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쪽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 9월 하순이지만 벌써 눈이 쌓여 있다.
아스팔트를 보내는 주체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주축으로 하는 민간단체 컨소시엄. 지난해 6월 인천에서 열린 ‘우리민족대회’에서 북한의 직업총동맹(이하 직총)이 요청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11월 하순 금강산에서 열린 실무접촉을 통해 문서화됐고, 이에 따라 곧바로 SK(주)에 생산을 의뢰했다고 한다.
SK㈜로부터 피치를 구매하는 데 들인 비용은 북한 용천 참사 당시 피해지원을 위해 모금했다가 복구가 상당부분 진행되어 사용처가 마땅치 않던 기금이라는 것이 민주노총 박민 통일국장의 설명이다. SK㈜ 노동조합도 컨소시엄의 일원으로 참여해 회사측과 구매협상을 담당했다. 양대 노총이 남북 물자교류를 진행해본 경험이 없어 구체적인 실무는 다양한 경제협력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이사장 김중배·이하 겨레하나)가 맡았다. 남포항으로 향하는 배에는 양대 노총 등 컨소시엄 관계자들도 동승했다.
정부 일각의 ‘염려’
이번 사업에 참여한 인사들은 “당국이나 기업의 논리가 아니라 순수한 민간단체 차원에서 이뤄진 사업인 만큼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한다. 당초 직총측은 2004년 연내에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피치 생산에 시간이 걸려 20일 가량 늦어졌다. 그러나 ‘논의 7개월 만의 현물 인도’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라는 것. 이 기간 동안 경색돼 있던 남북관계 등 주변상황을 감안하면 분명 이례적인 진행이다.
당초 직총이 요청한 피치 분량은 3000t이지만 양대 노총의 모금규모 등의 문제로 2000t으로 하향조정됐다. 이는 삼지연공항과 백두산 연결도로 등 백두산 인근의 관광단지를 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라는 것이 사업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북측 노동자들이 담당하는 보수공사는 6월까지 마무리될 예정. 공사가 끝나는대로 양대노총과 직총은 공동으로 백두산을 등반하기로 합의했다. 박민 국장은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이 백두산 관광 등 남북교류의 작은 돌파구가 된다면 반가운 일”이라고 밝혔다.
겨레하나의 김훈 조직국장은 “직총과 컨소시엄의 합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후반에는 통일부도 적극적인 자세로 도와줬지만, 관계당국과 처음 협의할 때는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고 말한다. 우여곡절이란 다름아닌 군과 정보당국 등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관계기관의 ‘염려’. 삼지연공항이 순수한 민간공항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북위 41.55, 동경 128.36 지점의 해발 1400m 고원지대에 자리한 삼지연공항은 천지연에서 46km 떨어져 있어 백두산 관광의 관문에 해당하지만, 인근 숲에 공군 주기장이 있어 군사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DMZ와의 거리가 워낙 멀어서 남측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국방부와 합참, 국가정보원은 논의 초기에 “지원되는 피치가 군사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구두논의과정에 ‘삼지연공항 활주로 수리용’이라고 돼 있던 피치의 용도는 최종 합의서에서 ‘백두산지역의 시설보수’라는 포괄적인 용어로 대체됐다. 피치는 바세나르 협약 등의 규제를 받는 전략물자가 아닌 데다, 관계기관이 군사적 위협이 증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통일부 사회문화교류국 등 주무부처의 의견대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전례가 드문 사업임에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은 것도 공연한 분란을 피하고자 한 때문으로 보인다.
민간단체의 북한 인프라 건설지원이라는 의미도 가볍지 않지만, 관계자들이 이번 지원사업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문제의 삼지연공항 수리가 지난해 11월까지 남북의 관계기관이 물밑에서 추진해오던 백두산관광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부 차원에서는 해결이 쉽지 않아 난감해하던 문제를 뜻하지 않게 민간단체에서 풀어준 셈이다. 관광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들이 반색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만만치 않은 협상
현재 백두산관광사업과 관련해 가장 앞서가는 기관은 한국관광공사. 관광공사는 북한의 코스타(Korea Star·총사장 김수길)와 지난해 7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중국 선양에서 협의를 갖고 백두산 일대에 대한 시범관광사업을 은밀히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 북측은 고려민항뿐 아니라 남측의 국적기가 삼지연공항에 직접 착륙해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방안도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