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떠나갔다. 찬바람 부는 아침, 대나무 평상(平床)에 누워 가사(袈裟) 한 장 덮으시고 떠나셨다. 관(棺)도 없고 수의(壽衣)도 없었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던 스님 생전의 당부대로였다. 스님은 입적(入寂)하기 전날 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님은 그렇게 ‘무소유(無所有)의 법문(法文)’을 중생에 남기고 열반(涅槃)하셨다.
하지만 소유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괴로움이라 한들 속세의 인간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그들은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권력, 부(富), 명예, 출세…. 세상은 욕망의 바다다. 오늘 한국 사회가 당면해 있는 누적된 갈등의 교착(膠着) 상태도, 어쩌면 그 밑바닥에는 욕망의 맨얼굴이 자리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다양한 생각은 존중하되, 작은 차이를 넘어 최종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정신은 국민의 민생 향상을 위해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지양하고 서로 인정, 존중하며 생산적인 실천방법을 찾는 중도실용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낡은 이념의 틀에 갇혀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고, 대립과 갈등으로 국민이 분열돼선 선진화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작은 차이를 넘어서는 커다란 조화.’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일면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일까? 내가 이 대통령에게 한 편의 영화 감상을 권유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영화 제목은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Invictus)’이다.
팔순의 거장(巨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1995년 월드컵대회에서 우승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대표팀의 실화를 통해 기적이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기적을 현실로 만드는 소통의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진정한 화해와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남아공에서 럭비는 백인의 전유물이었다. 27년간의 옥고(獄苦)를 거쳐 1994년 남아공 대통령에 선출된 넬슨 만델라는 뿌리 깊은 흑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고심한다. 스포츠의 힘에 주목한 만델라는 흑백 인종 간 용서와 화해의 계기를 남아공 럭비대표팀 ‘스프링복스’의 월드컵 우승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들어선 남아공 정부의 체육위원회는 럭비대표팀의 이름과 유니폼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스프링복스’는 오랜 세월 남아공 흑인들이 증오해온 백인의 상징이었기에. 소식을 전해 들은 만델라는 직접 위원회를 찾아가 흑인위원들에게 결정을 취소할 것을 설득한다. 그는 말했다. “백인들에게서 무엇이든 빼앗으려 하지 마시오. 그들로부터 뭔가를 빼앗으면, 빼앗긴 그들은 우리를 증오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아공 국민 간 화해와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백인의 차별과 착취에 신음해온 흑인들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만델라의 도덕적 권위와 진정한 설득 앞에 체육위원회의 만장일치 결정은 취소된다. 체육위원회를 설득한 만델라는 ‘스프링복스’의 백인 주장 프랑스와 피나르를 대통령집무실로 초대해 1년 뒤 열릴 남아공 월드컵 럭비대회에서 우승해줄 것을 당부한다. 당시 최약체로 손꼽히던 ‘스프링복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만델라는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시(詩) ‘인빅터스(정복되지 않는)’의 구절을 들려주며 프랑스와에게 우승의 영감(靈感)을 불어넣는다. 그 영감은 주장 프랑스와를 통해 점차 ‘스프링복스’의 모든 팀원에 전이된다. 마침내 기적적인 우승.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던 흑인과 백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하나가 된다.
결과가 예정된 단조로운 스토리임에도 이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관용과 설득, 이해와 감동이 화해를 이끌어낸다는, 한국 사회가 풀어내야 할 지긋지긋한 갈등과 반목의 해소 방법을 만델라의 위대한 리더십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흑백 인종 간 적대(敵對)에 비한다면 한국 사회 세력 간 대립은 보다 적은 노력으로도 한결 누그러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작은 차이를 넘어서는 커다란 조화‘를 위해 어떤 리더십을 구현해야 할 것인가. 수사(修辭)만이 아닌 구체적 행위를 통한 비판 및 반대세력에 대한 관용과 설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수 국민의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성과와 효율만을 앞세워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는 일방적 리더십으로는 비판 및 반대세력을 설득할 수도, 동의를 구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들을 몽땅 ‘좌파’로 치부하려 한다면 국민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물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친북좌파세력까지 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줌밖에 안될 그런 반체제세력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