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서울 강남 초등학교 6학년생의 하루

  • 곽희자 자유기고가

    입력2006-12-27 10: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이가 다닐 학원을 네다섯 곳 알아봤는데 마음에 쏙 드는 곳이 없네요. 작은 학원은 아이들 관리가 잘 되지만 레벨수업이 안 되고, 큰 학원들은 레벨수업은 그런대로 잘 되지만, 아이들이 많다 보니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것 같고…, 정말 골치 아파 죽겠어요.”

    1년 전 겨울방학을 앞두고 6학년 아들을 둔 이웃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녀는 아들의 중학교 진학준비로 바빴다. 매일이다시피 들어오는 학원 안내 전단을 꼼꼼히 체크하고 학원마다 일일이 탐방하는 그녀의 열의에 나는 혀를 내두르면서도 내심 못마땅했다.

    “어차피 중학교 가면 질리도록 공부할 텐데 벌써부터 공부로 애 잡을 일 있어요? 그만 극성 부리고 이번 방학만이라도 맘껏 좀 놀려요. 그 동안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리고 미리 다 배워 가면 중학교 가서 무슨 재미로 공부하겠어요?”

    이런 나를 보고 그녀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다들 학원에 보내는데 어떻게 우리애만 안 시켜요? 내년에 댁도 닥쳐봐요. 안 시킬 재간이 있나”라며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딱히 여기는 눈치다. 당시 우리 큰애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두고 봐라, 나는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애를 잡진 않는다’며 큰소리 쳤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슬프게도 나는 지금 그때 그 이웃 어머니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아들이 다닐 학원을 찾아 헤매고 있다.



    흔들리는 소신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과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나에게는 3월이면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들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딸이 있다. 교육에 관한 한 말 많고 탈 많은 강남에 살지만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소신껏 아이들을 길러왔다. 남들이 대여섯 곳씩 학원을 보내며 아이들을 뺑뺑 돌릴 때, 우리는 아이가 하고 싶어하고, 꼭 필요로 할 때만 스스로 학원을 선택해서 다니도록 했다. 학교에서 1년에 두 차례 치르는 수학경시대회를 앞두고 부모가 더 안달복달하며 문제집 펴놓고 아이를 다그치는 것이 이제는 집집마다 흔한 풍경이지만, 경시대회란 평소 실력으로 하는 거라며 느긋하게 내버려 둔 것도 우리 부부의 교육적 소신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우리 아이들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딸아이가 3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에서 수학경시가 있었다. 그 동안 학교생활을 성실히 했고 모든 면에서 야무진 딸이라 수학경시도 웬만큼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시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25문제 중 9문제를 맞아왔다. 자존심 강한 딸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당장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아이의 상태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위에 다닐 만한 학원을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딸아이가 집을 나선 지 30분쯤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여기 수학 학원이 하나 있는데 괜찮은 것 같아요. 나 여기 다닐래요. 선생님 바꿔드릴게요.” 딸아이는 다음날부터 열심히 수학학원을 다녔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서인지 다른 아이들보다 30분 일찍 학원에 가서 그날 할 것을 미리 풀고, 집에 와서도 열심히 했다.

    3학년 2학기 들어 두 번째 경시대회를 치른 딸은 3개밖에 안 틀렸다며 우수상까지 받아왔다. 상장을 들고 달려온 딸은 이젠 수학이 제일 재미있다며 즐거워했다. 나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학원에 다녀야만 학교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우리의 교육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얼마 후 딸에게 학원은 그만다니라고 했다. 이제부터는 혼자 공부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도 해주었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고 나와 남편은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는 식이었다. 이런 훈련 덕분에 두 아이 모두 다음날 학교 준비물은 알아서 챙겨놓고 자고, 실내화를 빠는 일까지 척척했다. 집안일도 불평 없이 도왔고 교우관계도 원만했다. 우리 부부는 이런 교육방법이 옳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아들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나의 소신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6학년 수학은 건너 뛰어도 돼요”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인 11월 중순, 아들 친구의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자신의 아들은 여름방학 때부터 학원에서 중학교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있다, 11월부터 국어와 과학까지 하고 있는데 밤 11시가 넘어야 돌아온다, 매일 학원 숙제도 해야 해서 이번 6학년 수학경시는 준비를 못 하고 있노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학원에서는 “6학년 수학은 별로 중요한 단원이 없으니 건너뛰어도 문제없다”고 해서 자신도 아들에게 “이번 경시는 포기해도 좋으니 대신 중학교 수학이나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고 했다.

    정말 기가 딱 막혔다. 벽돌도 쌓기 전에 지붕을 올려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전화를 받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어리석은 교육관을 비웃으며 나만큼은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은근히 자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지금 영어·수학은 중학교 1학년 1학기 과정을 끝내고 막 2학기 과정에 들어갔어요. 다른 애들은 벌써 1학년 과정을 한 번씩 훑었대요. 이렇게 안 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요.”

    그 어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말도 안 돼, 모두 미리 공부를 해 가니까 선생님이 가르칠 것도 안 가르치는 것이겠지. 미리 배우지 않고 그냥 가봐, 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겠어?’

    나는 애써 외면하며 더욱 마음을 굳게 다졌다. 여기서 마음이 흔들려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 혼자 잘난 척하다가 아이만 바보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려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아들 친구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또 한 번 배신감만 맛보았다. 그 동안 자기 아들은 집에서 영어만 시킨다고 하더니 어느새 학원 종합반에 등록해 보내고 있었다.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가면 어머니들끼리도 경쟁이 벌어져 자식이 학원 다니는 사실도 숨기고 공부하는 내용이나 참고서적도 알려주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학원 전단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시작부터 최고로 키우고 싶은 바람, 어머니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000학원’, ‘내신·경시·실력 향상에 꼭 필요한 학원이 왔다’ ‘겨울방학이 승부를 좌우한다’ 전단마다 각종 문구로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우리만 몰랐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겨울방학은 방학이 아니다. 그동안 집에서 그룹을 지어, 혹은 개별적으로 중학교 영어와 수학 정도를 준비하던 학생들도 12월 방학에 들어가면 학원 종합반에 등록, 본격적으로 중학교 공부에 들어간다. 종합반은 국어·영어·수학·과학 네 과목을 가르친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강남의 유명학원들은 대대적으로 예비중학생 학부모를 위한 설명회를 개최한다. 설명회장에 오는 어머니들은 주로 첫아이를 중학교에 보내는 초보들이다. 이미 첫아이나 둘째 아이를 진학시켜본 어머니들은 주변 학원에 대해 훤히 알기 때문에 굳이 설명회장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나도 풋내기 어머니로 드디어 J학원 학부모 설명회에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학원 관계자는 2000년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의 입시 경향을 전망하고, 자기 학원의 교육방법도 홍보한다. 그런데 학원은 한결같이 아무리 무시험으로 대학을 간다 하고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게 대학 문이 넓어진다 해도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 가게 돼 있으니 지금과 같은(성적 올리기 중심의) 공부방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서울대 등 유명대학들이 학교장 추천을 받아 선발하는 학생의 수를 늘리겠다고 했는데, 추천받는 기준은 학교 내신성적과 수능점수가 될 수밖에 없다며 거듭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신을 잘 받기 위해선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가 제일 중요하다, 이 성적은 3년 내내 간다, 그러니 결국 남보다 빨리 준비해야 기선을 제압할 수 있고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듣기에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참석한 어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메모를 했다. 강사는 시험 잘 보는 방법과 과목별 학습방법까지 꼼꼼히 알려주었다.

    하지만 학원의 예비중학생반 12월 시간표를 보니 숨이 탁 막혀왔다. 종합반 수업은 일주일에 3일, 방학 전에는 오후 5시30분~밤 11시까지 하루 5시간30분씩 공부하고, 방학 중에는 오전 9시30분~오후 6시30분까지 9시간씩 공부한다. 75분 수업에 5분 휴식으로 시간표만 보아도 질려버렸다.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공부에 흥미를 잃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 관계자에게 이렇게 무리하게 시키는 것이 효과가 있느냐고 묻자 “6학년 겨울방학에 처음 시작한 아이들은 어차피 늦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방학 동안 1학기 과정을 한번 끝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깊은 회의에 빠져 설명회장에 앉아 있는 다른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어떻게 공부시켜야 할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서초동에서 왔다는 다른 어머니는 “2002년부터 대입제도가 많이 바뀐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바뀌는지 잘 몰랐는데 오늘 여기 와서 들어보니까 대충 알 것 같아요. 모르고 공부를 시키는 것보다 방향을 알고 아이를 지도하면 좀더 낫지 않겠어요?”라며 이 학원에 등록하겠다고 했다.

    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어머니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입시를 위해 학원에 보내는 것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변명처럼 “다른 아이들도 안 한다면 모를까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순 없잖아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5학년 때 시작해야 안 늦어

    설명회에 다녀온 뒤 며칠 안 돼 나는 다시 J학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테스트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미 저녁 7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아이의 손을 이끌고 상담하러 오는 어머니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내가 상담실에 들어섰을 때는 대치동에서 왔다는 어머니 세 명이 아이들의 테스트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다 자기 아이들은 벌써 다른 학원에서 1학년 영어·수학을 한 번씩 끝냈다고 했다. 내가 “벌써?”라며 놀라자 “그 정도는 보통 수준”이라며 “강남에서는 4~5학년 때부터 중학교 공부를 시작해 6학년 무렵이면 중학교 2·3학년 공부를 하는 애들도 많다”고 했다. 1년 앞서 선행학습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라웠지만, 2~3년씩 앞서 배운다는 말에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추세가 그렇고, 미리 공부한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앞서 나가니 나쁘다고만 할 순 없죠.”

    자녀가 넷이라는 한 어머니는 위로 세 아이 모두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영어·수학 선행학습을 시켰더니 중학교에 들어간 후 시험기간에는 영어·수학은 전혀 손 대지 않고 암기과목만 집중적으로 공부해 좋은 성적을 내더라며, 막내도 5학년 겨울 방학 때부터 중학교 과정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이 아이들이 대학에 갈 때는 선발기준도 다양해지고 한 가지 특기만 있어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성적에 매달릴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상담실의 어머니들은 입을 모아 몇 퍼센트 안 되는 기회를 보고 모험을 하겠느냐, 오히려 그게 함정이고 그 장단에 춤추는 사람들이 미련한 거다, 아무리 교육제도가 바뀌어도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가게 돼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무렵 2시간 가까이 진행된 반배정 테스트(영어·수학)를 마치고 아이들이 지친 표정으로 상담실로 돌아왔다. 이 학원에서는 테스트를 통해 성적순으로 4개 반에 배정한다. 지난 여름 방학 때부터 이 학원을 다녔다는 한 남학생은 “처음엔 TA-1반에서 공부하다가 지난번 테스트에서 영어점수가 좋지 않아, 신입생 중심으로 돼 있는 신M2반으로 내려갔는데, 굉장히 스트레스 받고 짜증나요”라고 했다.

    “TA-1반과 신M2 반이 뭐가 다른데?”

    “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TA-1반 아이들은 학원에 오래 다닌 애들이라 공부하는 자세가 잡혀 있고, 수업중에도 다들 열심히 해요. 그런데 신M2반 아이들은 그게 안 돼 있어요. 놀려는 애들도 많고요. 이런 애들은 교무실에 끌려가 각목으로 맞고, 그래도 달라지지 않으면 학원에서 나오지 말라며 잘라버려요.”

    학교에서는 손바닥 한 대만 때려도 신고를 하느니 교직에서 물러나게 하느니 흥분해서 달음질치던 학부모들이 각목까지 동원해 실력행사를 하는 학원에 대해서는 항의하는 일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학원강사가 학생을 때려 문제가 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이 학생은 학기중 학원 가는 날이면 오후 3시 반쯤 귀가해 학원 수업준비를 한다고 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매일 10분간 짧은 테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5시에 오는 학원 버스를 타려면 4시30분쯤 저녁을 먹어야 한다. 만약 이때 저녁식사를 놓치면 수업이 끝나는 밤 11시까지 꼼짝없이 굶는다. 그리고 보통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12시. 방학이 되면 조금 여유가 생기지만 대신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어진다.

    “잠 좀 실컷 자고, 학원 안 가는 날만큼은 게임이나 마음껏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알아서 공부하게 제발 좀 내버려둘 수 없나요?”

    학교에선 초등학생, 방과 후엔 중학생

    대치동 D초등학교의 6학년 담임교사가 말하는 수업 풍경.

    “6학년 1학기 때부터 중학교 공부를 하는 애들이 많은데, 2학기 때가 되면 안 하는 아이가 없는 것 같아요. 쉬는 시간이면 학원 숙제 한다고 중학교 문제집 내놓고 앉아 있죠. 6학년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이 중학교 문제집 풀고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그 교사는 아이들이 중학교 공부만 공부고, 초등학교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숙제를 내줘도 안 해오고 수업시간에는 조는 애도 많다고 걱정했다.

    아이들마다 선행학습을 시작하는 시점은 차이가 있지만 서울 강남지역에서는 6학년 겨울방학이 중학교 공부를 시작하는 마지막 시기고, 보통 5학년 2학기 무렵부터 시작한다. 시작 시점은 강남에서도 지역별로 조금씩 편차가 있다. 대치동과 압구정동 쪽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일찍 시작하고 학원가의 열기도 다른 곳에 비해 뜨겁다.

    “갈수록 더 빨라지는 것 같아요. 주변 아이들이 다 6학년 때부터 하니까 경쟁에서 앞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좀더 빨리, 좀더 빨리 하다가 5학년에서 4학년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압구정동에 산다는 한 학부형은 학원이 앞장서서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바로 학원의 수준별 수업이 경쟁을 가속시킨다는 것이다.

    “처음 학원에 가면 반배정을 위해 레벨 테스트를 하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중학교 문제를 주고 풀라고 하니 다른 학원에 다녔거나 개인과외를 한 적이 없는 아이들은 수준이 낮은 반에 배치될 수밖에 없죠. 부모나 아이 모두 학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뒤졌다는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학원은 이런 심리를 이용해 학부모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실제 강남의 학원들을 대부분 3~4단계로 반을 나누어 운영한다. 수준별 학습이라고 하지만 실제 진도 위주로 나뉜다. 높은 단계의 아이들은 이미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두 번 정도 반복하고 다시 2학년 단계로 넘어가는데, 처음 수강하는 아이들은 이제서야 1학년 과정을 시작하니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학부모들의 자존심 싸움이 경쟁을 부추긴다. 압구정동 C학원의 수학교사는 “무조건 내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앞서야 된다는 부모들의 경쟁의식이 지나친 선행학습을 유도하고 있다”고 한다.

    “한 어머니에게 아이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니 아랫반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고 했더니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리 없다, 따라갈 수 있으니 그냥 있게 해달라며 막무가내였어요. 정말 자녀를 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거죠.”

    H학원의 홍모 원장도 어머니들의 과잉경쟁의식은 학원을 선택하는 과정에도 나타난다고 했다.

    “유명하진 않아도 잘 가르치는 학원을 발견하면 절대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아요. 학원측에서 다른 수강생을 소개하면 학원비를 깎아준다고 해도 데려오는 법이 없어요.”

    선행학습 과목으로 영어·수학은 당연하고 국어·과학은 겨울방학부터 시작한다. 영어는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학원에서는 문법 위주로 중학교 과정을 배운다. 교과서 대신 1학년 교과과정에 나오는 문법이나 어휘, 독해 등을 배우기 때문에 정확히 몇 학년 과정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수학의 경우는 교과 단계별 수업을 하기 때문에 정확한 단계를 알 수 있었는데 빠른 아이들은 5학년 때 이미 중학교 과정에 들어간다.

    “수학은 사고력 확장에 목적을 두는 학문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는 기본과정을 이해시키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이런 기본과정의 이해 없이 답을 찾아내는 방법만 가르치다 보니 문제를 조금만 바꿔놓아도 풀지를 못해요. 그런데 부모는 중학교 2·3학년 교과서로 배우면 수학을 잘 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어요.”

    학원강사들도 지나친 선행학습에 우려를 표시한다. C학원의 임모 강사는 정상적인 과정보다 앞선 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은 몇 %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너도나도 1~2년씩 과정을 앞당겨 배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꼭 필요하다면 6개월 정도 미리 배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

    원촌 중학교의 권혜경 교사는 “미리 배워온 아이들을 보면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들어봤다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에게 직접 문제 풀이를 시켜보면 정확히 푸는 아이들이 거의 없고 오히려 가정환경이 어려워 미리 공부를 하지 못하고 온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듣고 노트 정리도 꼼꼼히 해 수행평가에서나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것 같다”고 했다.

    S중학의 김모 교사 역시 한 단원 정도 예습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선행학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안 하고 중학교에 가면 안 돼요. 나도 우리 아이 입학시켜 놓고 옆에 좀 보고 살걸, 왜 더 빨리 시작할 생각을 못 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라고 했다. 겨울방학 때부터 중학교 준비를 시켰다는 이 어머니는 학교에서는 이미 다 배운 걸로 치고 수업시간에 대충 훑고 그냥 넘어가기 때문에 학원에 다니지 않은 아이들은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우열반을 나누었는데 우리 아이는 열반으로 떨어졌어요. 학원을 다니며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5학년 때부터 시작한 아이들을 따라잡지 못하는 거예요. 수학은 얼마나 문제를 많이 풀어 봤느냐로 결정되죠. 일찍 시작한 애들이 확실히 잘 하더라고요. 영어도 중학교 첫 시험에서 곧바로 문장을 쓰게 하는 걸 보고 안 해가면 안 되겠다는 걸 느꼈어요.”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전교권(전교 10등 이내)이라고 하는 어느 어머니는 영어·수학은 누구나 준비해 오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고, 암기 과목과 예체능 과목까지 얼마나 철저히 준비를 했느냐로 등수가 결정된다는 조언도 해주었다. 전교권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6학년 여름방학부터 쉬지 않고 학원 종합반에 다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잘 하는 아이대로, 못 하는 아이는 못 하는 아이대로 학원에 다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에 들어가면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끊임없이 다음 과정으로의 선행학습이 이어진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의 수학 Ⅰ Ⅱ 정석을 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주요과목은 한번 이상 배운 상태기 때문에 반복과 심화학습이 가능해진다. 그래야 대입 준비에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끝없는 선행학습의 고리

    결국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선행학습은 1차적으로는 중·고등학교에서 좋은 내신으로 유명대학 입학 티켓을 확보한 후, 높은 수능 점수를 얻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연결된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방학을 학원 종합반에서 보내는 것도 최종 목적은 일류대학 입학에 있는 것이다.

    2002년이면 교육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고 대학입시는 무시험으로 바뀐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이 교육정책을 믿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문민정부 때 대대적으로 열린교육을 한다며 한동안 초등학교마다 교실 벽을 트고 체험학습을 한답시고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유행했다. 교과평가시험도 모두 없애고 1년에 두 번씩 수학경시만 치렀더니 문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배웠는지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숙제가 많아졌다. 대부분 견학하고 보고서를 써가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증거물로 사진이나 팸플릿을 붙여오라고 하는데 결국 어른들 숙제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 마디로 열린교육을 한다며 시늉만 하는 통에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지고 학부모들만 바빠졌다.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3년간 6학년 담임을 하고 있다는 C교사는 “갈수록 아이들의 학습태도가 나빠지고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앉으면 가수나 탤런트 얘기나 하고, 수업 시간에도 어떻게 공부 안 하고 그 시간을 때울까 이 궁리밖에 안 해요”라고 하소연했다.

    학원 강사가 보기에도 열린교육 세대는 문제가 많다. 부모 손에 이끌려 학원에 온 아이들은 자신이 왜 공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힘들어도 하려는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다.

    열린교육 1세대라고 할 중학교 1학년을 맡고 있는 권모 강사는 “열린교육 세대들은 예전보다 표정이 밝고 자기 주장도 강하며 매우 적극적이에요. 반면 끈기가 부족하고, 매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책임의식도 약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열린교육 세대라도 어떤 교육 시스템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차이가 크다고 한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정기적으로 교과시험을 치러온 아이들은 학습태도나 성적에서 앞서간다는 것이다. 열린교육이라는 국가 교육시책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상급학교와의 연계성을 생각해 시험을 보고 공부를 시킨 학교의 아이들이 경쟁에서 앞선다는 것이다.

    결국 무시험전형이고 뭐고 상관 없이 공부 잘 하는 게 나중에 대학 가는 데 최고라는 학원 관계자의 말이 별로 틀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학원의 철저한 학생 관리

    이처럼 초등학교에서 열린교육을 받은 아이들을 중학교라는 새로운 교육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체질을 완전히 바꿔놓는 곳이 바로 학원이다. H학원의 홍원장은 선행학습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초등학교 과정과 달리 중학교에 진학하면 교과목이 크게 늘어나고, 교과내용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준비 없이 바로 입학하게 되면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러한 충격을 줄여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학습법을 알려주고, 앞선 진도로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선행학습의 목적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학원의 학생관리는 철저했다. 학원에서는 수업시간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완전히 익혔는지 테스트하고 점수가 좋지 않으면 재시험을 치르게 했다. 수시로 평가를 해서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성적표를 우송해 준다. 학부모가 찾아와 성적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항상 비치해 놓기도 한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보충수업도 있어서 결국 전체적으로 진도를 맞춰 준다. 학교에서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못 했는지 알 길이 없던 부모들은 이와 같은 학원의 철저한 관리에 탄복한다.

    레벨 테스트를 할 때는 상품을 걸어 아이들로 하여금 공부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학과목 선생님들은 수시로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수업태도나 심리변화 등을 일일이 알려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방학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친목도 다지게 했다. H학원에서는 여름방학 동안 고아원을 방문해 봉사활동 점수도 얻게 해주고, 한 반 아이들끼리 단합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겨울방학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눈썰매장에 간다고 한다.

    학원은 소규모 편성이어서 강사가 학생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자녀의 성적이 떨어지면 학교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학원으로 전화를 걸어 상담을 청한다. 하지만 성적이 계속 떨어지면 아무리 그 학원과 신뢰가 쌓였다 해도 부모들은 오래 참아 주지 않는다. 바로 학원을 바꿔버리는 냉정함을 갖고 있다. 이것이 학원 강사들을 부단히 노력하게 만드는 이유이며, 학원교육이 학교교육보다 앞서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학교교육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도 있으리라.

    교사 자녀도 학원 다녀

    나는 서너 군데 학원의 설명회장을 찾아다니고 상담도 해본 끝에 최종결정은 아들이 들어갈 중학교 교사를 만나 본 후 하기로 했다.

    나의 고민을 들은 교장선생님은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며 “저희도 정말 답답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고 문제를 해결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사실 이 모든 현상은 우리 사회가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 데서 비롯된 거라고 봅니다. 아이의 특성은 무시하고 최고의 대학에 보내 일류 인간으로 성공시키겠다는 부모들의 욕심, 그리고 변화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교사들의 안일한 태도, 우왕좌왕하는 교육제도, 이 모두가 오늘날 우리 교육을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교장은 우리가 교육받는 이유는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인데 요즘 아이들은 일이라는 걸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창가에 분필가루가 묻어 있어 한 아이에게 닦으라고 했더니 ‘어떻게 닦아요?’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걸레로 닦아야지’ 했더니 ‘걸레는 어디에 있는데요?’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찾아서 하려 하지 않고 끝없이 남에게 묻고 의지만 해요. 수행평가가 바로 이런 과정을 중시하자는 것인데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시행부터 하다 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요.”

    교장에게서도 시원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나는 국어·영어·수학·과학 등 소위 주요과목 담당 교사들을 만나 선행학습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불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교사들 역시 자신의 자녀는 학원에 보내 선행학습을 시키는 현실을 누가 탓하랴.

    드디어 11월30일,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예비중학생을 위한 종합반이 설치돼 있는 동네 H학원을 찾아갔다. 학원에서는 수강을 하려면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엘리트반과 일반반 두 종류의 시험지가 있다며 선택을 하라고 했다. 테스트 단계부터 엘리트와 일반으로 나뉘는 게 불편했다. 일반반 시험지를 쥐는 순간, 우리 아들은 영영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들은 일반반 시험지를 택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수학문제가 모두 중학교 문제라며 잔뜩 겁을 먹은 채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테스트를 받는 동안 다른 어머니들이 자녀를 데리고 상담실로 들어섰다. 잠시 후 그 아이들도 시험을 치렀다. 긴장된 표정으로 아이들은 시험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어려운 문제가 있는지 문제를 풀다 말고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

    테스트가 끝난 아들은 수학문제는 몇 개밖에 못 풀었다면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런 아들에게 “괜찮아, 넌 아직 배운 적이 없으니까 못 푸는 게 당연해.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돼” 하고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러나 마음 약한 아들은 주눅 든 얼굴을 쉽게 펴지 못했고 “중학교에 가는 게 겁이 난다”고 말했다.

    아들을 일반반에 등록시키고 학원 문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학원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마치 내 아이의 장래를 학원이 책임져 주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그 동안의 갈등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뒤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숨까지 내쉬며 “이제부터 열심히 할게요”라며 스스로 다짐을 했다. 아들의 시간표를 보니 수업은 일주일에 3일(화·목·토), 하루에 국어·영어·수학·과학 4과목을 모두 배운다. 오후 4시에 시작해 8시에 끝난다. 그것을 보는 순간 홀가분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다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입학 전까지만 아니, 입학하고 두어 달 후면 중간 고사를 볼 텐데 첫 시험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때까진 보내야겠지, 그럼 기말고사는 어떻게 하고…. 그럼 3년 내내, 아니지 고등학교는 더욱더 안 하면 안 되잖아, 그럼 앞으로 6년을….’

    나는 지금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머니로 내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에겐 이를 뿌리칠 용기가 없었다.

    나의 아들은 지금도 주눅 든 어깨를 펴지 못하고 학원으로 간다. 아들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교육&학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