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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⑪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비바람 몰아치는 ‘어둠의 터널’ 5개월

  • 전원경│작가,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박사과정 winniejeon@hotmail.com│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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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전지들의 충전 예배’

사시사철 햇빛 만나기가 어려운 데다 흐리고 비 오는 날씨가 일상처럼 계속되다 보니 영국에선 해가 나는 여름이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공원이든 식물원이든 아니면 집의 정원이든 간에 잔디가 깔린 곳이면 어디에나 너나 할 것 없이 나와 팔다리 드러내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다. 한여름의 맑은 날에는 런던의 하이드파크처럼 드넓은 공원조차 일광욕 인파로 가득 찬다.

그런데 그 일광욕하는 모습들이 누가 영국인 아니랄까봐 얼마나 진지한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잔디밭에 눕거나 엎드려 있으면 웃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도시락을 까먹거나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무척 소란스러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햇볕을 쐴 기회가 없기라도 한 듯, 사람들은 하나같이 햇볕 아래 조용히 누워있거나 엎드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오죽하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국의 이런 일광욕 현상을 가리켜 ‘태양전지들의 충전을 겸한 태양 숭배 모임’ 같다고 했을까. 영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법한 표현이지만, 여름의 일광욕 장면을 볼 때마다 나 역시 ‘태양전지들의 충전 예배’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영국의 날씨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점도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 비치는 부분이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쨍 내리쬐는 등 날씨가 극적으로 바뀐다. 영국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는 하루 날씨를 아침·정오·오후·밤 이렇게 4번, 혹은 아침·낮·저녁의 3번으로 나눠서 한다.

영국에 관련된 속설 중에 ‘하루 동안 4계절 날씨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전에 햇빛이 비치는 걸 보고 ‘음, 오늘은 날씨가 좋네’하면서 우산이나 방수 점퍼를 안 챙겼다가는 오후에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라고 해도 대개는 ‘바람 불고 흐리고 비 옴’이 영국 일기예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기한 점은 날씨가 이렇게나 정신없이 바뀌는데도 일기예보는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는 사실이다.



막상 영국에서 살아보면 햇빛을 볼 수 있는 날이 너무나 드물다는 게 큰 괴로움이다. 흐린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절로 마음이 침울해지고 기운이 빠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없던 신경통도 생겨난 듯, 전에 없이 팔다리가 쿡쿡 쑤신다. 아직 해가 안 뜬 건지, 아니면 비가 와서 해가 가려진 건지 구분조차 안 가는 어두컴컴한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단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영국의 집들은 겨울 아침마다 냉장고 속처럼 차갑게 식어 있기 일쑤다.

영국인들도 이 길고 긴 어둠에는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듯, 겨울을 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영국인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단연 스페인인데, 그 이유는 당연히 사시사철 햇빛이 눈부신 스페인의 날씨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영국 사람들은 늘 자기들끼리 ‘영국 날씨, 정말 끔찍하다’는 식으로 나쁜 날씨를 탓하면서도 외국인들이 “아유, 영국은 왜 이렇게 날씨가 나빠요?”하고 날씨를 험담하면 그걸 속으로 굉장히 기분 나빠 한다고 한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 앞에서

이제 10월이니 곧 길고 긴 영국의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영국에서도 북쪽인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쯤은 계속된다. 곧 오후 3시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고, 창밖으로는 칠흑처럼 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배경이 된 도시가 바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인데,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이 소설이 묘사하는 음침한 분위기, 무언가 악마적인 힘이 숨어 있는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와 여전히 똑같다.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올여름 최악의 무더위를 뚫고 한국으로 필드워크도 다녀왔고, 자료도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올겨울 나는 한눈팔지 않고 연구에만 매달려야 한다. 이번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앞으로의 연구 성패를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연구실 창밖에 늘 가득할 음산한 어둠과 유리창을 덜컹덜컹 흔들며 지나갈 차가운 비바람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겨울 하늘처럼 컴컴해진다. 더구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유럽에는 이상한파가 덮칠 것이라는 보도까지 접하고 보니 마음은 더 무겁다. 이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와 내년 봄 교정에 무리지어 핀 수선화를 웃으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신동아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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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작가,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박사과정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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