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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에 항거하다 돌 속에 갇힌 인생들

구로구청 사건, 그후 29년

  • 이문헌 | 자유기고가

부정에 항거하다 돌 속에 갇힌 인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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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범한 주부에서 사회운동가로
  • ● 농성 주도 혐의 재판받다 사망
  • ● 추락해 하반신 마비…장애인 인권운동 투신
  • ● “투표함 열렸지만 의혹 못 씻어”
29년간 밀봉돼 있던 투표함 하나가 7월 21일 열렸다. 이른바 ‘구로구청 부정투표 항의 사건’의 발단이 된,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당시 서울 구로구을(乙) 선거구의 부재자 투표함이다. 이 투표함을 선거관리위원회와 한국정치학회가 공개 검증하겠다며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선거연수원 대강당에서 개함 및 계표에 들어갔다.

29년 만에 봉인이 풀린 투표함의 개표와 계수는 불과 3시간 반 만에 끝났다. 계표 결과 기호 1번 노태우(민주정의당) 후보가 압도적으로 득표한 걸로 나타났다. 4325명 중 3133명(72.4%)이 1번을 찍었다. 기호 3번 김대중(평화민주당) 후보 575표(13.3%), 2번 김영삼(통일민주당) 후보 404표(9.3%), 4번 김종필(신민주공화당) 후보 130표(3.0%) 순이었다.

이는 13대 대통령선거 최종 득표율인 1위 노태우 36.6%, 2위 김영삼 28.0%, 3위 김대중 27.0%, 4위 김종필 8.1%와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구로구을의 전체 득표율이 노태우 28.05%, 김영삼 25.36%, 김대중 35.66%인 것과는 더욱 차이가 크다. 차이는 물론 순위까지 뒤집힌 것이다. 군 부재자 투표에 광범위한 부정이 있었다는 당시의 의혹이 상당한 근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그런데 이날 개표를 놓고 일반인에겐 잘 이해되지 않는 공방이 벌어졌다. 1987년 당시 구로구청 현장에 있었던 이들, 즉 문제의 투표함을 ‘적발’하고 3일간 농성을 벌인 이들은 정작 이 투표함의 개함에 반대했다. 투표함을 열라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했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이를 막고 나선 것이다. 당시 구로구청 농성에 참여한 이들로 구성된 ‘구로동지회’에서는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성준(51) 씨만 개표 현장에 입회했다. 그러나 개표를 참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표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자기합리화 위해 개함”

서울대 학생대표로 당시 농성에 참여한 박씨는 “이 투표함이 당시의 그 투표함이 맞는지부터가 명확하지 않다. 당시 경찰이 투표함을 가져갔는데, 어떻게 투표함이 중앙선관위로 다시 이송됐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며 진행을 가로막았다. 같은 시각 박씨의 동료들인 구로동지회의 다른 회원들은 연수원 건물 밖에서 ‘선관위의 졸속 개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투표함 하나를 개함할 것이 아니라 1987년 대선 전반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구로동지회는 한국정치학회가 사건 피해자인 자신들과 충분한 협의도 거치지 않은 채 구로을 우편 투표함 개함을 강행하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그 의도와 공정성에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고 말한다. 구로동지회는 한국정치학회에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현재 선관위가 귀 학회의 손을 빌려 개함하려는 의도는 1987년에 부정선거는 없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오직 해당 부재자 투표함 속에 있는 투표지의 진위 여부만으로 당시의 선거 부정 유무를 판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학회는 일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캐낼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학회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구로을 투표함 검증 종합결과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결과보고서가 어떻게 나올지, 그 보고서가 과연 구로구청 투표함의 의혹, 나아가 1987년 대선의 의혹을 얼마나 해소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29년 만의 개표를 놓고 벌어진 공방은 새삼 1987년 겨울 구로구청에서의 3일간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 ‘구로구청에서의 3일간’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 이들이 겪은 굴곡과 파란을 돌아보게 했다.



“부정투표함이다!”

개함일 구로동지회의 기자회견에 함께한 김인자(61) 씨가 바로 그런 경우다. 당시 경기 남양주에 살던  그는 방송에서 “구로구에서 부정투표가 저질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구로구청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평범한 주부이던 김씨의 삶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놓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도 노인정 노인들을 상대로 백지 투표용지를 모아 ‘릴레이 투표’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섯 살 된 아들을 이웃에게 맡기고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구로구청엔 나처럼 방송을 듣고 달려온 시민이 많았다.”

1987년 12월 구로구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해 겨울로 돌아가 보자. 12월 16일, 13대 대통령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뜨거운 열기 속에 치러졌다. 89.2%.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투표율은 6월항쟁이 만들어낸 대통령 직선제에 국민이 얼마나 열광했으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짐작게 한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전국 각 투표장은 투표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구로구청도 그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 투표가 한창 진행 중이던 오전 11시경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투표가 끝나고 나서야 이송돼야 할 투표함이 구청 건물 밖으로 옮겨지는 광경이 한 시민의 눈에 잡힌 것이다. 그는 “부정투표함이다!”라고 소리쳤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투표함이 실려 있던 승합차는 과자상자와 빵 상자로 덮여 있었다. 호송 경찰도 없었다.

흥분한 시민들은 구청 3층에 마련된 선관위 사무실로 몰려갔다. 그곳에서도 이상한 장면이 목격됐다. 수상쩍은 투표함과 기표용구가 대거 발견된 것이다. 투표함 1개, 백지투표용지 1500여 매, 붓두껍 60개, 인주 70개, 인주가 묻은 장갑 6켤레, 특히 붓두껍과 장갑에 묻은 인주는 방금 사용된 듯 선명했다.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계속 몰려들었고 오후 4시부터 5000여 명의 시민이 농성에 들어갔다. 18일 새벽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해산되기까지 2박3일간 이어진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 농성’의 시작이었다. 농성 첫  날인 16일 밤엔 농성자 수가 줄어드는가 싶었으나 다음 날엔 오히려 전날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대부분 가정이 있고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라 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계속 합류했기 때문이다. 유시민 전 의원도 당시 김대중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구로구청으로 달려가 투표함을 붙잡고 울었다. 그는 “그날 (진 것이) 믿을 수가 없고, 서럽고 해서 밤새 울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군중 속에는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의 작가 김영현도 있었다. 그는 소설 ‘단풍나무집 풍경’에서 당시 구로구청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구로구청 마당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담벼락에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자보가 하얗게 붙어 있었다. 선거용으로 사용되었던 중계차도 서 있었는데 그 중계차에 설치되어 있는 고성능 앰프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연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자신을 동장이라고 소개한 사십대 초반의 사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도대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울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이게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다음 날 신문에서 그는 사내가 집에 가서 석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7일 밤, 농성 지도부가 공정선거 감시단을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로 전환할 것을 선언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 날인 18일 오전에는 시청 앞 광장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그곳에서 구로구청까지 행진할 것이라는 계획도 나왔다. 18일 자정 무렵 서울시장의 진압 예고 전화가 걸려왔다.



폭력 겪은 뒤 정서불안

새벽 6시경, 마침내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4000여 명의 백골단이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하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구로구청에 난입했다. 7시경부터는 헬기까지 동원해 옥상으로 진압 공격을 했다. 아수라장이었다. 미처 옥상까지 올라가지 못한 농성자들은 경찰을 피해 건물 3, 4층에서 뛰어내렸다.  

이곳저곳에서 욕설과 비명, 누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대생 양원태 씨가 5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척추가 꺾이는 중상을 입는 등 크게 다친 사람이 확인된 경우만도 17명이었다. 김인자 씨는 그때 상황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최루탄으로 눈조차 뜰 수 없이 밀려서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옆에 ‘배금이’라는 이름의, 모범택시 기사 옷을 입고 온 아가씨가 있었어요. 그런데 백골단이 그 아이 몸 위로 올라가 허리를 마구 밟아대는 거예요. 결국 그 애는 허리를 다쳐 지금도 몸이 성치 못해요.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 울부짖음… 끔찍했죠.

나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곧 풀려났지만 한동안 정서불안에 시달렸어요. 손가락을 괜히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로부터 명함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구깃구깃 구기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제복을 입은 군인이나 경찰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그는 울분을 주체할 수 없어 이후 구로구청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모임과 시위에 열심히 다녔다.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놔둘 수 없어 아이까지 데리고 집회에 나갔다. 평범한 가정주부이던 그녀가 그 후 29년간 맹렬 여성운동가로, 노동운동가로, 남편을 사고로 잃는 불행을 겪으면서도 해고투쟁을 벌이는 등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세월은 ‘87년 구로구청’의 연장이었던 듯하다.



부부가 암으로 타계

12월 18일 연행된 사람은 1050명. 그중 208명이 구속되고 114명이 기소됐다. 구속됐든 아니든, 형을 살았든 아니든 간에 구로구청에 있었던 사람 상당수의 삶은 ‘구로구청 이전’과 ‘구로구청 이후’로 바뀌었다.

특히 청년운동가 김병곤(사건 당시 35세) 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김씨는 “아직 살아 있다면 사회운동과 정치 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는 구로구청 농성 주도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사망한다. 1971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3학년 때인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처음 구속된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재판정에서의 일화로 유명해졌다. 스물두 살이던 그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법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얼굴엔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구형 정찰제’로 불릴 만큼 검사가 구형하면 판사도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던 시대였는데, ‘준(準)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구로구청 사건 때 김씨는 1985년 민민투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출소한 지 몇 달 안 지난 시점이었다. 현장에서 농성을 이끈 그는 17일 밤 사람들을 설득해 내보냈다. 경찰 진입은 시간문제였고, 그렇게 되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한 그는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제 좀 냉정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오늘밤 경찰이 대규모로 공격해 올 거라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선 안 됩니다. 민주화를 위한 긴 여정엔 여러분의 힘이 계속 필요할 것입니다. 꼭 있어야 할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내보내고 남은 그는 진압 과정에서 무수히 구타당해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몸이 망가진 채 감옥에 들어간 그는 감옥에서 건강을 더 해쳤다. 계속 소화가 안 되고 배에서 뭔가 잡히는데도 교도소 의사는 소화제만 줬다고 한다. 결국 위궤양 및 위암 판정을 받았다. 병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1990년 12월 6일 눈을 감았다. 서른여덟 한창 나이였다.

김씨의 부인 박문숙 씨의 죽음도 많은 이의 안타까움을 샀다. 서울여대 74학번으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교회 야학에서 김씨를 만났고 운동가의 아내로서 번역부터 액세서리 가게, 보험 외판원 등 온갖 일을 다 하며 두 딸을 키웠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경실련 사무국장이던 박씨는 남편이 미처 못다 한 일을 이어가려 애썼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을 맡기도 했고,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그가 언젠가부터 몸이 좋지 않다며 집회나 모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후배들은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줄로만 알았지만 실은 암과 싸우고 있었다. 남편을 덮친 암이 20년 만에 아내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2014년 4월 세상을 떠난 박씨는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남편과 합장됐다. 24년 만에 남편과 아내, 두 영혼이 지하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쇠파이프 피하다 추락

양원태(51) 씨는 구로구청 사건의 최대 희생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23세의 서울대 경영학과 학생으로 노동현장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공정선거 감시활동을 하다가 구로구청으로 갔다. 18일 새벽 최루탄 연기 자욱한 구로구청 5층 강당,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머리 위로 쏟아지던 전경들의 쇠파이프 세례를 피하려던 그는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기억나는 건 그게 다였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온 그에게 척추가 부러졌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반신이 마비된 것이다.

양씨는 현재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열성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92년 장애인인권사업단을 시작으로 여러 곳의 장애인단체를 거친 그는 2006년부터 장애인인권포럼에서 일하고 있다. 장애인을 대표해 서울시 명예부시장으로 위촉돼 박원순 시장에게 장애 정책과 관련된 조언을 많이 했다. 장애인인권포럼은 2004년 출범한 장애인 시민사회단체다. 그는 “배제되고 소외돼온 장애인들의 현실을 개선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 미력하나마 일조하고자 시작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간 한국의 장애인 운동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장애인 운동은 생존권 확보와 더불어 사회와의 소통,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당위성과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사회·문화적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구로구청 부정선거 항의투쟁 동지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구로동지회는 1987년 이후 10년 단위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30주년인 내년에 기념행사를 하게 돼 있지만, 이번 투표함 개함으로 기념행사를 올해로 앞당겨 여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몇 번의 대선이 있었지만, 회원들이 보기에 선거제도는 아직도 상당한 개선이 필요하다. 1987년 선거 당시 공정선거감시단 서울시 조직국장이자 구로지부장을 맡고 있다 구로구청 농성에 참여해 실형을 산 윤두병 구로동지회장이 (전자개표 대신) 수개표 운동을 벌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윤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며 자신이 수개표 운동을 하는 것은 그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는 2001년 3월 6일, 1987년 구로구청 점거농성 당시 경찰에게 상해를 입은 문광일(당시 평민당 당원) 씨 등 3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구로구청 사건으로 민보상위를 통해 명예회복 및 보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67명이다.



29년간 갇힌 사람들

그러나 민보상위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당시 중앙선관위는 반발했다. 중앙선관위는 민보상위에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구로구청 점거농성 사건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사건이 아니라 통상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이송 중인 투표함을 다중의 힘으로 강점하고, 사무소에 난입해 기물을 파괴했으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직원 등을 장기간 불법 감금·폭행하는 등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문란하게 한 사건이었다.”

중앙선관위는 2009년 발간한 ‘대한민국선거사’ 제4집에서도 구로구청 사건을 ‘구로을 선관위 우편 투표함 탈취사건’으로 지칭했다.

간극은 이렇듯 크다. 1987년의 진상을 밝히려면 열려야 할 것이 투표함만은 아닌 듯하다. 2004년 구로구청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은 ‘돌 속에 갇힌 말들’이다. 이 영화를 찍은 나루 감독은 구로구청 사건 때 대학 1학년이었다. 공정선거감시단에 자원해 활동을 하다 구로구청 현장에 있었던 그는 당시 일기장에 자신이 겪은 일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언젠가 이 사건을 영상으로 반드시 남기겠다”고 썼다 한다.

나루 감독은 당시 농성에 참여한 이들을 인터뷰해 ‘돌 속에 묻힌 말’들을 끄집어내려 한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울을 떠나 몇 년 동안 칩거한 한 이도 있었고, 알코올에 의지해서야 인터뷰에 응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김인자 씨처럼 같은 트라우마에 내내 시달려온 이도 적지 않다. 이들의 ‘갇힌 29년’을 누가, 어떻게 열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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