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실천 강조한 남명 유학 현대적 가치 알리는 곳

한국선비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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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23-07-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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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명 조식 사상 연구와 교육에 전념

    • 실천 강조한 한국 선비 정신 敬義

    • ESG 경영, 공직 청렴과도 일맥상통

    6월 22~23일 이틀간 ‘청렴 선비문화 체험교육’을 위해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찾은 통영시청 공무원들. [홍중식 기자]

    6월 22~23일 이틀간 ‘청렴 선비문화 체험교육’을 위해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찾은 통영시청 공무원들. [홍중식 기자]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덕천강. [홍중식 기자]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덕천강. [홍중식 기자]

    두류산 두 갈래 물길을 처음 와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다.
    얘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싶구나.

    조선시대 유학자 남명 조식이 남긴 시조다. 시조의 배경은 경남 산청군 시천면이다. 두류산은 지금의 지리산이다. 시천면에서는 어디서든 고개를 들면 지리산 자락이 보인다. 지리산의 산세가 동네를 끌어안은 모양새다. 시천면으로 들어오는 도로 옆에는 강이 흐른다. 물이 맑아 산이 비칠 정도다. 지리산의 두 갈래 물길, 시천천과 삼장천이 합쳐지는 덕천강이다. 덕천강 자락 한구석에 산천재라는 작은 집이 하나 있다. 조식이 환갑이 넘어 시천면에 지은 집이다. 그는 말년에 찾은 무릉도원에서 제자를 키워냈다.

    산천재가 있는 자리에서 도로를 하나 건너면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하 선비문화연구원)이 보인다. 최구식 선비문화연구원장은 “나는 이곳을 산천재 제2캠퍼스라고 부른다”며 “산천재가 조선시대 조식의 가르침을 전하던 곳이라면, 현대에는 선비문화연구원이 조식의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을 한다”고 소개했다.

    선비문화연구원은 교육 외에도 남명의 실천 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선비문화연구원 관계자는 “실천 유학을 알리고, 이 사상을 현대에 접목하기 위해 학술대회, 국제회의 개최 등 다방면으로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선비문화연구원의 입구에는 “학문은 실천을 통하여 그 빛을 발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선비문화연구원 관계자는 “조식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비문화연구원 측의 설명에 따르면 조식은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경은 세상의 옳고 그름을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의는 공부한 내용을 실천하는 자세다. 당대 철학자들은 경에 집중했다. 세상의 원리와 옳고 그름에 대해 탐구했다. 조식은 공부만큼이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공직자, 기업가도 경의 사상에 관심 커

    남명기념관 앞에는 조식이 명종이 내린 벼슬을 거절하며 쓴 상소 ‘단성현감사직소’ 전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홍중식 기자]

    남명기념관 앞에는 조식이 명종이 내린 벼슬을 거절하며 쓴 상소 ‘단성현감사직소’ 전문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홍중식 기자]

    조식은 목숨을 내놓고 왕에게 진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활동하던 16세기는 선비들의 암흑기였다. 연산군 시절 시작된 사화로 수많은 선비가 목숨을 잃었다. 조식의 친구인 이림, 송인수도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러던 중 명종이 조식에게 단성 현감 벼슬을 내렸다. 조식은 벼슬을 거절하며 ‘단성현감사직소’(이하 단성소)를 올린다.



    거절은 상소의 명분일 뿐이었다. 조식은 상소 한줄 한줄에 왕실과 정국에 대한 비판을 눌러 담았다. 특히 문정왕후를 두고 “한낱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며 외척의 정치참여를 통렬히 지적했다. 명종은 이에 크게 분노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조식을 벌하진 못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은 단성소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정성스럽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언사(言辭)에 드러났다. (내용이) 강직하여 (임금에게 진언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조식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어진 사람이다.”

    상소의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자 조식은 유명 인사가 됐다. 조식에게 학문을 배우러 수많은 선비가 산천재를 찾았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길러냈다. 스승의 강직함과 실천 정신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식의 제자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홍의장군 곽재우, 경상 지역 의병 도대장 김면, 그리고 광해군 집권기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이 조식의 제자들이다.

    최구식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 [홍중식 기자]

    최구식 한국선비문화연구원장. [홍중식 기자]

    최 원장은 “조선시대 경의의 실천이 의병이라면 지금은 사회적 책임이 경의의 실천이라 볼 수 있다”며 “청렴한 공직사회와 기업의 ESG 경영도 경의 실천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마다 선비문화연구원은 선비문화교육을 100회 이상 시행하고 있다. 조식의 경의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현대인의 삶에 접목하는 과정이다. 학생들은 물론 공직자, 기업가들도 이곳을 찾는다. 지난해에는 중소기업진흥공단과 K-기업가정신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400년 넘어도 향 잃지 않은 조식 가르침

    6월 22~23일에는 통영시청 공무원 40여 명이 선비문화연구원을 찾았다. 이들과 함께 이틀을 선비문화연구원에 머물며 ‘청렴 선비문화 체험교육’을 받았다. 첫날 강의에서는 조식의 생애와 그가 남긴 글귀로 경의 사상을 배웠다. 조식이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 등 다양한 내용이 강단에 올랐다. 편지에는 조식이 얼마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가 드러나 있다. 조식은 이황에게 “요즘 선비들은 빗질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하의 이치를 논합니다”라며 “원로인 이황이 이들을 꾸짖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이야기가 한 시간 넘게 이어져도 누구 하나 집중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만큼 강의는 흥미로웠다. 강의는 최 원장이 직접 했다. 그는 “매번 첫 강의는 직접 하고 있다”며 “강의 자료를 매번 새로 준비하는 노력도 있지만, 조식이라는 인물 자체가 현대인의 흥미를 끈다”고 설명했다. 잘못됐다면 위아래를 막론하고 거침없이 지적하는 모습에 감화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 강의가 끝난 뒤 식사시간이 되자 공무원 몇 명이 최 원장을 둘러쌌다. 나이는 많아야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들은 뜻깊은 강의였다며 최 원장에게 조식의 삶에 대해 몇 가지를 묻고 흩어졌다. 학교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남명 조식이 환갑에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서당 산천재. [홍중식 기자]

    남명 조식이 환갑에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은 서당 산천재. [홍중식 기자]

    강의가 끝난 뒤에는 조식의 묘, 남명기념관, 산천재를 직접 찾았다. 남명기념관에는 ‘경의검’이라는 이름의 칼과 ‘성성자’라는 방울이 있었다. 검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내명자경 외단자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의미다. 김경식 선비문화원 선임연구원은 “조식의 별명이 ‘칼 찬 선비’”라며 “검에 새겨진 말대로 평생 자신을 갈고닦았고, 방울인 성성자는 항상 자신의 마음이 깨어 있도록 단속하는 도구”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칼 찬 선비라는 별명에는 조식이 병법에도 관심을 뒀다는 의미가 있다”며 “조식은 성리학 외에도 노장사상, 의학, 병법 등 백성의 삶을 낫게 할 방안이라면 공부하던 학자”라고 덧붙였다.

    조식이 산천재 앞 마당에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 [홍중식 기자]

    조식이 산천재 앞 마당에 심은 매화나무 ‘남명매’. [홍중식 기자]

    남명기념관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산천재가 보인다. 산천재의 규모는 생각보다 작았다. 방 두 칸에 행랑채가 하나 딸려 있다. 산천재 마당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이름은 ‘남명매’. 조식이 산천재를 짓고 심은 나무다. 4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김 연구원은 “400년이 넘은 나무지만 지금도 향이 좋은 매화를 피운다”며 “조식의 가르침도 남명매가 피운 매화 향처럼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세준 기자

    박세준 기자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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