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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영원한 ‘특전맨’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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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살아 돌아오게 하려고 혹독하게 조련”
  • ● “불합리를 경험해야 불합리해지지 않아”
  • ● 정호용, 이기백 장군에게 배운 군인정신
  • ● 죽을 때까지 새겨야 할 이름…조용준·이유성 하사
  • ● “한미관계 증진, 동물보호 활동 나설 것”

드라마에서처럼 부하를 아끼는 사령관도 실재한다. 전인범 사령관(2013~2015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이 그런 사례다. 보급품 확충, 수당 인상, 사제품 허용, 간결한 훈시 등 여러 면에서 부하들을 꼼꼼히 챙겼다.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특공무술 시범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식사시간에 전 사령관이 의원들에게 전투식량을 건네 보이며 ‘우리 애들이 이런 대우받을 애들 아니다, 더 잘 먹여야 훈련도 더 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 후 정말 전투식량이 좋아졌다. 군에 그런 분이 많았다면 나도 유시진(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인공) 대위 같은 군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부사관 출신 A씨)



‘신동아’ 5월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화제가 된 것을 계기로 ‘진짜 특전사’의 삶을 취재해 기사화했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러 전·현직 특전사 요원들이 전인범(58) 장군을 언급하며 높이 평가했다.

예비역 중장으로 육사 37기인 전 장군은 22사단 대대장, 9사단 29연대장, 국방부 대미 정책과장, 합동참모본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 사단장,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제1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냈다. 화랑무공훈장(2005), 미국 동성훈장(2005), 미국 공로훈장(2011, 2013)에 이어 올해 한국군 최초로 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을 받았다.



공개된 정보를 종합하면 그는 ‘다 가진 사람’이다. 할아버지(전항섭)는 유한양행 사장, 아버지(전주화)는 한의사, 어머니(홍숙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후보, 부인(심화진)은 성신여대 총장, 페이스북 친구는 5000명이다. 재력도 갖췄다. 지난 3월 관보에 게재된 공직자 재산변동 현황에 따르면, 그는 군 인사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25억2149만 원)을 신고했다.

화룡점정으로 그에겐 ‘아웅산 테러 영웅’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폭탄 테러를 일으킨 미얀마 아웅산 묘소 현장에서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이기백 합참의장을 구했다. 그는 특전사 부대가(部隊歌) 가사의 ‘사나이’를 ‘전사들’로 바꿔 ‘젠더 의식 있다’는 평도 듣는다.

7월 28일 경기 이천 특전사 연병장에서 전인범 중장의 전역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방부에 ‘퇴임 기념 인터뷰’를 청했다. 인터뷰는 그가 민간인이 된 첫날인 8월 1일(복무기간 1977년 3월 1일~2016년 7월 31일) 이뤄졌다.



“수고한다” 한 마디

▼ 특전사 전역자들이 “전인범 사령관 같은 분이 군에 더 많았더라면 전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훌륭한 군인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비극은, 그렇지 않은 군인들도 있다는 거예요. 조직에 필요한 많은 친구들이 군을 떠나 애석합니다.”  

▼ ‘태양의 후예’ 촬영할 때 지원했다고요.  

“그건 잘못알려졌습니다. 드라마가 감동적이었어요. 옥의 티랄까, 특전사 마크가 잘못 나왔더군요. 저라면 그런 드라마를 통해 특전사를 제대로 알리면서 개선책도 끌어왔을 것 같아요.”

▼ 특전사령관으로서 성과를 많이 낸 걸로 압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세종시 달려가서 관료들 만나 빌고, 울고, 협박도 했어요.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수당 올리고 장비 개선하겠다’ 하니까 어느 원사가 ‘지금껏 약속 지킨 사람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어요. 그 사람, 정확히 6개월 뒤 제게 사과했습니다.”

▼ 수당이 올랐습니까.

“강하(降下) 수당이 15년 만에 5만 원에서 7만 원으로 40% 인상됐어요. 특전사는 분기당 한 번 이상 강하 훈련이나 레펠(현수하강) 훈련을 받아야 해요. 강하가 더 힘든 데다 전날에도 훈련을 받아야 하니 강하 수당을 조정해야겠다 싶었습니다.”

▼ 장비도 보완하고, 휴가도 많이 주고, 훈련도 강하게 시켰다고요.

“특전사 부하들이 적진에 침투하면 살아 돌아올 확률이 50%가 안 됩니다. 그러니 훈련을 실전처럼 시키고, 장비도 보완해주고, 수당도 높이고, 가족과 보낼 시간도 더 주고 싶었습니다. 특전사 요원에겐 지구력을 길러줘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전역을 코앞에 둔 이광호 원사를 설득해 알아낸 방법으로 훈련시키니까 효과가 있었습니다. 한 달에 250여km를 뛰면 휴가를 하루 줬어요.”

▼ 제가 만난 전역자들은 “전인범 사령관 때문에 훈련을 세게 받았다”면서도 “전 사령관을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군인이 훌륭한 겁니다. 그 친구들이 돈을 더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태양의 후예’에서) 서대영, 유시진이 어디 돈 100만 원 더 달라고 그럽디까. 그,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해줘서 실망하고 나간 겁니다(이 대목에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해야 해요. 부하들 얼굴을 보면, 이놈들을 정말 적진으로 들여보내는 날이 올까 봐 두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 어떤 마음으로 조직생활을 했습니까.

“도덕적 용기를 가지고 순간순간 옳은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상관에게 건의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공손하게 얘기했고요. 상관을 망신 줄 이유는 없으니까 증인이 없을 때 말하고 쌍방과실, 하극상은 피했습니다. ‘정직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죽기 직전 3만5000원짜리 책에 그 비법을 담을 겁니다(웃음).”

 ▼ 언론도 호평 일색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부담스럽습니다.”


전인범이 ‘잔인범’ 된 사연

▼ 사성(四星) 장군을 못해 아쉽진 않습니까.

“별 4개 못 단 건 아쉽지 않습니다. 군복 입고 국가 위해 봉사할 기회가 더는 없다는 게 아쉽죠. 육사 꼴찌가 이 정도 된 것만 해도 어디예요.”

▼ 꼴찌요?

“입학할 때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다행히 영어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는데 그것 때문에 합격시켜준 게 아닌가 싶어요. 학창시절 체육성적은 늘 C, D였고. 겁도 많았죠.”

▼ 그런 분이 어떻게 군인이 됐습니까.

“어릴 때부터 꿈이 군인이었습니다. 7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1965년부터 5년쯤 미국에서 살았어요. 늘 외톨이였어요. TV 프로그램 ‘전투(Combat)’를 보다 샌더스 중사에게 푹 빠졌죠. 12살 때 한국에 돌아와 외삼촌과 국군의 날 행진을 봤는데 외삼촌이 ‘군인 되려면 육사 가야 한다’고 해서 육사에 갔습니다.”

▼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어머니가 아들의 꿈을 반대하진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모범적인 군인이 되라’고 하셨어요.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도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납치하더라도, 나는 죽게 놔두고 너희는 나라를 택하라’고 가르친 분입니다.”

▼ 육사 생도 시절은 어땠습니까. 별명이 ‘잔인범’이었다고….

“1학년 때 한 선배가 이유 없이 동기들 뺨을 때리기에 해결하려고 나섰다가 주동자로 몰렸습니다. 하도 심하게 기합을 주니까 자퇴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그 선배와 같이 기합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선배는 ‘원산폭격’을 3분도 채 못하더군요. 귀여움만 받았지, 기합을 안 받아봤대요. 그걸 보고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남한테 포악하게 구는구나’ 싶어 후배들에게 기합을 많이 줬습니다. 불합리를 경험한 사람이 불합리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 동기인 박지만 씨와 친했습니까.

“어머니가 외교부에 계실 때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맡으셨는데, 어린이날이 되면 육 여사가 ‘얼마나 힘드냐’면서 저희에게 과자랑 금일봉을 챙겨주셨대요. 어머니가 ‘지만이 잘 챙겨라’고 하셨는데, 지만이 주변엔 늘 사람이 많아서 제가 들어갈 틈이 없더라고요.”  



 아웅산에서 배운 군인정신

▼ 어떤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까. 지키고자 한 가치가 있었나요.  

“평범한 집 딸인 어머니는 유학을 가는 게 꿈이었대요. 그러다 유학기관에서 나온 분의 통역을 맡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유학 길을 열어줘 인생이 달라졌죠. 어머니는 늘 ‘대가 없이 남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을 좋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위 무렵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 전역사에서 고마운 선배들을 꼽으며 5공 인사인 정호용 장군을 언급했는데요.  

“정 장군님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밤에 라면 끓이려고 냄비를 찾다가 소동이 난 적이 있어요. ‘우리를 부르시지 그랬냐’고 했더니 ‘너희들 곤히 자는데 깨울까 봐…’ 하시는 겁니다. 그분이 그런 분입니다. 그분을 보면서 사람을 진실하게 대해야 사람이 따른다는 걸 배웠습니다.”

▼ 아웅산 사건 때 이기백 합참의장을 구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폭발로 두피(頭皮)까지 열린 이기백 장군님을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고 붕대로 친친 감아놓아서 미라 같던 분이 의식이 돌아오자 마자 이러시는 겁니다.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 그 상황에서 하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인 질문 아닙니까. 상관과 부하를 저렇게 챙기고 위하는 게 진짜 군인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처절한 현장에서 군인정신을 배웠네요.  

“그렇죠. 그때 이기욱 재무부 차관도 큰 부상을 입고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로 후송됐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의사의 말을 통역해 ‘차관님, 손을 꽉 쥐어보십시오’ ‘들리십니까’ 하고 계속 여쭤봤지만…. 저는 그때부터 ‘운이 좋아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 운이 좋았다?

“상황실에 있다가 카메라 배터리를 교체하려고 잠깐 나갔다가 살아난 겁니다. 저는 ‘영웅’이 아니라 119 대원처럼 현장으로 간 것뿐입니다. 그때 기자가 저를 촬영했기 때문에 알려진 거죠. 우리 사회에는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 많이 있습니다.”

▼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까.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도 똑같이 행동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장담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럼에도 저는 죽음보다 불명예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확률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심을 잊지 않고 되새기며  ‘이래서 군인으로 산다’는 희열도 느꼈습니다.”


‘불굴의 대령’

▼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한국인 23명 중 21명이 풀려난 뒤 기자회견장에서 “전인범 단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더군요. 그때 어떤 임무를 맡았습니까.

“군사협조단 단장으로서 국제안보지원군(ISAF) 사령부에 파견돼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설득할 논리가 부족하니 인간적으로 얘기했어요. 서양 사람들은 어릴 때 착한 일을 하면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고 믿으며 자랐으니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선 스웨덴 투스타(소장)에게 ‘사람들 살려야 한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상황실 출입을 허가해달라’ ‘인터넷, 유선전화, 휴대전화 쓰게 해달라’ ‘숙식 제공해달라’…줄줄이 부탁했죠. 상황실에 갔더니 마침 유학시절 알고 지낸 독일군, 미군이 있는 거예요. 나한테 불고기 얻어먹은 애들인데 안 도와주겠어요?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니까 많이들 도와주더라고요. 그런데도 나중에 ‘돈 많이 쓰고 왔다’고 혼났습니다.”

▼ 돈을 많이 썼습니까.  


“첫인상만큼이나 마지막 인상도 중요하거든요. 도와준 사람들한테 밥은 사야 할 거 아닙니까. 거기에 2000달러쯤 썼죠. 5달러짜리 이발소 상품권도 100장 만들어서 도와준 사람들한테 돌렸고요. 외교부가 선물로 가져온 티스푼 세트와 디지털 카메라를 달래서 각각 유럽 장군들하고 우리가 다닌 식당에서 바닥 닦는 아프가니스탄인들한테 줬어요. 따로 챙겨간 시계는 식당에서 서빙하는 파키스탄 사람들한테 주고요.”

▼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국이 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없었습니다. 2004년 다국적군사령부 민군작전처 선거지원과장으로 갔는데, 직속 부하들이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다 바쁘다는 장군들 대신 브리핑하고 좋은 평가를 받아서 점차 조직을 장악했습니다. 국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승인받은 투표용지를 중국 등지로부터 수송기로 받아 이라크 전역의 5800개 투표소에 분배하고, 직원들 봉급을 비롯해 비용을 전달했죠. 함께한 호주군 짐 몰란 장군이 자신의 책(‘Running the War in Iraq’)에 저를 ‘군벌’ ‘불굴의 대령’으로 썼더군요.”



커크 선장에게 배운 리더십

▼ ‘불굴의 대령’이 페이스북을 한다는 게 뜻밖입니다.

“페이스북 시작하고 나서 군에서 지적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몰라요. 하지만 페이스북은 일개 병사가 사령관에게 직접 고자질할 수 있는 통로예요. 병사들이 든든했을 겁니다.

언젠가는 몸의 문신 때문에 특전사에 불합격했다면서 ‘문신 지우면 합격시켜달라’는 메시지가 왔어요. 알아보니 보호감찰 받은 전력이 문제가 됐더라고요. 그 얘기를 메시지로 보냈더니 한 달 만에 ‘홀어머니 밑에서 살다 친구랑 싸웠는데 경찰서에 갔더니 합의하라면서 보호감찰동의서에 사인하라고 해서 했다’는 답이 왔어요. 이걸 모른 척할 수 없잖아요. 일단 합격시키고 나서 훈련을 더 강하게 시켰죠. 훈련 중 탈락률이 20% 내외로 꽤 높아요. 그런데 그 친구, 결국 임관했습니다.”

▼ 한 사람의 인생을 구했네요.

“나라가 잘되게 된 거죠. 아랫사람들은 작은 것에 감동하고 작은 것에 실망합니다. 아랫사람들한테 작은 배려를 하면 더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간부들은 이걸 잘 알아야 해요.”

▼ 그런 리더십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좋은 분을 본받기도 했지만, 안 좋은 분을 보면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했어요. 영화도 많이 봤죠. ‘스타트렉’ 커크 선장에게선 균형감, 논리력, 용기를 배웠어요. ‘힐스트릿 블루스’의 훠릴로 경찰서장을 보면서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고요.”

▼ 군에서 재산이 가장 많은 분으로 꼽히더군요.

“어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힘들어본 적이 있어서 ‘돈의 중요성’을 알고 차근차근 재산 증식을 한 겁니다. 어머니는 딱 150만 원과 영어라는 재산을 물려주셨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AFKN 방송만 보게 하고,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하셨어요. 저도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을 빼놓지 않고 읽었죠.”

▼ 1970년 27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차성도 중위는 부하가 안전핀을 뺀 수류탄을 놓치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들을 구했습니다. 전 장군께서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했다고 들었습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 탈레반의 자살폭탄 테러로 전사한 윤장호 하사도 챙기고요.


가슴에 품은 두 하사

“제가 27사단장일 때 누가 차성도 중위 얘기를 하는데 뭉클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사고라고 덮어버린 것 같았어요. 이런 건 알려야겠다 싶어서 차성도 상을 만들었습니다. 장호 건은 미 8군부대 안에 있는 ‘장호를 기리는 나무’가 죽었다기에 나무를 교체하게 건의한 게 전부입니다. 장호는 역사관에도 소개했죠.”

 ▼ 역사관….

“27사단의 창고로 쓰던 걸 1년에 걸쳐 역사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사단의 역사를 보고 배우는 게 중요하니까요. 제가 육사 전사(戰史)과를 나왔어요. 혹시 육탄 10용사(1949년 5월 4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탄을 안고 적 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산화한 군인 10명)를 아시는지…. 죽을 줄 알면서도 뛰어든 이런 위대한 사람들을 모른다는 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언제 또 당할지 몰라요.

제 전역식 때 유일하게 축사를 해준 분이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이진복 부회장입니다. 특전사령관 시절 구월산 유격대 15인 특공대 출신 할아버지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들은 군번이 없으니 국가에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요. 팀을 만들어 이분들이 잃어버린 지위를 찾기 위해 어디로든 가신다면 차로든 헬기로든 모시라고 지시했습니다.”

▼ 특전사령관 시절 포로 극복훈련을 받던 부하 2명이 사망했습니다.


“조용준·이유성 하사. 저는 당시 부대 지휘관으로 절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 ‘지휘관들이 영화에서 본 무리한 훈련 장면을 따라 하다 일어난 참사’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브라보 투 제로’란 영화는 1990년대 중반 영국 특수부대의 실화를 그렸기에 배울 만한 전술이 많습니다. 회의 시간에 영상을 보면서 헬기에서 뛰어내릴 때 좌우를 살핀다거나 적진에 들어갈 때 동영상으로 유서를 남기는 것 등을 배우자고 한 거죠. 전술 얘기를 하던 중 누군가가 포로 극복훈련을 자청해서 하게 된 겁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입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저는 두 사람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새기고 가야 한다는 벌을 받았습니다.”

▼ 후회하는 일이 또 있습니까.


“수두룩합니다. 1981년 소대장하면서 사격 못하는 사람들을 군홧발로 짓이겼어요. 나중에 당시 소대원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제가 ‘개대가리’라고 막말을 해 상처받았다고 해서 반성했습니다. 22사단 대대장할 때는 부하가 매년 1명씩 3명이 자살했는데, 연대장이 ‘관에 태극기를 덮어주라’고 했는데도 안 덮어줬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자살자만 덮어줬어요. 그 태극기가 뭐라고…. 아들 둘 둔 아버지로서 부하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말만 했지, 정말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는 부하를 아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훈이, 민이, 말로, 무이

▼ 정치를 할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과거처럼 앞으로도 한미관계 증진하는 일을 하려고요. 10월부터 브루킹스 연구소 방문학자,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객원 연구원으로 일합니다. 요즘 침대에서 집사람이랑 훈이, 민이, 말로, 무이(강아지들)와 같이 자고 일어나는데, 너무 행복합니다. 앞으로 동물자유연대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싶어요.”

▼ 오직 한길만 걸어온 소감이 어떠세요.  


“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했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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