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주연 유태준, 연출 어머니 코믹출연 김정일…

희극이 된 유태준 재탈북 소동 전말기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1-05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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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4월30일 김정일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을 사랑한다’는 친필 지시를 내림으로써 32년형을 선고받은 유태준씨는 석방되었고 그후 그는 중국으로 탈출했다. 아들이 김정일의 배려로 살아난 것을 안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해 유씨의 거짓말은 시작되었다.
    설 연휴 다음날인 2월14일자 몇몇 신문은 북한을 재탈북한 유태준(劉泰俊·34)씨 사건을 보도하며, 유씨를 한국의 ‘빠삐용’으로 묘사했다. 북한의 국가보위부는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한 기구다. 이 날짜 신문들은 유씨가 평양에 있는 국가보위부 감옥의 담장을 넘어 탈옥한 다음 중국으로 재탈북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 유씨는 평양의 국가보위부 감옥에서 탈옥한 것이 아니라, 평남 평성군에 있는 양정(糧政)사업소(말하면 양곡 도정소)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재탈북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자 몇몇 언론은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을 거론하면서 유씨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였다.

    유씨가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 것은 함흥에 살고 있는 처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유씨는 처를 데리고 나오지 못하고 국가보위부에 붙잡혔다. 2월16일자 신문은 유씨는 북한에 붙잡힌 후 남파공작원을 양성하는 평양의 문수초대소에서 부인과 25일간 생활했다고 보도했다. 문수초대소에서 지낼 때인 2001년 5월, 유씨는 북한의 라디오와 TV 방송에 나와 자진 입북했음을 밝히고 북한 체제를 찬양했다. 이러한 유씨가 재탈북한 뒤 북한을 비난한 것도 유씨를 믿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신문들은 유씨가 간첩을 양성하는 초대소 생활까지 했으니 공작 임무를 띠고 위장 재탈북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1998년 12월2일 한국에 처음 들어온 후 유씨는 한국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북한에 들어가면 관련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1996년 7월31일 소설가 김하기(본명 金榮)씨는 북한과 가까운 중국 도시에서 술에 취해 북한으로 들어갔다가, 10여일 후 돌아온 적이 있다. 검찰은 한국으로 송환된 김씨를 국가보안법의 잠입탈출과 고무찬양 혐의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검찰의 기소를 인정해 김씨에게 선고한 3년6월의 징역형을 확정한 바 있다. 김하기씨의 사례는 같은 한국인인 유태준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은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유씨를 불구속 조사했다.

    하루아침에 빠삐용에서 이수근으로 전락한 유태준 재탈북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 의문을 풀어가려면 유씨의 가족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에 온 유씨의 가족은 어머니 안정숙(安貞淑·59)씨와 성(姓)다른 동생 이근혁(21)씨 그리고 유씨의 여섯 살짜리 아들로 구성돼 있다. 유씨에게 ‘배다른’이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많은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부(異父) 형제를 두었으니 독자들은 유씨의 어머니는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졌을 것이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기강이 무너진 콩가루 집안이니 아들이 재입북을 했을 것이다’라며 유씨 가족을 백안시했을지도 모른다.

    유씨의 어머니 안정숙씨는 엘리트 여성이다. 북한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김책공대를 졸업한 안씨는 1965년부터 1992년까지 8개 국어로 출판물을 제작하는 평양의 외국문출판사에서 연구사 생활을 했다. 일본어로 제작되는 ‘조선화보’(朝鮮畵報)는 한국인에게도 매우 익숙한 북한의 출판물인데, 조선화보를 제작하는 곳이 바로 외국문출판사다.



    안씨의 아버지는 1943년 일본 순사를 죽이고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도주했다. 이때 안씨의 오빠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광복 후 안씨의 오빠는 북한으로 돌아와 인민군 군관(장교)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오빠는 대대장으로 참전해 경북 영덕에서 전사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954년 안씨 가족은 북한으로 돌아왔다.

    북한 정부는 죽은 오빠에게 ‘열사증(烈士證)’을 발급했는데, 열사증 덕분에 안씨의 가족은 성분을 인정받는 계층이 될 수 있었다. 외국문출판사 연구사를 할 때 안씨는 인민경제대학 교원(교수)과 결혼해, 유태준을 잉태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잉태 4개월 뒤 병사했다. 유복자를 낳은 안씨는 10여 년을 수절하다 아내와 사별한 고급 군관을 만나 재혼했다. 안씨의 두 번째 남편은 소장(한국군에서는 준장)까지 진급해, 전 인민군에게 의약품을 공급하는 후방총국의 군의(軍醫)국장을 맡았다. 두 번째 남편에게는 사별한 전처에게서 얻은 장성한 자식이 있었다. 안씨는 둘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이근혁을 낳았다. 근혁은 안씨의 큰아들인 유태준과 13살 차이가 난다.

    유태준은 새 아버지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청소년기 때부터 집밖으로 돌며 공부를 게을리했다. 대신 광적으로 소설을 탐독했다. 북한 소설은 전혀 읽지 않고 알렉산더 뒤마, 세익스피어 등 서양 작가들의 명작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라디오를 조립해 KBS를 비롯한 한국 방송을 들으며, 한국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내로라 하는 엘리트들인 안씨 부부도 김정일 체제에 혐오감을 품기 시작했다. 안씨는 “평양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분명 호의호식하고 살았지만 우리는 북한은 곧 망한다, 아니 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부지불식간에 북한체제에 대한 불만이 노출됐는지 1992년 남편은 함남 함흥으로 철직(좌천)되었다. 안씨는 외국문출판사를 그만두고 함흥으로 따라가 함남도일보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1994년 두 번째 남편이 또 병사했다. 그러자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남편의 자식과 안씨는 자연 멀어지고, 안씨는 성 다른 두 아들을 거느린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큰아들 태준씨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생모와 계부가 막강한 자리에 있었던 만큼 ‘빵빵한 직장’인 함흥 연료판매소에서 지도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둘째아들 이근혁이 사춘기에 들어서자 두 형제는 서로를 싫어해, 자주 다투었다. 계부가 사망한 이듬해 유태준은 함남도 국가보위부 지도원 집안의 딸인 최정남과 결혼했다. 북한은 여권(女權)이 신장되지 않은 사회라 여성은 남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문화가 남아 있다. 최정남이 그러한 문화에 젖은 여자였다. 최정남과 결혼한 유태준이 분가하여 나간 후 안씨와 둘째 아들은 북한 체제에 대해 심각한 불만을 주고받게 되었다.

    1998년 4월 모자는 장사를 하기 위해 무산행 기차에 올라탔는데, 청진 북쪽을 달리던 중 이 열차가 탈선·전복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여러 사람이 사망한 큰 사고였으나 모자는 멀쩡했다. 이때 안씨가 재치를 발휘했다. “근혁아, 사람들이 여럿 죽고 실종자가 나왔다고 하니, 차제에 중국으로 도망치자.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으니 우리가 실종된 것으로만 알 것이다. 친척들도 다치지 않을 것이니 중국으로 넘어가자.”

    아들이 동의하자 모자는 아주 쉽게 중국으로 넘어왔다(1998년 4월15일).

    안씨는 11살이 될 때까지 중국에서 살았으므로 중국에는 지인이 있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 안씨는 그해 11월 어느 날 근혁에게 돈을 주며, “형이 어찌 사는지 보고 오라. 데리고 나올 수 있으면 더욱 좋고…”라고 말했다. 17살 소년 이근혁은 깜쪽같이 함흥까지 들어가 형을 만났다(탈북자들에 따르면 조·중 국경을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기차사고 때 실종된 줄 알았던 동생이 나타나 어머니 소식까지 전해주자, 유태준은 주저하지 않고 동생을 따라 만주로 가겠다고 했다.

    유태준은 처도 데려갈 생각으로 “만주로 갈 생각이 있는가”하고 넌지시 떠보았다. 처는 보위부 집안 출신답게 “허무맹랑한 소리 말라우”하며 펄쩍 뛰었다. 태준씨는 ‘두 살 난 아들만 데려 간다’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평양에는 태준씨의 친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태준씨는 처에게 “아이를 데리고 평양에 가 증조할머니에게 인사시키고 오겠다”고 속이고, 함흥역으로 나와 무산행 기차에 올랐다. 11월23일 유씨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넘어와 어머니와 재회했다. 그 직후 안씨 가족은 베이징((北京)으로 이동해 세 번이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유태준이 대안으로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몰래 올라타자고 제의했다. 몰래 배에 타기 위해서는 바다를 헤엄쳐 배로 기어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때문에 바다에 뛰어들 수 있는 유태준과 이근혁이 먼저 한국으로 가 정착한 후, 어머니와 아이를 데려오기로 약속했다. 유태준과 이근혁은 텐진(天津)항으로 옮겨가 밀항을 시도했는데, 뜻밖에도 너무 쉽게 한국행 배에 몰래 올라타게 되었다. 12월2일 이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몸을 드러내 귀순을 신청했다. 한국 입국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목숨을 건 한국행에 성공했으면 이후부터라도 형제는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데,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다시 험하게 다투기 시작한 것. 보다못한 국정원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태준은 대구에, 근혁은 서울에 각각 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유태준은 중국에 남은 어머니와 연락을 하다, 1999년 9월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조선족 어린이의 여권을 구입해, 그 여권으로 세 살이 된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는 사이 어머니 안씨는 조선족 호구(戶口·호적)를 만들었다. 호구가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 수 있다. 이미 한국인이 된 두 아들은 이러한 어머니에게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2000년 2월2일 ‘조선족’ 안씨가 인천공항으로 들어와 귀순했다. 이로써 안씨 가족은 전부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큰아들 태준씨는 북한에 남은 ‘그의 가족(처)’ 때문에 심각한 외로움을 겪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외로움을 타는 유씨에게 아가씨를 소개하며 “새 장가를 가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콧대 높은’ 한국 여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를 하늘처럼 떠받들어주던 함흥의 처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처를 데려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북한에 들어갔다 오자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 나흘 전인 2000년 6월9일 유씨는 연길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집착이 강한 유씨의 성격이 또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6월16일 길림성 화룡시 송전툰으로 간 유씨는 1998년 탈북 때 알게 된 조선족 최○○씨(37)를 만났다. 최씨의 도움으로 북한 초소 경비병에게 중국돈 400위안(한화 약 6만원)을 준 유씨는 함북 무산으로 들어갔다. 무산에서는 밀입북 및 탈북 알선자인 한○○을 만나 중국 돈 400원을 주고, ○○○ 명의의 신분증을 빌렸다. 이 신분증으로 열차표를 사, 6월21일 유씨는 함흥시에 도착했다. 처가 부근에 여장을 푼 태준은 처를 불러내기 위해 몇 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6월25일 유씨는 계획을 바꿔 직접 처가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처가 아니라 장모였다. 1년 반만에 나타난 사위를 본 장모는 당장에 “보위부에 신고하겠다”고 해, 겁을 먹은 태준은 밖으로 뛰어나왔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이 태준은 장모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보위부원들이 처가집 동네를 에워싸는 것을 보며 무산행 열차에 올라타고 탈북 알선자 한○○의 집으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6월30일 함북 무산군 보위부원들이 나타나 그가 숨어 있는 곳을 포위했다. 겁을 먹은 태준은 밖으로 도주하다 발이 접질려 붙잡히게 되었다.

    그날로 유태준은 함북 청진시 보위부로 압송돼 구류장에 수감되고 2000년 10월초까지 심한 고문을 받으며 조사 받았다. 그리고 평양의 국가보위부 구류장으로 이송돼 조사 받다가 2001년 1월15일 열린 재판에서 ‘조국 반역죄 및 국경 월경죄’로 혐의로 10분만에 3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함북 청진으로 이송돼 ‘제25 정치범 교화소’로 수감되었다(유태준씨가 평양의 국가보위부 감옥에 있었던 기간은 약 5개월이었다). 아내를 데려와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던 유씨에게는 암흑 같은 감옥 생활만 남게 된 것이다.

    한편 며느리를 데리고 닷새 후쯤 돌아오겠다던 아들이 석달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 안씨는 애가 타게 되었다. 이러한 안씨를 위로해준 이가 ‘조선일보’의 김모 기자였다. 북한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김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북한의 엘리트 여성인 안씨를 알게 됐는데, 안씨가 북한에 간 아들 문제로 애태워하는 것을 함께 걱정해주었다. 2001년 3월 초 김기자는 모정보기관이 ‘북한에 들어간 유태준씨가 공개처형되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문이 여러 곳으로 퍼지면서 기정사실화돼 가자 김기자는 안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공개처형됐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김기자는 이 소문이 사실일 경우에는 북한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실이 아니면 유씨를 처형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아들이 공개처형되었다는 소문을 보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들은 안씨는 대성통곡을 하고 이틀간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김기자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는데 동의했다. 마음을 정한 안씨는 김기자에게 “보도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로써 김기자는 2001년 3월17일자 ‘조선일보’에 ‘아내를 찾으러 북한에 들어간 유태준씨가 공개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게 되었다.

    이 보도가 나가자 한국에 있는 북한 인권단체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김정일 정권을 비판했다. 4월이 되자 이들 단체들은 ‘피랍·탈북자 인권과 구명을 위한 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를 결성했다. 시민연대는 언론기관을 찾아다니며 유씨의 공개처형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는데 몇몇 언론이 이에 동조해 수차례 유씨 공개처형 문제를 거론했다.

    2000년 6월에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8월에 있었던 언론사 사장단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국 언론을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 외에는 유태준씨 공개처형을 떠든 데가 없는데, 4월30일 김위원장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도 사랑합니다’라는 친필메모와 함께 32년형을 선고받고 교화소에 수감돼 있는 유씨를 석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직후 유씨는 교화소를 찾아온 국가보위부의 간부로부터 “진정으로 처를 데리러 온 것이냐. 처가 보고 싶으면 조국에 충성해야 한다”고 회유를 받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5월 초, 이번에는 중앙당의 한 간부가 찾아와 그날로 그를 석방시키고, 평남 평성군의 양정사업소로 데려가 노동자로 배치했다. 이때 중앙당 간부는 김위원장의 친필지시 때문에 특별히 석방하는 것이라며, 일부러 요덕에 있는 정치범수용소 부근을 거쳐 유씨를 평양으로 데려왔다.

    유씨가 공개처형됐다는 ‘조선일보’의 오보는 결과적으로는 유씨를 석방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양정사업소에 배치된 유씨는 며칠 후 조평통 참사 안명국을 따라 평양에 와 문수초대소에서 25일간 ‘꿈에 그리던’ 처를 만나게 되었다. 안명국은 유씨와 가까와지자 자신은 가끔 한국에 침투해 대학생들을 만나고 온다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5월30일에는, 6월12일 방송된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고 이어 8월14일 방영된 TV 기자회견을 녹화했다. 유씨는 방송에서 탈북자를 관리하는 한국의 비밀조직 ‘대성공사’ 조직에 대해 아는 바를 상세히 털어놓는 등 적잖은 국가 비밀을 이야기했다. 또 그는 “국정원과 이부(異父) 동생의 꾐에 속아 남한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북한으로 돌아왔다”며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 8월14일 방영된 유태준씨 기자회견 프로그램을 입수한 것은 MBC였다. 그 직후 MBC는 테이프를 공개, 유씨가 살아 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 보도했다.

    양정사업소는 곡식을 다루는 곳이므로 배 곯을 일이 없다. 김위원장이 유씨에게 양정사업소라는 직장을 준 것은 상당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인민에게는 ‘통 큰 정치’(廣幅정치) 스타일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제스처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온 유씨는 양정사업소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떨쳐 버릴 수 없어 11월10일 도보로 양정사업소를 탈출했다. 평남 순천 역에서 무산행 야간 열차의 지붕에 올라탄 그는 길주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이때까지도 유씨는 짧은 머리에 죄수복 차림이었다.

    차라리 군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유씨는 인민군을 1명을 때려 눕히고 군복을 뺏어 입었다. 두 번째로 탈북하다 붙잡힌 무산에는 보위부원이 새카맣게 깔려 있을 것으로 생각한 유씨는 걸어서 양강도 보천보(혜산)로 이동했다. 보천보는 과거 함흥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혹시 탈북하게 되면 보천보를 거쳐 넘어갈 생각으로 답사를 해둔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살려 보천보에 도착한 유씨는 12월1일 압록강을 넘어 중국 길림성 장백현으로 재탈북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2월3일 중국 공안(경찰)에 붙잡혔는데 중국 공안은 북한 말을 쓰는 유씨를 탈북자로 판단해 족쇄를 채워 수감했다.

    이에 대해 유씨는 “북한 말을 쓰지만 나는 한국인이다. 여권과 한국 주민번호는 이러한데 2000년 6월9일 연길공항을 통해 내가 중국에 온 기록이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유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길림성 공안은,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 ‘이러한 여권과 주민번호를 가진 유태준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 사람이 맞느냐’고 물어왔다. 2002년 1월17일 한국 대사관은 “맞다”는 통보를 보내고, 2월5일 유태준 명의로 된 임시여행증명서를 길림성 공안에 보내주었다. 길림성 공안은 유씨를 불법체류자로 판정해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2월9일 중국 공안은 연길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항공기에 유씨를 태워 출국시켰다. 유씨는 전적으로 자기의 운과 힘만으로 한국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20개월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된 유씨는 바로 국정원의 조사를 받았다. 국정원은 큰 언론과 시민단체가 구명운동을 벌인 유씨에 대해 시큰둥했던 만큼 다음날 유씨를 풀어주었다. 유씨는 그날부터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유씨는 국정원과 경찰 조사에서 평양의 국가보위부 감옥을 탈옥했다는 등의 거짓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경찰은 국정원이 손을 뗀만큼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조사했다. 유씨가 대한민국 국민인 만큼 형사소송법상의 절차도 지켰다.

    교류협력법 위반죄는 형량이 가벼우므로 경찰은 검찰의 지휘를 받아 2월11일 불구속으로 유씨를 석방했다. 설날을 하루 앞둔 날밤 ‘아들 생환’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된 어머니는 너무 기뻤다. 그러나 아들이 너무 피곤해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잠부터 재웠다. 다음날인 설날, 동생 근혁씨(고려대 재학중)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근혁씨는 수일 전 어머니에게 설날 아침 친구를 데려와 놀겠다는 얘기를 미리 했다.

    둘째 아들 손님을 보내고 난 후 안씨는 비로소 큰아들로부터 재탈북 경위를 듣게 되었다. 안씨는 큰아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도 사랑합니다’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시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다. 안씨는 김정일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사람이었으므로 친필지시가 알려지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한국에서 일어났던 김정일 신드롬이 재연될 수 있겠다고 우려했다.

    김정일 신드롬이 생기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안씨는 큰아들에게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보위부 감옥에서 석방됐다고 말하지 말라. 국가보위부 감옥을 탈옥했다고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20개월만에 돌아온 유씨는 많이 변해 있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낀 듯 그는 앙숙처럼 싸워온 동생을 붙잡고 “처음 탈북이 너무 쉽게 이뤄져 모든 일이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지옥에 갔다온 기분이다. 이제는 우리 잘 지내자”라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시키는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날 안씨는 아들의 생환을 도와준 이는 ‘조선일보’의 김기자라고 생각하고 김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이 돌아왔음을 알려 주었다. 다음날 아침 김기자가 달려와 유씨를 취재했다. 유씨는 김기자에게 “말 못할 부분이 있다”며 정치범 교화소에서 나온 과정을 얼버무렸다. 이때 다른 언론사의 A기자가 ‘냄새’를 맡고 전화를 걸어왔다. 아들 구명과 관련해 A기자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던 안씨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A기자의 방문을 허가했다.

    그러자 김기자가 보다 조용한 곳에서 취재하기 위해 유씨를 데리고 나갔다. 안씨 집에 도착한 A기자는 유씨가 나간 것을 알자 크게 화를 내고 즉각 유씨가 돌아온 것을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다른 언론들이 ‘조선일보’에 항의해, 2월13일 오후 유씨는 코리아나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다. 이 회견에서도 유씨는 “평양 국가보위부 감옥에서 탈출했다. 전기가 흐르는 고압선은 옷을 걸쳐놓고 넘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기자들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유씨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감 시간이 임박한탓에 대부분 언론은 유씨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2월14일 유씨의 주장을 의심한 몇몇 언론들이 1985년 17개월간 평양시 용평구역 마담동에 있는 국가보위부 감옥에 수감됐다 탈북한 안혁(34·현재 영화사업)씨에게 국가보위부 감옥을 탈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씨는 “웃기는 소리다. 보위부 감옥은 감시가 너무 철저해 담장 근처로는 갈 수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대답을 근거로 다시 추궁하자 유태준씨는 또 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유씨의 설명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2월14일 오후, 통일부의 모 국장과 국정원이 거의 동시에 “유씨는 평양의 국가보위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순간 유씨는 빠삐용에서 바로 이수근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때부터 유씨를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유씨가 대성공사 조직 등 국가기밀을 밝혔는데 왜 수사기관은 조사하지 않았느냐는 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유씨의 대공용의점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상황에 대해 안씨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정부가 북한한테 절절 매는 것이 정말 꼴보기 싫었다. 그런데 며느리를 데리고 오겠다며 북한에 갔던 아들이 김정일의 친필 지시 때문에 살아났다고 밝히면 또 한번 한국 언론은 김정일이 ‘통 큰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기사를 쏟아낼 것이 뻔했다. 1년 남짓 한국 생활을 하면서 나는 북한이 어떤 곳인지, 김정일은 어떤 자인지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기사를 쏟아내는 한국 언론에 상당히 실망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국가보위부 감옥을 탈옥했다고 말하라고 시켰는데 이것이 아들을 죽일 놈으로 만드는 죄가 되고 말았다. 지옥에서 탈출해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아들을 내가 죽일 놈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나이니 늙은 이 에미를 죽여라.”

    유태준씨가 ‘빠삐용’에서 ‘이수근’으로까지 무자비하게 전락하게 된 일차적인 책임은 한국 법을 어기고 북한에 간 유씨와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어머니 안씨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씨 모자는 한국보다는 북한식 사고 방식에 더 익숙한 ‘이방인’이다. 따라서 안씨 모자에게 책임을 묻기에 앞서 한국 사회는 북한 출신 동포에게 어떤 배려를 했는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유씨가 아내를 데려오려고 북한에 간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에서 수감돼 고문을 받을 때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시민연대를 비롯한 인권단체와 언론이 유씨 구명운동을 벌일 때 정부는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유화국면을 유지하는데 집착해 유씨의 고통을 외면한 것은 아닌가. 그러한 유씨가 어렵게 중국으로 재탈북했다면 국정원과 외교부는 유씨를 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보여줬어야 한다. 여기에 언론은 과당경쟁을 벌임으로써 또 한번 유씨의 인권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유씨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를 범인시(犯人視) 하고 하루 아침에 이수근으로 전락시킨 것이 좋은 사례다. 이러한 언론의 ‘오버’에 국정원과 통일부는 유씨의 거짓말을 공식 확인해줌으써 장단을 맞춰 주었다.

    살려고 도망쳐왔는데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박절하게 구박당한 유씨는 “할 말이 없다. 나는 비난을 받아 싸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한반도에서는 유씨가 일으킨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유일하게 유씨의 자활을 도와주고 있는 시민연대의 관계자들은 “정부와 언론은 유씨 사건을 해프닝으로 넘기지 말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분명한 원칙을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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