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권력 눈치 보는 외교관에 외교정책은 공염불

  • 이동진 < 시인, 전 주나이지리아 대사 >

    입력2004-11-09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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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은 엉터리다. 영어는 그것으로 밥벌이할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90% 이상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영어만으로도 해외여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미국인도 영어문맹률이 20%라고 아우성이다.
    외교관 생활 30여 년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낡은 트렁크와 늙은 마누라가 고작’이라는 말이 있다. 어딘가 자조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자부심을 갖고 신사답게 우아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내 경우는 어떤가. 특정인 또는 그룹의 눈에 벗어났다는 이유로, 민주주의, 인권, 평화를 노래한다는 정권 시절인 2년 전에 55세의 나이로 본의 아니게 퇴임했으니 나로서는 회고담이란 말이 좀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제라는 거울에서 반사된 빛으로 오늘과 내일의 삶을 비추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믿고, 그런 의미에서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솔직하게 정리해본다.

    나는 1969년 여름에 외무고시 2기에 응시해서 9명의 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졸업하려면 아직 한 학기가 남아 있었고, ROTC 생도 신분이어서 군복무도 마쳐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외무사무관 시보로 발령났다. 그해 9월1일부터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증명서를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아마도 총무처에서는 내가 재학생인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당시 중앙청에 자리잡고 있던 외무부(현재 외교통상부)로서는 직원이 한 명이라도 급하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졸업을 해도 취직자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시합격자가 희귀하고 여권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그 시절에 외무부의 사무관, 즉 앞으로 해외에 나가서 근무할 외교관이라는 신분은 매우 근사한 것이었다. 여대생들이 배우자 선택의 우선 순위를 꼽을 때 첫번째가 외교관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당시 신문의 설문조사 결과는 그랬다.

    그때 젊은 외교관과 결혼한 부인들 가운데 지금은 상당수가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객지생활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외교관이란 외로운 직업이고 영원한 뜨내기 인생이라고도 한다. 외교관 자신은 직업상 해외근무가 필수적이니까 고생이다 뭐다 얘기할 것도 없지만, 부인들은 집안살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교육하는 데 전념해도 바쁜 판에 본국에서 오는 높으신 분들 접대하느라 관저 만찬이 있을 때면 뻔질나게 불려가 부엌데기 노릇을 해야 하는 신세니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고위층 손님이 촌지를 놓고 가도 수고한 부인들에게 분배된 예는 극히 드물었다.

    무료로 근로봉사를 하는 것인데, 그게 좋게 말해서 자원봉사이지 사실은 강제노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관장이 관저에서 밥장사를 한다는 말이 이제는 사라졌으리라 믿는다. 외교관의 부인도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인권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물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외교관 부인의 활동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자질을 높이는 제도적인 장치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교관은 시험으로 뽑지만, 그들의 부인마저 시험을 쳐서 뽑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별도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본부 근무를 처음 시작한 곳은 의전실 여권과였다. 난생 처음으로 월급봉투를 받은 것은 9월 말. 액수는 8900원. 쌀 세 가마에 해당했다. 꽤 많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일반회사에 다니던 친구들의 월급이 3만원 선이었으니 말이다. 첫월급을 받아 난생 처음 현재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에 몰려 있던 양복점에 가서 겨울 양복 한 벌을 맞추었더니 값이 1만2000원이라고 했다.

    속으로 놀랐다. 한숨도 나왔다. 공무원 월급이란 여물값이라고 누군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말이나 소를 먹이는 여물을 마련할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다. 월급이 여물값이라면 공무원은 닭이나 돼지란 말인가. 그런 공무원들을 거느리는 지도자는 그러면 동물농장 주인인가. 동료들 간에 그런 우스갯소리도 나왔던 시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끔찍한 소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월급이 얼마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부분이 가난하던 시절이라서 가난은 큰 수치가 아니었다. 가난은 불편할 뿐이라는 격언도 믿었다. 오히려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경제건설의 일부분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거의 날마다 점심과 저녁을 자장면으로 때워도 불평하지 않았고 야근도 이틀이 멀다 하고 했다. 외국서적이나 잡지가 귀한 때라서 영어로 된 문서나 책을 만나면 닥치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는 외국어 공부를 위한 테이프조차 귀했다. 그러나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그런 것이 몸에 배어 나의 31년 외교관 생활을 지배했다.

    외교관에게는 영어와 제2외국어가 필수무기다. 가능하면 제3외국어도 잘하면 금상첨화다. 대부분은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만, 문제는 직원별로 외국어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해서 적소에 쓰는가에 달렸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나라에 그 나라 언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대사 이하 대사관 직원으로 파견하는 것은 예산과 인력의 낭비라고 본다.

    주재국을 잘 이해하고 성공적으로 교섭하려면 그 나라 언어에 불편이 없어야 효과적이라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봄과 가을에 해외 보직을 정할 때마다 이 점에 관해서 한층 발전적으로 인사를 한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서 합격했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한 번도 파견된 적이 없다.

    대사로 처음 임명될 때 사실 나는 로마교황청 주재를 희망했다. 가톨릭신학교에서 라틴어를 4년간 공부했고, 로마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 이탈리아어를 불편 없이 사용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나의 대사 부임지는 나이지리아로 낙착됐다.

    반면에, 영어 실력만 가지고 외교관의 자질을 평가하려는 지금까지의 고질적인 악습은 고쳐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영어가 국제공용어 성격을 지니고 그만큼 중요하다고 해도, 영어를 잘하는 것과 외교관으로서 훌륭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양쪽을 겸비하는 인물도 없지는 않지만 드문 편이다.

    영어만 잘하면 외무부에서 승진과 보직 그리고 해외발령 등에서 유리하다는 그릇된 풍조 때문에 영어 외의 다른 외국어를 열심히 하려는 사람이 극소수인 형편이 아닌가? 나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이외에 일본어도 했고, 네덜란드어와 아랍어도 공부해봤지만, 근무하던 그 나라를 떠난 뒤에는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열심히 계속해서 공부할 의욕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랍어에 발을 더 깊이 들여놓으면 평생 중동지방에서 썩을지도 모른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영어 하나만 가지고 외교가 되겠는가. 그나마 국제무대에서 원고 없이 30분 정도라도 연설할 실력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지만….

    영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고 넘어가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마저 나오는 세상이니 말이다. 내가 주재하던 나이지리아는 인구가 1억2000만 명이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근 100년이나 받았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종족이 400개가 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영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학교에서도 대개 영어로 수업을 한다.

    그러나 영어 일간지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0%도 안된다. 인도와 필리핀의 경우도 영어를 정말로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절반도 안된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들은 언제 영어를 배워서 공용어로 사용하겠다는 것인가? 누가 가르칠 것인가? 외국인 영어 선생을 10만 명 정도 수입할 것인가? 그들은 한국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천재들인가? 정말 천재들이라면 왜 조기유학을 못가 안달인가? 영어 방송도 날마다 들을 수 있고, 회화 교재도 넘치고 영어학원도 많고 영어책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가? 무엇이 부족해서 영어 실력이 없다고 하는가? 게다가 진보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통일을 외치는데, 영어를 공용어로 한 뒤에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에게도 영어를 강제할 작정인가?

    영어는 그것을 가지고 밥을 벌어먹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우리 국민의 90% 이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로 배우는 그 정도 영어면, 그거라도 열심히 배운다면 해외여행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미국인도 영어 문맹률이 20% 이상이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천재라고 영어 교과서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영어 타령인가. 발음이 나쁘다? 외국인이 하는 외국어 발음이 좀 나쁘면 어떤가. 외국인이 우리말 발음을 우리처럼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영어만 잘하면 취직이 문제없다? 천만에! 그렇다면 미국과 영국의 실업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어 좀 배워서 미국에 가서 햄버거 장사를 하려면 그런 노력과 자본을 가지고 여기서는 왜 햄버거 장사를 못하는가?

    작년 11월에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지를 한 달 간 여행하면서 조기유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종합해보면 자녀들 교육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이민간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후회한다고 한다. 제발 내가 잘못 들은 이야기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들이 소위 본토발음으로 영어를 할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인간성을 망쳤다는 것이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30년 동안 교직에 있는 현직 교사의 말이다.

    자기 직업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전직을 생각해 볼 것이다. 내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원래는 가톨릭의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성직자의 길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철학과 1학년을 마친 뒤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법대에 들어갔지만, 판사나 검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졸업하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외무고시에 응시한 것이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고 말았다. 본부에서 2년 반 근무하다가 최초의 해외근무 발령을 받고 주일대사관에 3등 서기관으로 부임할 때만 해도 외교관이란 직업이 해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른바 10월 유신과 1인 독재체제 강화, 무자비한 인권탄압 등 국내사태가 암담해질수록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다. ‘유신만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라고 홍보하라는 지침을 받고 해외공관의 모든 외교관들이 분주하게 다니며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던 시절이었다.

    활동성과를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신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냉소나 침묵마저도 위험했다. 심리적으로 심한 갈등에 빠지고 스스로 비겁하다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때 처음 사표를 던질 결심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교란 국내정치의 연장이라고 배웠다.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해외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외교관이다. 특정 정권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해서 국익을 지키는 것이 외교관의 임무이다.

    그런데 유신체제에서 국내상황은 어떠했던가? 수많은 사람을 투옥하고 고문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체제에서 외교관의 활동이란 결국은 최고권력자 한 사람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도록 도와주는 것밖에 더 되는가? 국민의 자유와 기본적 인권이 유린된다면 국가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사실 매일 상대하는 일본 관료들이나 외국의 외교관들이 당시 한국에 대해서 속으로 냉소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라가 나라다워야 외교관들이 해외에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어느날 같이 근무하던 선배 외교관과 대사관 근처 어묵집에서 정종을 마시면서 상의했다. 사표를 내고 귀국하겠다고 말하자 선배가 물었다. 외무부를 그만두고 나면 무엇을 하겠냐고. 신문사 입사시험을 보겠다고 대답했다. 선배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런 시국에 기자가 되겠다고? 정신 나갔군. 그건 외교관보다 더 험한 길이야.”

    그걸 내가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날 선배는 진정으로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이렇게 설득했다. 세월은 변하게 마련이다. 정권도 무상한 것이다. 언젠가 길을 바꾼다 해도, 우선은 외교관이 무엇인지 실제로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0년만 더 근무해보고 그래도 싫다면 미련 없이 떠나라.

    그후 10년이 지나 내가 중동의 섬나라 바레인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는 소위 신군부 시절이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차석인 내가 하여간 군부 출신 대사의 눈에 가시였다. 어느날 대사가 나더러 사표를 쓰라고 했다.

    마침 서울신문 모기자가 해외 출장을 나왔다가 귀국길에 바레인에 들렀다. 나하고는 서울대에서 ROTC 훈련을 같이 받던 친구였다. 사표를 써서 그에게 주고는 서울에 도착하면 총무과장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그후 그 친구가 카타르에 머무는 동안 내 사표는 파기되었다.

    그리고 6공 시절 도쿄에서 총영사로 있을 때 또 사표를 던졌다. 네덜란드에서 도쿄으로 전임한 지 1년 반 만에 다시 벨기에로 가라는 말도 안되는 인사에 반발한 것이다. 외교관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1년 반 정도에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인가? 국익을 위해 중대한 사유가 있었다면 군말 없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총영사라는 타이틀을 주어야 하니까 소위 힘 없는 똥차는 길을 비키라는 식의 인사였다.

    사표가 이번에는 본부에 전달되었다. 본부에서는 자기들 체면을 지키기 위해 힘으로 눌렀다. 아니, 더 큰 힘에 대해 그들이 미리 알아서 긴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인사가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누가 믿을까? 공정한 실력평가와 적재적소 임명의 원칙이란 몽유병자의 잠꼬대요 특정지역이 우선하는 인사라는 말은 무엇인가?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치던 외교관들, 그리고 신군부 시절에 앞다투어 충성하던 외교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대사, 차관, 장관 등을 거쳐서 은퇴한 사람들도 많지만, 아직도 고위직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후진적 관행이 판치는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평생 눈치나 보고 보신책이나 연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본능이자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들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든가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라는 표어를 생활신조로 내건 채, 지금은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의 투사’로 당당하게 행세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앵무새처럼 남이 시키는 말을 흉내나 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진심으로 성실하게 일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만일 껍데기만 민주주의고 인권이지 사실상 1인 지배체제에다가 부패가 심각한 권력의 시녀노릇만 한다면,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창녀는 손님의 인격이 아니라 그의 돈지갑만 보듯이, 비굴한 관리는 권력을 쥔 사람의 인품이나 명령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가 손에 쥔 꿀단지만 쳐다본다.

    매사에 윗사람의 눈치나 보고 아첨에 열중하는 사람들, 심하게 표현하면 시녀, 환관 또는 가신적 노예들, 좋게 말하면 보좌관 또는 비서관 격에 불과한 외교관들에게 창의적이고 소신과 일관성이 있는 외교정책을 기대하기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하다.

    본부든 해외공관이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솔직하고 활발한 정책 토론이 있을 리가 없다. 매년 공관장회의를 열어봤자 거기서 무슨 좋은 정책이 나왔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금년에도 공관장회의가 열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심각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일관계, 한미관계, 대북관계, 해외교민보호 등에 관해서 “외교정책이란 것이 있기는 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답은 오리무중일 것이다. 고작해야 국가정책은 비밀이라는 근사한 외교적 답변만 들려온다. 사실은 외교관들의 머릿속에 마땅히 들어있어야 할 외교정책이 없다는 그 사실이 최고기밀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글을 쓴 나는 기밀누설죄에 해당할 것이다.

    관직을 떠나면 당장에 죽는 줄 아는 심약한 관리들도 많다. 나도 공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사회로 뛰쳐나갈 용기가 없었다. 대사직을 최소한 두 번 하고 나면 정년까지 여러 해 남았다 해도 후진들을 위해 자진해서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본부 고위층에서 사표를 내라고 내게 요구해왔기 때문에 나는 거절했다. 하던 지랄도 멍석을 펴놓으면 안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이것은 그런 식이 결코 아니었다. 지랄은 내가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공직을 떠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다보니 많은 것을 배웠다. 공직에 있는 동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외교관의 자부심이라는 것도 어쩌면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세상에는 보람 있는 직업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공직만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는 직업은 아니다. 모든 직업이 다 나름대로 기여하는 바가 있고,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 공직이란 것도 수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공직이란 어느 것이나 반드시 끝날 때가 있다. 그것도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매우 빨리 끝나고 떠날 때의 아쉬움과 미련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부정이나 부패, 비굴한 청탁 등을 전혀 모른 채, 소신 있게 바른 말을 거침없이 하면서 살아온 것에 대해 떳떳하게 생각한다. 일부 특정인들의 눈에 벗어났던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들도 머지 않아 모두 공직을 떠날 것이다.

    나는 현직에 있는 공직자들의 인간적인 한계와 연약함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요즈음 각종 뉴스 시간을 매일 장식하는 게이트니 부패니 하는 소리도 달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살아 있는 한 인생에는 절대로 은퇴가 있을 수 없다. 공직 은퇴 이후에 진정으로 자유롭고 보람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다. 글을 쓰는 일이 나의 평생 직업이고 이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믿고 크게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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