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부상(浮上)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1932년에 영연방 국가들을 소집해 캐나다 오타와에서 경제회의를 열고 연방 내 국가들 간의 ‘특혜관세’ 제정을 합의했다. 요컨대 영국과 그 식민지 국가의 무역 관세율을 크게 낮추고, 연방에 속하지 않는 신흥공업국 일본, 독일 등을 견제하려는 심산이었다.
특히 인도 면화에 대한 영국 정부의 압력은 더욱 거셌다. 1930년만 해도 영국과 기타 국가에 대해 각각 15%, 20% 정도로 차등해 관세를 부과했는데 1933년부터는 각각 25%, 75%로 폭을 크게 벌렸다.
인구는 많지만 천연자원이나 석유 등이 턱없이 부족해 애초부터 해외수출을 통한 무역의존도가 높던 일본 처지에서는 대항하기 힘든 조치임에 틀림없었다. 일본은 1890년만 해도 GN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는 34.3%로, 오늘날 무역구조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우리 생명선은 만주”
불평등한 무역구조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원료를 자급할 수 있고 관세장벽 없이 무역거래를 할 수 있는 식민지, 혹은 주도권을 확실히 쥔 시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우리의 생명선(生命線)은 만주”라는 선전문구 아래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며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 진출을 꾀했다. 국제연맹은 1933년 일본의 부당한 침략을 견제하며 44개국 중 42개국의 찬성으로 대일 경제제재에 찬성했고, 이에 일본은 연맹 탈퇴라는 강수를 두며 당시 국제질서에서 한 걸음 이탈하게 된다. 이 시기 영국과 함께 일본에 대한 견제의 끈을 조인 나라는 중국과 만주에서 이권 행사를 노리던 미국이다.
일본은 이미 러일전쟁(1905) 승전의 대가로 기존에 러시아가 쥐고 있던 중국 남만주지역 철도 부설권 등의 권익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그보다 앞서 청일전쟁(1894~1895) 패배로 지도력이 어수선해진 청나라의 약점을 잡아 요동반도와 만주지역 전체에 대한 조차권(租借權) 및 철도부설권 등을 접수한 바 있다.
특히 하얼빈부터 뤼순(旅順) 지방에 걸친 남만주철도 부설권은 단순히 건설 시공에 대한 권리가 아니고, 주변 지역의 광물 채굴권이나 실질적 도시 행정권 같은 개념과 닿아 있어 초미의 관심사였다. 실제로 일본은 철도 부설 과정에서 철광산을 발견, 인근에 대형 제철소를 짓기도 했다.
중국대륙에서 러시아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발을 빼면서 일본의 주도권이 커지자 영국, 프랑스, 독일은 물론 그때까지 아시아 지역 영향력 행사에 큰 관심이 없던 미국도 본격적인 경쟁에 참가한다. 1915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은 1차대전 종반부인 1917년에는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도움을 줬다.
미국의 의도대로 전승국이 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중국은 독일에 내준 산둥반도 조차권을 반환받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산둥반도를 탐내던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견제구였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군정이 일종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운 배경으로는 미국이 영국과 연합해 일본이 부설한 남만주철도에 평행하는 또 다른 경쟁 철도를 세울 계획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과 영국이 차관을 뒤에서 제공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중국인 자본’이라는 점을 내걸고 요금도 싸게 책정해 일본과의 시장경쟁에서 이기려는 속셈이었다.
‘침략자 일본’의 민낯
영일동맹(1902)이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에서 보듯 20세기 초만 해도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과 우호적 동맹관계였다. 그러다 1차대전 후 일본이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내면서부터 외교관계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1차대전 중 청이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일본은 먼저 1915년 ‘대화(對華) 21개조’를 만들어 중국에 요구했다.
뤼순, 다롄(大連) 지방의 조차권을 1999년까지 연기하고 만주에 있는 일본인 상공업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 등은 예상 가능했으나 ‘너무 나간’ 항목들이 문제였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이 필요할 경우 먼저 일본과 상의할 것’ ‘정치·경제·군사 분야에 일본인 고문을 둘 것’ ‘중국의 경찰조직에 상당수의 일본인을 고용할 것’ 등의 조항은 때마침 일본에 대해 견제심리가 발동하던 미국과 영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이나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蔣介石) 등 중국 지도층 역시 그전까지는 “일본에서 배우자”며 친일 행보에 열심이었으나, ‘대화 21개조’ 파동을 겪으며 노선을 바꾸게 된다. ‘침략자 일본’의 민낯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2차대전 당사국 미국의 반목을 사게 된 결정적 계기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를 세계 무대에서 주창하면서부터다. 1937년 난징(南京), 1938년 국민당 주요 거점이던 우한(武漢)과 광둥(廣東)지역을 차례로 공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이때부터 ‘만주국’뿐 아니라 중국 대륙 전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심이 돼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동아신질서’ 선언의 요지다. 이것이 그동안 자제하던 미국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1939년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파기했고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국민당의 장제스 세력을 측면 지원하며 일본에 맞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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