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호

집중기획 | 중국은 적인가, 친구인가

“사드는 외교적 약속 수권정당은 약속 지켜야”

‘야당 야단치는 야당’ 김종인의 일갈

  • 이정훈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6-08-23 11: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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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소·한중수교로 본 강대국의 생리
    • “중국은 절대 북한 포기 안 해”
    • 퍼싱-2 배치 후 통일 이뤄낸 서독의 지혜
    •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 필요하다”
    지난해 김종인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되자 “결국엔 팽(烹)당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가 많았다. 그의 보수 색채가 강했기에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념적으로 맞지 않는 정당에 들어갔는데도 칩거를 비롯한 정치 투쟁을 통해 4·13총선에서 승리했다.

    퇴임을 앞둔 그의 사무실을 찾았더니 각 언론사 막내급 기자 수십 명이 진을 쳤다. 그의 일갈을 받아 적으려는 것이다. 그들을 뚫고 들어가 그를 만났다. 상의 왼쪽 깃에 태극기 배지를 단 게 눈에 띄었다. 더민주 의원이라면 노란 리본을 달아야 할 텐데.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기자도 캐묻고 따졌다. 그와의 대화는 결국 일문일답의 인터뷰가 아니라 토론이 돼버렸다. 이 토론에서 그가 설파한 내용은 정치(精緻)했다. 김 대표의 허락을 받고 그의 구술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정부 초기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일하다 1990년 3월 대통령 경제수석을 맡았다. 경제수석이지만 국정 전반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느 날 노 대통령에게 북방정책에 대해 물어보니 “틀은 짜였는데, 진행이 잘 안 된다”고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후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했으나 ‘대어’를 낚지 못한 것이다.





    한소 정상회담 전야

    나는 대통령에게 “소련, 중국 같은 거대 국가를 상대하려면 노련하고 능숙한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국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며 소련 붕괴의 기반을 닦은 조지 슐츠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슐츠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냈기에 대통령에게 “대소(對蘇) 외교를 이끈 슐츠 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1990년 5월 어느 날, 내 의중을 잘 아는 슐츠 씨가 “다음 달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이 스탠퍼드대 총장과 나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강연하기로 했다. 한국에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힌트를 줬다. 며칠 후 1962~1987년 주미 소련대사를 역임하고 고르비의 외교고문이 된 아나톨리 도브리닌이 비밀리에 서울로 날아왔다. 내 소개로 노 대통령을 만난 그는 “6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면 고르비를 만날 수 있다. 다만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게 조건”이라고 했다.

    또한 도브리닌은 “경제협력을 해줄 수 있는 사안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소련과의 경제협력 방안 마련에 들어갔다. 언론에는 엠바고를 요청해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는데, 한 매체가 이를 어기고 대통령의 미국행을 보도했다. 중인환시(衆人環視)가 된 상황에서 우리는 한소 정상회담을 기다렸다. 소련 측은 사전 보도가 된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상견례 때 고르비는 내가 준비해 간 경제협력 파일을 연필로 가리키며 “(파일이) 너무 얇다”고 농담을 던졌다. 노 대통령은 준비한 문서에 있는 말을 읽었지만, 고르비는 자신감에 넘친 듯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줄줄 풀어놓았다.



    꿈쩍 않는 베이징

    한 달여가 지난 7월 20일 소련 측이 “8월 2일 모스크바에서 경협회담을 하자”면서 “외교관은 오지 말고 경제 관계자만 와달라”고 통지해왔다. 내가 회담 준비에 들어가자 외교부는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슈퍼파워 대응방안’ 등의 자료를 만들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양국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제협력을 시작한 후 수교하는 것으로 합의했으나 나는 유리 마슬류코프 부총리에게 “수교 후에 경협을 해야 한다”면서 “양 국민이 서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끼리 무슨 돈거래를 하느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경협은 2차 서울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킬 것을 약속한다. 한국이 슈퍼파워인 소련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부연한 후 고르비의 답을 받아와서 회담을 계속하자고 버텼다. 다음 날 마슬류코프는 ‘한소 수교를 경협보다 먼저 해도 좋다’는 고르비의 답을 갖고 회담장에 나타났다. 그해 9월 말 양국은 뉴욕에서 수교협정을 체결했다.

    그러고 나서 전력을 기울인 것이 중국과의 수교인데, 베이징은 꿈쩍하지 않았다. 훗날 정부 고위관료를 지낸 인사를 비롯해 국내 경제학자 몇몇이 수교 전 중국을 방문해 ‘한국 경제개발 모델을 설명했다’며 한중 수교의 가교 노릇을 한 것으로 자임한다. 하지만 중국은 그들 때문에 한국과 수교한 게 아니다.

    1978년 개혁·개방을 선택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싱가포르를 벤치마크로 삼고자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리콴유는 덩샤오핑에게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민주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해도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준 것이다.

    그 후 중국은 암암리에 박정희 모델을 연구하며 개혁·개방을 추진해 성공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여기에 추가할 것이 있는지, 한국 경제학자들을 초청해 의견을 들어본 것이다. 중국에 박정희 모델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기에 1992년 중국이 한국의 경제개발을 배우기 위해 한국과 수교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끝까지 북한 배려한 중국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직후 노 대통령이 나를 불러 “덩샤오핑의 아들인 덩푸팡(鄧樸方)이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을 초청했는데, 그 일행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에 다녀오라”며 “나와 비서실장만 알고 있겠다”고 했다. 나는 ‘중국이 나를 지명한 것은 내가 한소수교에 깊이 관련된 것을 알고 수교 과정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베이징에서 나는 덩샤오핑과 함께 원로회의 멤버로 경제 문제를 주로 담당해온 보이보(薄一波)를 만나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한국이 중국에 접근하는 방식은 베이징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쳐도 비는 내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베이징은 건조한 지역이라 천둥 번개가 쳐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가 많다).

    급하게 추진해서는 한중수교가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국이 잘 살게 됐다고 중국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들렸다. 보이보는 중국과 북한이 혈맹관계임도 강조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노 대통령에게 “한중수교를 서둘지 말자”면서 “당분간 냉각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 이뤄졌다. 퇴임이 가까워진 노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북방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덩샤오핑과 장쩌민(江澤民)이 결심하지 않으면 한중수교는 불가능했는데, 두 사람에게 노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슐츠 전 장관이 덩샤오핑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들렀다. 나는 노 대통령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슐츠와의 면담에서 “중국과의 수교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슐츠는 “그러면 대만은요?” 하고 물었다. 노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한 다른 나라들처럼 단교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슐츠는 내게 전화를 걸어 “오는 11월 서울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외무장관 회담을 하죠? 그때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선물을 들고 갈 거요”라고 했다. 11월 서울에 온 첸지천은 노 대통령 단독 면담을 요청하더니 노 대통령에게 “한중수교 실무회담을 해도 좋다”고 했다. 중국은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했으니 한국과 수교해도 북한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그렇듯 중국은 북한을 의식하고 자극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 했다. 1992년 봄부터 실무회담에 나서 같은 해 8월 중국과 대사급 수교를 맺었다.



    강대국의 생리

    내가 한소·한중수교 뒷이야기를 처음으로 밝힌 까닭은 강대국의 생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강대국의 생리를 알아야 그들을 상대로 외교를 할 수 있다. 그들은 국익에 도움이 되거나 명분이 있어야 움직인다.

    한중수교 24년이 지난 지금 양국 간 교역은 2274억 달러에 달한다(2015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한국은 중국의 네 번째 무역국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중국을 잘 다루려면 그들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꿰뚫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자신을 환대해주니 중국을 너무 우호적으로 본 것 같다. 중국이 립서비스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는 것과 그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해 제재에 동참했으나 외교·안보상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중국의 속내를 읽으려면 그들의 전략이 드러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은 일본을 어떻게 항복시킬지 고민했다. 그러다 주목한 게 만주국에 주둔한 100여만 명의 일본 관동군이다. 관동군은 노몬한 사건 등을 통해 소련 극동군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1941년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 때문에 소련군과 전투를 하지 않아 전력(戰力)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미국은 관동군이 일본 본토로 옮겨와 방어선을 치면 일본을 항복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소련에 관동군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꾀가 많은 스탈린은 일·소 중립조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자,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했다.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극동군을 만주로 진입시켜 항복한 관동군을 무장해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소련은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를 체포해 하바롭스크에 수감하고 관동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는 옌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군에 몰래 공급했다. 스탈린은 이 무기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밀어붙여 북중국을 차지할 것을 기대했다.



    러·中에 꼭 필요한 북한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켜야 장차 중국을 다루기 쉽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毛澤東)은 운이 좋았는지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대륙에서 밀어내고 통일을 이뤘다(1949).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거만하고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련은 이런 중국을 견제하려면 만주국을 부활시키는 게 낫다고 보고, 1950년 푸이를 석방해 중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속셈을 간파하고 돌아온 푸이를 체포해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했다. 푸이를 중심으로 만주족이 세력을 모을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마지막 방법으로 스탈린이 선택한 것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전쟁을 도발케 하는 것이었다. 유엔은 미국의 주도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사상 최초로 유엔군을 결성했는데, 이는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진하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게 했다. 스탈린의 기대대로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기회를 잡은 것이다. 6·25전쟁에서 중국군 36만여 명이 희생됐으나 중국은 힘을 잃거나 분열되지 않았다. 당시 위구르와 티베트 등의 독립 노력은 미약했고, 확전을 두려워한 미국은 대만의 반격을 억제했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는 터라 나는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때 중국이나 러시아가 가장 먼저 접수해야 할 지역이 북한일 것이다. 중국은 북한을 장악해야 바다를 활용해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러시아가 북한을 차지하면 베이징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이 핵무장을 해도 절대 북한을 괄시하지 않는다.

    이런 속셈을 가진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 같은 환경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외교·안보를 정말 잘해야 한다. 외교·안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기에 전문가들이 책임지고 해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드 배치를 놓고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잘못됐다.



    사드 배치는 외교적 약속

    한국엔 정말로 노련하고 똑똑한 외교장관이 필요하다. 통일, 통일 하는데, 통일한국이 친미국가로 있으면 중국이 좋아할까. 반대로 통일한국이 친중 노선을 걸으면 미국이 발끈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그런 불편을 초래할 수 있는 통일에 찬성하지 않는다. 중국과 미국을 아우르는 노련하고 똑똑한 외교장관이 있어야 우리는 통일을 할 수 있다.

    사드 배치는 한국 정부만의 뜻이 아니라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이뤄진 ‘약속’이다. 국내 문제가 아닌 외국과의 ‘약속이므로 우리 정부는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국을 상대로 이러한 약속’을 놓고 국내에서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다. 약속을 어기면 우리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수권(受權) 정당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경솔해선 안 된다.

    우리는 중국과 미국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북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중국은 ‘피를 나눈 너희도 못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풀지 못한 우리 문제를 외부인 중국이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중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그러한 중국을 다룰 수 있는 친구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반미를 외치면 많은 국민이 지지할 것으로 보는 정치인이 적지 않은데, 일본의 변신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패전의 역사를 지닌 일본 엘리트들은 가슴 깊은 곳에 반미를 하고픈 욕망이 숨어 있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세계 최고를 구가하자 일본에서는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는 등 반미 정서가 노골화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에 환율 조작국 시비를 걸어 일본 경제를 일거에 멈춰 세웠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그렇게 찾아왔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략을 제대로 수정하지 않다가 중국이 G2로 부상하는 위기를 맞았다. 중국은 팽창 의지를 내비치며 아시아를 냉전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한 때 아베 신조 총리가 나타나 반중(反中)을 위한 친미를 선택하자, 비로소 미국은 환율 문제 등을 풀어줬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아베노믹스’인데 잃어버린 20년이 너무 길었던 데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겹쳐 일본은 불황에서 좀처럼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을 보며 우리의 대미 외교를 점검해야 한다.

    나는 독일에서 공부했으니 독일의 사례도 들어보겠다. 1972년 미·중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19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하면서 다시 냉전의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러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서독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미국과 협의해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

    그 바람에 미국과 소련이 진행하던 중거리핵전력협정(INF)과 관련한 협상이 중단되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슈미트 정권은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퍼싱-2와 사드

    박근혜 정부도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사드 배치를 결정했으니 이를 원점으로 되돌릴 수 없다. 2018년에 더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약속임을 잘 알아야 한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한국 안보와 번영의 근간인 한미동맹이 무너질 수 있다. 퍼싱-2 사태를 겪은 서독이 결국 통일을 이뤄냈듯, 사드 사태를 치른 대한민국도 얼마 후 통일을 이뤄낼 수 있다.

    현재 북한 경제는 취약한 상태이며 중국은 거듭된 성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국제정세라면 그 속에서 우리의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경제민주화’로 상징되는 조화(調和)경제를 주창한다. 민주주의가 중우(衆愚)정치로 가지 않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덕분이다. 시장경제는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런데 완전경쟁은 승자독식, 약육강식을 초래하므로 힘이 없는 이들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자유 속에서도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도 완전한 평등을 절대로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포용적 경제를 하자고 주장한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정도의 경쟁은 허용하되, 그 경쟁이 지나쳐 싸움이 일어날 정도의 자유는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까지의 자유와 경쟁은 용인하되, 그 이상은 있는 자가 내놓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프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어 독일을 통일하고 숙적 프랑스를 격파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를 독일 황제로 끌어올린 이가 비스마르크 총리다. 그는 프러시아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노련한 안목으로 국제정치를 주물렀다. 그가 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황태자가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한다”고 고해바쳤다. 하지만 빌헬름 1세는 “그가 나보다 더 잘하니 놔두자”며 기다려줬다. 그의 안목이 독일 통일과 독일의 영광을 만들었다.

    지금 독일이 잘나가는 것은 2차대전 후 독일 체제를 만든 콘라드 아데나워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덕분이다.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 밑에서 경제담당 장관을 지냈는데,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나빴다. “에르하르트를 자르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아데나워는 “그가 경제를 잘 운영하고 국민이 그를 원하는데 어쩌겠나…”라며 기다렸다. 덕분에 전후 독일 경제는 부흥했고 에르하르트는 아데나워의 후임 총리가 됐다. 사람들은 에르하르트가 무소속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기민당의 아데나워는 당적(黨籍)이 아니라 능력을 보고 에르하르트를 선택한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안목이 이래서 중요하다.



    수권정당 되려면 변해야

    한반도는 평화가 아니라 휴전 상태다. 경제가 발전했다고 안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한미동맹을 잊는다면, 통일은커녕 우리의 미래도 암울해진다. 외교와 안보는 국민이나 야당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다. 외국이 상대다. 그러한 외교·안보 문제를 놓고 너무 오랜 시간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대가(大家)다. 그런 대가가 있어야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우리 더민주당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이를 알아보는 인물을 대표주자로 내놓아 국민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 나서 정립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다.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알아야 우리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의 정치 구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치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안으로는 포용적 경제로 경제민주화를 이뤄 단합하고 밖으로는 외교를 잘해 통일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통일은 예고하고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온다. 그 기회를 혼란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 당은 외교와 경제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진 이를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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