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에세이] 아버지의 그늘

  • 박명희 소설가

    입력2023-08-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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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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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吉祥寺)에 가면 삶의 고단함이 나도 모르게 내려놓아진다.

    비가 씻어낸 푸른 풀잎의 표정이 청신하고 하늘은 속절없이 푸르렀다. 숲 나뭇가지에 이는 바람이 코끝에 훅, 들어왔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나를 감쌌다.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을 길상사 지장전에 모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법정(法頂) 스님께서 친히 천도재를 올려주셨다.

    나는 지장전에 계신 부모님께 정성스럽게 절했다. 부모님이 극락정토에 가시게 해달라고, 아니, 이미 가 계실 것이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렇게 지장보살님을 부르면 부모님께서 정말 극락에서 나를 굽어보고 계실 것 같다.



    바닷물보다 짜디짰을 생

    아버지, 오늘은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고통받거나 기쁨 가운데 들떠 있는 나를 바라봤어요.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삶이었어요. 특별한 것도 잘난 것도 없지만, 아버지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은 해요.

    아버지는 병원에서 수술하고 병상에 누워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 생이 그런대로 성공한 거지?’ 저도 이 나이가 되니 그 말씀이 마음속에 닿아요. 물론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실 때 그렇게 쉽게 가실 줄 몰랐어요.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비교적 평온해 보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일찍 타계하셔서 불우했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신 아버지 세대에도 어김없이 찾아왔을 고난을 저희에게는 아버지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도 울고 싶을 때가 있고 누구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었겠지만 가족 일곱 명의 삶을 등에 진 가장의 이름으로 그렇게 버텨오신 당신의 세월이 오죽했겠어요. 그러나 당시 저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더러는 힘들고 더러는 바닷물보다 짜디짰을 아버지의 생은 그 누구보다 훌륭하셨어요.

    아버지가 떠나시고 나서 저와 어머니 동생은 매일매일 무덤을 향해 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고 딸이 효도할 기회조차 안 주시고 총총히 떠나신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고요. 어머니는 날마다 ‘그 좋은 남편을 보내고 살 수 없다’고 우셨죠. 막내 여동생도 아버지 따라가고 싶다고 하죠. 당시는 지옥이었어요.

    무덤에 가도 이미 아버지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천 개의 바람이 되고 이슬 안개가 돼 우리 주변에 떠다니시지요. 그 모든 것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 그중에도 인간의 죽음, 그중에서도 불과 20일 만에 수술 후유증으로 가신 당신의 죽음만큼 덧없는 게 없어요. 죽음은 혼자서 가는 가장 고독한 일일 텐데. 남아 있는 가족들의 기억에서만 아버지가 살아 계시지요. 아버지 없는 하늘 아래 저희들은 그야말로 애면글면 살아왔지요. 죽음이 가장 무정한 것을 실감하며. 우리 오남매는 큰 탈 없이 잘 살고 있어요. 며칠 전 미국에 계신 오빠를 잠깐 뵙고 왔어요. 건강이 좀 안 좋아 걱정이에요. 아버지가 잘 보살펴주세요.


    아버지 가시고 30년이 훌쩍 넘었건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그늘 아래 살고 있다. 내가 하는 행동거지 일일이 아버지께서 굽어보시는 것 같아서. 나는 일상을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헤아리며 스스로를 제어하며 산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미안한 맘이 든다. 잘해드리지 못하고 잘못한 일만 화인처럼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언젠가 어머니와 사소한 일로 다툰 적이 있다. 한참 지나고 서울에 오신 아버지가 그 일을 언급하셨다.

    “너희 엄마는 장점이 많지만 단점도 있다. 그렇지만 너는 딸로서 응당 엄마로 보듬어야 한다. 네가 서울에 있어서 엄마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엄마가 다소 잘못했다고 해서 엄마에게 섭섭하게 대한다면 네가 나쁜 것이다.”

    이후로 나는 어머니를 대할 때 아버지의 말씀을 꼭 마음에 담았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 부동산 열풍이 분 적이 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분양이 활발해서 이른바 복부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를 두고 새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해서 당첨만 되면 큰돈을 벌었다. 그때는 분양 신청에 아무 조건이 없을 때였다. 신청해서 당첨만 되면 프리미엄을 붙여 팔고 또 사고, 잘만 굴리면 아파트 평수가 늘어남은 물론 여분의 아파트까지 모을 수 있던 시대였다. 그 경기에 올라타려던 나를 아버지가 말리셨다.

    “집은 네 가족이 몸담고 사는 보금자리다. 비록 작지만 네 가족에게는 성(城)이다. 지금 조촐한 너의 집이 결코 투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집에서 몸과 사랑의 따뜻함을 구하는 안식처가 집이다. 네가 남편과 자식들을 기다리고 네 가족이 거듭해 태어나는 곳을 투기 대상으로 삼아 욕되게 하지 마라.”

    아버지의 말씀과 표정은 봄볕처럼 따사로웠다.

    남편이 아버지 말씀에 한 마디 더 보탰다.

    “내가 장인을 정말 잘 두었어.”

    훗날 아파트 분양이 어렵게 돼 프리미엄을 얹어 사려고 했더니 남편은 “국가경제를 망치는 큰일 낼 여자”라며 나를 말렸다. 그 아파트는 한 달 만에 프리미엄이 세 배로 뛰었다. 덕분에 우리는 아직도 조촐한 집에 산다.

    평생 고쳐 못 할 일

    내가 작은아들을 낳자 어머니는 큰아들을 데리고 지방 도시로 내려가셨다. 내 아들은 아버지의 꽃이었다. 날마다 아들을 데리고 다방에 데려가셨다. 큰아들은 한 달가량 지방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데려오셨다. 그리고 한 달 후면 또 데려가셨다, 할아버지가 기다린다며. 어느 날 할머니를 따라 나서는 형을 보며 세 살 된 작은아들이 말했다.

    “할머니, 저도 데려가요.”

    어머니는 두말없이 두 아들을 앞장세워 친정에 데려가셨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은 위험한 장난도 하지 않고 큰아들보다 키우기가 더 편하다며 좋아하셨다. 집에 정원과 옥상이 있는데 큰아들이 그곳을 수시로 들락거려 행여 다칠까 봐 염려가 크셨던 것이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다. 밤새 이부자리에 실례를 하고 일어난 작은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 계셨고, 어머니와 도우미 누나가 깔깔대고 웃으며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아이는 마루로 가더니 앞을 보지 못하고 그냥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마침 마당으로 들어오시던 아버지가 머리끝까지 빨개지셔서 아이를 안고 안과로 달려가셨다. 병원에서는 전혀 이상이 없다고 했고 아이는 곧 눈을 떴다. 그런데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는 또 눈을 뜨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이는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잘 먹고 형이랑 잘 놀았다. 퇴근해서 오신 아버지는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간 내 앞에서 아이는 눈을 반짝 뜨고 있었다. 아버지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눈 감은 아들을 어미에게 데려갈 일이 아득했는데 이제 됐다.”

    아버지는 그길로 집으로 내려가셨다. 해거름에 집을 나섰지만 벌써 밤이 깊어 있었다. 내가 주무시고 가시라고 만류했지만 다음 날 아침에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하셨다.

    “내가 아들 손자만 같아도 내일까지 기다려볼 텐데 딸 손자는 어렵구나.”
    (이후로 아이는 금세 좋아졌다.)

    아비라 그런 거지, 자식들이 당신을 봄바람처럼 느끼도록 해주고 귀한 것만 주고 새로운 것만 보여주고 늘 올바르게 살게 하신 당신은 그것을 아버지의 숙명으로 생각하셨다. 그런데 남아 있는 딸은 아직도 회한이 많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섬기기 다하여라.
    돌아가신 뒤에 아무리 애통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

    박명희
    ● 1971년 이화여대 국문과 졸
    ● 1989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별의 주소’로 등단
    ● 소설집 ‘안개등’(1996) ‘숨어있는 방’(2010), 장편소설 ‘숨어있는 생’(2022) 출간
    ● 제34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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