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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文 경제정책, 방향 옳으나 너무 원리주의적”

“한국 경제는 악성 저성장으로 가는 중”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文 경제정책, 방향 옳으나 너무 원리주의적”

  • ● “미·중 무역전쟁, 구도상 中이 美 이길 수 없어”
    ● “소득주도성장 반쪽짜리, 투자증진정책 병행해야”
    ● “日, 자신들 성장 뒷바라지 韓에 보복, 부도덕 국가”
    ● “文정부 정책 전반에 상인적 현실감각 부족”
    ● “기득권 노조, 아집 심하고 사회에 대한 배려 부족”
    ● “분양가상한제, 투기과열 조장하는 최악의 선택”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박승(83) 전 한국은행 총재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여러 정권에서 중용됐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박승 중앙대 교수를 전격 발탁했다. 임명 직전까지 박 전 총재는 노 당시 대통령과 만난 적이 없었다. 이후 박 전 총재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거쳐 김영삼 정부에서 대한주택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그 뒤 학계로 돌아가 한국경제학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다 2002년 초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제22대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김 당시 대통령도 박 전 총재와 일면식도 없었다. 중도에 놓인 그의 이념적 좌표가 집권자들에게 소구력을 발휘했을 터. 한국의 경제 원로(元老) 중 박 전 총재만큼 각양각색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는 없다. 

그는 2006년 3월 한국은행 총재직 퇴임 후 공직과 거리를 뒀다. 그 뒤 2016년 10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선을 위해 꾸린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에 자문위원장으로 합류했다. 지난 4월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원로 오찬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0월 11일 서울 평창동의 한 호텔에서 박 전 총재를 만나 ‘한국 경제의 길’을 물었다.


“트럼프, 중국에 밥 못주겠다는 뜻”

- 지정학적 요인 탓에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세계경제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습니까? 

“1990년대부터 세계경제 흐름을 신자유주의가 지배했어요.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고효율로 인해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렸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이르러 거품이 꺼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각국이 경쟁적인 금리 인하와 무한 통화 공급으로 대처하면서 세계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 상승 국면이 재작년까지 이어지다 미국의 금리 인상, 유동성 회수가 계기가 돼 하향 국면으로 들어섰어요. 지금은 미·중 무역전쟁, 유럽 브렉시트 등이 가세해 경기 하강이 깊어지는 모습입니다.” 

박 전 총재는 “케인스주의가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는 두 가지 문제를 낳았습니다. 먼저 수출이 막히면서 수요 부족 문제를 야기했어요. 또 양극화가 심화됐습니다. 현재 세계경제 조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신(新)케인스주의’라 할 수 있어요. 수요 부족에 대응하는 ‘구(舊)케인스주의’에 더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가진 양극화에 대한 문제인식이 결합된 모양으로 가고 있어요.” 

박 전 총재는 1961년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조사부 차장 시절이던 1976년 중앙대로 자리를 옮겨 경제발전론과 국제경제학 등을 가르쳤다.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냈다. 거시경제 및 금융 관련 지표에 관한 한 이골이 났을 법하다. 그는 이날도 막힘없이 ‘숫자’를 쏟아냈다. 

“일본과 독일은 올해 0%대 성장을 할 것으로 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체 평균 성장률이 1%대예요. 유엔무역개발회의(UNTAD)에 의하면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이 2.3%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저성장률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다만 완만한 침체여서 과거 금융위기 같은 충격적인 불황은 없을 겁니다.” 

박 전 총재는 “미·중 무역전쟁이 일단락되면 세계경기는 침체 국면에서 서서히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그렇다면 미·중 무역전쟁의 향배가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요. 

“과거에 중국은 미국에 상대조차 안 되는 후진국이었어요. 지금은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의 70%까지 차올랐고, 머잖아 역전될 상황에 와 있습니다. 중국이 크도록 밥을 준 것은 미국입니다. 지난해 미국의 무역적자가 6200억 달러인데, 그중 60%가 중국에 대한 적자입니다. 미국의 대중 수출이 1500억 달러인데, 중국의 대미 수출은 5000억 달러가 넘어요.” 

- 무역 불균형이 심하죠. 

“트럼프의 대중 무역제재는 중국에 밥을 더는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구도상 중국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전쟁입니다. 밥을 안 주겠다는 걸 어떻게 합니까? 중국이 갈수록 손해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갈 수 없는 전쟁이에요.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에는 이 문제가 결말이 나리라 봐요. 미국이 바라는 대로 결국 결말이 날 겁니다.” 

-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역보복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왜 이런 행동을 했다고 보시나요? 

“속뜻은 한국의 첨단산업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40년 전에는 지금 미국이 중국을 보듯이 일본이 한국을 봤어요. 그때 일본 경제 규모가 한국의 20배였습니다. 지금은 3배 차이로 좁혀졌죠. 격차는 갈수록 좁혀질 겁니다. 특히 일본은 첨단산업에서 한국에 밀리고 있습니다. 40년 전에는 반도체 세계 1위가 일본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어요. 디스플레이, 5G,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모두 한국이 세계 1위죠. 4차산업도 한국이 일본을 앞서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첨단산업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일본의 적반하장”

그는 이 대목에서 “일본은 참 부도덕한 나라”라고 일갈했다. 

“미국은 중국에 밥을 줬다가 이제 못 주겠다는 거니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저렇게 크도록 밥을 준 건 한국입니다. 36년간 식민 지배는 말할 것도 없고, 6·25전쟁으로 우리나라가 폭삭할 때 일본경제는 팍 일어났습니다. 국교 정상화 이후 54년간 일본에 퍼준 한국의 무역적자가 6000억 달러입니다. 지난해 한 해만 해도 250억 달러예요. 그렇게 희생하면서 일본의 성장을 뒷바라지한 한국에 보복한다? 한마디로 적반하장이에요.” 

- 그래도 한국 경제에는 파장이 있지 않겠습니까? 

“전화위복입니다. 반도체 핵심 기술은 6개월 이내에 국산화하거나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해결될 겁니다. 반도체 생산에 일시적인 차질을 빚을 수가 있습니다만, 우리에겐 더 좋습니다. 반도체 생산이 10% 줄면 반도체 가격은 20% 오르고, 반도체 생산이 30% 줄면 반도체 가격은 50% 올라요. 그러면 한국의 반도체 수입은 더 늘고 그 피해는 반도체 수요, 즉 세계 모든 고객이 봅니다.” 

- 미국과 중국의 IT(정보기술) 기업이 피해를 보겠죠. 

“그러면 (미·중 기업이) 일본에 항의하게 될 겁니다. 소재·부품·장비산업 국산화가 문제인데, 시간이 걸릴 거예요. 소재·부품·장비산업 국산화는 1990년대부터 정부가 역점을 둬왔던 사안이에요. 다만 결정적 계기가 없었어요. 지금은 타의에 의해 안 할 수 없게 됐어요. 처음에는 우리 기술이 떨어지니 적자 생산이 불가피합니다. 정부가 자립할 때까지 지원해야 해요. 일시 불편은 있지만 대일적자에서 벗어날 기회입니다. 신규 투자 수요도 만들 수 있어요.” 

- 양국 간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한국에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건 아베 총리 같은 정치인들이지 일본 국민이 아니에요. 일본 국민과 아베 총리를 분리해야죠. 또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단은 존중해야 하니 보상은 100% 우리 정부가 해야 합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일본에 손 벌리지 말고요. 대신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약속해야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돼요”

문재인 대통령이 4월 3일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열린 경제계 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이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4월 3일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열린 경제계 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이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청와대 제공]

- 내년에 1%대 성장률이 현실화할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한국이 장기불황에 들어섰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장기불황이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장기불황은 현재 경제적 어려움을 경기순환의 한 국면으로 이해하는 개념이에요. 어느 시점에 호황으로 돌아선다는 점을 내포하는 의미죠. 현재 한국의 저성장은 우리 경제가 성숙단계에 진입함에 따른 구조적 현상입니다. 밑으로 안 내려가면 다행입니다. 어느 면에서는 장기불황보다 더 안 좋게 경제를 보는 셈이지요. 저성장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 한국 경제 저성장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라고 봅니까? 

“크게 보아 3가지입니다. 수출의 추세적 감소가 결정적 원인이에요. 또 급격한 저출산의 영향이 큽니다. 마지막으로 임금과 집값 등 고비용사회가 도래했다는 데 원인이 있습니다. 성장률이 더 올라가려야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노화 단계에 들어섰는데 불로초 먹고 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면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양질의 저성장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저성장이되 실업이 적고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가 완화되는 저성장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악성 저성장으로 가고 있어요. 저성장이면서 일자리는 부족하고 양극화는 심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일자리가 있고 불평등이 완화된다면 성장을 안 해도 좋은 나라겠죠. 

“그게 선진국입니다.” 

10월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9월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9월 수출액은 447억1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1.7% 줄었다.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12월(-1.7%) 마이너스 전환 이후 10개월째 감소했다. 

- 수출 대기업과 낙수효과에 의존한 한국형 성장모델이 효력을 다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출 증가로 대기업이 돈을 벌면 국내투자, 고용증대, 가계소득 증대 등 선순환으로 이어졌어요. 지금은 수출이 줄면서 저성장, 투자 감소, 가계소득 감소로 이어집니다. 이제 우리 경제의 대안은 내수밖에 없습니다.” 

- 내수만으로는 힘에 부치니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건 모르는 소리입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앞으로 수출 증가는 기대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돼요. 답답하지만 내수에 의해 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must’입니다. 세계 모든 선진국 경제는 내수 성장입니다. 수출 주도 성장은 중국을 포함해 후진국뿐이에요. 내수로 성장하는 선진국에서는 3% 이상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 한국 경제의 최대치도 3%다? 

“그렇죠. 내수로 성장하려면 가계소득을 늘려야 해요. 기업이 투자를 안 하니 가계소득이 늘 수가 없어요. 이것이 지금 당면한 핵심 문제입니다. 대기업이 내수 보고 투자하겠습니까? 해외에 투자하거나 유보해 쌓잖아요. 그러니 정부가 나서서 가계소득을 늘려주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소득주도성장은 기업의 역할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기업이 80%밖에 못하니 나머지 20%는 정부가 하겠다는 겁니다.” 

- 문재인 정부에는 소득주도성장만 있고 기업 활동 활성화를 위한 대책이 부재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현 정부가 투자와 생산성 향상에 대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평가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의 방향은 옳고 성과도 있었어요.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2.7%입니다. 5.5% 증가한 정부 지출 덕입니다. 국민소득 중 가계소득과 노동소득 비중이 계속 감소해오다가 지난해에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소득주도성장은 반쪽 성장정책입니다. 공급 쪽 성장정책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간 정부는 이 부분에 소홀했어요. 소득주도성장과 공급 쪽 투자 증진 정책이 같이 가야 합니다. 혁신성장, 특히 4차산업 성장에 미래의 명운을 걸면서 친서민, 친기업, 친시장 정책을 펴야 해요.”


“타협 않고 끝까지 그 길로만…”

2002년 4월 1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박승 한국은행 총재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동아DB]

2002년 4월 1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박승 한국은행 총재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동아DB]

- 문 대통령에게 평소 실용주의를 말씀드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이 그런 길로 잘 가고 있다고 보나요? 

“경제정책이 가야 할 길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내수 성장을 위한 가계소득 증대, 또 하나는 양극화 해소입니다. 정부가 두 과제에 대처하는 방향은 옳다고 봅니다. 일부에서 ‘돈 갖고 퍼주기 한다’ 비판하던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추진 방법에 문제가 있어요. 너무 원리주의적이고 실용성이 부족합니다.” 

- 원리주의적이라면…. 

“타협 않고 끝까지 그 길로만 가야 한다는 거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생적 문제의식 상인적 현실감각’을 말했습니다. 내가 주장해온 중도적 사관의 핵심이 그겁니다. 현 정부의 정책은, 비단 경제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서생적 문제의식이 훌륭해요. 그러나 상인적 현실감각이 부족합니다. 민심이 어떤지, 시장이 어떤지, 국민의 불편은 없는지를 봐야 해요. 방향이 있다 하더라도 시장법칙에 어긋난다면 조정해야죠. 또 민심에 맞춰서도 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실용주의예요. 그게 부족합니다. 그간 최저임금 문제라든지 주52시간 근로제 등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다만 근래 와서는 대통령부터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봐요.” 

-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추려 노력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삼성도 찾고 기업인도 만나고. 또 시장 민심을 보려고 하고 있죠.” 

9월 26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1분기 임금 근로 일자리 동향’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제조업 일자리는 2만 개 줄었다. 다만 보건·사회복지 일자리는 17만3000개 늘었다. 박 전 총재의 진단은 이렇다. 

“제조업 일자리가 줄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다만 수출 증가를 기대할 수 없듯 제조업 고용 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워요. 또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 나서는 것이 주가 될 수는 없어요. 서비스업을 통해 고용을 늘려야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노무현 정부 때 노인요양시설을 만들었어요. 그때 그걸 안 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자식들이 다 부양을 못합니다. 또 요양원이 전국에 수천 개입니다. 한 곳당 20명의 고용을 흡수해요. 요양시설에서의 고용 흡수가 제조업 전체보다 많아요. 제조업은 자꾸 기계화되니 고용을 흡수할 수가 없지요.” 

그는 이 대목에서 ‘고부가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교통, 관광, 교육, 의료 분야 등 소득이 높아질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산업을 키워야 해요. 이에 더해 4차산업을 집중 개발해야죠.”


“세계경제포럼에서 꼴찌”

- 제조업 경쟁력 약화는 구조조정 이슈와 맞물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돼 갈등의 첨예한 전장이 생길 텐데요. 

“그건 어쩔 도리가 없죠. 휴대전화가 나오면서 카메라가 다 죽었잖아요. 혁신이 불가피하다 보니 제조업에서는 고용이 늘 수가 없어요. 새로운 혁신은 다 노동절약형입니다.” 

-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의 반발을 무릅쓰고서라도 노동유연성 확보 등 노동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정부는 노동 복지를 대폭 확대하는 대신 노조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개혁에 협조해야 합니다. 노조가 노동유연성 문제나 직무급제에서 양보해 성장을 뒷받침해야 해요. 더군다나 현 정부가 진보 정부니까 협력관계가 조성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노조가 이에 응하질 않고 있죠. 지금 노조 조직률이 10%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기득권 세력화했어요.” 

-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으로 조직화돼 있으니까요. 

“고임금·정규직 중심으로 똘똘 뭉쳐 기득권 세력화해 우리 국가·사회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합니다. 엊그저께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나온 국가경쟁력 순위를 보니 노사 협력에 있어 한국이 130개국 중 130등을 했더라고요. 꼴찌예요. 2003년에 독일 중도좌파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 브라질의 좌파 노동자당 룰라 대통령이 노동 복지를 확대하는 대신 노조 기득권을 단절하고 노동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성장과 고용 증대에 좋은 성과를 냈어요. 모두 좌파 정당에서 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개혁이 대단히 미흡해요. 특히 일부 노조의 지나친 기득권과 아집을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조직화된 소수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정권의 지지 기반이라고 보니 선뜻 손을 못 대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만 한다면 개혁을 못 하죠. 노조는 반대하더라도 국민은 지지할 것 아닙니까?” 

- 남북 간 경제협력이 내수를 키울 방책이라 보나요? 

“남북경협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한국 저성장 국면에서 하나 남은 마지막 도약 기회라고 봐요. 지금 저성장의 원인이 아까 말했듯 3가지(투자 수요 부족, 저출산, 고비용 사회)입니다. 남북경협은 3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책입니다. 우리가 지금 돈은 많은데 투자할 데가 없는 것 아닙니까. 북한에는 무한한 투자 수요가 있습니다. 저출산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죠. 고비용 문제도 풀립니다. 북한의 인건비는 남한의 20분의 1밖에 안 됩니다. 땅값은 거저나 마찬가지고.” 

- 일종의 마스터키라고 보시는 거네요. 

“그렇죠. 하나면 다 열리는 마스터키죠. 다만 북한이 호응할 것이냐가 문제죠.” 

- 정치적인 이슈다 보니까요. 

“북한이 비핵화 문제에 적극 협력을 못 하는 이유는 체제 보장 때문입니다. 남북경협이 이뤄져서 남한의 기술과 자본으로 북한에 철도와 도로를 놓고 공장을 세우면 남한한테 먹힌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북한은 핵을 끝까지 안 놓으려 하는 거죠. 그렇다고 남북 간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북한이 재래식 폭탄 하나만 서울에 던져놓으면 한국은 풍비박산(風飛雹散)납니다. 어떻게든 평화체제를 구현해 북한을 개방시켜야 해요.”


“금리 1.25%가 마지노선”

- 일각에서는 규제가 많아 혁신성장이 더디다고 합니다. 

“주산 유단자들의 직업을 보호하기 위해 컴퓨터 출원을 막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 현상이 우리 사회 도처에 있습니다. 규제는 구질서를 지탱해온 규범입니다. 그걸 없애려 하니 반대하는 거예요. 의사, 약사, 변호사, 공직자, 기업 심지어 택시기사 할 것 없이 각 분야에 낡은 규제가 깔려 있습니다. 나는 정부와 정치권에 다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기득권의 벽을 넘지 못하는 정부도 문제고, 국회에 계류된 혁신을 위한 법률에 손대지 않고 있는 국회도 문제죠.” 

- 표 계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크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0월 16일 본 회의를 열고 10월 기준 금리를 역대 최저인 연 1.25%로 인하했다. 지난 7월 금리를 인하한 지 석 달 만이다. 이에 대해 박 전 총재는 “더 이상 내려선 안 된다”고 신중론을 폈다. 

- 1.25%가 마지노선이라고 보시나요? 

“그렇죠. 신중해야 해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과연 금리를 내렸을 때 투자가 증가하겠느냐는 것이죠. 기업이 자금을 쌓아놓고도 투자할 데가 없어 투자를 안 합니다. 금리를 인하한다고 투자가 늘어나는 효과는 대단히 제한적일 겁니다. 오히려 금리 인하가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고 자금의 해외 이탈을 유발하는 부작용으로 번질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지금 상황에서는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을 써야 합니다. 재정에서 돈을 풀면 직접 지출하는 데 쓰지요. 정부가 사람한테 돈을 주거나, 직접 투자를 하면 유효수요로 나타날 테니 말입니다. 통화정책은 가급적 자제하고 재정 쪽에서 나서주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 야당에서는 ‘재정중독성장’ 아니냐는 말을 합니다. 국가채무 증가를 우려하기도 하고요. 

“재정 확대는 내수 성장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필요합니다. 국제기구에서도 권고하고 있어요.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는, 물론 좋은 충고라고 봅니다만 한국은 아직 걱정할 단계가 아닙니다. 2020년에 우리나라 부채 비율이 39%, 2023년에 46%가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은 80%고 일본은 250% 수준이에요. 유의해야겠지만 경제가 어려울 때 재정을 조금 풀어 쓰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서민주택건설 기여금 경쟁입찰제”

박 전 총재는 대통령경제수석으로 일하던 1988년, 분당·일산·평촌 등 5대 신도시 계획을 입안했다. 이른바 1기 신도시다. 이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신도시 건설 집행을 맡으라는 특명을 내리며 박 전 총재를 건설부 장관에 임명했다. 부동산 정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셈. 그는 “부동산 문제야말로 한국이 ‘고소득 저생활국’이 된 근본 원인”이라며 “조세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산이 이재(理財) 수단이 되는 길을 차단해야 합니다. 보유세와 양도소득세를 강화해야 해요. 선진국 보유세는 시가의 1~1.5%입니다. 한국은 0.2%예요. 선진국 수준에 맞추려면 적어도 보유세를 5~7배 올려야 해요. 국민들 깜짝 놀라겠죠. 단계별로 올려 5~10년 뒤에는 선진국에 준하는 보유과세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에 곁들여 양도소득세도 강화하는 조세정책만이 부동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겁니다.” 

- 야권이나 일부 전문가들은 공급이 부족해 부동산 값이 폭등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거 안 돼요. 내가 5대 신도시를 입안할 때는 그 말이 맞았어요. 그땐 주택보급률이 56%밖에 안됐습니다. 지금은 100%가 넘습니다. 가구 수보다 집이 더 많아요.” 

- 정부가 내놓은 민간택지에 대한 분양가상한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십니까? 

“부정적으로 봅니다. 주택 건설에는 초과이익이 수반됩니다. 문제는 이 초과이익을 누가 갖느냐에 있어요. 현 상황에서는 건설업자와 지주가 갖습니다. 그런데 분양가상한제를 해놓으면 입주 당첨자가 초과이익을 갖게 돼요. 당첨만 되면 로또복권이 되는 셈이니 투기가 더 과열될 겁니다. 차라리 지주나 건설업자가 먹으면 공급이라도 늘어나는데, 당첨자가 먹으면 불평등만 키우게 돼 최악의 선택입니다.” 

이 대목에서 박 전 총재는 자신이 구상한 정책 대안을 소개했다. 

“분양가상한제와 함께 ‘서민주택건설 기여금 경쟁입찰제’를 실시해야 합니다. 한때 채권입찰제가 있었어요.(*공공택지에서 전용면적 25.7평을 초과하는 아파트를 분양받는 경우 서민 주거안정 등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국민주택채권을 매입토록 한 것. 매입액을 많이 써낸 사람에게 분양 우선권을 주는 방식) 이처럼 아파트 추첨할 때 서민들 집 짓는 돈을 입찰에 부치는 거예요. 그러면 장기적으로 과열 수요도 억제하고 아파트 가격도 안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 사회 원로로서 작금의 이념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보수와 진보는 자동차의 두 바퀴처럼 보완관계로서 역사 발전을 끌어가는 두 주체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증오와 대결의 관계로 가고 있어요. 국토 분단에서 오는 아픈 유산입니다. 정부·여당은 좀 더 포용적인 협치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야당도 무조건 반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대처하지 말고 협치에 응했으면 합니다.” 

인터뷰 직후 평창동 언덕배기에서 박 전 총재와 헤어졌다. 그뒤 그는 길을 걷다 말고 과일 트럭 앞에 멈춰 과일 몇 개를 샀다. 그러고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가던 길을 갔다. 박 전 총재는 지난 3월 모교인 이리공고에 장학금 7억 원을 기부했다. 사회 원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가 빚어낸 몇 가지 장면이 복합적으로 웅변하는 듯도 하다.




신동아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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