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美軍주둔 인정해도 범죄는 용서 못해”

‘미군기지 되찾기’에 나선 김용한씨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1 1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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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때 행방불명된 작은아버지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합격이 취소되고, 통역병으로 근무하다 최전방으로 전출된 사람. 그는 긴급조치 시대와 1980년 ‘서울의 봄’을 침묵으로 보냈지만, 수많은 운동권들이 현장을 떠난 뒤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
    1987년 2월 기자는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독일어 시간강사로 대학에 출강하고 있었는데, 장안의 화제였던 김만철씨 일가족 귀순사건보다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과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전자가 여론전환용 이벤트라면, 후자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국가적 테러라는 설명이었다. 그는 1970∼80년대의 대학 캠퍼스에서 데모 한번 해보지 않은 학구파였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인권운동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바로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김용한(48)씨다.

    노근리 사건의 새로운 증언과 매향리 사격장 파문,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F15 전투기 구매 압력설, 용산기지 미군아파트 건축 계획과 잇따른 환경오염 사건, 그리고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판정시비에 이르기까지…. 최근 일련의 사건에서 촉발된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은 위험수위까지 치닫고 있다. ‘시사저널’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총련 학생들의 미상공회의소 점거에 공감한다는 의견이 무려 47.1%에 달했다. 한총련이 공안 당국으로부터 ‘이적단체’ 혐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우방’으로 참전했고, 그뒤 막대한 원조물자를 지원했던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억울한 평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1980년 광주항쟁과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크게 달라졌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주둔하고 있다는 미군에 대해 냉정한 접근이 뒤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도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주한미군의 현실적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미군의 위상과 기능이 전면 재조정돼야 한다’는 절충론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3월6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송화1리 마을회관. 김용한씨는 미군 공군기지(팽성읍 안정리 소재, K-6 CAMP HUMPHREYS)로 인한 마을주민들의 피해사례를 수집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송화1리 상공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의 소음과 진동, 그리고 사격장 주변을 둘러싼 철조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저공비행을 할 때마다 유리창에 금이 가고 지붕이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수백만원의 빚을 얻어서 콘크리트를 바르고 함석으로 덮어야 합니다. 갓난아이는 자다가 놀라서 병원으로 실려가고 소와 돼지는 기형 새끼를 낳고 있는 지경입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밤에 들일을 나가다가 하마터면 총알에 맞을 뻔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양반은 요즘도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을 무서워해요. 예전에는 미군 사격장 가운데로 길이 나 있었는데, 작년에 철조망을 치는 바람에 20분이나 더 걸립니다. 땅값은 똥값이고, 보상받을 수도 없고,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비행기가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물건을 쏟아붓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미군부대에서는 꿀벌이 한꺼번에 날면서 똥을 쌌다고 해명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미군의 분비물 같아요. 냄새가 아주 지독해서 볕이 좋은 날도 장독대를 열 수가 없어요. 옆 동네에서는 미군들이 폐수를 논바닥에 버려서 곡식이 말라죽었습니다.”

    주민들의 하소연은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송화1리 이장 장만수(55)씨는 “수십년 동안 그냥 참고만 살아왔지만, 이젠 우리의 권리를 찾을 때가 됐다. 가장 시급한 건 야간사격 금지이고, 궁극적으로는 미군기지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빠른 시일에 마을주민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송화1리를 빠져나왔다.

    김씨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이다. 하지만 그는 평택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평택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이곳에서 13년째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주사범대학 독일어교육과 75학번인 김씨는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잠시 교직에 몸담았는데, 중학생들의 교련조회 참석을 종용하는 교장의 횡포에 맞서고 졸업앨범을 제작하는 사진관측과의 회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은 일이 있다. 김씨는 이 무렵 아내 강순원(42)씨를 ‘동지’로 만났는데, 강씨는 뒷날 전교조에 적극 가담해 4년 6개월 동안 해직되기도 했다.

    김씨는 1985년부터 대학에 출강했다.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다면 그는 1990년초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쯤 중년의 대학교수가 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1990년, 그러니까 김씨가 평택으로 이사와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때,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박사학위 취득은 5년 뒤로 늦춰지게 된다.

    “고등학교 때 미군기지 근처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밤거리의 풍경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핫팬티 차림에 앞가슴을 다 드러낸 여자들이 미군들과 떼를 지어 돌아다니더라고요. 어느날 아침 용산기지를 평택으로 옮긴다는 기사를 보고 제일 먼저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두면 우리 동네가 완전히 퇴폐의 바다가 되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선 거죠. 그래서 그건 막아야 한다고 시작한 게 오늘까지 온 거예요.”

    누구나 그렇듯이 김씨의 초창기 운동도 매우 감상적이었다. 미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유인물을 만들다보니 곳곳에 허점이 나타났다. 단순히 고향 땅에 미군기지가 추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구호를 만들다보니 ‘님비즘(지역이기주의)’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한마디로 유령단체의 유인물이나 다름없었죠. 서점 아저씨, 가방가게 주인, 포장마차 하시는 분들이 모여서 ‘핵군단 물러가라’ ‘에이즈 오염 막아내자’고 외친 거예요. 언론사에서 자꾸 ‘누가 대표냐’고 묻는데, 다들 이름을 공개하기 어려워해서 저하고 포장마차 주인이 공동대표로 나섰어요.”

    이렇게 해서 ‘용산 미군기지 평택이전을 결사반대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이 창립됐다. 하지만 시민모임의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곳곳에서 걸려오는 정체불명의 협박전화도 문제였지만, 평택시민들의 싸늘한 반응이 더 큰 부담이었다. 이미 평택에는 두 개의 미군기지가 있었던 탓에, 그것을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지역유지들은 도시의 발전을 위해 미군기지를 적극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운동단체들은 “미군 반대는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이 있다”며 동참을 꺼렸다.

    1991년 7월 정부가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을 공식 발표하자 시민모임은 위기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결정한 이상 반대운동은 무의미하다”며 발을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씨는 “시민모임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미군기지가 들어오더라도 시민모임을 통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맞섰다. 정족수가 모자라 회의도 열지 못하고 사무실 월세가 8개월째 밀려 있던 어느날, 김씨는 눈이 번쩍 떠지는 소식을 접했다. 미군기지 이전지역으로 확정된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이다.

    “시위현장을 찾아가다가 바로 옆 동네에 ‘미군기지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잠시 들렀어요.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 놈들이 야금야금 쳐들어온다고. 6·25 때부터 벌써 열세 번이나 기지를 넓혔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데모가 없었어. 그러니까 우습게 보고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거지. 이번에 밀리면 다음 번엔 우리 마을이 당할 수밖에 없어.’ 저는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그 자리에서 1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미군기지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하지만 김씨는 정작 이전 대상지로 확정된 마을에서 처참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경찰과 정보기관의 조직적 방해에 부딪힌 것이다. 이 때문에 김씨는 마을 어귀에서 ‘빨갱이는 필요없으니, 얼씬도 하지 말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김씨는 우여곡절 끝에 한달이 지나서야 친구의 도움으로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주민들과 시민모임의 연대투쟁이 이루어졌다. 한번 마음을 열고 나니까 처음엔 김씨를 멀리하던 노인들도 막걸리를 따라주면서 광복 직후 미군들에게 땅을 넘기면서 받았던 장롱 속의 채권까지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싸웠습니다.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동네 곳곳에 초소를 세워놓고 온종일 외지인들의 출입을 감시했어요. 공무원들이 회유공작을 펴러 나오면 인분을 퍼붓고,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집회를 열었습니다. 주민들이 그렇게 나가니까 정부도 이전비용 부담과 지역의 반발을 내세우며 용산기지 이전을 백지화한 거죠.”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재야단체인 전국연합 산하 서울연합이 용산기지의 지방이전 운동을 벌이고 나선 것이다. 이때 김씨는 공청회에 참석해 “미군기지가 서울에 있으면 민족적 수치고, 지방으로 가면 민족적 자랑이냐”고 따졌다고 한다.

    서울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수도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용산기지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최근까지도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는 서울시민의 처지에서 반가울 수도 있는 소식이지만, 해당지역 주민들에게는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김씨는 지역주민들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고민하면서 미군기지 문제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단순히 미군기지를 옮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전 지역주민의 갈등을 조장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처방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도쿄에도 서울처럼 미군기지가 있지만, 우리처럼 철저히 통제돼 있지는 않아요. 곳곳에 감시 망원경이 설치돼 있어서 누구든 100엔만 넣으면 부대 안을 들여다보고 사진까지 찍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서울 도심에 미군부대가 위치한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작정 지방사람들에게 고통을 전가할 게 아니라, 더욱 효과적으로 외국 군대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대개의 운동권 단체 관계자들은 미군기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의 철수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씨는 처음부터 이러한 논리에 반대해왔다. 김씨는 격렬한 반미 구호가 난무하던 시절부터 ‘미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주민들의 권리를 지켜야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 때문에 일부 운동단체로부터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씨가 미군철수에 부정적인 이유는 대략 네 가지다. 첫째 국민들이 미군 없는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둘째 북한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철수는 어렵다. 셋째 6·25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미군철수론은 설득력이 없다. 넷째 미군철수를 외칠 경우 국내외적으로 고립될 위험성이 크다.

    김씨는 대안으로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제시한다. 한국이 주권국가인 이상 미국과 계약을 통해 일정 기간 기지를 임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계약연장 여부는 양국의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 김씨의 견해다.

    “필리핀은 1947년에 99년 동안 기지를 공여하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18년만인 1965년에 기간을 25년으로 줄였습니다. 미국은 온갖 회유를 통해 계약기간 연장을 꾀했지만, 필리핀 상원은 그것을 부결시켰어요. 그런데 한국은 계약은커녕 처음부터 무기한이에요. 그래서 끔찍한 미군범죄가 터져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권국가라면 당연히 외국군대와 계약을 체결하고, 그것을 위반하면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1993년 8월 김용한씨는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전국 공대위’ 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국내외 미군기지를 찾아다니면서 주민들의 피해사례를 수집하는 한편,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미군 주둔지역 주민지원에 대한 특별법안(가안)’의 골격이 완성됐고, 주한미군 문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노근리에서 매향리까지(깊은자유, 2001)’가 출간될 수 있었다.

    “정말 기막힌 일들이 많았어요. 봉제공장 노동자가 미군에게 폭행을 당해 머리가 함몰됐는데, 미군이 치료비를 내지 않으니까 병원에서는 그 노동자를 쫓아냈습니다. 미군기지가 확장되는 바람에 집과 땅을 다 빼앗긴 채 50년 동안이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분들 소원이 미군부대 앞 철조망에서 망향제를 지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무엇보다 김씨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1992년 10월27일에 터진 윤금이씨 사건이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봉제공장에 취직했던 윤씨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동두천 매춘가로 흘러들어갔다가, 미군 케네스 마이클 이병에게 참변을 당했다. 대개의 미군범죄가 그렇듯이 이 사건도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동두천 시민들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엔 동두천 택시기사들이 주한미군 승차거부운동을 하는 수준이었으나, 뒷날 ‘주한미군범죄 근절운동본부’의 기틀이 됐다.

    “윤금이씨는 벌거벗은 몸의 국부에 콜라병과 우산살이 꽂힌 채 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런데도 윤금이씨를 죽인 범인은 외국인 교도소에서 호텔생활을 한답니다. 한국인 죄수들은 1.31평짜리 독거실에 3명씩 몰아넣고 있으면서 말이죠. 이게 정상입니까?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는 미군이 왜 우리 땅을 공짜로 쓰고, 우리 여인들을 함부로 겁탈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죽이고, 한강에 독극물을 버리고…. 우리 정부가 딱 부러지게 항의하지 못하는 것도 억울하지만, 규탄시위를 벌이는 주민들이 탄압받는 건 더 기막힌 일이에요.”

    김씨는 현실주의적 미국관을 갖고 있다. 감정을 앞세울 경우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권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보다 한미관계의 문제점을 좀더 치밀하게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일찍부터 SOFA(한미주둔군 지위협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도 그런 이유다.

    김씨는 SOFA 협상기간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백악관 상하의원 국무성 등을 돌아다니며 SOFA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시민단체와 연대해 청와대 외교통상부 국방부 국회 용산기지 등을 방문해 SOFA 개정을 촉구했다. 그는 특히 1999년 10월부터 매월 둘째주 화요일마다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지금껏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2001년 4월 환경조항과 미군범죄자 기소시점 등이 바뀐 SOFA 개정안이 발표됐는데, 김씨는 “눈 가리고 아웅한 격”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미군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항이 빠졌다는 설명이다.

    2000년 5월부터 시작된 매향리 투쟁은 그의 삶을 또 한번 바꿔놓았다. 그는 12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폐쇄 범국민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각종 집회가 열릴 때마다 사회를 보았다. 무작정 ‘양키고홈’을 외치는 운동권 인사들보다 미군기지의 폐해를 조목조목 나열하는 그의 말솜씨가 집회 참석자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선 까닭이다.

    매향리 사태는 인터넷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순식간에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해 6월6일 ‘전국민 행동의 날’ 행사 때는 무려 3500여 명이 매향리에 집결해 사격장 주위의 철조망을 끊기도 했다. 7월16일 밤 매향리 주민들과 범국민대책위 관계자들은 대규모 횃불시위를 벌였는데, 이날 김씨는 집시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렇게 해서 김씨는 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매향리 육상폭격이 중단되고 사흘 뒤인 8월21일 김씨의 모두진술이 있었다. 이 내용은 ‘오마이뉴스’에 보도돼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첫째, 목소리를 크게 하라. 왜 그렇게 안들리게 하냐. 이 재판에는 국제 폭격장의 소음 때문에 귀가 먹은 노인들이 많이 참석해 있는데, 그분들이 들을 수 있도록 좀 크게 말해라.

    둘째, 검찰 공소장을 다시 써라. 미안하지만 문법에 안 맞는 문장이 너무 많고, A4용지 15쪽 분량의 글이 한 문장으로 돼 있는 걸 처음 본다. 주어와 술어가 엇갈려 문학박사인 나도 무엇을 잘못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셋째, 매향리 폭격장은 군수업체 록히드 마틴의 폭격장이다. 폭격장이 미공군기지의 소유라 해도 주민피해를 감안해 폐쇄해야 마땅하겠지만, 그곳은 ‘록히드 마틴’이라는 미국 군수업체의 폭격장이다. 여기서는 신무기를 개발해 폭파력을 실험하기 때문에 주민피해가 심각하다.

    넷째, 우리나라는 미군기지라는 심장병을 앓고 있다. 집안에 누구라도 심장병을 앓고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나서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나처럼 법을 모르는 사람도 나선 것이다. 이제 당신들처럼 법을 전공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SOFA 개정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당부하건대, 이 재판을 끝내기 전에 꼭 한번 매향리에 다녀와라. 그 뒤에 판결하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강철은 두드릴수록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2000년 10월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 김씨는 본격적으로 반미시위에 참여했다.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이 방한했을 때는 공항부터 숙소까지 따라다니며 이른바 ‘그림자 시위’를 펼쳤고,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는 ‘전쟁책동 중단, 무기강매 중단’ 등을 주장했다.

    “미국이 우리 국민의 정서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미관계의 개선이 가능합니다. 불평등한 SOFA 조항만 고쳐도 반미감정은 급속도로 가라앉을 겁니다. 무조건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갈등의 골만 깊어질 뿐이에요. 한국정부도 국민의 생각을 이해하고 미국을 설득해야지, 미국의 논리를 국민에게 강요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김씨의 오랜 투쟁은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다. 처음엔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미군기지 임대 문제가 시민단체와 언론을 통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한미 양국은 2011년까지 주한미군 공여지 4000만평을 연차적으로 한국에 반환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물론 용산기지를 비롯한 노른자위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전향적 조치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을 통해 국민들이 미국을 냉정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점이다. 김씨는 지역사회 현안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대표적인 예가 에바다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 부분이다. 에바다는 농아들의 수용시설로 오랫동안 재단비리 문제로 파문을 일으킨 사회복지시설이다. 1996년 교사들과 농아들이 ‘대통령 할아버지 춥고 배고파서 못살겠어요’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인 것이 에바다 사태의 시작이다. 그뒤 방송에 에바다재단의 비리가 보도되고 원장이 구속되긴 했지만, 농아들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장애인 숫자를 부풀려서 국고를 상습적으로 횡령하고, 친인척을 유령 직원으로 채용해 급료를 가로채고, 후원금 장부를 없애 막대한 돈을 유용했어요. 그렇게 해서 3년 동안 챙긴 돈이 무려 13억6000만원인데, 그러면서도 농아들에게는 밥도 제때 주지 않았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 돈이 누구 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에바다 관계자는 실실 웃으면서 ‘국민 돈이겠죠’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찌나 분통이 터지는지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각계 대표들이 모여서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운동을 벌이게 된 거죠.”

    에바다 사태는 김대중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공개적으로 해결을 약속했음에도, 아직까지도 매듭이 풀리지 않고 있다. 사회복지재단 이사회의 독특한 의사결정 구조가 결정적인 이유다. 김씨는 2001년 8월부터 시민대표 자격으로 에바다 이사를 맡고 있지만, 지금껏 한번도 에바다 시설 안으로 들어가 본 일이 없다. 이사가 문앞에서 매를 맞고 쫓겨나는 ‘기상천외한’ 시설이 바로 에바다인 셈이다.

    김씨는 정치극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요즘 대학에서 강의하는 과목은 ‘역사 속의 한국과 미국’이다. 10여 년간 싸워오면서 전공까지 바뀐 것이다. 김씨는 미군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미군의 주둔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미군기지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는 주민들에게 마땅히 국고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김씨는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운동권의 한계와 미국의 실체, 그리고 피해주민 보상대책과 국제적 연대투쟁에 이르기까지…. 김씨는 끊임없이 심각한 주제를 꺼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에게서는 사람냄새가 물씬 묻어났다. 자정 무렵 평택을 떠나면서 그의 법정 최후진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두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주야, 하나야, 사랑한다. 아빠는 앞으로도 너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살게. 거창하게 민족을 위해서라는 말은 못하겠고, 바로 몇 년 있으면 이 나라의 주인이 될 너희들을 위해서라도 말야. 아빠가 용돈 못 줘도 이해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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