 곳곳에 서가를 마련했다. 서가엔 추천도서, 베스트셀러, 필독 교양도서가 빽빽이 꽂혀 있다. 열람실과 자료실 사이의 벽을 허문 시도인데, 반응이 꽤 좋다고 한다.
서울대 도서관 사서 정구인 씨는 “주변에 꽂혀 있는 책 제목을 그저 훑는 것만으로도 독서 욕구가 자극된다. 열람실을 이용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서가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정다은(22) 씨는 “자리 부족 문제도 거의 해소됐다. 학교가 학생들이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탐사기획보도’ 수강생이 박재영 교수의 지도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