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문학으로, 고대사로… 신음하며 써내려간 ‘뿌리’ 이야기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입력2005-09-09 13: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청년 김달수는 서류를 위조해 간신히 들어간 대학에서 한국 출신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광복 후 그의 응축된 정신세계는 폭발하듯 문학작품으로 쏟아져 나왔다. 조국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을 비판과 풍자가 어우러진 소설에 담는 것에 한계를 느낀 그는 한국 고대사에 빠져들었다. 일본에 남은 한반도의 도래문화 유적을 찾아 20여 년간 답사여행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남겨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넝마주이 청년 김달수(金達壽)의 인생에 전기가 찾아왔다. 장두식(나중에 ‘어느 조선인의 기록’을 펴냄)이라는 가난한 문학청년과의 만남이다. 장은 김보다 세 살 위, 그러니까 스물한 살이었으나 둘은 우정이 깊어져 평생 친구가 된다.

    장두식 역시 ‘빈곤아동’으로 어렵사리 학교에 다녔다. 학비는 면제됐으나, 생활비는 토공, 신문배달 같은 궂은일을 해서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아 줄곧 우등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浪速) 중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했다.

    문학을 향한 두 청년의 열정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장두식은 “문학이란” “문학이야말로” 하는 유식한 말투로 김달수를 사로잡았다. 김달수는 ‘문학강의록’ 같은 것을 읽긴 했지만, 아직 장두식만큼의 지식이나 논리를 갖추지는 못했다. 장두식에게 자극을 받아 김달수의 문학 열정이 일거에 폭발하게 된다. 한마디로 죽이 맞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등사판으로 ‘함성(오타케비)’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한국인 문맹청년을 가르치기 위한 자료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두 번째 호가 나오고 난 뒤, 요코스카(橫須賀) 경찰서의 사상 단속반인 특고(特高·특별고등경찰의 준말로 사상·저항운동을 감시, 단속했다)에 걸리고 말았다. 제목부터가 저항적이라고 해서 불온 유인물로 찍혀 발행금지를 당했다.

    김달수는 대학에 다니고 싶었다. 당시 메이지대학, 일본대학 같은 사립대는 전문부라는 것을 두고 있었다. 4년제 중학교 졸업자나 중3 수료자 정도면 3년 과정의 전문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정식 4년제 대학은 당시에도 고등학교나 예과를 마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김달수는 전문부조차 지원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처지였다. 장두식도 대학에 다니고 싶었으나 역시 자격미달. 비록 중4 중퇴라고는 하지만 수업료 체납이 길어져 그만뒀기 때문에 수료증을 떼어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일단 도쿄로 가서 시나가와의 가나모리(金森)라는 한국인 넝마업자 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도시바(東芝)의 가와사키 공장 잡역부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야학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할 수 없어 도리없이 넝마주이 일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받는 돈으로 밤에는 영어학원인 마사노리(正則) 영어학교에 다녔다. 김달수는 초등과, 장두식은 중등과에서 공부했다.

    편법으로 대학생 되다

    이 주경야독의 기간에 김달수는 큰 소득을 얻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무엇을 소재로 글을 쓰든 인간의 진실을 리얼하게 기록하면 문학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또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라는 일본 최고의 사소설 작가가 쓴 작품도 읽었다. 그것을 읽으며, 자기 자신의 얘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좋은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인의 비애와 고통을 쓰자. 멸시당하고 차별받는 한국인들, 그들의 삶을 소설로 그리자. 진실하게만 쓴다면 일본인에게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의 인간적 진실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나가와의 넝마주이 생활은 서너 달 만에 한계에 부딪혔다. 둘이서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넝마를 수거 해도 점심으로 라면 한 그릇씩 때우면 남는 게 없었다. 학원비를 댈 길이 막막했다. 궁지에 몰린 김달수는 ‘막가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 명의로 입학하면 그만 아닌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어차피 ‘조센진’은 전문부를 나와도 일본인처럼 취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기 명의든 타인 명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서 배우고 머릿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자격을 얻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하다.’

    김달수의 매제 정조화(鄭朝和)가 요코스카 시립실업학교 출신이었다. 김달수는 매제의 졸업증명서를 이용해 마침내 일본대학 전문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철학개론,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대학생임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전문부 학생이나 4년제 학생이나 청강생이나 모두 같은 방에서 강의를 듣기 때문에 차별받을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늘같은 천황(텐노)을 ‘텐짱’이라고 부르는 학생도 있어 놀랐다. 대학의 자유분방함이라니!

    그러나 본명 ‘김달수’를 감추고 ‘정조화’라는 매제 이름으로 다니는 게 부끄러웠다. 그는 본명을 찾기 위해 다른 과에 편입학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국문과 학생들이 만드는 잡지 ‘신생작가’에 글을 낼 땐 필명으로 ‘김달수’를 쓰고 있다, 어차피 입학했으니 이번에는 전과(轉科) 절차가 허술한 점을 이용하자, 김달수 이름으로 창작과에 편입을 시도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접수 창구의 아가씨는 ‘일본대학 재학 중’이라는 것을 믿어서일까, 중학수료증 같은 건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편입 합격. 마침내 진짜 ‘대학생 김달수’가 되었다.

    한국 작가들과의 인연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김달수는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찾아 20여 년간 답사여행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남겼다. 취재 당시 신라 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절을 찾아 절 관계자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같은 대학에서 귀중한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문예과에 이은직(나중에 소설가가 됨), 영화과에 허남기(나중에 시인이 됨)가 다니고 있었다. 이들과의 교류는 평생을 이어간다. 그리고 김사량(金史良·본명 김시창)이라는, 당시 일본 문학계에 샛별처럼 떠오른 한국 출신 작가도 만났다.

    1914년 평양 태생의 김사량은 평양에서 중학을 마치고 19세 때 일본 규슈의 사가(佐賀)고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진학했다. 김사량은 1939년 소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선정되면서 이름을 떨쳤다. 1945년에는 중국의 조선군 학도병을 위문한다는 구실로 대륙으로 건너가 팔로군 항일부대로 탈출을 꾀했다. 이어 화북(華北) 조선독립동맹 소속의 조선의용군에 투신했다. 가히 극적인 인생이다. 김사량과 김달수는 죽이 맞았다. 김달수의 글 ‘나의 아리랑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김사량은 ‘벌레’라는 작품을 ‘신조(新潮)’에 쓴 바 있다. 이것은 도쿄의 시바우라(芝浦)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묘사한 작품이다. 거기에 ‘지기미(제기랄, 빌어먹을, 분하다는 의미)’라는 별명의 노인이 나온다. 그는 어딜 가도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고, 침 세례를 받는 등 벌레같이 취급당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존재를 초월해 동포, 즉 민족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한국인이 바다에서 돌아오면, ‘그들을 맞이하여 기뻐 날뛰는 지기미의 모습은 석양을 업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이슬람교도처럼 아름다웠다’고 작품을 끝맺는다. 당시 일본에 살던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적인 행동과 사랑은 외형상으로는 이와 같이 ‘기괴’한 방식을 빌리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밖에 쓸 길이 없었다.”

    김사량이 가마쿠라나 요코스카에서 글쓰기에 몰두할 무렵, 김달수는 다섯 살 위의 그를 형처럼 따르며 어울렸다. 민족에 대한 의식도, 저항적인 기질도 비슷했다. 김사량은 늘 김달수에게 “너라면 쓸 수 있어” 하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김달수는 그에 힘입어 ‘쓰레기’라는 작품을 ‘문예수도’에 발표했다. 그리고 ‘곱추 두목’을 ‘신조’에 냈다. 김사량은 김달수의 문학인생에 길잡이가 됐다.

    1941년 12월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를 기습 폭격,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동안 특고가 축적해둔 정보 파일을 근거로 김달수가 사는 가나가와현에서만 일본인을 포함해 ‘불온분자’ 200여 명이 잡혀들어갔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한 내부 단속이었다.

    이때 김사량과 김달수의 형 김성수도 끌려갔다. 김사량은 글에 드러난 저항적 성향 때문이었고, 김달수의 형은 한국 빈민 노동자에게 집을 내줘 불평불만을 떠들게 했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인들이 모여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반란이라도 해야만…’ 같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불온분자로 몰려 1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같은 일본인 아닌가요?”

    김달수는 일본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했다. 형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요코스카 경찰서에 드나들던 그는 우연히 경찰서 옆에 있는 가나가와 일일신문사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한국인이지만 열심히 해보겠다”며 사장 앞으로 편지를 쓰고, 대학 지도교수의 추천서도 첨부했다. 며칠 뒤 신문사에서 한번 만나보자는 전갈이 왔다. 알고 보니 히구치 다쿠산로(?口宅三郞) 사장도 독학을 한 터였다. 히구치 사장은 입사를 허락하며 김달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은행 지점장 중에 ‘리노이에(李家)’라는 성을 가진 이가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한반도의 자손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다닌다네. 자네도 한국인이라고 해서 주눅들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하게.”

    김달수가 입사한 뒤 곧바로 전시 언론통폐합으로 1현1지(1縣1紙) 작업이 이루어졌다. 가나가와 일일신문은 요코하마의 ‘가나가와현 신문’과 합쳐져 ‘가나가와 신문’이 됐다.

    김달수가 기자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김사량이 풀려났다. 일본인 문인 작가들의 호소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김사량은 김달수에게 옥중에서 들은 ‘희망적인 얘기’를 전했다.

    “나랑 같이 구속되어 있던 일본인 경제학자가 하는 말이, 전쟁 초반에는 일본의 기세가 좋지만 반드시 미국한테 지고 만다고 해. 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이 전쟁은 종국에 일본이 패배한다더군.”

    기자는 나쁘지 않은 직업이었다. 전철회사에서 무료 전차탑승권이 나오고, 영화관에도 아무 때나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며 당시 세무서에 근무하던 일본 처녀 아리야마 미도리(有山綠)와 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김달수가 그에게 대학 졸업년도를 물었을 때다.

    “아, 그건 기원 2600년!”

    서기 1940년이건만, 미도리는 ‘일본서기’의 허무맹랑한 기록을 근거로 한 황국사관에 따라 그렇게 대답했다. 군국주의 사회에서 자란 그를 탓할 순 없지만 김달수는 자신의 글 ‘내 아리랑의 노래’에 표현했듯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달수가 1년여의 열애 끝에 이별을 선언하자, 미도리가 “이젠 같은 일본인 아닌가요?” 하고 반문했다. 김달수는 그때 결코 일본인일 수 없는 자신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러운 ‘어용기자’ 생활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힘겹게 삶을 지탱하면서도 민족문학의 꽃을 피워 대문호로 성장한 김달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있던 그가 말년에 경남 창원시 교외에 있는 할머니 산소를 찾았다.

    1943년 4월 김달수는 서울에 왔다. 인천의 친척집에 머물며, 그리웠던 고국의 수도를 거닐었다. 옛 성이며 종로, 명동 거리를 배회했다. 덕수궁 미술관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들여다보니, 참으로 자신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김달수는 서울에 정착하고 싶었다. 일자리가 없을까 하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지금의 시청 뒤 서울신문사 부근을 지나게 되었다. ‘경성일보’라는 간판이 보였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키고 일본어로 찍는 ‘경성일보’ 하나만 선전지로 남겨뒀다.

    김달수는 이력서를 들고 사회부장을 찾아갔다. ‘가나가와 신문’의 경력이 인정되어 일단 교열부로 들어갔다. 반년 뒤에 사회부로 옮겼다. 하지만 고국생활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급여가 일본 기자 월급의 절반밖에 안됐다. 일본 기자는 기본급에 추가로 ‘외지(外地)수당’을 받기 때문이었다. 고국에서 받는 차별은 더 서러웠다.

    그러나 참으로 괴로운 일은 따로 있었다. 유명한 한국인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이다.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라 ‘학도병 자원을 호소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거의 매일 ‘반도의 학도여! 내 명예를 빛내자’ ‘천재일우의 호기를 놓치지 말자’는 표어를 내걸고, 학도병 자원을 부추기는 기사를 써댔다. 마음이 편치 않은 어용(御用)기자 생활이었다. 자원병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기자와 함께 달려가 보면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청년이 울먹이며 말한다. ‘기자 당신, 뭘 쓰고 싶어하는지 모르지만 마음대로 쓰세요. 그리고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우리 조선인의 적은 어디에 있고, 누구입니까?’ 기자인 내가 묵묵히 말을 못하고 있으면 다시 따진다. ‘왜 우리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사람을 죽이고, 다치고,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도대체 왜 우리는 일본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까.’

    이런 말을 하는 청년도 있다. ‘우리가 희생되어 삼천리 조선 민족이 받는 차별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그렇게라도 된다면 사명감을 갖고 기꺼이 싸우다 죽겠습니다.’ 이건 편집방침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저히 기사로 쓸 수 없는 소리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이야말로 나는 커다란 임무와 영예를 자각하고’ 운운하며 기사를 날조해 데스크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나의 아리랑 노래’에서)

    더 어려운 일은 한국인 명사록을 끼고 다니며 학도병 자원을 권유하는 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김달수는 김사연(金思演)이라는 중추원 참의를 찾아간 날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대뜸 기자 김달수에게 “동양의 미남자구나!” 하고 치켜세우고는 절대로 학도병 권유 발언을 해주지 않았다. 매달리듯 부탁하자 “아, 그 젊은 학생들도 당신 같은 귀중한 세대야. 그렇지?”하고 말했다.

    훗날 김달수는 그 시절의 고충을 와코대 명예교수인 이진희 선생에게도 털어놓았다. 이진희 교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서울에서 당시 인망이 두터운 인촌 김성수 같은 분이 코멘트를 해주면 학도병 권유 기사는 대성공일 텐데, 그토록 통사정해도 인촌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시종 정중하게 거절하며 ‘다른 데 알아보라’고 손을 내젓는 것이었다. 김달수는 인촌이 대단한 그릇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끙끙 신음하는 심정으로

    한국에서 1년여 기자생활을 하다 접지 않을 수 없었다. ‘경성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요코스카로 돌아가 다시 ‘가나가와 신문’ 기자로 복직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광복을 맞고 이듬해 3월, 신문사를 그만뒀다. 자신이 직접 ‘민주조선’을 창간했다.

    이때부터 김달수의 응축된 정신세계가 폭발하듯 문학작품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일본제국주의에 갇혀 있던 민족애와 열정이 분출하는 것 같았다. 김달수의 1945년 이후 활동에 관해, 그의 오랜 동료인 강재언 전 가엔(花園)대 교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일본이 패전하기 전부터 패전 후까지 일관되게 활약한 인물은 김달수와 허남기다. 시인 허는 ‘화승총의 노래’ ‘한국의 겨울이야기’ 같은 시로 주목을 받았으나 나중에 조총련 간부가 되어 정치활동에 빠져서 시를 등지고 말았다. 결국 김달수만이 최후까지 문필가로 남은 것이다.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20여 년간, 김달수의 활약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결코 가볍게 평가해선 안 된다. 1970년대 이후의 재일 한국인 문학은 바로 김달수의 노력과 개척에 힘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달수의 ‘후예의 거리’(1947) ‘현해탄’(1953) 같은 작품은 모두 사회주의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다. 당시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 남한을 볼 때 이승만 정권에는 희망을 걸어볼 것이 전혀 없었다. 그의 작품은 그런 상황의 산물이다.”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왼쪽부터 도예가 심수관, 작가 시바 료타료, 김달수. 김달수는 문인, 학자, 철학자 등 명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현해탄’은 김달수의 대표작이다. 그의 나이 32세 때인 1952년 1월부터 ‘신일본문학’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그는 6·25전쟁 때 미군 비행기가 고국 한국을 폭격하기 위해 날마다 일본의 기지를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밤이 깊어가도 잦아들지 않는 비행기의 폭음을 들으면서 ‘끙끙 신음하는 심정으로’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6·25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쓴 건 아니다. ‘현해탄’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말기인 1943년. 미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무렵이요, ‘성전(聖戰) 완수’의 구호 아래 식민지 조선인이 가혹하게 시달리던 시기다.

    “한반도 청년에게는 세 갈래의 길이 주어졌다. 고개를 쳐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 눈을 감고 절망에 빠져버릴 것이냐, 아니면 굽실거리고 타협하며 항복하고 배신할 것이냐, 이 세 가지가 그것이다.”(‘현해탄’에서)

    이러한 인물 설정에 관해서는 강재언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선명해진다.

    “해방 전 재일 문인으로는 김사량, 장혁주가 꼽히는데, 김은 민족의식에 투철해서 일본군 종군 작가로 중국에 건너가 옌안(延安)에서 탈출하고 만다. 해방 후 북에 들어가 작가 활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다.

    장혁주는 1932년 ‘아귀도(餓鬼道)’라는 작품으로 일본 문단에 등장해 식민지 치하의 한국 농민운동의 현실을 매우 굵은 필치로 그려내 호평을 얻었으나, 나중에 황민화 운동에 앞장서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일본에 귀화했다. 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재일 문학평론가 안우식씨는 김사량이 ‘고개 쳐들고 나아갔으며’, 장혁주가 ‘타협 항복하고 배신한 인물’이라고 적었다.

    희망 없는 南, 혐오스러운 北

    아무튼 ‘현해탄’은 당시 서울에 사는 두 한국 청년의 성장 및 변혁의 과정을 좇는다.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치는 민족의 번민, 대항, 좌절, 배신, 폭행 그리고 연애까지 담고 있다. 전쟁과 항전, 혁명과 반혁명이 어우러진다. 그러나 시대의 한계 탓이라고나 할까, 결정적인 흠은 “김일성을 소설 일부에 영웅처럼 등장시킨 대목”(한 재일 작가의 평론)이다.

    ‘박달(朴達)의 재판’(1958)이라는 소설도 흥미롭다. 저항, 비판, 풍자, 재치가 교차하는 김달수 소설의 백미다.

    “박달은 다섯 살 때부터 지주집의 노예처럼 심부름꾼으로 자란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일자무식 기층민중의 표본 같은 인물이다. 한국이 해방되자 일본이 없어졌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 미국이 지배자로 와서 군정이 시작됐다.

    박달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유치장에 갇히고 보니 정치범 사상범이 가득 들어와 있다. 그들을 통해 마을 어귀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잠시 연설을 하는 체 하면 잡혀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풀려나자 그 유치한 짓을 박달이 일부러 실천해 유치장행을 자원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얼른 전향해버리고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출소한다. 그러는 사이 박달이 마침내는 정치 사상범들로부터 배우게 되고, 몸에 혁명 정신이 스며든 사상가, 혁명가로 바뀌고 만다.”

    이 소설은 루신(魯迅)의 ‘아큐정전’에 비교되곤 한다. 재일교포 사회에 사회주의가 하나의 꿈이요 환상이던 시절의 산물인 것도 분명하다. 젊은 날의 김달수가 가졌던 사회주의 성향에 대해 이진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1950년대 재일 한국인의 95%가 이남 출신인데도, 북의 사회주의에 희망을 건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제시대에 항일 저항을 한 빨치산이나 중국 옌안에서 싸운 사회주의자들이 북에 정권을 세웠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남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한 사람과 식민지 시대의 권력기구와 인맥을 그대로 이용했다.”

    그러나 북과 사회주의에 대한 김달수의 호감은 오래가지 못하고 혐오로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북한의 개인숭배는 작가 김달수에게 환멸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부터는 김일성 숭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소설 ‘태백산맥’의 후편을 쓰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달수는 1991년 7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춘을 사회주의운동에 바쳤습니다. 조총련에서 손을 뗀 것이 1960년대이니까, 그전까지는 조직운동에 온 정열을 쏟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북한이 1950년대 남로당 출신을 숙청하는 것을 보고 회의를 갖기 시작했는데, 조직에서 저술 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에 테러도 많이 당했지요.”

    사회주의를 등진 김달수에 대한 ‘활자 테러’도 숱했다. 조총련의 기관지 ‘조선신보’의 어느 날 1면 머리기사를 보자.

    “김달수는 조선 역사를 반동적인 부르주아 사상체계에 의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1920년대 이후의 것이 두드러져, 그는 괴뢰 이승만의 상해임시정부와 종파의 소굴인 고려공산당, 그리고 민족개량주의자 집단인 신간회를 혁명의 주류인 것처럼 왜곡한 문헌을 냈다.

    위대한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조선인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투쟁에 가져다 준 영향을 무시하고, 특히 김일성 원수를 김구, 심지어는 이승만 매국노와 동렬에 놓아 항일 빨치산 투쟁을 ‘이에는 이’식의 복수(復讐) 테러 행위처럼 간주했다.”

    김달수는 조총련과 소설에서 점점 멀어졌다. 소설에 대한 열정이 식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진희 교수의 설명이다.

    “한국의 남북을 소재로 한 소설이므로 작품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다가왔다. 그건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태평양전쟁말기인 1943년부터 1년여 서울에서 ‘경성일보’ 기자를 한 것이 그의 한국 생활의 전부다. 한국의 이곳저곳을 걸으면서 충분히 호흡한 것도 없다. 지식도 풍토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불국사 석굴암에 대해 문헌만 읽고도 글을 쓸 수는 있으나 가보지 않은 이상 실제와 다른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취재도 없이 한국에 관해 쓸 수는 없다.”

    한글강좌 ‘안녕하십니까’

    그런 벽에 부딪혀 있던 1971년 여름, 한국의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견됐다. 이듬해에는 나라(奈良)에서 다카마쓰(高松) 고분이 발굴됐다. 이것은 일본 역사가 동아시아사와 별개가 아니라는 증거가 됐다.

    무령왕릉에서 고대 백제와 일본 왕실이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물이 나왔다.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고구려 등 한국 고대문화의 일본 유입을 입증하는 남녀의 복장과 여인의 쪽머리, 긴 치마 등을 그린 벽화가 나왔다.

    김달수는 이런 것에 자극받아 한일 고대사에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1974년 김달수는 이진희·강재언 교수와 손잡고 계간 잡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세 사람 모두 그보다 3년 앞서 조총련과의 관계를 끊었다. 북의 김일성 개인숭배와 신격화는 학자, 연구자, 문필가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항일투쟁은 김일성만의 투쟁이어야 했고, 모든 역사해석을 공산혁명에 맞췄다. 그러나 활자는 영원히 남는 것이다. 뜻을 굽혀 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삼천리’는 오늘날의 남북 단일팀이 쓰는 ‘한반도’ 깃발과 같은 의미였다. 남과 북이 따로 없는 ‘삼천리 방방곡곡’의 반도를 뜻했다. 김달수는 말했다.

    “첫째, ‘삼천리’ 잡지로 남북의 7·4 공동성명에도 나와 있는 평화적인 조국통일에 기여합시다. 둘째, 일본-한국, 일본-북한의 복잡하게 비틀리고 얽힌 관계를 풀고 일본인의 한국관(觀)을 바로잡는 것이 잡지의 목표입니다”

    1987년 5월 50호까지 나온 ‘삼천리’는 3인의 꿈을 실현하는 도구가 됐다.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국과 중국에서 대대적인 반일 캠페인이 벌어지고, 외교적으로도 대소동이 일었다. 일본 외무성이 이른바 ‘근린(近隣)조항’이라는 것을 만들어 굴복하게 되지만…. 사실 ‘삼천리’는 그보다 6년 전인 1976년부터 ‘교과서 속의 한국’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 연재물은 고단샤(講談社)에서 ‘교과서에 적힌 한국’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이진희 교수)

    김달수가 이끈 ‘삼천리’는 조총련에도 화살을 겨누곤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겐 객관적인 매체로 인식됐다.

    “그전까지 한국 관련 책은 조총련 아니면 민단이라는 조직의 산물이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삼천리’는 조직에 거리를 두고, 조국과 일본을 객관적으로 보며, 남과 북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 논평했다는 점에서 일본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강재언 교수)

    김달수는 일본의 양식 있는 지성인을 ‘삼천리’ 대담에 초청했다. 예를 들면, 철학자이자 평론가이며 리버럴리스트(혹자는 그를 ‘시민주의자’라고 부른다)인 구노 오사무(久野收·1910∼1999) 같은 인물을 초청해 대담하던 중 한국말을 일본에 보급하는 운동을 펴기로 한다. 그것이 ‘국영방송 NHK에 한글강좌를!’이라는 서명운동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현재의 ‘안녕하십니까’라는 한글 강좌 개설로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한글 교육용 ‘안녕하십니까’ 교재는 매달 2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다. 김달수가 뿌린 한 알의 밀알이 한글 붐으로 이어진 것이다.

    20년 넘게 답사여행

    김달수가 한일 고대사에 빠지게 된 것은 도쿄 근교에 ‘고려신사’가 있는 것을 눈여겨보면서부터다. 문헌을 뒤져보다 예부터 행정구역으로 ‘고구려군(郡)’ ‘신라군’이 있었다는 데 놀랐다. 1963년 ‘고려신사와 심대사(深大寺)’라는 논문을 ‘조양(朝陽)’잡지에 기고했다. 이 논문을 읽고 관심 갖는 이가 의외로 많은 것을 알았다.

    도쿄에서 가까운 간토(關東)지방의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하코네, 아타미, 그리고 무사시노 등지의 한반도 도래문화 유적 답사에 나섰다. 그렇게 답사기를 모아 책을 내니 어느 덧 10만부라는 놀라운 부수가 팔려나갔다.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1974년 여름, 대마도에서 현해탄 너머 고향을 바라보는 김달수(왼쪽)의 모습. 이 사진을 촬영한 이진희 교수는 “짙은 안개 때문에 한국이 보일 리 없다고 만류했지만 김달수가 기어코 고향 땅을 봐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국을 돌기로 하고 20년간이나 답사여행과 집필에 몰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포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편지로 한반도 관련 지역이나 설화를 제보하고 도와줬다. 취재비용도 대고 밥과 술을 사주면서 “꼭 확인차 다녀가시라”는 초청도 많았다. 교토(京都)에 취재 갔을 때는 한 일본인 의사가 “한국에서는 일제 지배 36년을 말하지만, 고대 일본은 통째로 한국의 식민지였지 않습니까”라고 말해 감격하기도 했다.

    일본의 지명이나 유적에는 한반도 도래문화의 흔적이 숱하게 남아 있다. 고려신사는 간사이(關西) 규슈(九州) 지방은 물론 도호쿠(東北) 지방에 이르기까지 없는 데가 없었다. 오사카의 백제천(川) 백제역(驛) 백제왕신사도 그대로 남아 있어 가보았다. 오사카 중심지 신사이바시(心齊橋)는 신라교(橋)가 변한 말이다. 오사카 안에도 백제군이 있었는데, 그곳이 기이하게도 일제 강점기 이래 한국인이 밀집해 사는 이쿠노구(生野區) 지역이다. 남(南)백제 소학교도 있고, 오사카에는 백제교(橋)도 있다. 규슈에도 백제천(川) 백제촌(村)이 있고,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靑森)에는 신라신사가 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내려가면 닿는 야마나시(山梨)현의 80%가 나카고마군(中巨摩郡), 가미(上)고마군, 시모(下)고마군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거마(巨摩)’는 바로 고마(高麗)가 변한 것임을 일본 고문헌을 통해 확인했다. 야마나시현 옆의 나가노(長野)현은 야마나시와 더불어 일본에서 손꼽히는 산악지방이다. 평야가 좁고 농지가 드문 곳인데도 반도 사람들이 스며들었다. 거기에 고구려의 도래인 케루(卦婁)씨가 정착해 스즈키(須須岐·鈴木)로 성을 바꿨다.

    스즈키는 일본 최대 인구의 성씨다. 괘루(卦婁) 상부(上部) 하부(下部) 후부(後部) 같은 고구려 왕족의 성을 갖고 있던 도래인들이 일본 조정에 성을 바꿔 달라고 청원해 스즈키 같은 성을 받았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최대의 성씨는 역시 반도계 혈통이기에 그렇게 많아진 것이다.

    “김달수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황국사관과 한반도 멸시 감정에 빠져 있던 일본인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는 ‘한국 이름’으로 교수도 공무원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그런 가운데 김달수가 일본의 고대 문헌과 일본인의 저술을 근거로, 일본 사람이 고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을 도래문화라고 하니 쇼크일 수밖에 없었다.”(이진희 교수)

    고대 일본인의 성씨는 모두 지명에서 비롯했다. 도쿄 동남쪽의 가나가와(神奈川)현의 하타노(秦野)시는 ‘바다(하타로 전이)’를 건너온 도래인 마을이었다. 그처럼 고대 일본의 최대 성씨요, 실력자의 상징인 하타(秦)라는 성씨가 도래인 가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 학자들이 정리한 문헌에 나와 있다. 김달수는, 규슈의 하타씨가 서기 702년경 도요구니(豊國·현재의 오이타 부근) 인구의 97%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발굴해 글로 썼다.

    “한국이 일본을 만들었다”

    김달수가 답사여행을 통해 추정하는 한반도에서의 도래 루트는 첫 번째가 역시 규슈의 후쿠오카(福岡) 지방. 한반도 남서해안의 해류가 그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루트로 들어간 사람들이 세토나이카이 시코쿠(四國) 지방을 거쳐 오사카 교토에 터를 잡은 것이 야마토(大和) 정권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루트가 일본 혼슈(本州)의 서쪽 해안. 한반도를 바라보는 니가타(新瀉) 쓰루가(敦賀) 방면이다. 동해안의 해류가 이곳에 닿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여기로 표착하고 새 삶의 터전이 됐다. 김달수는 니가타 해변에서 주어 ‘포항 제5 영정호’라는 그물 부표(浮標)가 바로 해류의 증빙이라며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이 루트로 온 고구려 신라계 사람들은 육로로 남진해서 교토 나라 같은 긴키(近畿) 기내(畿內)로 흘러갔다. 이중 일부가 나가노나 야마나시 산중까지 진출했다.

    세 번째 루트가 혼슈의 북부 해안. 두만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면, 아오모리 지역의 해변에 표착하게 된다. 김달수는 동북부 지방에서 한반도 관련 유적이 대거 발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반도 사람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한반도 도래인들은 일본의 고대 원주민을 남북으로 내몰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철기와 볍씨를 갖고 갔다. 그것은 미개한 열도에서, 지금 세상의 원자폭탄보다도 위력적인 것이었다.

    유명한 고야마 슈조(小山修三) 교수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박사가 과학적으로 추출한 것이지만, 조몬(繩文·즐문토기에서 나온 말)시대의 일본 인구가 최대 26만명, 말기에 줄어들어 7만5000명 정도였다. 8000년 동안 그렇게 지속되던 인구가 벼농사기의 야요이(彌生) 시대가 되면 갑자기 59만4000여 명으로 늘어난다. 한반도에서 볍씨를 가져간 도래인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해 제대로 된 식량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수렵 어로채취 생활을 하던 열도가 변화하게 된 것이다.

    대량으로 도래한 이주민들은 원주민을 북해도와 오키나와로 몰아내고, 규슈를 중심으로 농경문화를 꽃피우고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들이 손에 쥔 철기문화는 원주민의 어떤 대항무기도 제압할 수 있는 신형 과학병기였다.”(1991년 7월, ‘한국일보’ 문창재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김달수는 휴머니스트다. 고국을 버리고 민족을 등진 ‘일본인 장혁주’에 관한 애잔한 뒷얘기가 그의 책에 담겨 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 고려신사(高麗神社) 부분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일본인이 된 장혁주가 거기 살고 있었다.

    “내가 고마향(高麗鄕)에 처음 간 것은 1948년이었다. 같이 간 일행은 허남기, 이은직 등이었다. 한국인끼리 한국 핏줄이 서린 유서 깊은 고마향에 가게 되어 우리는 모두 들떠서 떠들어댔다. 뭔가 굉장히 먼 환상의 고향이라도 찾아온 기분이었다.

    고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우리는 작은 여관에 들어갔다. 다른 곳과는 달리 기분이 왠지 모르게 가벼웠다. 한국인은 여관 숙박계에 한국 이름을 적어 넣으면 여관 사람의 반응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늘 무거운 기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모두 당당히 제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아, 한국 분들이시군요’ 하며 환영해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여관에서 떠들어대며 술을 마셨다. 그 정도로 끝냈으면 됐을 텐데, 전쟁이 끝나고 고마촌에 은거하던 작가 장혁주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거기서 또 술을 마시고, 떠들어대다 끝판에 제각기 한국 민요와 유행가를 불러대는 소동으로 발전했다. 그런 중에 허남기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자 이변이 일어났다. 그 노래를 듣던 장혁주의 일본인 부인이 갑자기 장씨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이어 장씨도 따라 울었다. 몹쓸 짓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그들의 슬픔에 끌려 우리도 따라서 울고 말았지만, 어쨌든 비극의 작가 장혁주도 역시 민족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김달수는 장혁주가 일제 말 황민화 글쓰기에 앞장섰기에 교포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용서했다. 그래서 김달수는 ‘대륙풍의 대인’소리를 듣는지도 모른다.

    깊고 깊은 망향의 정

    김달수의 교우 범위는 넓고 깊었다.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를 비롯한 문인, 학자, 철학자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1978년 3·1절을 기념해 도쿄의 사학(私學)회관에서 김달수의 저서 ‘나의 아리랑 노래’ 출판 기념회가 열리던 날, 명사 240여 명이 몰려와 그의 깊고 따스한 인품을 느끼게 해줬다. 거기서 작가 시바 료타로가 인사말을 했다.

    “제가 사는 오사카는 한국인의 근거지입니다. 김달수씨가 수십년간 매달려온 ‘고대사’ 이래로 그렇습니다. 그런 김달수씨와 제가 함께 쓰시마(對馬島)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아사히신문’이 펴낸 ‘길을 가다’ 여행기의 쓰시마편 취재차). 김달수씨가 그 여행을 다녀와서 ‘쓰시마까지’라는 소설을 2년 전에 썼습니다. 쓰시마 북쪽 끝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아주 로맨틱한, 이건 한국 분에게는 실례되는 표현입니다만, 저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대단히 ‘전압(電壓)’이 센,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한국인은 참으로 망향의 정이 깊은, 그런 점은 약간 일본인도 닮았다고 봅니다마는, 한참 더 한 것 같습니다. 김씨가 일본 땅을 디딘 지 50년이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본서 태어나서 한 테두리 속의 ‘재일 일본인’으로 살아갑니다만, 김씨는 재일 한국인이기에 타향살이가 매우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불리한 가운데 50년을 살아왔기에, 농담입니다만, 오늘도 사람이 적게 오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일본 분이 대단히 많이 오셔서 감격스럽습니다. 한국인은 사람을 좋아하고 인정이 깊어서 한번 모이면 헤어지지 못합니다. 오늘 이것이 끝나고 2차도 준비되어 있으니 많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김달수의 오뚝이 같은 인생, 드라마 같은 생애는 1997년 77세를 일기로 막을 내렸다. 그의 형 성수씨가 작고한 지 넉 달 만에 그도 갔다. 라일락 꽃이 피는 5월이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