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윌리엄-케이트 결혼 英 침체 관광산업 · 노쇠 왕실 살렸다

영국 왕실 결혼의 정치경제학

  • 영국 런던=성기영│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 sung.kiyoung@gmail.com

    입력2011-05-23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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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세계 20억 시청자를 사로잡은 한 시간짜리 결혼 드라마는 영국 관광산업의 먹구름을 걷었고, 스러져가던 왕실 재정에도 밝은 빛을 비추었다. 평민 케이트와 왕자 윌리엄의 결혼은 군주제에 회의적이던 영국민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 그러나 결혼과 이혼의 역사로 점철된 왕실에 과연 지속가능한 미래가 펼쳐질까.
    윌리엄-케이트 결혼 英 침체 관광산업 · 노쇠 왕실 살렸다
    잔치는 끝났다. 영국 왕실의 전통에 따라 케이트 미들턴, 아니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Duchess of Cambridge)의 웨딩 부케는 결혼식이 열렸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돌아와 무명용사의 묘 앞에 다시 놓여졌다. 무명용사의 묘에 부케를 가져다놓는 것은 1923년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모후가 남편인 조지 6세와 결혼하던 당시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전세계 수십억 인구를 열광시킨 21세기의 초대형 이벤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21세기판 신데렐라의 주인공이 된 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나 되는 20억 시청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동화 속 주인공에서 공군 대위의 평범한 아내로 되돌아갔다. 결혼식 며칠 후 영국 신문이 게재한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의 사진은 슈퍼마켓에서 쇼핑 카트를 미는 평범한 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의 결혼식이 이처럼 많은 사람을 열광과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을까. 4월29일 불과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지루해 보이는 영국 국교회의 혼인 예식은 전세계인의 관심을 이 저물어가는 섬나라로 집중시켰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번 로열 웨딩은 영국인들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 것이 분명하다.

    발코니 키스 기다린 50만 인파

    그만큼 영국인이 로열 웨딩에 갖는 관심도 유별났다. 우선 몇 가지 수치를 보자. 결혼식이 생중계된 시각에 BBC나 ITV를 시청한 영국인은 24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결혼식 당일 아침 전국적인 전력 소모 추이는 흥미로운 삽화를 보여준다. 결혼식과 마차 행진을 모두 마치고 로열 커플이 버킹엄궁 안으로 사라진 직후 전력 소모량이 갑자기 치솟았다.



    영국 언론은 이를 텔레비전 앞에서 숨죽이고 이들 커플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이 그제야 한숨 돌리고 차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를 동시에 켰기 때문으로 해석한다(영국인들이 얼마나 홍차를 즐겨 마시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100만개의 커피포트가 일제히 켜졌다는 그럴싸한 수치를 제시한 신문도 있었다.

    반면 결혼식 후 공식 오찬이 진행되던 도중 윌리엄-케이트 커플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등장해 광장을 메운 관객에게 인사하고 키스를 나누던 순간 전력 소모량은 다시 급감했다.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TV 앞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로열 웨딩의 열성팬들은 물론 텔레비전 시청에 만족하지 않았다. 15분 정도의 마차 행진 (웨스트민스터 사원-버킹엄궁)을 보기 위해 수십만 명이 런던 중심가 곳곳을 메웠다. 그뿐 아니라 단 몇 초도 되지 않는 ‘발코니 키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50만명이나 되는 인파가 버킹엄궁 광장 앞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하이드 파크와 성 제임스 파크 등 중심가 대형 공원에 운집해 런던시에서 설치한 대형 스크린으로 생중계를 지켜보기도 했다. 결혼식 당일 이들 공원 주변에서 2파운드에 판매된 결혼식 프로그램 15만부는 삽시간에 동이 났다.

    결혼식날 길거리 파티 5500건

    현대 자본주의에서 ‘관심’은 곧 ‘소비’로 이어지는 법. 로열 웨딩에 대한 극성스러운 열기는 고스란히 경제적 효과로 나타났다. 컨설팅 업체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는 로열 웨딩에 따른 관광객 증가로 인해 런던의 호텔과 레스토랑 등이 누릴 수 있는 추가 수입을 1억 파운드(약 1800억원) 이상으로 추계하기도 했다.

    또 영국 소매업협회는 결혼식 당일 전국적으로 5억파운드 정도의 수익을 기록했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평상시 하루 수익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소매점 매출에 큰 효자 노릇을 한 것은 영국인들의 거리 축제 문화다.

    ‘번팅(bunting)’이라고 하는 만국기 스타일의 깃발을 내걸어놓고 길거리에서 파티를 여는 것은 영국인의 오랜 전통이다.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 앞에서도 예외 없이 길거리 파티가 열릴 정도였다. 심지어 동네 초등학교에서도 로열 웨딩을 축하하기 위한 길거리 파티가 줄을 이었다.

    결혼식 당일 영국 전역에서는 대략 5500건의 길거리 파티가 열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소규모 파티로 길거리가 들썩거리면서 당연히 가장 짭짤한 수입을 올린 곳은 중소형 슈퍼마켓들이다. 각종 케이크나 스낵류에 ‘로열’자를 얹은 기획상품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말하자면 ‘미들턴 소시지롤’이나 ‘빅토리아 스펀지케이크’같은 먹을거리들이 인기상품 리스트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영국 왕실은 그동안 몇 년 만에 한 번씩 치러지는 왕족의 결혼식을 통해 고급스럽고 다양한 왕실 기념품을 선보여왔다. 이러한 기념품을 제조, 판매하는 업체들은 왕실 가족들의 결혼 소문이 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수백 가지의 기념품을 생산해낸다.

    이들 기념품 제조업자들의 선투자는 윌리엄-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을 계기로 대박을 터뜨렸다. 업계에서는 이들 로열 커플의 사진이 들어간 머그잔, 깃발, 수건 등 다양한 기념품 판매만으로 2600만파운드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한다.

    그뿐만 아니라 약혼식과 결혼식을 거치면서 케이트 미들턴이 입었던 옷이나 착용했던 액세서리 브랜드들도 후광효과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 한때 오바마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미셸이 애용하는 브랜드가 반짝 호황을 누린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이런 반짝 효과도 이번 로열 웨딩이 영국 관광산업에 앞으로도 몇 년 동안 안겨다줄 노다지에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세기의 로열 커플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마차 행진을 통해 20억 시청자에게 보여준 런던 시내 명물들은 하나하나가 런던 관광의 아이콘이다.

    재정적자 속 우려 목소리도

    영국 관광청은 이번 로열 웨딩이 침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국 경제에 가뭄 끝 단비가 되리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관광청은 이번 로열 웨딩의 배경이 된 런던의 명소들을 찾는 관광객의 행렬이 최소한 몇 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숫자로만 따지면 총 400만명의 관광객 증가와 20억파운드 정도의 관광 수입 증가를 가져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축제 분위기 속에 끝난 이 세기의 결혼식이 이런 긍정적 효과만을 안겨다주었을까. 물론 아니다. 특히 영국 경제가 사상 유례없는 재정적자에 짓눌리는 상황에서 이런 호화판 결혼식이 납세자 또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나절도 못 되는 짧은 구경거리를 위해 영국 납세자들이 부담한 비용은 1000만파운드 (약 180억원)에 달한다. 이번 로열 웨딩은 세계 각국의 국왕, 왕비, 왕세자 등이 총출동한 초특급 경호 행사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경호와 보안 업무에 들어간 비용만도 700만파운드나 된다.

    결혼식 행사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이야 왕실 예산으로 부담한다고 치더라도 경호, 경비와 행사 홍보, 취재 지원 등 간접 경비는 고스란히 정부 예산에서 지출됐다. 또 행사 전후 장내 정리, 청소 등에 드는 비용 역시 해당 지자체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번 왕실 행사를 책임진 문화관광체육부 측은 과다 지출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심지어 버킹엄궁 주변에 진을 친 방송사에 중계 부스를 설치해주고 6만파운드 가량을 회수했다고 밝힐 정도로 ‘적자 행사’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재정 적자의 여파로 공무원들이 잇달아 일자리를 잃고 자녀 보육 수당이 잘려 나가는 상황에서 납세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돈 씀씀이를 최대한 규모 있게 해나가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는 왕실 가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혼식 후 버킹엄궁에서 열린 피로연도 최대한 간소하게 치렀다. 그뿐만 아니라 신부 측인 미들턴가(家) 역시 결혼예배에 쓰인 꽃 장식과 신부의 웨딩드레스, 공식 및 비공식 피로연에 들어가는 비용 일부를 분담함으로써 왕실의 검소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경제계에서는 여전히 왕실 결혼식 날짜를 4월29일 금요일로 택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5월2일(월)까지 4일 동안 각급 사업장이 문을 닫는 데 대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영국의 5월 첫째 월요일은 휴무일이다). 특히 이 4일 연휴는 부활절 4일 연휴가 끝난 지 사흘 만에 다시 찾아온 것으로 적지 않은 자영업자가 4월 말~5월 초에 걸쳐 열흘 넘게 셔터문을 내려놓는 초특급 황금연휴가 이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경영자총협회(CBI)에 따르면 금요일인 로열 웨딩이 낀 4일 연휴로 인해 약 60억파운드에 달하는 생산성 하락 효과가 예상된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왕립은행 (RBS)도 이번 연휴가 2분기 경제성장에 0.1% 정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심각한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왕실에 대한 신뢰와 존경

    그러나 경제학자들이 내놓는 이러한 통계 수치는 로열 웨딩이 영국인에게 선사해준 벅찬 감동과 자긍심에 가려 단순한 통계 이상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감동과 자긍심의 원천은 대다수 영국인이 갖는 왕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다.

    따라서 로열 웨딩을 수입과 지출에 맞춰 결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작업은 이러한 왕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로열 웨딩을 전후로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바로 현대 민주주의 시대에 영국 왕실이라는 전근대적 국가기구가 어떤 방식으로 존속해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영국 왕실은 이번 로열 웨딩을 통해 현대화된 이미지를 대내외에 구축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재확인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케이트 결혼식이 끝난 직후 케임브리지 대학이 유고브(YouGov)와 함께 영국인 2만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이 조사에 따르면 10년 전에 비해 왕실을 기반으로 하는 군주제 시스템(monarchy)에 대한 영국인의 지지율은 두 배로 껑충 뛰었다. 10년 전 비슷한 내용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절반이 훨씬 넘는 59%가 ‘군주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 이 비율은 28%로 줄어들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응답자의 3분의 2가 ‘100년이 지나도 군주제 시스템이 존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는 조사 결과도 왕실에는 희소식을 안겨주었다.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왕실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왕실 재정 확보에마저 어려움을 겪어온 버킹엄궁으로서는 이번 결혼식으로 인해 군주제 시스템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왕실 가족들 중 윌리엄 개인에 대한 호감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다. 이 조사에서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치고 왕실 구성원 중 인기도 1위에 뽑혔다. 여왕의 뒤를 이어, 예비 왕비인 케이트 미들턴이 3위에 오른 것은 물론이다.

    이미 80대에 접어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찰스 왕세자와 달리 서른이 채 안 된 젊은 윌리엄 왕세손이 영국 왕실을 대표하는 인물로 영국인들 사이에 각인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군주제의 미래와 그 지속가능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절대적이다.

    간소함과 현대적

    그렇다면 군주제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생각해온 국민조차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식에서 새로운 왕실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일까? 그들은 이번 로열 웨딩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왕실의 미래를 어떻게 보았을까?

    일반 국민이 느끼는 새로운 왕실 혼인 절차에 대한 이미지는 상대적 ‘간소함’과 ‘현대적’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30년 전 윌리엄의 아버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영국인들에게 새로운 결혼식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찰스-다이애나의 결혼식이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면 윌리엄-케이트의 결혼식은 예상을 뛰어넘는 단아함과 간소함으로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왕실의 결혼식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던 신부의 드레스 길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30년 전 그날, 연출된 듯한 인형 같은 미소에 7m60㎝나 되는 긴 드레스 꼬리를 끌며 성 바오로 대성당에 나타났던 다이애나는 간 데 없었다. 대신 로열 웨딩 아침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는 평범한 신부들이 입는 수수한 길이의 (2m70㎝)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 미들턴이 결혼식장 바로 앞에서도 전혀 긴장한 빛이 없이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드레스 길이만을 놓고 로열 웨딩 당일 신부를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와 결혼했던 사라 퍼거슨이 결혼식장에 섰을 때 드레스 길이가 5m가 넘었고 현재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남편 필립 공과 1947년 결혼 당시 4m 길이의 드레스를 입었던 것과 비교하면 간소함이라는 명분 아래 왕실의 전통을 깬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두 사람 간의 호칭이나 관계도 화젯거리였다. 동화 속에서 금방 걸어나온 듯한 신비한 이미지로 등장한 다이애나는 자신보다 13세나 많은 찰스 왕세자에 대해 ‘경(Sir)’이라는 존칭을 붙여야만 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성혼 선언문에 신랑에 대한 ‘복종(obey)’이라는 구절이 빠졌던 사실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찰스-다이애나 결혼 이후 다른 왕실 가족들의 혼인 서약에는 다시 복종 의무가 포함됐다.

    그러나 윌리엄-케이트의 성혼 선언문에서 복종 의무가 빠진 것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결혼 예배를 집전한 영국 국교회 주교단 역시 ‘복종 의무를 언급하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암시한 것이 교리에 더욱 부합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성혼 선언문의 구절을 두 사람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더욱 강조됐다.

    왕실 관계자들을 더욱 만족시킨 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왕실의 육중한 커튼 뒤에서 벌어지는 궁중야사가 아니라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거나 가지고 있었던 건강한 생활인 사이의 결합으로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찰스-다이애나 커플은 약혼에 이르기까지 고작 13번 만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갓 스무 살에 불과했던 다이애나에게 판타지는 가득했지만 결혼 당시만 해도 그녀에게서 친근함을 발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이애나의 친근한 이미지가 영국인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천사 이미지의 그녀가 아프리카 빈국을 찾아다니며 에이즈 환자들의 거친 손을 끌어당겨 잡았을 때부터였다.

    그러나 대학 친구 사이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던 윌리엄과 케이트의 8년이 넘는 연애사는 영국인들에게 귀족적 이미지로만 느껴져왔던 왕실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게다가 케이트는 결혼 당시 다이애나보다 열 살이나 많고 성숙하다.

    생활인들의 결혼

    이런 현대화된 왕실의 이미지는 로열 웨딩이 모두 끝나고 나서 선보인 ‘깜짝쇼’에서 절정을 이뤘다. 전 세계의 수십여 개 TV채널이 결혼식 생중계를 모두 마치고 한숨 돌렸을 무렵 윌리엄-미들턴 커플이 알록달록한 파티 풍선으로 장식된 깜찍한 오픈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난 것.

    신혼 커플은 찰스 왕세자 소유의 클래식카인 아스턴 마틴에 ‘JU5T WED’ 라는 번호판을 달고 등장했다. 영국의 차량 번호판 양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누구라도 ‘방금 결혼했다(Just Wed)’는 메시지를 알아챌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한 것이었다.

    관람객들의 웃음을 더욱 자아낸 것은 차 앞쪽 잘 보이는 곳에 붉은색 알파벳 대문자 ‘L’자를 크게 붙여놓았던 것. ‘L’은 ‘Learner’의 약자로 영국에서 운전교습을 받고 있는 초보 운전자들이 사용하는 표지판이다. 방금 전 세기의 결혼식을 치른 로열 커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캐주얼한 면모를 보여준 이 장면은 이날 이벤트의 최대 반전을 기록했다.

    이런 ‘깜짝 이벤트’가 왕실의 권위와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 커플의 즉석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노쇠한 왕실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연출의 결과물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시도 자체만으로도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로열 웨딩의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안겨준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카 이벤트는 고답적 왕실 이미지에 답답해하던 젊은 층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고 왕실의 전통을 중시하는 노년층에게도 잔잔한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위기의 왕실

    그러나 이번 로열 웨딩의 흥행 성공에 대해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이들 관객이 아니라 바로 왕실 관계자들이었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영국 왕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버킹엄궁 주변을 감돌고 있는 위기 증후군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왔다. 30년 만의 왕실 최고 이벤트로 이런 왕실의 위기감을 상당 부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의 징후는 이미 여러 군데서 동시에 찾아들었었다. 왕실 운영을 지탱하는 재정은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고 왕실에 대한 일반 국민의 존경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또한 전근대적 풍습을 유지하고 있는 왕실의 혼인 관행과 절차마저 논란의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위기 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왕실의 재정이다. 노후해가는 버킹엄궁의 보수와 왕실 행사 경비 등을 위해 왕실은 지난 20여 년간 정부 측에 예산 증액을 꾸준히 요청해 왔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인한 세수 감소와 런던올림픽 예산 등으로 인한 정부 재정 압박으로 왕실 측의 요구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왕실 측은 ‘영국인의 자랑인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1인당 지출하는 돈이 62펜스(약 1000원)밖에 되지 않는다’며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 그래도 각종 복지 수당 삭감으로 인해 살림 걱정이 늘어난 국민에게 왕실 형편을 일일이 살펴줄 여유는 없었다.

    지난해 영국 언론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왕실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농가와 땅을 매각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 외국 귀빈으로부터 받은 고가의 선물이나 소장하고 있는 포도주 등도 처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왕실 소식통이 전하는 버킹엄궁의 살림살이 현실이다.

    결국 버킹엄궁이 현재와 같은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실 내부에서 경비를 조달하는 방법을 찾아내거나 자금원을 찾아내지 못하면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왕실의 재정 위축은 왕실 운영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두 번째, 왕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과거처럼 무조건적이지 않다는 것도 위기의 징후를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물론 58년째 재위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한 신뢰는 아직도 절대적이다. 또 여왕이 현재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어 당장 왕위 계승 문제가 떠오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왕위 계승 1순위에 올라 있는 찰스 왕세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다닌다. 특히 많은 영국인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비극적 죽음에 찰스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찰스가 다이애나와 결혼한 후에도 남몰래 밀회를 즐겨온 것으로 드러난 현재의 부인 파밀라 파커 볼스에 대한 영국인들의 감정은 적대감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 위기감은 영국 왕실이 유지해오고 있는 결혼 풍습이 과연 현대적 법체계 및 인권 시스템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이미 왕실이 유지해오고 있는 엄격한 배우자 선택 기준 등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왕실 이미지 쇄신 계기

    예를 들어 현재 왕실 규정에 따르면 왕족 중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왕위 계승 순위에서 제외된다. 16세기 영국 국교회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해 딴살림을 차린 데서 이러한 규정이 유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이는 종교의 자유라는 현대법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게다가 가톨릭 신자가 아닌 무슬림이나 감리교, 침례교 등 타 종교 신자와 결혼했을 때 어떻게 된다는 명시적 조항이 없다. 나아가 만약 결혼 당시에는 아니었지만 결혼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경우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왕실 규정은 결혼 적령기에 이른 왕족 누구라도 왕의 동의 없이는 결혼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 간의 합법적 ‘파트너십’을 인정하는 영국 사회에서 왕족 중 누군가가 만약 이성 간 결혼이 아닌 동성 파트너를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여기에 대한 왕실 규정은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다.

    왕실 결혼 규정이 갖는 이런 모순점을 추적해 최근 책을 펴낸 영국 워릭대 레베카 프로버트 교수는 왕실이 갖고 있는 이러한 전근대적 법규정이 유럽 인권 법원에 가면 모두 패소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기도 한다. 프로버트 교수는 심지어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이 법적 논쟁을 유발하지 않고 순탄하게 치러지는 마지막 로열 웨딩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이렇게 돈 문제, 왕위 계승 문제, 혼인 문제 등으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버킹엄궁으로서는 윌리엄-케이트 커플의 결혼식이 왕실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 이런 위기감을 일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눈치다. 또 실제로 이러한 바람은 상당 부분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윌리엄-케이트 커플의 로열 웨딩이 남긴 여운은 왕실 내 결혼이 갖는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도 가져다주었다. 근대국가 성립 이래 왕실의 결혼은 전통적으로 지역 내 세력 확장이나 적대적 파워에 맞서 세력 균형을 꾀하는 정치적 행위로 인식되어왔다.

    그 후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사라졌지만 로열 웨딩은 여전히 이성적 개인 간의 결혼이 아닌 가문 간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채로 치러져왔다.

    당초 대학 친구로 출발했던 윌리엄-케이트의 화려한 결혼식과 평범한 결혼 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로열 웨딩도 평범한 연애의 연장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되었다. 로열 웨딩의 새로운 한 장(章)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왕실 결혼사? 이혼의 역사!

    로열 커플의 탄생은 단순히 그 화려함만으로도 세계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이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왕실의 결혼사를 되짚어보면 행복한 결말보다는 이혼과 파경이 훨씬 더 많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스캔들은 일단 잠시 접어두자. 우선 찰스 왕세자의 여동생인 앤 공주부터 오빠 못지않은 결혼과 이혼 경력을 자랑한다. 앤 공주는 1973년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1981년 파경을 맞이한 후 1992년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찰스가 다이애나와 갈라선 바로 그해였다. 그뿐만 아니라 찰스의 동생인 앤드루 왕자의 결혼 생활도 같은 해 파국을 맞았다. 여왕은 4남매 중 3명이 같은 해에 파경을 맞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앤 공주는 이혼 후 같은 해 해군 장교 출신으로 왕실 직원이던 티모시 로렌스와 재혼했다. 그러나 남편인 티모시는 왕실 내에서는 드물게 아무런 작위를 받지 못했다.

    현재 앤 공주는 공식적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두 번째 남편인 티모시와도 사실상 별거 상태인 것으로 알려진다. 일부에서는 티모시가 왕실의 일원으로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앤 공주와 관련해서는 두 번째 이혼설마저 돌고 있다.

    게다가 앤 공주는 찰스 왕세자의 현재 부인인 파밀라 파커 볼스의 전 남편인 앤드루파커 볼스와 결혼 전부터 염문을 뿌린 바 있다. 두 사람은 각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앤드루가 두 번째 부인과 사별했을 때 앤 공주는 직접 조문하기도 했다.

    앤 공주의 오빠인 앤드루 왕자도 1986년 사라 퍼거슨과 결혼했으나 6년 만인 1992년 파경을 맞았다. 사라 퍼거슨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사라 퍼거슨은 얼마 전 기업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이권을 챙기려는 거래가 언론에 포착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4남매 중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만이 1999년 결혼한 이후 비교적 평탄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조금 더 이야기를 과거로 돌려보자. 앤 공주의 이모이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동생인 마거릿 공주(2002년 사망)는 버킹엄궁 내에서도 유명한 스캔들 메이커였다.

    물론 결혼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공주가 애초 사랑했던 사람은 아이가 둘이나 딸린 이혼남이었다. 둘은 약혼식까지 치렀다. 그러나 이혼 경력을 이유로 영국 국교회에서 이 결혼을 승인하지 않자 마거릿 공주는 결국 다른 평민 출신의 남자와 만나 결혼했다.

    마거릿 공주의 결혼식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최초의 로열 웨딩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결국 이 결혼도 파국을 맞는다. 이 무렵 마거릿 공주가 17세 소년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거릿 공주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1936년 말 갑작스레 왕위에 올랐다. 조지 5세의 사후 왕위를 계승한 형 에드워드 8세가 1년 만에 갑작스레 왕위를 내놓으면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이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내놓은 에드워드 8세의 이야기는 최근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킹스 스피치’에 잘 나와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영국 왕실에서 치러진 결혼의 역사는 몇 년 뒤 고스란히 똑같은 이름을 내건 이혼의 역사로 탈바꿈했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윌리엄과 케이트는 과연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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