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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현대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라인 강의 기적’ 주역 아데나워 서거 50주기

  • 백범흠|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정치학 박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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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강의 기적’… 국력 회복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1989년 11월 9일 서독 쪽 시위대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베를린장벽 한쪽을 뜯어내자 그 틈으로 벽 앞에 서 있던 동독 국경수비대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아일보]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진보 사민당(SPD) 쿠르트 슈마허 대표의 반대에 부딪혔다. 독일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사민당은 ‘아데나워가 서독을 미국, 영국,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슈망 플랜 참가도 반대했다. 사민당은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이 서독을 미국 블록에 편입시킴으로써 독일 통일을 어렵게 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은 유럽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데나워는 당장 분단된 독일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서독을 유럽에 통합시켜야만 통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1952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안한 ‘중립국 통일안’을 거부했다. 1950년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서독에 기회로 작용했다.

6·25 전쟁 특수가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밑거름이 됐다. 6·25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주된 관심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향하면서 유럽은 소련의 군사력에 그대로 노출됐다. 한반도 다음은 유럽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서독 재무장에 대한 영국, 프랑스의 거부감을 희석시키면서 재무장 논의가 급진전됐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 개최된 뉴욕 외무장관 회담에서 서독 재무장에 합의했다. 서독은 1955년 5월 파리 조약 발효와 함께 군사 주권을 회복했으며 연방군을 조직하고 NATO에도 가입했다. 서독은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도 가입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동·서독 분단이 더욱 굳어졌으나 서독이 라인 강의 기적에 힘입어 국력을 회복함에 따라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서독의 국제 지위를 인정해주는 한편, 독일 통일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제 지위 회복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한 아데나워는 유라시아 대륙의 상황 변화에도 주목했다. 아데나워는 어느 나라 지도자보다 빨리 중·소 분쟁 진전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데나워는 1962년 3월 ‘르몽드’ 인터뷰에서 ‘소련이 중국을 큰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소련이 △6·25전쟁 △타이완 해협 위기 △중국의 대약진운동 등과 관련해 단순한 갈등을 넘어 적대 관계에 들어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중국 인구가 7억여 명이던 데 반해 소련 인구는 2억여 명에 불과했다. 중국의 거대한 잠재력에 주목한 아데나워는 1960년대 말 나타나는 미국-소련-중국 3각 구도를 예측해냈다.

또한 중소 분쟁이 서독을 포함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련이 중국을 제압하려면 군사력을 동아시아에 집중시켜야 하므로 서독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대해서는 온건하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독일공산당 해산시켜

아데나워는 1962년과 1963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서독과 프랑스가 중소 분쟁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했다. 이 같은 국제 상황을 이용해 서독은 1963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와 동등한 국제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드골은 중국에도 접근한다. 소련으로 하여금 유럽에 더욱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와 중국은 1964년 1월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역사적 결정에 도달했다.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서독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국제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서방정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독일 통일로 가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아데나워의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서독 사회로 하여금 공산주의 대한 면역력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독일공산당(KPD)은 1949년 실시된 서독 총선에서 5.7%를 득표해 연방의회에 진출했으나 동독 공산당과의 연계를 의심받은 데다 스탈린을 옹호하는 실책을 저질러 1953년 총선에서는 겨우 2.2%를 득표해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독일공산당은 1956년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정당 활동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반한다는 판결을 받아 해산됐다. 독일공산당 해산 과정에서 아데나워의 역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독일공산당을 계승한 독일평화연합(DFU)은 1961년 총선에서 1.9%, 1962년 노동자 집중 거주 지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회선거에서 2%를 득표하는 데 그쳐 연방은 물론 주 의회 진출에도 실패했다. 서독 사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이 확인된 것이다.

보수 정치인 아데나워가 이뤄놓은 △경제성장과 국제 지위 향상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 확보는 진보 정치인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독일은 경제성장과 함께 복지제도를 잘 갖춰 중산층 비율이 70% 넘었으며 이들은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1960년을 전후해 소련이 핵과 미사일 전력을 대폭 강화하면서 미국은 더 이상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보수 진영의 기민/기사연합(CDU/CSU)이 복지 등 진보정책을 대거 수용하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진보 사민당은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전당대회를 계기로 이념 정당에서 탈피했으며, 아데나워 주도의 ‘서방정책’도 일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만,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독일의 분단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독재체제 아래 동독 주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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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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