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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천, 겹눈으로 보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⑤

  •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입력2023-08-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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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진보 일각 ‘반미-친중’ 배경

    • 역사관·외교관 재정립 필요성

    • 박정희 경제학 vs 민족경제론

    •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 너머로

    • 韓도 ‘제국의 눈’ 가질 때 됐다

    • 대만해협, 韓에도 ‘핵심 이익’

    지난해 8월 24일 박진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함께 건배 제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8월 24일 박진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함께 건배 제의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본격화한다. 진보정당은 두 종류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사민당) 계열과 공산당 계열이다. 공산당 계열의 경우 프랑스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일본 공산당이 대표적이다.

    공산당 계열과 사민당 계열은 두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 경제 노선이 달랐다. 공산당 계열은 ‘소련식’ 경제모델을 추구했다. 소련식 경제모델은 ①상품-시장의 폐지 ②사적 소유 부정 ③기업의 이윤 추구 부정 ④국유화 ⑤계획경제를 추구했다. 사민당 계열은 ①상품-시장의 긍정 ②사적 소유 존중 ③기업의 이윤 추구 인정 ④혼합경제 활용 ⑤전면적 계획경제를 반대했다.

    둘째, 외교 노선이 달랐다. 공산당 계열은 ‘친소-반미 노선’이었다. 소련에 우호적이고, 미국에 비판적이었다. 사민당 계열은 ‘친미-반소 노선’이었다. 미국에 우호적이고, 소련에 비판적이었다.

    현재 유럽 정치에서 공산당 계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89년 동독의 붕괴, 1990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 1991년 소련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공산당들도 이후 사라졌다.

    한국 진보가 사회주의를 수용한 계기는 1980년 광주의 충격 때문이었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은 한국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에 있기에, 워싱턴의 묵인 없이 전두환의 광주 학살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미국 대사관 점거 시위가 벌어진 이유다. 1980년대 한국 진보세력 일부는 ‘소련식-북한식’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 일부에서 ‘반미-친중적’ 생각이 강한 이유다.



    국가 운영의 3大 메가 어젠다

    유럽에서 공산당과 사민당의 차이점은 경제 노선과 외교 노선이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진보 정치를 현대화하려면 경제 노선과 외교 노선을 재정립해야 한다. 경제 노선의 경우, ‘투자촉진형 복지국가’와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을 선명히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을 소개하면서 다룬 내용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른 한 축은 외교 노선의 혁신이다. 두 가지 작업이 수반돼야 한다. 첫째, 한국이 겪었던 근현대사를 ‘세계사’의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둘째, 현재 동북아시아와 세계 질서에 대한 ‘국제주의적’ 인식이 필요하다. 전자는 역사관의 재정립이다. 후자는 외교관의 재정립이다. 둘은 연동돼 있다. 역사 인식을 근간으로 외교에 대한 생각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능한 진보의 핵심은 유능한 국가 운영이다. 국가 운영은 3대 메가 어젠다와의 만남을 뜻한다. ①외교/안보 ②경제/성장 ③정치/사회 어젠다다.
    1945년 광복 이후 냉전기에 국한해서,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각기 ①외교/안보 ②경제/성장 ③정치/사회 어젠다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이를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외교/안보 어젠다다. 한국 보수는 반북+한미동맹을 핵심으로 삼았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소련의 냉전적 대결 구조와 6·25전쟁 경험이 작용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을 추진했고, 1970년대 초반에는 방위산업의 연장에서 중화학공업을 파격 지원했다.

    한국 진보의 입장은 반(反)외세 민족주의였다. 물론 진보 내부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한미동맹에 우호적이고, 1965년 한일협정을 찬성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세력 다수 사이에는 반외세 민족주의 정서가 강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반대하고,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반대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둘째, 경제/성장 어젠다다. 한국 보수의 태도는 ‘박정희 경제학’으로 집약된다. 박정희 경제학은 대기업+수출+낙수효과+임금 억제+노동 3권 탄압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한국 진보의 입장은 ‘민족경제론’으로 집약된다. 박정희 경제학과 정반대였다. 중소기업+내수+분수효과+임금 인상+노동 3권 존중을 표방했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에서 주류 입장은 외려 민족경제론이었다. 박정희 경제학이 오히려 ‘이단적’ 경제정책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 경제학이 한국 경제의 성공으로 연결됐다.

    셋째, 정치/사회 어젠다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 첨예한 대립 전선이 형성됐다. 한국 보수는 민주주의 시기 상조+권위주의 불가피론을 폈다. 1972년 10월 유신과 군부독재가 대표적이다. 한국 진보의 입장은 달랐다. 독재 타도+민주 쟁취를 내걸었다. 1970년대 초반 유신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한국 근현대사 150년 5大 사건

    한국인의 역사관과 외교관은 서로 연결돼 있다. 역사관의 재정립이 중요한 이유다. 한국의 근현대사 1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5가지 사건을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①조선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 지배 ②3·1운동과 민주공화정의 수용 ③남북 분단 ④기적의 경제성장 ⑤정권교체가 가능한 민주화가 해당할 것이다.

    5가지 중대 사건에 대해 그간 국내적 요인으로 보거나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예컨대,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일본 민족이 침략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용감한 조선 민중이’ 떨쳐 일어났기 때문에 발생했다. 한반도 분단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개입 때문이거나 혹은 북한의 남침 야욕 때문이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영도력 때문이거나, 전태일 열사 같은 노동자들이 피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화 세력의 영웅적인 투쟁 덕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관점은 100% 틀렸다고 볼 수 없지만, 매우 편협한 해석이다.

    먼저 조선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살펴보자. 그간의 민족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일본 민족’이 ‘조선 민족’을 침략했기 때문에 쌍방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를 통틀어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는 두 나라뿐이다. 일본과 태국이다. 당시의 세계정세는 식민지가 된 것이 예외가 아니라, 되레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경우가 예외였다. 시야를 더 넓혀보면, 아시아 국가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남미, 아프리카, 중동을 포함한 제3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그랬다. 조선의 몰락과 일본의 식민 지배 과정을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입체적인 역사 인식이 가능해지고, 오늘날 외교에서 실천적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한국이 이룩한 기적의 경제성장 역시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세계 경제사를 통틀어 5% 이상의 고성장을 30년 이상 달성한 나라는 매우 예외적이다. [표-2]에 있는 11개의 나라가 이에 해당한다. 흥미롭게도 11개의 나라는 ‘두 덩어리’로 구분된다. 하나는 자원 부국이다. ①적도 기니 ②오만 ③리비아 ⑤보츠와나 ⑩사우디아라비아가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발전 국가들이다. ④대한민국 ⑥타이완 ⑦중국 ⑧싱가포르 ⑨일본 ⑪홍콩이 해당한다.

    이 중에서 도시국가에 해당하는 싱가포르와 홍콩을 논외로 하면, 한국·타이완·중국·일본은 다시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토지개혁을 했다. 둘째, 모두 친미 국가였다. 셋째, ‘지정학적으로’ 소련 혹은 공산주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는 최전선에 있었다.

    실제로는 토지개혁, 친미 국가, 지정학적 위치는 서로 연결돼 작동했다. 일본과 한국, 대만은 모두 ‘공산화를 막기 위해’ 토지개혁이 실시됐다. 중국은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이후 국유화를 하고,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다시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중국이 친미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일부 독자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추가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다. 중국은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서 미국과 붙게 됐다. 미국과 적대 관계였다. 중국은 1969년 소련과 국경 분쟁을 겪는다. 당시 소련은 중국에 핵폭탄 투하를 실제로 검토했다. 이후 미국 국무부의 헨리 키신저가 개입해 소련의 핵폭탄 투하를 막아냈다. 1972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이때부터 중국의 외교 노선은 ‘친미-반소 노선’이 된다.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은 이유는 ‘소련 포위’를 위해서였다. 과거 운동권 용어로 표현하면, ‘반소 통일전선’의 일환이었다.

    제국·지정학·국익의 관점으로

    외교 노선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세 가지 관점의 전환이 중요하다. 제국의 관점, 지정학의 관점, 국익의 관점이다. 셋은 서로 연결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정은 왜 일본과 한국의 토지개혁을 지원했을까. 그 이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미국 처지에서 중국과 북한 역시 소련의 세력권 국가였다. 중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을까.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중국 처지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력권 국가에 불과했다.

    국가의 본질적 특징은 ‘폭력의 독점’이다.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평화의 제공’이다. 국가는 폭력 독점을 통해 평화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는 세계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개념은 세력 균형의 관점이다. 일본은 외교 선진국이고, 한국은 외교 후진국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제국의 눈’으로 세계를 인식하는지다. 한국의 덩치는 과거와 달리 글로벌 중추국가가 됐다. 한국 역시 제국의 눈으로 세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대만해협에 대해 ‘핵심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국제사회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은 반대한다. 한국은 에너지, 식량, 교역 등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상당 부분이 대만해협을 통해 이뤄진다. 대만해협을 중국이 지배하게 된다면, 사실상 한국은 중국의 속국(屬國)이 될 것이다. 에너지, 식량, 교역의 접근권이 중국에 의해 좌지우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동북아 국제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다. 한국은 전후(戰後)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다. 세력 균형, 지정학, 국익의 관점에서 대만해협 문제와 중국의 부상에 대해 올바른 외교 노선을 정립해야만 한다.

    [+영상] 싱하이밍에 한방 먹은 민주당, 중국 어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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