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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지대, 1955년 자유중도연합 꿈 이을까

[한지원의 잠망경]

  • 한지원 정치경제평론가·‘대통령의 숙제’ 저자

    입력2023-08-10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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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번영의 주춧돌, 농지개혁

    • 우리나라가 필리핀과 달랐던 이유

    농지개혁관련 신문 보도. [동아DB]

    농지개혁관련 신문 보도. [동아DB]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국회가 제대로 돌아간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대통령제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고, 그 법을 만드는 곳은 국회다. 입법 없는 행정은 소극적이면 현상 유지, 적극적이면 권력남용이 된다.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1년 넘게 각종 의혹만 쏟아내며 아예 장외에 진지를 꾸렸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윤심’만 쫓으니, 존재감조차 없다.

    오작동 한국 정치와 위기의 대한민국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대한민국이 당장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것은 아니지만 30년 후에, 50년 후에 한민족을 절멸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 문제가 바로 우리 곁에서 생기고 있다. 당장 2020년 이후 대중(對中) 수출 감소로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있다. 중국의 리오프닝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일시적 현상이 아니란 의미다. 수출 주도 경제에서 장기간의 무역적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1997년 국가 부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인구 붕괴 문제는 더 심각하다. 10년 전 인구 추계에 따르면 2022년 출생아는 45만 명이었다. 하지만 현재 출생아는 27만 명이다. 예상보다 40%가 적다. 10년 전 예상보다 20년 더 이른 2021년에 인구 고점을 이미 지나쳤다. 노동층이 부양해야 할 노령층이 예상보다 빠르게 증가한다. 세대 간 분배와 관련된 모든 제도를 빨리 뜯어고쳐야 한다. 개혁하지 못하면 세대 간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2020년대 정치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이대로 몇 년을 어영부영 보내면 골든타임이 지나간다. 해결하고 싶어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 정책을 결정하고, 법 제도를 고치는 게 바로 정치의 소임이다. 현재 정치는 심각하게 오작동하고 있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우리나라 정치인이 해낸 가장 성공적 개혁을 살펴보며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2023년 현재 정치는 심각하게 오작동하고 있다. 사진은 국회 본회의장. [뉴스1]

    2023년 현재 정치는 심각하게 오작동하고 있다. 사진은 국회 본회의장. [뉴스1]

    뭐니 뭐니 해도 한국 현대사에서 최고로 성공한 개혁은 1950년 전후의 농지개혁이다. 지주·소작제에서는 소작료로 충분한 수입을 얻는 지주가 모험이 필요한 기업가가 될 이유가 없다. 또한 땅에 묶인 농민은 임금노동자로 변모하지 못한다. 힘을 잃지 않은 지주가 정부 정책에 관여하면 개혁 전반이 지지부진해진다. 자연(토지)에서 수입을 얻는 지주는 인간이 만드는 변화(제도)에 기본적으로 보수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로 생산하는 소작농 역시 현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화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가부장적 질서를 제한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산업화가 탄력을 받으려면 지주·소작제 개혁이 필수적이다. 한국은 이 개혁을 해냈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고소득 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다.



    특히 농지개혁의 속도가 중요했다. 세계적 경쟁이 가속화한 20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제 힘으로 현대적 나라를 세운 대한민국이다. 수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개혁에 성공한 서유럽 나라들과 처지가 달랐다. 빨리 성공해 일본처럼 되지 못하면 아프리카처럼 버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정부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서인 토지 소유제도를 흔드는 게 말처럼 쉬울 리 없었다. 세계적으로 봐도 남미,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토지개혁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유리한 조건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적절하게 이용한 정치가 있었다.

    근대식 자본국가로의 길

    조건부터 살펴보자. 우선 대지주 상당수가 일본인이던 까닭에 광복 이후 꽤 많은 토지가 적산(敵産)으로 정부 수중에 들어왔다. 정부의 매각 정책이 농지 시가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지주들의 힘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소작농의 나라를 표방한 북한이 무상몰수·무상분배 정책을 전격 실행했다. 막 정부가 들어선 한국에서도 농지개혁 열기가 대단했다. 정부가 이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한국도 소작농의 나라로 뒤집힐 수 있었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작동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어 반대자까지 설득하지 못하면 토지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글자 하나에도 엄청난 재산이 왔다 갔다 하는 이해관계가 첨예한 법이라서 그렇다. 누구 하나 작정하고 반대하기 시작하면,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폭발할 수도 있다.

    농지개혁 최전방에 선 사람은 죽산 조봉암이다. 이승만은 전향한 공산주의자의 상징이던 조봉암을 초대 내각의 농림부 장관에 발탁해 농지개혁 전권을 맡겼다. 조봉암은 지주 정당으로 불린 한국민주당(한민당)계 인사와 중도파 공무원을 모아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경작하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헌법 조항을 근거로 유상매입·유상분배 정책을 수립했다. 상한선을 넘어선 농지는 정부가 평균 수확량 기준으로 책정한 가격에 따라 매각하도록 했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이 이 토지를 할부로 구매해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반발이 없을 리 없었다. 제1당이던 한민당 계열 의원들의 방해가 극심했다. 그들은 갖가지 구실을 들어 법안 통과를 지연시켰다. 예상됐던 일이긴 했다. 한민당은 우파 지식인과 지주 세력이 주도했다. 이들 눈에 농지개혁법은 농민 지지를 얻어 자본주의를 철폐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책략이었을 뿐이다. 한민당 정치인들은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국회를 파행으로 만들 각오도 했다.

    실제 필리핀에서는 그렇게 했다. 1946년 독립 후, 미국은 토지개혁안을 필리핀 정부에 제안했지만, 지주들이 장악한 국회는 개혁 논의를 초장에 꺾어버렸다. 1950~60년대에는 농지개혁 공약으로 당선된 대통령들이 개혁법을 다시 제안했지만, 역시 지주들이 국회에서 꼼수를 부려 개혁을 무력화했다. 필리핀은 지금도 소수 대지주 가문이 경제를 주도한다. 극단적 농촌 빈곤 탓에 반군이 농촌을 기반으로 세를 키우기도 한다. 국민경제가 건실하게 성장하기 어렵다.

    한국이 필리핀과 다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인촌 김성수다. 그는 최고 부자였다. 또한 한국 최대 신문사의 설립자였고, 한민당(민국당)의 실질적 리더였다. 만약 그가 필리핀처럼 지주들을 모아 이권을 중심에 두고 실력 행사를 했다면, 농지개혁은 성공할 수 없었다.

    한민당 간부 중 농지개혁법에 찬성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더욱이 당시 한민당은 이승만과 결전을 벌이던 차였다. 정부 입법안이라면 좋든 싫든 모두 반대할 판이었다. 하지만 인촌은 1949년 4월 농지개혁법을 받아들이라고 당 간부회의에 지시했다. “농본국가에서 이탈해 근대산업의 종합적인 조기 건설을 위한 근대식 자본국가”로 전환하려면 지주들이 근대산업에 종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농지개혁법 입안자들의 제안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주들은 법안 통과 이전에 이미 농지를 헐값에 방매하고 있기도 했다. 인촌이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아서였다. 값 내려가기 전에 빨리 팔아버리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농지개혁법 자체는 조봉암이 만들었지만, 개혁법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인촌이었다.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그런데 어떻게 저 둘이 농지개혁법을 두고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조봉암은 반(反)공산주의자(소련과 북한에 대한 반대)로 전향은 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자 계보에 있었다. 김성수는 개항 이후 조선에서 가장 성공한 호남 지주였고, 반공 우파의 아이콘이었다.

    이승렬의 최근 연구(‘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에 따르면 김성수는 ‘지주’라는 단순한 계급적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개항 이후 중앙권력과 연계가 약했던 호남 지방에서 근대적 상업을 적극적으로 일으켜 부를 쌓았다. 즉 근대적 부르주아였다. 또한 지주-소작 관계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유학을 통해 서구 문명을 학습하고, 중앙학교·동아일보·경성방직 등 근대화를 이끌 수 있는 여러 기관을 만든 자유주의자였다.

    이승렬은 진취적 지주 계급이 앞장선 근대화가 한국적 근대 이행의 특징이며, 이 특징 덕에 광복 이후 예상 밖의 빠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봐도 광복 전후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급진파들은 혼돈만 부추긴 게 사실이다.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주관적으로 통일을 지향했지만, 격렬한 반탁운동으로 분단을 더 가속화했다. 급진적 공산주의자들은 주관적으로 노동해방을 지향했지만, 더 억압적인 국가를 만들어냈다. 한국이 1940~50년대를 어떻게든 비집고 나아간 것은 세계적 흐름을 읽으며 중도적 정책에 충실했던 김성수 같은 자유주의자 덕분이었다.

    1950년대 조봉암은 오늘날 식으로 구분하면 중도좌파 정도라 하겠다. 조선공산당 리더 중 한 명이었던 그는 1946년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입장서를 발표하며 공개적으로 전향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후 행보를 볼 때, 광복 전후로 공산당의 종파주의와 혁명론에 관해 근본적 회의를 느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일관되게 영국 노동당, 독일 사회민주당, 미국 민주당 정도의 지향과 정책을 이야기했다.

    1950년대는 세계적으로 진보의 시대였다. 고전적 자유주의를 현대화한 케인스주의 정책이 선진국 정부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노동조합과 연합한 진보 정당이 여당 또는 제1야당으로 활약했다. 조봉암은 이런 흐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국내 정치인이었다. 서중석의 연구에 따르면, 조봉암이 기초한 진보당 강령은 사회민주주의 내용이 정리돼 선언으로 발표된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주의인터내셔널대회를 참조한 것이었다.

    인촌과 죽산의 이념적 지향을 이렇게 보면, 농지개혁을 두고 의견이 일치한 까닭을 알 수 있다. 둘은 자유주의라는 현대를 창조한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져보면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고 볼 수도 있다. 둘은 전체주의나 독재를 견결하게 비판했고, 헌정과 법치의 중요성, 자본 축적의 필요성, 성장의 토대 확보를 위한 정부 주도 경제계획, 국민 계몽 등을 강조했다. 또한 저 둘은 1940∼50년대의 좌우익 급진파를 비판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조봉암은 북한식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좌익을 견제했고, 김성수는 토지개혁 자체를 거부하는 극우파를 견제했다. 농지개혁은 양쪽 극단을 통제할 수 있었던 덕분에 부족하게나마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둘은 1954년 말부터 야권 통합 정당을 구상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이 계기였다. 이승만 독재에 맞서기 위해 야권이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김성수는 조봉암으로 상징되는 진보 혁신 세력과 연대를 계획했다. 물론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장면·조병옥 등 강경 우파 지도자들은 김성수의 요청 탓에 잠자코 있긴 했지만, 속으로는 ‘빨갱이’와 당을 함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1955년 2월 18일 인촌이 병으로 사망했다. 나흘 뒤 죽산은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을) 따라갈 것”이라고 끝을 맺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성수가 임종 직전까지 조봉암에게 부탁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성수가 죽은 후 강경 우파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야권에는 없었다.

    그때 그랬다면…

    자유민주파로 불린 우파는 그해 9월 신익희를 대표로 해 조봉암을 배제하고 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대동단결파로 불린 좌파는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 결성에 나섰다. 당시 정치인들은 몰랐겠지만, 이 분열이 한국 정치의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

    국회에 지분이 없었던 진보당은 이승만의 탄압으로 해체됐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사법 살인의 피해자가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주당도 방식만 다르지 결국 참혹하게 무너졌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어정쩡한 이념과 부패 카르텔 속에서 몇 개월 만에 민심을 잃었다. 장준하 같은 재야 지식인마저 박정희 쿠데타를 지지할 정도였다. 민주당은 자유주의적 중도연합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을 대체한 또 다른 기득권 연합처럼 비쳤다. 조봉암과 통합하지 못한 후과라고 하겠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55년 체제’로 불리는 안정적 보수·진보 구도가 탄생했다. 전통적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던 자유당과 민주당이 사회당의 집권 가능성에 자극받아, 1955년 자유민주당으로 보수 대통합을 이뤘다. 그리고 보수 우위하에서 다양한 좌우익 급진파를 포용하는 정치 구도가 만들어졌다. 제1야당 자리를 차지한 사회당은 평화헌법을 지키는 수문장 노릇을 했다. 가끔씩 고개를 드는 군국주의 세력이나, 노동조합과 함께 과격한 투쟁을 벌인 공산주의 세력은 적절하게 통제됐다.

    김성수와 조봉암의 연대가 만약 성공했다면, 한국도 이와 비슷한 구도가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자유주의 중도연합 정당의 우위하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이 경쟁하는 체제 말이다. 법치를 확립하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시장 제도를 정비하며, 좌우익 급진파와 정치군인에게도 적절한 활동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부터 서구의 최신 흐름까지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1950년대 머릿속에 그린 한국의 정치는 지금 내가 상상하는 “그때 그랬다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자기 뿌리를 1955년 민주당에서 찾는다. 현 민주당은 자유주의 정치, 중도연합 정당을 꿈꿨던 김성수의 바람과는 차이가 큰 것 같다. 정의당이나 진보당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뿌리를 1955년 이후 만들어진 진보당에서 찾지만, 조봉암이 그린 미래의 정당과는 거리가 멀다. 단적인 예로 인촌과 죽산이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도약시킬 농지개혁을 성공시킨 것과 달리, 민주당과 정의당은 힘을 합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선거법 같은 정파적 법률만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민주당이 제 기능을 못 하면서 제3지대에 대한 관심이 최근 커지고 있다. 제3지대(세력)란 말의 원조가 실은 1950년대 초반의 조봉암이었다. 1955년으로 돌아가면, 김성수가 만들 정당에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함께하려고 했던 세력, 자유주의 중도연합을 위해 몸을 내던졌던 세력이 바로 제3지대다. 오늘날의 제3지대 역시 비슷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한지원의 잠망경’은 이번 호가 마지막회입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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