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시킨 미술관은 러시아의 양대 미술관 중 하나다.
- 이 미술관의 아버지는 츠베타예프 모스크바대 교수다. 미술관 설립에 매달린 그가 자금난을 겪자 친구인 외교관 출신 사업가 네차예프-말초프가 거금을 지원하면서 꿈이 실현됐다.
러시아 미술관 양대 산맥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미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고, 그다음이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이다. 두 미술관은 러시아 작가 이외의 외국 작가 작품을 소장한 러시아 미술관의 양대 산맥이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다. 이들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장중하다. 푸시킨 미술관도 ‘모스크바의 에르미타주’라고 할 정도로 우수한 작품을 많이 소장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작품을 이곳으로 많이 옮겨온 덕분이다.
1918년에 들어선 레닌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부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겼는데, 이때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수천 점의 작품을 푸시킨 미술관으로 가져왔다. 다른 소규모 미술관들의 소장품도 푸시킨 미술관으로 옮겼는데, 현재 푸시킨 미술관이 소장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작품은 대부분 이때 가져왔다.
미술관의 세계에서도 강자의 횡포는 무서웠다. 푸시킨 미술관의 고대 조각상과 유적은 2차대전 때 독일에서 가져온 것이 많다. 전승국으로서 동독을 점거한 러시아는 드레스덴 미술관의 모든 작품을 가져왔다. 10년 후 이 작품들을 동독으로 되돌려주긴 했으나 미술관 직원들의 반대가 격렬했다고 한다.
푸시킨 미술관은 독일에서 가져온 작품 중 상당수를 여전히 갖고 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가져온 트로이 유적은 푸시킨 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이다. 일본에 빼앗긴 한국의 문화재도 이런 현실에 처해 있을 것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소장품은 90%가 미국 바깥에서 왔다고 한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은 자본과 힘의 논리 말고는 기댈 곳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미술관은 돈 먹는 하마
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미술관이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물론 돈 때문이었다. 미술관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다. 돈이 있어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이 없으면 유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유명 미술관 대부분은 국립 미술관이거나 재벌 미술관이다. 푸시킨 미술관도 지금은 국립 미술관이고 만들 때는 재벌 미술관이었다.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처럼 돈도 누가 먹느냐에 따라 미술관이 될 수도 있고 무기 창고가 될 수도 있다. 츠베타예프는 유리 제조업으로 재벌이 된 유리 네차예프-말초프(1834~1913)를 설득해 200만 루블의 기부금을 받아냈다. 요즘 가치로 1000억 원에 가까운 거액이다. 이 돈으로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모스크바 최고의 건축가인 로만 클라인과 블라디미르 슈코프의 설계로 1898년 8월 대대적인 기공식이 있었고, 그 후 장장 14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912년 마침내 문을 열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츠베타예프의 꿈은 실현됐다. 미술관은 일반인에게도 개방됐지만 모스크바대 교육용 부속미술관으로도 운영됐다. 미술관 운영은 당연히 츠베타예프의 몫이었다.
개관 당시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알렉산더 3세 미술관’으로 명명됐다. 거금을 기부한 네차예프-말초프 대신 20만 루블밖에 내지 않은 알렉산더 3세의 이름이 붙여진 걸 보면 여기에도 권력의 횡포는 작용했나 보다. 권력은 더럽고 유한하다. 이후 미술관의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고, 1923년에는 모스크바대에서 분리돼 독립 미술관이 됐다. 1937년부터 푸시킨 미술관으로 명명돼 오늘에 이른다.
설립 초창기에는 이집트 고대 유적과 14세기 이탈리아 작품이 주요 소장품이었다. 이후 개인이 수집한 서양 미술품이 대거 몰려오면서 소장품을 풍부하게 갖추게 됐다. 특히 37만 점이나 되는 드로잉 및 판화와 25만 점 이상의 각종 화폐는 이 미술관의 독보적인 소장품으로 인정받는다.
츠베타예프 교수와 네차예프-말초프 재벌이 아니었으면 푸시킨 미술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생을 미술관 설립에 집요하게 매달린 츠베타예프는 러시아의 관료주의가 그의 염원을 가로막고 있음을 간파하고 독지가를 찾아나섰다. 그가 바로 친구 네차예프-말초프였다.
네차예프-말초프는 미술관 건립에 200만 루블을 내놓았지만 이 돈으로는 미술관을 완공할 수 없었다. 네차예프는 내부 공사를 위해 다시 250만 루블을 기부했다. 이후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1905년 러시아에는 혁명과 전쟁으로 경제위기가 몰아닥쳤다. 네차예프-말초프의 유리 공장도 노동자 파업에 휩싸이면서 회사는 손실과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미술관 공사는 진척되지 못했고, 미술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희미해졌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네차예프-말초프는 익명으로 미술관 공사를 계속 지원했다. 작품 구입을 위해서도 많은 돈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술관 공사가 끝날 무렵 네차예프-말초프는 결국 부도 상태에 이르렀고, 미술관 완공 1년 후 유명을 달리했다.
숭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푸시킨 미술관은 이처럼 네차예프-말초프와 츠베타예프의 숭고한 정신과 헌신적인 노력의 결정체였다. 학자의 신념과 사업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의기투합한 결과이며, 전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이 만들어낸 예술 이상의 융합 예술작품이다.네차예프는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대 법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파리 등 유럽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서유럽의 상류 문화를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과 가까워지고 조예도 깊어졌다. 고위 관리이던 아버지가 고대사에 심취했던 터라 그 영향도 받아 매우 지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46세 때 전환기가 찾아왔다. 황제의 측근이던 삼촌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삼촌은 유리산업의 메카인 거스(Gus)에 여러 개의 유리공장을 가진 재벌이기도 했다. 삼촌 말초프는 네차예프가 ‘말초프’라는 성(姓)을 물려받는 조건으로 그의 재산을 모두 네차예프에게 상속했다. 네차예프는 뜻하지 않게 사업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고 이름도 네차예프-말초프가 됐다.
네차예프는 성격이 조용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사업가로 변신하면서 부드럽던 성격도 강해졌다. 재벌이 된 네차예프-말초프는 미술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병원, 고아원, 학교 등을 만들고 빈민을 돕는 일에도 앞장섰다.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러시아였지만, 사회 공헌에 돈을 아끼지 않은 이런 재벌도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이지만 변방이고 후진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사회주의를 시행한 국가다. 이런 나라에 서유럽 그림, 특히 인상파 그림들이 그토록 많다는 것이 놀라웠다. 2차대전 승전국으로서 점령지 유럽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들여온 게 대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캐고 들어가 보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러시아 재벌들이 이런 작품을 많이 수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흥 부자들의 ‘인상파 쇼핑’
19세기 말 러시아엔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신흥 부자들이 생겨났다. 돈이 많아지면 문화예술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많은 부자가 파리 등 유럽을 여행하면서 당시 아방가르드 작품인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작품들을 사 모았다. 이들은 수집품으로 개인 미술관을 만들기도 하고 모스크바 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부자들의 이런 행동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됐다.러시아 정부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개인 수집품을 국유화하면서도 서구 미술품 수집과 전시는 계속 장려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부자와 유력자들은 계속 서유럽 미술품을 수집했고, 덕분에 러시아에는 서유럽 작품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전쟁이 끝난 후 정부는 새로운 미술정책을 도입했다.
정부는 서유럽 미술품을 모두 두 미술관으로 모으는 정책을 폈다. 바로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푸시킨 미술관이었다. 이후에도 푸시킨 미술관은 서양 미술품을 확보해갔다. 스스로도 작품 수집을 계속해나갔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유명 작가의 가족들로부터 작품을 기증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술관에는 서유럽 미술이 많이 늘어났고 인상파 이후의 작품도 풍부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친 미술관의 이름이 ‘푸시킨’이라는 것은 좀 생뚱맞다.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은 화가도 아니고 컬렉터도 아니다. 러시아에서 최고로 치는 위대한 시인이자 문학가이지만, 미술이나 미술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는 그의 시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러시아 정부는 푸시킨 서거 100주년이 되는 1937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의 일환으로 이 미술관의 이름을 푸시킨 미술관으로 바꿨다. 시인의 이름이 미술관 명칭이 된 것이다. 푸시킨 덕에 미술관도 유명해지고, 푸시킨은 미술계에도 얼굴을 알렸으니 결과적으로 둘 모두에게 득이 된 것일까.
고흐 생전에 팔린 유일한 그림
푸시킨은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 태생이다. 그의 모계 쪽 증조할아버지는 에티오피아에서 붙잡혀 온 노예였지만 귀족 계급에 오를 정도로 국가에 많은 공을 쌓았다. 푸시킨은 15세에 첫 시집을 출간한 천재로, 러시아 현대문학의 개척자다. 이 미술관에 ‘푸시킨’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러시아가 이 미술관과 푸시킨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푸시킨은 모스크바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나탈리아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29세 때 불과 16세이던 나탈리아에게 프러포즈해 3년 후인 1831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1837년 나탈리아는 다른 남자와의 염문이 퍼졌고 이 얘기가 푸시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푸시킨은 그 남자와 결투를 벌여 총상을 입었고 이틀 후 사망했다. 불과 38세 때였다. 그가 마지막에 살던 집은 그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푸시킨 미술관에 고흐의 ‘붉은 포도밭’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흐 생전에 팔린 유일한 그림이 어떻게 여기에 걸리게 됐는지 무척 궁금했다. 고흐는 짧은 생애를 불우하게 살다 갔다. 생전에는 누구도 이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고흐의 진가를 그때 이미 알아본 것일까.
‘붉은 포도밭’은 1888년 작품인데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Les XX’의 연례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Les XX는 20명의 벨기에 화가, 조각가,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모임인데 1883년 결성됐다. 이 모임의 연례 전시회에는 회원과 초청 작가만 참가할 수 있었다. ‘붉은 포도밭’은 이 전시회에 걸렸고, 안나 보흐라는 벨기에의 인상파 여류화가이자 그림 컬렉터에게 400프랑(요즘 가치로 약 100만 원)에 팔렸다.
이후 이 그림은 러시아의 사업가로 유명한 그림 수집가 세르게이 슈추킨에게 넘어갔다. 1917년의 볼세비키 혁명 후 이 그림은 슈추킨의 다른 소장품과 함께 국유화해 푸시킨 미술관으로 넘겨졌다. 러시아 컬렉터들의 안목이 높았서였는지 푸시킨 미술관에는 고흐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 있다.
‘붉은 포도밭’은 포도 수확에 몰두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수확한 포도를 싣고 갈 마차도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제목이 아니라면 이곳이 포도밭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체적인 색조가 너무 붉다. 마치 꽃밭 같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포도밭에서 농민들이 얼마나 고되게 일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다른 그림에서도 농민과 노동자들의 고된 삶에 대해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노동자, 농민을 앞세우는 사회주의 정신에 딱 맞아떨어지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로트레크와 길베르의 우정
푸시킨 미술관에는 ‘노래하는 길베르(Yvette Gilbert Singing “Linger, Longer, Loo”)’라는 제목의, 매우 흥미로운 드로잉이 걸려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의 작품이다. 당대 파리의 유명 여가수 이베트 길베르를 스케치한 초상화다. 길베르는 바닥에서 시작해 정상에 이른 사람이고, 로트레크는 귀족이지만 불우했던 인물이다. 로트레크는 어릴 적 사고로 척추 장애인이 됐고 부모로부터도 배척당해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독특하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그림을 많이 남겼다.그가 스케치한 길베르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중에는 물랭루즈의 명가수로 등극했고, 프랑스는 물론 영국, 독일,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뉴욕의 카네기홀에서도 공연했을 뿐 아니라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개인 파티에 초대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로트레크는 물랭루즈의 불우한 가수, 댄서, 접대부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길베르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두 번째 스케치 앨범을 그녀에게 헌납했다. 푸시킨 미술관에 걸린 길베르의 초상화는 ‘Le Rire’라는 잡지의 표지로 그린 그림이다. 길베르는 다음 날 런던으로 가야 하는 스케줄이 잡혀 있었지만, 로트레크가 잡지에 보낼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꺼이 시간을 내 모델이 됐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노래까지 불러줬다. 로트레크가 편집장에게 준 이 초상화는 어떤 경로를 거쳐서인지 모스크바에까지 와서 푸시킨 미술관에 걸리게 됐다. 길베르는 노래를 부를 때 늘 기다란 검은 장갑을 꼈는데, 이 그림에 그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는 로트레크와 길베르의 정반대 인생 행로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두 사람의 처지는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평등의 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남다른 우정은 사회주의 이념을 넘은 참다운 인간애의 발로였다.
최 정 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